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면서 세계의 석학들이 지난 천년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기 위하여 논의한 내용을 요약한 책이다. 한 권의 책에서 이렇게 세계적인 석학들을 만날수 있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새로운 천년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스티븐 제이 굴드, 장 들뢰모, 움베르토 에코, 장 클로드 카이에르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미국의 고생물학자, 장 들뢰모는 프랑스의 역사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이탈리아의 기호학자이자 소설가이며, 장 클로드 카이에르는 프랑스 동양학자이다. 이렇게 다른 분야에 최고 권위자들의 새로운 천년에서 지난 천년을 반성하고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많은 가르침을 받는다. 이 책은 내용상 그 사회에 대한 예를 들어서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아니면 부분적으로도 지적인 충격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나의 무지를 깨닫게 해주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준 책이기도 하다. 나는 여기 4명의 저자중에서 스티븐 제이 굴드와 움베르토 에코를 무척 존경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글을 보고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인간의 위대함을 말한다는 것은 우상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편견이라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를 지금 지배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다는 것은 인간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현재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흔드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 책에서 그 박학다식함을 자랑이라도 하듯 너무 많은 얘기를 한다. 신비주의자들에 대한 강렬한 비판, 사회의 역사성, 비겁한 잔인성, 50억개의 이데올로기, 타협의 윤리... 너무 많아서 다 열거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 박학다식에서 나오는 그의 열변은 로베르토 마기오리가 말한 것처럼 '기성 여론과 편견의 안개 속에서, 그리고 정치 또는 경제적인 언어의 숲속에서 깜박이는 지성'이란 표현이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지 깨닫게 해준다. 20세기를 이끈 사람들을 세 사람으로 요약해 보면 마르크스, 프로이트, 다윈 정도가 되겠다. 이들의 특징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면서 각 분야의 최고 권위자들의 열띤 토론속에서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그들의 모습이 아름답기만 하다. 1999년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준비하던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움베르토 에코가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1999년 종말을 외치던 사람들은 이제 또 다른 종말론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종말론은 언론들의 특종찾기에 편승에 다시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언제나 종말을 외치는 사람은 있고, 종말이라는 것이 인간이라는 종의 마지막은 될 수 있으나 시간의 종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스티븐 제이 굴드가 말한 것처럼 박테리아가 희망이 될 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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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노피아의 세기가 펼쳐질 것이라고 예견되는 21세기의 벽두에 왜 시간의 종말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종말은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이 무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과연 이런 것이 가능하기나 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절망 속에 살아가야 하나? 하지만, 이 책의 기획자들은 시간의 종말이라는 서양인들의 뿌리깊은 공포를 다시 불러 일으켜 화제 거리로 삼으려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종말이라는 극단적인 생각의 연원이 어디 있는가를 차분히 되살펴보고, 종말의 가능성을 통해 문명의 행로를 반성해보려는 기획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도 죽음을 생각하면 자신의 삶을 반성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 문명에 대한 반성을 직업 분야가 서로 다르고 이념도 다른 사람들을 모아 의견을 들어봄으로써 다채로운 사유들을 접할 수 있게 한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고생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던 책력의 역사라든지 1000이란 숫자가 종말론의 역사에서 갖는 의의 등을 드러내 주어 매우 독자를 흥미롭게 한다. 이번 윤년이 400년 만에 오는 윤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굴드를 통해 이를 처음 알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대담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생물의 역사를 통해 인류의 역사를 상대화시키는 부분이다. 생물의 역사는 급격한 멸종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멸망하지 않고 그대로 있고, 생명은 어떻게든 살아나갔다는 그의 지적은 우리의 시야를 좀 더 넓혀놓는다. 인류의 멸망을 어느새 우리는 세계의 멸망으로 치환시키지 않았는가. 에코가 지적한대로 종말론은 인간의 죽음을 세계에 치환시킨 것이 아니었던가. 박테리아가 생명력에서 볼 때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굴드의 유머는 그래서 뼈가 있다.
굴드가 과학자로서 철저한 유물론적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 반해 들뤼모는 기독교도로서의 입장을 가지고 종말론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 역시 자신을 유물론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들뤼모의 입장엔 거부감을 가지면서 보았다. 하지만 그의 입장 덕분에 기독교 역사의 내부, 그리고 그것과 연관된 종말론의 역사를 더 충실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특히, 종말론이 단순한 광신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반역의 정신으로 기능하였다는 그의 지적은 곰곰이 역사와 사상, 신앙에 대해 숙고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광기 어린 신앙은 역사에서 긍정적인 기능도 한다는 것, 어쩌면 합리성은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비합리주의가 역사를 뒤흔들어 놓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비합리성이 역사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할지 부정적으로 작용할지는 굴드의 말대로 우연 속에 놓여 잇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합리주의가 뮌쩌의 농민 봉기에서처럼 피압박 계급의 분노의 표현으로 드러날 수 있지만, 나치처럼 특정 민족을 몰살하려는 계획으로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는 바로 인간에게 달린 문제일 것이다.
굴드가 생명사를 통해 인류사를 상대화했다면, 카리에르는 동양의 시간관을 통해 시작과 끝을 설정하는 서양의 종말론적 시간관을 상대화한다. 그는 시간의 종말을 설정할 수 있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주관적 무의 상태, 니르바나의 상태뿐이 없다고 말한다. 서양식의 사고가 설정하고 있는 객관적 무의 상태라는 것은 현대 물리학을 보더라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시작과 끝을 설정하지 않는 동양 식 사고가 시간의 종말을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논리를 보면 기묘하면서도 기발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서양의 학문인 현대 물리학을 가지고 서양의 사고를 비판하면서 가장 고대적이라 여겨지는 동양의 사고와 그 물리학을 연결시키고 있기에 그렇다. 그런데 그의 논의에서 돋보이는 부분은 그가 숙고하고 있는 동양식 사고와 현대 물리학의 만남을 주선하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를 역설의 사회라고 지적한 부분도 돋보인다. 사회의 외양과 그 뒷면의 정반대의 면모를 꿰뚫어볼 수 있는 유연하고 날카로운 사고는 아마도 그가 서양 문명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동양적 사고의 도움을 받았기에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동양적 허무주의에 빠지는 부류는 아니다. 그는 유토피아의 복원을 말하고 불교는 좌파적이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그 유토피아는 19세기 식, 20세기 식의 유토피아는 아닌 듯 하다. 그는 또한 객관적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에서 거리를 두어야 이 현대 세계의 속도의 시간에 휘말리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19-20세기의 유토피아는 그렇지만 바로 이 속도의 시간을 가속화하려 하지 않았을까? 자본주의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회주의를 생각해보면 말이다. 그는 그와는 다른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만큼 불명료하다는 것이 그의 논의의 단점이라면 단점일 것이다.
에코는 2000년을 맞이하면서 나타나는 종말론 담론에 대해, 거대 이데올로기의 몰락에 따른 이념적 공백에 의한 현상이라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접근은 위의 논자들의 접근과는 차별성을 지니고 잇는 것 같다. 나는 에코의 이 역사적 접근에 동의하는 편이다. 사실, 어떤 현상에 대해 인류라든가 역사라든가 종교 등을 동원하여 너무 거창하게 접근하게 되면 안보이게 되는 부분도 있게 마련이다. 이런 면에서 에코는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바가 있다. 바로 지금의 현상은 저 요한계시록의 문구의 진정성의 힘이 아닐까라는 식으로 몇 천년을 넘나들면서 해명한다기보다는 바로 10년 전의 사회주의 몰락에 의해 설명되는 부분이 훨씬 많을지도 모은다.
하지만 그런 논의는 역시 큰 맥락 속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다른 논자들의 이야기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에코 역시도 들뤼모처럼 종말론이 19세기 유토피아 사상의 연원이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논의를 펼치고 있다. 에코의 논의에서 숙고하게 되는 것은 이데올로기 없이는 인간은 살 수 없으며, 종말론 같은 사교도 그러기에 성행하는 것이란 그의 주장이다. 이데올로기의 몰락이란 것은 없다. 우리는 어떻든 어떤 마음의 지주를 찾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찾은 이념의 지주는 그렇다면 무엇일까. 에코는 그런데 거대 이데올로기가 몰락한 후 그 집단적 이념이 사라지고 사적으로 변하는데 우려하고 잇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만 믿는 광신자들만 존재할 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그의 우려는 나에게 피부에 닿는 현실감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상깊은구절] "우연만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의 형태를 결정합니다. 생명의 역사 속에는 기원부터 일련의 우연들이 존재했습니다." "베르가민은 말하기를 우리들의 생활은 시간의 당혹스럽고 황홀한 경험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영원성의 순간들을 횡단하는 일련의 역사적 순간들입니다.(많은 경우 그것은 그 자체로 존재할 뿐입니다.) 모든 형태의 시들만이 그것을 우리에게 가져다 줍니다." "어떻게 인류의 일부가, 인간을 만들고 인류에 대한 사랑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신을 창조할 만큼 충분한 상상력을 가질 수 있었는지를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