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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인이 쓴 글은 항상 아프다. 그것도 같은 식민지 출신이라 공감 포인트가 많은 경계인이 쓴 글이라 더 아프게 느껴진다. 녹색광선에서 새로 낸 <빛 속으로>에는 김석희 님 번역으로 김사량의 단편 4편 <빛 속으로>, <천마>, <풀이 깊다>, <노마만리>이 실려있다. 한국인이 쓴 소설인데 번역이 필요하다니, 참으로 씁쓸한 지점이 있다. 일본어로 글을 쓴 식민지 조선인의 글이기 때문이다. 언어 전공자로서 주류 언어를 보며 느끼는 이율배반이 있기는 하다. 내가 사랑하는 언어와 문화이지만, 그 언어의 기반에 제국주의가 있다는 것을 결코 모른 척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학부 시절에 영문학 원서를 읽다보면 가끔 제국주의 문학을 한다고 뭐라하고 지나가는 선배가 있었다. 그럴 때면 볼멘 소리로 '아름다운 걸 어쩌라고." 그렇게 투덜거리곤 했다. 정의와 아름다움은 왜 때로 서로를 척살하는 걸까 싶다. "조선말로 쓰라고!" "미나미 선생이 아니라 남 선생이라고 하라고!" 정의를 들이대는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참으로 많다. ㅎㅎ <천마>를 보자니 평론가나 학계 관계자나 미의 기준을 정하는 이들은 죄다 일본인이거나 일본의 권위를 빌려온 (일본물을 먹은) 사람들인 세상에서, 주인공 현룡은 사람들의 허위에 기생하는 기생충같은 인물이다. 일본에서는 조선에서온 불우한 천재 작가인 척을 해서 일본인들의 호의에 빌붙어 살아가고, 한국에서는 일본에서 인정받은 유망한 작가인 척을 해서 문단에 혹은 문단을 동경하는 이들에 빌붙어 살아가는 인물인데, 조선말로 쓰라는 밥줄 끊기는 소리를 들으면 웃어야지 어쩌겠나. 주인공은 문단에서 리플리가 되기가 너무도 쉽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의 허위와 동경을 먹고사는 자인데 말이지. 뼈저린 점은, 정작 일본에서 공부하고 일본어로 글을 쓰는 작가인 저자김사량의 시선이다. 한일 양쪽 문단의 허위와 가식에 기생하는 주인공에 작가의 심정은 얼마나 투영되어있을지 생각해보면 착찹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문단을 그린 장면은 왜 이렇게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ㅋㅋㅋ 글을 쓴다는 이름값이 엄청난 허위일 수 있는 와중에 우리는 왜 여전히 그리도 글을 쫓아다니고, (쓸데없이) 글쓰는 사람들을 동경하는가. 그런 점에서 아주 리얼하다. 지금과 별반 차이가 없다. 허위가 밥줄인 이는 그래서 끝까지 자신은 겐노가미 류노스케라고 외친다. 그게 붙들고 싶은 동앗줄인가 보다. <빛 속으로>에서는 일본에서 미나미 선생으로 불리는 남 선생이 일본-조선 혼혈인 것을 감추고, 폭력적인 아버지가 조선인 어머니를 칼부림해도 일본인이어야해서 어머니 편을 들지 못하는 (그러나 결국 어머니 앞에 찾아가는) 하루오라는 소년에게 엄청 감정이입을 하는 내용이 나온다. 결국 하루오는 미나미/ 남선생의 겪는 갈등을 극화시켜서 겪는 분신이다. 그리고 자신의 반쪽이 조센징이라서 그걸 부인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열을 내며 조센징들을 놀리고 차별하는 그 심리도 잘 그려내고 있다. 하루오의 아버지가 제국주의 일본이고, 하루오의 어미니가 식민지 조선을 상징한다. 사실 일본어로 일본식 교육을 받고 자라 일본식 논리로 생각하는 식민지 청년들은 어느 정도는 다 하루오이기도 하다. 그리고 괴로운 건, 아버지의 자식이기도, 어머니의 자식이기도 한 한 사람에게 넌 어머니 자식이잖아!라고 윽박지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건 마치 넌 얼마만큼 덜 하루오니?라고 묻는 것과 똑같은데 말이지. (사실 이 질문은 미나미-남 선생이 받는 질문이다.) 어느쪽 편은 참으로 명료한데, 양쪽이기도 한 내면의 하루오는 아마도 내면이 찢겨나가겠지. <풀이 깊다>에서는 색의 장려 운동과 이에 반항하는 사람들 얘기가 나온다. 흰 옷만 입던 조선인들에게 여러 색을 입으라며 먹으로 사람들 옷에 세모 네모 동그라미를 그렸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산골 곳곳을 도는 일제 부역자들이 그려지고, 그 말단에서 그저 붙어 먹고 살아남느라 골골거리는 코풀이 선생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색의 장려 운동에 대한 저항 중 하나로 백백교라는 사이비 종교가 어떻게 산골에서 일어났는지 (색을 강요하는 일제에 맞서느라 이름이 백백교가 된 건 몰랐다.) 그 백백교가 수백 명을 어떻게 죽였는지, 색을 강요하는 자와 색에 저항하는 자는 어떻게 다 폭력적인지, 그러다가 오로지 먹고 사는 일에만 빌빌거리며 하염없이 허리를 굽히고 찔찔거리며 코를 풀던 조선인은 백백교가 설치던 산골에 색의 장려를 하러 들어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는지.....그런 얘기가 그려진다. 정의를 외치는 양쪽이 다 폭력적일 수 있다는 데에 깊이 공감한다. 그리고, 그저 코를 찔찔거리는 약자에 불과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역사에 갈려들어가는지도 안타깝다. 지금도 벌어지는 일이니까. ********* 백 여년 전 소설은 현대에 어떤 의미로 불러와야 하는 걸까. 김사량이 수도 없이 느꼈을 내면의 균열에 함께 슬퍼하지 않을 수가 없다. 조선과 일본과 중국,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균열을 꿰어 맞추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다 결국 그는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고 전쟁을 벌이는 두 조국의 틈바구니에 끼어 전선에서 운명을 달리했다. 둘 사이에 끼어 죽었다. 가끔 죽는 모습이 살아온 삶을 집약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평생 일본인/ 조선인 정체성 그 틈바구니에서 균열을 일으키며 앓던 작가는 북한/남한의 균열 가운데에서 숨을 거두었다. <빛 속으로>라는 책 제목으로 돌아온다. 균열은 고통이지만 축복이기도 한다. 어두운 고통 속에 있을 때 균열의 틈을 통해 빛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래서 정체성의 균열을, 언어의 균열을, 허위와 현실의 균열을 치열하게 다루지만, 결국 빛은 그 균열을 통해 들어온다는 말을 하고 싶었나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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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속으로는 한국인이 일본어로 쓴 소설이다. 아쿠카타와상 후보에까지 올랐다니 더욱 놀랍다. 개인적으로 일제시대 1920년대와 1930년대가 우리 문학의 황금기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이나 김유정의 봄봄, 이상의 날개 같은 소설들이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김사량의 빛 속으로도 내게는 반짝반짝 빛나는 소설이 될 것 같다. 일본어를 잘 하지 못해서 읽어볼 기회가 없었는데, 녹색광선 출판사에서 김석희 선생님의 번역으로 이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기대된다. 김사량의 빛 속으로에 푹 빠져서 지내는 2021년 8월이 될 것 같다. 노란 치자색의 표지도, 김사량의 모습을 그린 김석희 선생님의 표지 그림도 마음에 쏙 든다. 김사량의 글을 읽을 수 있는 2021년 8월이 뜻깊고 소중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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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을 이 작품으로 처음 들었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그 운명이 참으로 안타깝기만 한... 간략하게 작가 소개만 읽었는데도 그의 삶이 어땠을지 그려졌다. 친일파에 친북 작가로 분류되어 국내에서 언급조차 될 수 없었던 그의 작품이라니 더 궁금할 수밖에... 분위기가 낯설고 생소한 느낌도 없지 않지만, 또 하나의 작가를 알아가는 반가움, 그 시대의 아픔을 겪은 이의 고통까지 한꺼번에 만나는 시간이 된다. 4편의 작품이 담긴 소설집인데, 한편 한편 읽어가는 재미가 있다. |
|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일본어로 아쿠타가와상 후보에까지 오른 최초의 조선인이라는 복잡한 내력을 가진 소설가. 처음으로 알게 되었는데, 첫 단편이자 표제작인 빛 속으로를 읽고 정말 마음에 들었다. 정체성의 경계에서 결국 자신을 규정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본질인지, 아니면 본질로 여기게 만드는 개인의 선택인지 많은 생각이 들게하는 내용이었다. 다른 단편들도 기대하며 읽어나갈 수 있을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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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을 이야기로서 읽는다. 소설을 이야기로만 읽다 보니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작가가 뭘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인지 짐작할 뿐이다. 때로 인상적인 표현이 기억에 남기도 하지만 작중 인물이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는지, 그 의미를 통해서 작가가 표현하고 싶은 게 무엇이었는지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짧은 분량으로 작가의 의도를 담아내는 단편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번에 출간된 김사량의 소설집은 전자책으로 출간되지 않아 소설보다도 그 소설의 배경과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한 해설을 먼저 접하고 서울에 와서야 비로소 종이책을 읽을 수 있었다. 작가 김사량은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어로 작품을 발표하고 광복 이후에는 월북해 작가로 활동한 이력 때문에 한동안 남과 북에서 모두 완벽하게 지워졌다고 한다. 이 책을 펴낸 출판사에서는 서문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박제가 되어버린’ 김사량의 작품은 1940년대에 쓰였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현대적 정서의 보이고 있으며, 작가 스스로 ‘적의 언어’로 글을 쓰는 고뇌를 작품에 드러내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십 년 넘게 남의 땅에서 남의 말을 쓰며 살아왔다. 작가처럼 나라를 빼앗겨서가 아니라 내 필요에 의해 내가 선택한 결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말을 쓰지 못하는 삶이 답답하지 않고 고단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살아보니 내 말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단지 언어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말의 뉘앙스 속에 감춰져 있는 발톱을 번연히 보면서도 그것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수없이 겪었고, 그러면서 언어가 힘이고 폭력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사량 연구자인 경희대학교 김석희 교수는 일곱 차례에 걸친 김사량의 작품을 소개하는 글에서 소설의 주제가 언어 자체에서 이름으로, 아이덴티티로 확장되어가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그 아이덴티티를 감추거나 애써 감춘 아이덴티티가 누군가에 의해 드러났을 때 주인공이 느꼈을 심리적 갈등과 충격을 세밀하게 살핀다. 심지어 타의에 의해 아이덴티티가 드러난 것을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의 상황에 비유하기도 한다.
<빛 속으로>에서는 조선인의 외관을 갖춘 주인공이 일본에서 굳이 자신의 언어를 드러내지 않고 살다가 주변인에 의해 조금씩 자신의 언어가 드러나고 <천마>에서는 일본 물을 먹은 주인공이 한국에서 일본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자신을 차별화하려고 하고 <풀이 깊다>에서는 당시로서는 인텔리인 주인공이 서투른 일본어로 군민들에게 자기를 과시하려는 군수인 숙부를 멸시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김사량 연구자인 역자가 해설에서 밝힌 것이나 편집자가 서문에서 평가한 것처럼 여기 실린 (자전적 소설인 <노마만리>는 제외한) 소설 세 편이 모두 언어를 매개로 사건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진 예민하지 못한 감수성으로는 역자나 편집자가 지적한 바와 같은 언어에서 이름으로, 아이덴티티로 확장되어나가는 주제나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구조를 읽어낼 수가 없었다. 어느 부분에서 ‘1940년대에 쓰였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현대적 정서’를 읽어냈는지도 찾을 수 없었다. 책 읽기에 앞서 해설을 대하면서 기대하게 되었던 (비록 적의 언어는 아닐지라도) 타국어를 쓸 수밖에 없는 이방인의 고단함에 대한 표현도 찾을 수 없어 아쉬웠다.
앞서 말했듯이 소설을 이야기로 읽는 내게는 <풀이 깊다>가 가장 짜임새 있는 작품으로 다가왔다. 주인공 이름이 나와 같아서 이야기에 좀 더 쉽게 빠져들었을지도 모르고 선친의 고향 (삼척)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이유가 되었을지 모르겠다. 그렇기는 해도 이야기가 비교적 구체적이고 그래서인지 주인공에 좀 더 쉽게 감정이입이 된 것이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또한 지금 상황에 맞춰 각색한다고 해도 2021년 가을에 어색하지 않게 녹아들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권력에 빌붙어 호가호위 하는 자들과 그들을 보고 분노를 느끼지만 그를 바꾸기 위해 결과적으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일상으로 돌아가는 지식인의 모습. 그런 면에서 ‘현대적 정서’를 말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동의할 만하다.
역자는 <풀이 깊다>에서 코풀이 선생의 아내가 코풀이 선생을 내쫒으며 퍼부어대는 것을 강원도 사투리로 표현한다. (억세 빠진 삼척의 내 사촌 누이들이 늘 쓰던 말이어서 몇 번을 되풀이해 읽었다.) 역자는 강원도 사람들이 분명하고 자신이 강원도 평창 출신이어서 자연히 그렇게 표현했노라고 설명하고 있다. 역자의 고향을 알고 있으니 그 설명이 쉽게 이해는 가는데, 그리고 그것이 내 선친의 고향 말이니 더욱 정감이 가기는 하는데, 역자의 번역 후기를 읽고 <풀이 깊다>를 샅샅이 살펴봤지만 어디에도 등장인물들이 강원도 사람이라고 특정 지을만한 표현이 없었다. 혹시 심심산골이면 모두 강원도라고 생각한 건 아닐까 모르겠다. 산골로 치자면 청송ㆍ영양ㆍ봉화가 더 깊은데.
김사량은 이 작품의 역자이자 김사량 연구로 석사와 박사를 마친 김석희 교수의 글을 통해 처음 만났다. 이름조차 들어본 일이 없지만 스스로를 김사량 연구자로 부르는 역자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하는 궁금함이 이 책을 읽게 만들었다. 내게는 낯설고 조금은 어려운 글이어서 앞으로 쉬이 손길이 가지는 않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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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여년 전의 이야기지만 (과장 좀 보태면 백여년.)너무나도 지금같이 느껴지는 이야기들. 소속, 뿌리에 대한 혼란을 슬프지만 따뜻하게 담아낸 작품들. 당대의 젊은이들이 일본통치 하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았을지, 조금 공감해볼 수 있게 해준 책이다. 문학교과서에 나올 법한 내용과 완성도를 보면 이 작가가 지금에서야 빛을 보게 된 것이 의아할 정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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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유투브를 보다가 추천도서 목록에 떠서 궁금해 구입해 보았다. 일본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일제강점기 시대의 이야기라니.. 이제 첫 페이지를 펼치며 어떤 이야기일까 궁금해졌다. 그 시대를 피해간 나는 참 운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궁금하다.. 빛속으로... 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