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 어리석게 '지금도 활동가가 있어?'란 순진한 생각을 했다. 노동, 젠더, 성소수자, 환경, 동물 등 세상의 모든 불균형에 대한 강자의 의도적 지배가 사라지지 않은 한 약자의 소리를 대변하는 모든 이의 움직임이 '활동가'일 수밖에 없는 데도 말이다. 조금 부끄러웠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좋은 책이라 추천해서 읽었는데, 역시 좋은 책이었다. 읽는 내내 '균형의 추'란 문장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저자가 '균형의 추'였고, 사라진 중국 친구들이 세상을 떠 받치고 있는 '균형의 추'였다. 천안문 광장에서 두 팔을 들어 탱크를 막아선 시민이 생각난다. 우린 그런 '균형의 추'를 활동가 또는 혁명가 그도 아니면 이름 없이 사라져간 시민이라 부르기도 했다. 성장의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빠르고, 성장의 성과물이 초법적으로 소수에게 집중되고 있는 중국 사회를 읽으며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우리 시대가 오버랩 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는 강력한 강자들의 연대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갈라내지 않았다. 오히려 왜곡되고 패쇄된 사회주의(아니 전체주의 또는 '국가자본주의'란 표현이 어울릴 것같은)에서는 약자에 대한 폭력이 은밀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성장의 성과물은 소수에게 독점되고 있었다. 이런 그들 사회에 연약한 두 팔을 뻗어 한 번만이라도 멈춰서서 잠시 주변을 둘러보라고 외쳤던 이들이 이 책의 저자와 사라진 중국친구들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젊은 활동가들은 우리 70~80년대처럼 경직되지 않았고 자유분방함 속에서도 목표와 방향성을 잃지 않았다. 그들의 건강한 에너지는 중국의 미래 아니 우리의 미래란 생각도 들었다. 굳이 우리의 미래까지 얘기한 이유는 중국으로 떠났던 저자의 의도 중 하나가 '연대'였기 때문이고, 중국 친구들 또한 '전태일 평전'을 읽으며 먼저 발생했던 한국의 노동운동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농민, 노동자의 국가권력임을 내세우는 중국정부가 우리보다 훨씬 강력하게 탈법적으로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것을 보며 참 '역사의 아이러니'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중국에도 우리처럼 어용 노조(그들은 어용공회라 부른다)가 있고, 사측은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직원의 출근을 막고, 깡패를 동원해 노동자를 구타한다. 물론 공안은 폭력 깡패를 잡지 않는다. 우리의 지난(아니 지금도) 80~90년대 대한민국이 데자뷰되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노동자만 연대와 공유를 통해 타국의 노동운동을 학습하는 게 아니라 자본가와 공권력도 만국이 연대해 지배와 탄압을 학습한다. 그들은 필연적 동지이자 강력한 톱니바퀴의 일원이다. 단지 노동운동만이 아니다. 젠더갈등, 여성인권 운동은 우리와 동시대를 고민하고 있다. 중국 친구들이 '82년 김지영'을 읽고 봄날의 벼락같이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성의 문제가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 인류가 접한 가장 오래되고 불평등한 권력관계이기에 그럴 것이다. 남성, 종교,국가가 개입해 여성을 죽음으로 내몰고 남성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는 건 어제의 일이 아니라 반드시 해결해야 할 오늘의 문제이다. 젊은 중국의 활동가들은 젠더갈등(대등해야 갈등이니, 사실은 갈등이 아니라 젠더 폭력이 맞다)을 대립과 파괴로 몰아가는 해결 방법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얘기한다. 젊은 중국친구들의 얘기를 들으며 득표를 위해 남과여를 비정상적으로 갈라치기 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집단을 떠올리며 씁쓸함과 부끄러움 또한 감출 수 없었다. 마르크스의 동상을 수도 없이 마주치는 중국에서 벌어지는 노동자 탄압 그리고 반 마르크스주의~ 베이징대에 마르크스주의학회가 중국 국가권력의 감시와 암묵적 탄압을 받는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어떻게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적이고 사회주의의 적이 되었는지 백골이 진토가 되었을 마르크스는 어떻게 생각할지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베이징대 중국 학생은 이렇게 말한다. '마르크스는 시험에만 나온다. 그리고 너무 어려워 학점 따기가 힘들다!' 마르크스를 공부하는 이유가 학점을 따기 위함이고, 학점을 따고 마르크스 박물관에 가는 이유는 국가자본주의 정점에서 자본을 수탈할 수 있는 권력 핵심에 들어가기 위해서라고 한다. 바로 '공산당원'이 되기 위해... 젊은 친구들의 저항과 연대가 꼭 자본권력과 국가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만이 아니었다는 것도 놀랍고 새로웠다. '706주거 공간'도 독특했다. 다른 관심과 전공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창의적 공간. 거주 공동체가 갖는 장점을 활용한 소통. 문학, 철학, 건축, 과학이 공존하는 거주공간의 다양성은 정말 부러웠다.(내가 벌써 오십대 중반이라니...ㅠㅠ 20~30대였으면 한 번쯤 꼭 살아보고 싶은 곳이다.) 다양성의 존중은 결국 새로움을 창조할 수 있는 토양이 될 것이다. 이들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이런 공간들이 자치와 협동조합의 형태로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다. 치솟을대로 치솟아 거주의 평화를 해치고, 삶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현실을 벗어나 소비문화와 고단한 삶에서 해방되는 자유로운 공간으로 확대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작자의 얘기대로 서울의 청년주거정책보다 훨씬 성장한 문화주거공간이면서 궁극적으로 자본으로부터 자유를 꿈꾸는 공간이 되는 것을 기대해본다. 역사의 저울에 올라서 강자들의 강력한 연대와 감히 무게를 맞추려 하는 '작은 추'.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들은 언젠가 강자와 균형을 맞추는 '균형의 추'로 성장할 것이다. 난 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완성시키리라 믿고 있다. 또한 그들의 삶을 존중하고 그들의 가치에 연대의 박수를 보낸다. 30년 전, 인민의 사적욕구를 공산당의 교육과 지도로 극복할 수 있다는 공산당 선언을 다시 곱씹다 '봄날의 벼락같이' 개소리란 것을 깨달았던 순간이 떠오른다. 언제까지 한 쪽에서는 자본이 숫자 욕심으로, 다른 한 쪽에서는 생존의 칼날로 존재할지 정말 안타까울뿐이다. '사라진 나의 중국친구에게' 좋은 책을 쓸 수 있는 삶을 살았던 작가, 그리고 좋은 책을 만드는 출판사에 경의를 표하며, 독자들이 돈 모아 술 사주거나, 세계일주라도 꼭 시켜줬으면 좋겠다! |
| 홍명교 작가님의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리뷰입니다. 친구에게 추천을 받고 구입해서 읽게 되었는데요. 누구나 평소 중국인들은 왜 중국의 authoritarian 정부에 반기를 들지 않는가? 라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을 텐데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나 현재 중국 혐오 정서가 유독 높아만 가는 시점에 중국은 어떤 곳인가? 라는 질문에도 답이 될 수 있는 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