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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때문에 <가마귀>를 읽기 위해 집었다가 <해방 전후(解放 前後)>를 비롯하여 다른 작품들을 더 읽었다. <가마귀>를 비롯해서 여러 작품들로 이태준이 해방 이후의 행적을 예측하기 힘들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태준은 해방 공간에서 북쪽을 택했고, 북에서는 오히려 부르주아적 사고에 대한 비판을 받고 숙청당했다. 그는 카프(KAPF) 쪽도 아니었고, 오히려 서정적인 단편소설로 인정받거나, 오히려 전근대적인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가마귀>도 사실은 어떤 주제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저 비극적인 분위기만 있을 뿐이고, 주인공이 폐병에 걸린 여인을 연민의 정으로 사랑하기로 결심했다가 실패(?)하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일종의 자전적인 소설인 <해방 전후>를 보면 해방 전후의 그의 고민이 드러난다. 적극적으로 친일 문인이 되지는 못하고, 그냥 형식적으로 문인보국회 소속으로 있으면서 겨우 면피나 하면서 일본의 패망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이태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해방 정국에서는 오히려 사회주의 쪽의 단체에 가입해서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그는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소설을 보면 양측 진영을 통합하고자 하는 노력을 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의 이후 행적과 관련해서 어느 정도의 단초를 얻을 수 있는 소설이긴 하다.
이 <해방 전후>라는 소설을 보면서 몇 가지 염두에 된 게 있다. 한 가지는 그 당시 지식인들 중에는 세계 정세를 보고 일본이 밀리고 시간이 얼마가 되었든 질 것이란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일본 패전의 소식이 전해진 직후 식민지 조선의 상황이다.
주인공인 ‘현은 차를 타고 가다 운전수의 문답을 듣고서야 일본 패전의 소식을 듣고 급히 상경한다. 해방 이틀 후, 현은 독립 만세를 목 터지게 부르고, 태극기가 휘날리는 것을 확인한다. 그런데 그것은 전국 방방곡고, 심지어 서울에서도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청량리 정거장을 나서니, 웬일일가 기대와는 달리 서울은 사람들도 냉정하고 태극긔조차 보기 드물다. 시내에 드러서니 독 오른 일본 군인들이 일촉즉발의 예리한 무장으로 거리마다 몫을 직히고 <경성일보>가 의연히 태연자약한 논조다.” (162쪽)
그래서 현은 정말 일본의 항복이 사실인가를 의심하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해방을 맞았으되 모든 국민들이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고, 그것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도 한 동안은 어수선했다는 얘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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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대하는 태도 이태준 『돌다리』, 『패강냉』 감상문 군복무를 끝내고 돌아온 학교에는 몇 가지 변화한 점이 있었다. 자주 가던 음식점은 망했는지 사라져 있었고, 수업이 끝나고 가끔 들렸던 카페는 다른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처음 보는 그들이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진 탓에, 나는 굳이 예전에 들르던 음식점을 찾아 멀리까지 발을 옮겨야만 했다. 새로 생긴 음식점, 카페는 이전 가게보다 위생이나 가격 면에서 월등이 우월했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예전 가게 같은 애정을 느낄 수 없었다. 새로 생긴 가게에는 이전 가게에서 느낄 수 있던 ‘정’을 찾을 수 없던 것이다. 조금 허름하긴 했지만 이전 가게에는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는 아주머니의 웃음이 있었고, 넉넉하게 음식을 더 주시는 따뜻함이 있었다. 그에 반해 새로 생긴 가게에는 손님을 맞이하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 깔끔하지 그지없는 정량의 음식만이 있을 뿐이었다. 어느 쪽이 더 나은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이전 가게의 그 느낌이 훨씬 더 좋게만 느껴졌다.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매일 같이 변화하고 있는 탓에,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주위의 것들만큼은 소박하길 바랐던 것이다. 내 친구들은 이런 나를 두고 희한한 녀석이라고 놀렸지만, 나는 친구들이 부탁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예전 음식점들을 찾아갔다. 하지만 짧은 점심시간을 가진 나는 어쩔 수 없이 타협안을 택해야만 했고, 친구들과 새 음식점에 가는 일은 점차 늘어만 갔다. 나는 새 음식점에도 차츰 익숙해져갔고, 매번 멀리 있는 음식점을 찾아나서는 내 기행은 그 빈도가 줄어들었다. 처음 변화를 마주했을 땐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계속 접하다보니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새로운 음식점의 매력에 눈 뜬 지금은 더 이상 예전 음식점이 더 좋았다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각자의 매력이 있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어쩌면 변화에서 중요한 건 전후의 상황이 아닌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태준의 『돌다리』와 『패강냉』에 나온 인물의 태도와 같이 말이다. 『돌다리』, 『패강냉』은 모두 잃어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다. 전자가 아버지의 농토에 대한 가치와 그것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의 세태를 다룬다면, 후자는 달라진 평양 세테에 대한 현의 아쉬움을 다룬다. 이들은 변화하는 세상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며, ‘예전 것’에 대한 향수를 말하며 그것을 그리워한다. 이때 주목해야할 점은, 이들이 과연 왜 그것을 그리워하는지(지키고 싶어 하는지)다. 『돌다리』의 아버지가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은 토지(아버지는 토지로 인해 자신의 가문이 먹고 살 수 있었다고 하며 그것을 소중히 여긴다)와 마을 전체의 협동 및 조화를 상징하는 돌다리다. 즉 그가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은 이전부터 내려온 전통이자, 역사로부터 내려오는 고유의 ‘정신’이다. 그는 농토를 팔면 아들에게 큰 이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땅을 팔려하지 않으며, 새로운 다리가 생겨 사람들이 더 이상 돌다리를 이용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굳이 돌다리를 고치려 한다. 그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시대의 변화에 어울리지 않을 것일뿐더러, 지킨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이 없는 ‘사소한’ 것이지만 (아버지가 소중히 여기는 토지나 돌다리는 기능상 다른 토지나 다리로 대체 가능하다.) 그는 조금도 타협하려고 하지 않는다. 토지와 돌다리는 사물의 경중을 떠나 그의 인생을 지배하는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패강냉』의 현이 지키고 싶어 한(그리워한) 것은 과거 평양이 보여준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는 오랜만에 평양에 들려 예전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만, 고유의 느낌을 상실한 채 서울의 유행을 따라가기에 급급한 평양의 모습에 크게 실망하고 만다. 그가 생각하는 평양의 매력은 전통 속에 나타나는 은은함이었지만, 이제 평양은 부녀자들마저 사투리를 쓰지 않을 만큼 크게 변화한 모습이다. 그는 평양 여자가 더 이상 하얀 머릿수건을 쓰지 않는 것을 아쉬워하며 나아가 그 감정을 삶의 태도와 연관시킨다. 과거의 것이 변화할수록 고유의 정신은 헤지기 마련이며, 이는 단순히 생활상뿐만 아니라 삶의 가치와 연결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돌다리』와 『패강냉』의 두 인물이 지키고 싶어 한 것은 옛것으로 대변되는 전통의 산물이다. 두 인물이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무척 사소한 것이지만 (이들은 대체되더라도 현실에 별다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이들은 이것을 절대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그것이 갖는 가치가 남들과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돌다리』의 아버지의 전통이나, 『패강냉』의 현의 전통은 그들 인생과 큰 관련이 있는 중요한 것이다. 설령 그것이 다른 이의 눈에 보기에 사소해 보인다고 해도, 타인은 이들의 이 같은 태도에 대해 무시할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이점에서 전통에 대한 이들의 태도는 존중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다만 이들의 이 같은 태도만이 전적으로 옳은 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이미 일어난, 혹은 무조건적으로 일어날 변화가 있다면, 과연 그것에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 태도가 옳은 것일까? 『돌다리』와 『패강냉』 속 변화를 주장하는 인물의 의견을 보면, 이들 역시 논리에 맞는 소리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변화를 해야만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합리적이며, 오히려 이들의 입장에서 전통을 주장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허황된 것이다. 이들이 반대의 태도를 취한다 해도 이미 일어난(날) 변화는 멈출 수 없으며, 변화가 일어난 세상에서 이 같은 입장을 고수하는 건 세상에서 자신을 도태시키는 일일 뿐이다. 즉 전통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두 소설의 주인공의 태도는 결코 긍정의 대상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두 소설에서 긍정할만한 유일한 인물은 『돌다리』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 듣고 아쉬워하면서도, 아버지의 주장에 크게 반발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아버지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만,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그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점에서 두 소설이 말하는 것은 전통이 옳다는 이야기보단, ‘변화를 대하는 태도’가 적절할 것이다. 변화를 두고 나타나는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며, 그것과 자신의 의견을 맞춰가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글 초입에 장난처럼 음식점 이야기를 썼지만, 이태준의 두 소설이 말하는 주제는 고작 개인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수많은 변화를 겪고 있고, (그에 대한) 수많은 대립 역시 함께 나타나고 있다. 변화를 대하는 두 태도 중 어느 것이 옳다고 할 순 없겠지만, 이들은 서로를 존중하지 않고 서로에게 아픔만 남기는 듯한 모습이다. 이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세상의 변화를 함께 만들어간다면 우리 삶은 조금 더 평화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변화를 거부하는 이들이 변화를 존중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이 변화를 거부하는 이를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 변화가 한 순간으로 멈추지 않고 서로를 더해 새로운 변화를 만들 수 있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