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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플로베르의『마담 보바리(문학동네/김남주 옮김)』는 친구이자 시인인 ‘루이 부이예에게’라는 짧은 헌사를 남기는데 그에 앞서 마리앙투안쥘 세나르에게 표하는 감사를 따로 덧붙힌다. 출간에 앞서 문학잡지에 연재 당시 종교 모독과 풍기문란을 야기할 가능성으로 결국 기소되었지만 세나르의 변론으로 무죄판결을 받았기에 1857년 『마담 보바리』의 초판에 세나르에 대한 글이 담긴다. 영어권 작가 125명에게 가장 좋아하는 최고의 문학작품 10권을 물은 결과 1위 안나 카레니나에 이어 2위에 올랐으며 1857년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함께 '현대(modern)'를 연 소설로(영어권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문학작품) 역자 해설의 시작 역시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가 자리잡은 이후 가장 많이 읽히고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소설, 단 하나의 단어도 다른 단어로 대체할 수 없다는 일물일어설을 낳은 절대 작품.’(p.501) 여기서 끝이 아니고 계속 이어진다. 운명의 소설, 실패의 소설, 기다림의 소설, 환멸의 소설이라는 별칭(방미경, 2003)을 가졌으며 출간 이후 ‘무려 백육십여 년 동안 전 세계에서 줄곧 현역으로 읽히고 있는 이 소설’(p.502)의 힘은 말 그대로 ’힘을 다해‘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마담 보바리』는 총 3부로 소설의 도입부라 할 수 있는 1부는 샤를 보바리가 전학해 온 학창시절과 가정의 분위기, 공의가 되고 아내가 죽은 후 환자의 딸이었던 에마를 만나 결혼하고 사 년간 머물며 자리가 잡히기 시작한 토트를 에마의 성화로 떠나게 되기까지다. 샤를에게는 내키지 않았던 이사의 직접적 원인은 보비에사르에 있는 당데르빌리에 후작 집에 초대받았던 데 있다. 사랑에 관한 책들에 빠져 보냈던 열 다섯 살, 책 속 인물과 그들의 삶을 지금 자신의 현실과 비교했을 때의 괴리에 “맙소사! 내가 도대체 왜 결혼을 했을까?”(p.70)라며 ‘만일’을 곱씹고 보태던 시기에 이루어진 초대는 그녀에게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되고 그날의 인상은 촘촘히 각인된다.
보바리 부부의 새로운 거주지는 용빌라베다. ‘노르망디, 피카드리, 일드프랑스 세 지역이 맞닿아 있는 이곳은 풍경에 별 특징이 없듯 사람들의 말투에서도 두드러진 억양을 찾아볼 수 없는, 이른바 잡탕 지역이다.’(p.106)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곳은 오메 씨의 약국으로 약제사 오메는 마지막까지 샤를과는 정 반대의 인생곡선을 그린다. 에마에게 공증인 사무소의 서기 레옹 뒤퓌는 남편 샤를과 달리 대화가 통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다. 레옹과 함께 있던 에마는 우연히 눈길이 닿은 남편이 ‘짜증’스럽다. ‘그녀의 눈에 프록코트로 감싼 그 등이 진부하기 짝이 없는 그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 보였다.’(p.148) 법률 공부를 위해 레옹은 파리로 떠나고 ‘보비에사르성에서 돌아온 후 얼마간 머릿속에서 카드리유가 맴돌았던 것처럼 그녀는 침울한 애수, 어딘가 마비된 듯한 절망에 휩싸였다. 레옹의 모습이 실제보다 더 크고 더 멋있고 더 감미롭고 더 모호하게 눈앞에 떠올랐다.’(p.178) 에마는 상념에 빠져든다.
약제사 오메의 예상대로 올해의 농업박람회는 용빌에서 개최되었다. 로돌프 불랑제의 눈에 ‘그 여자가 예뻐 보였’(p.187)고 그는 그녀를 유혹할 계획과 ‘나중에 떼어낼’ 생각을 동시에 챙기지만 그의 구애에 에마는 소녀 시절 꿈꾸었던 책 속 여주인공들의 삶이 자신에게 비로소 실현되었다고 여긴다. ‘이제 그녀 자신이 명실상부하게 그런 상상의 일부가 되었고, 그토록 부러워했던 사랑에 빠진 여자 역할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게 됨으로써 젊은 시절의 오랜 몽상을 실현한 셈이었다.’(p.232) 에마는 샤를의 외반족 수술 실패 이후 남편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중략) 그라는 인간 전체, 요컨대 그의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자 샤를이 곧 죽을 사람, 그녀의 눈앞에서 임종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인 양 그렇게 그녀의 삶으로부터 떨어져나간, 영영 없어져버린, 존재한다고 볼 수 없는 허상으로 여겨졌다.‘(p.264) 에마는 자신에게 허락된 가정이라는 테두리에 분노를 터뜨린다. 하지만 에마의 집착이 커질수록 로돌프는 발을 뺀다. 분노와 상실로 인한 신경증의 발작 이후 샤를의 정성으로 겨우 회복된 에마는 레옹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새로운 정열에 자신을 맡긴다. 이미 상인 뢰뢰는 그녀의 틈과 약점을 간파하고 있다. ‘아! 걸려들었군.’(p.270) 뢰뢰의 사악한 덫은 에마를 죽음으로 몰고 일 년 후 샤를에게, 그리고 어린 베르트만 남을 때까지 일가 내의 죽음은 계속된다.
『마담 보바리』는 ‘눈앞의 현실이 아니라 꿈꾸는 환상을 살고자 하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보바리슴’(p.504)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며 생생하게 펼쳐지는 사건과 인물들에게 때론 감정을 이입하게, 때론 묻게 됨에도 줄거리 자체는 단순하게 요약이 가능하다. 과연 작가는 인물들의 서사에 집중했을까 생각할 때 존 업다이크의 “『마담 보바리』는 한 시대를 나타내는 기차역이다. 고풍스러운데다 꽃까지 만발해 있지만 강철로 만들어져 단단하기 그지없다.”는 평은 해답을 간직한다. 꽃과 강철이라는 극단의 상징처럼 작가는 세차게 몰아치는 감정에 속수무책으로 자신을 내맡겼던 아름다움을 가차없는 비극으로 완결함으로 독자로 하여금 잠시 넋을 잃게 한다. 그리고 에마같은, 샤를같은 나아가 오메나 로돌프, 뢰뢰같은 자들의 존재를 헤아려보게 된다. 의외로 그들은 특별하지 않기에, 다분히 보편적이기에 더 씁쓸하다.
논픽션의 대가 존 맥피 역시 플로베르의 글쓰기에 대해 언급한다.“나는 사전에서 모르는 단어보다 아는 단어를 찾는 데 월등히 많은 시간을-적어도 99대 1의 비율로-쏟는다.(중략) 나는 이를 ‘일물일어를 찾는 탐색’이라고 부른다.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날이면 날마다 자기 집 안뜰을 걸어다니며 가장 적확한 단어 하나를 찾아 머릿속을 뒤졌다는 이야기를 8학년 때 바살러뮤 선생님한테 들었기 때문이다. 누가 이 이야기를 잊을 수 있겠는가? 플로베르는 영웅과도 같았다.”(p.265/네 번째 원고/존 맥피/글항아리) 역자는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가는 철두철미한 글쓰기’(p.502)라고 말한다. 겉과 속을 모두 그려내는 문학에서의 그림(p.505), 진짜 교향곡으로 보일 것이라며 수정을 거듭했다는 장면들(p.515)까지 아마도 완독 횟수가 늘어갈수록 작품은 달리 보일 것이다. 하지만 농업 박람회의 시상식 장면에서 호명되는 수상자와 로돌프의 구애가 교차하는 서술기법은 생동감이 넘치고 입체적이며 독특했다. 재독을 하지 않더라도, 예민하지 못한 감각을 지닌 필자조차도 그 장면은 인상 깊으니 말이다. 이런 문장은 어떤가. ‘하지만 아무리 충만한 마음이라도 때로는 고작 공허한 비유로나 표현될 뿐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욕망이나 관념, 고통의 정도를 결코 적확하게 표현할 수 없을뿐더러 사람의 말이란 금간 냄비와도 같아서 별을 감동시키고자 하지만 곰을 춤추게 하는 가락을 내는 데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p.273) 대안은 이런 문장을 암기하는 것일까.
시점의 자유로운 이동 역시 내내 반복되면서 독자의 감상을 풍성하게 한다. 인물의 단정적인 목소리가 아니라 대변하는 무언가를 통해 좀 더 잘 이해하게, 실제적으로 느끼도록 돕는다. ‘층층기법’에 대한 역자의 설명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상기하게 했으며 작가의 치밀한 시도들이 다시 읽어야 할 충분한 이유를 만든다. 에마의 고단한 삶은 무엇에 기인하는가, 에마와 샤를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을까, 에마의 중독과도 같은 맹목적 선택과 행동은 비단 그녀만의 한계일까 생각하게 된다. “내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 내가 쓰고 싶은 것은 아무것에도 떠받쳐지지 않은 채 공중에 떠 있는 지구처럼 외부적으로 전혀 묶인 데 없이 문체의 내적인 힘으로 저 혼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한 권의 책입니다. 가능하다면 주제랄 것이 거의 없는, 아니 적어도 주제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책 말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작품은 그 재료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책입니다. 표현이 생각한 바에 가까워질수록, 언어가 사고와 하나가 되어 사라져버릴수록 작품은 더 아름다워집니다.”(p.516) 플로베르의 문학이『마담 보바리』전후로 완전히 달라졌다(김계선,2017)고 하듯 이를 분명하게 성취한 작품이었고 문학사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 같다. 역자 해설의 ‘플로베르 론’을 읽고 난 독자는 아마도 당장 다시 읽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임은 알았지만 플로베르 탄생 200주년은 후에 알게 되었다. 지금,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0번으로『마담 보바리』를 만날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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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풍기문란과 종교모독 죄로 기소된 화제의 책. 이후 무죄판결을 받은뒤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받은 책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보바리다.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나다 꿈꾸는 삶. 현실도피. 어느정도의 환상속에 살고있는 우리들이 아니던가. '보바리즘'이라는 용어를 탄생시킬만큼 마담 보바리, 표지의 어여쁜 여인 에마는 그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들여다보기로한다.
책은 총 3부로 나뉘어, 현재 1부를 마친나로서는 철없는 어린시절, 그저 남자라곤 아빠밖에 모르고 지내던 이쁘고 발랄한 그녀가 그녀의 아버지를 치료중인 유부남 보바리를 만나, 보바리가 사별을 하고, 다시 그와함께 인연을 맺어 신혼을 꾸려나가는 이야기로 진행된다.
꿈꾸던 신혼이 시작되는것도 잠시, 권태는 생각보다 쉬이 찾아와버렸는데...
음식을 먹고나서 혀로 이를 핥는 그, 수프를 한모금씩 먹을때마다 나는 꿀꺽거리는소리, 살이붙어 포동해진 뺨 덕에 원래도 작은눈이 관자놀이 쪽으로 당겨 올라가는 보바리가 그녀의 신경을 몹시 거슬리게한것이다.
그는 그녀가 행복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녀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평온과 어떻게 해볼수 없는 둔감함, 자신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를 원망했다. 마담보바리 1부. p65
사랑이 식다못해 얼마나 얼어버렸으면, 자신이 그를 행복하게해주고있다는 그 사실때문에 그를 원망할수있단 말인가? 내사랑이 그에게 행복이라면~의 반대말.
그녀는 이미 그를 "사랑하지않다"가 아니라 "싫어해"가 되어버린것 같다.
반면 그녀를 위해 자리잡은 공의(의사를 대신할수있는 직업) 생활을 옮기고서라도, 그녀의 마음을 편케하기위해 이사를 결심하는데....이미 그의 아이를 뱃속에 품은 그녀는 과연 이후 어떤일들로 이 권태를 헤쳐나가길래 풍기문란, 종교모독까지 갔단말이지?
지금읽고있는책,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보바리"이다.
"네이버독서까페 리딩투데이 지원도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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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문학을 읽어 보려고 이것 저것 구경 하는데 마침 눈에 띄어서 구매 하게 되었습니다. 도파민이 좀 필요한 상태라 ㅎㅎ 대략적인 줄거리를 보니 불륜? 파멸? ㅎㅎ 단어만 봐도 도파민 폭발할 것 같은 내용이라 망설임 없이 바로 구매 했습니다. ㅎㅎ |
| 마담보바리 몇 번째 도전인지 민음사책도 여럿 사고 드디어 문학동네까지 읽는게 어렵다 언젠가 완독하길 기대하며 리뷰를 쓴다 마담보바리를 사놓고서는 완독하지 못한 년수가 점점 길어지고 있다는걸 새삼 깨닫는다 의심하지말고 읽어나갑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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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인 소감 처음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는 부도덕한 유부녀의 방탕한 사생활을 그린 모양인데, 이 책이 고전문학으로 칭송받는 이유가 뭘까라는 호기심이었다.
그리나 큰 기대는 걸지 않고 읽기 시작했다. 야한 장면이 좀 나오려나? 하는 궁금증도 있긴 했다.
책 깨나 읽었다는 젠체를 하려면 이른바 고전세계문학전집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책의 내용을 깊이있게 알지는 못하더라도 완독은 해야 적어도 거짓말은 안 할 수 있다는 얄팍한 도덕심이 부추긴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가 자습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마담 보봐리라는 소설책은 처음 시작할 때 좀 진부할 것이고 따분할 것이라는 예상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렸다.
중간에 나오는 풍경 묘사는 환상적이고 에마의 결혼식 케이크를 묘사하는 것은 와~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하였다.
에마와 그의 모질한 애인들 그리고 무덤덤한 남편 샤를의 심리와 행동은 화도나고 고구마 한 열 개를 입 속에 꾸역꾸역 밀어넣은 듯한 답답함을 유발시키며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사치와 열정의 댓가인 압류를 막으려 이리저리 뛰는 에마의 모습과 그녀의 비열하고 나약한 겁쟁이 상간남들에게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욕정은 채우되 책임은 지지 않는다.> 인류의 탄생 이후로 지속되어 온 비열한 겁쟁이들과 탐욕에 가득차서 눈를 희번덕거리는 욕심쟁이들의 슬로건을 에마의 상간남들은 모세의 10계처럼 철저히 고수했다.
에마가 사치와 철모르는 열정의 변주곡에 미친 년 널 뛰듯 뛴 건 맞으나 뢰뢰의 야비한 살인적 이자의 덫에 걸려 소액에서 시작된 빚이 홍수처럼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갚을 수 없는 그녀의 빚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녀의 애인들은 그녀를 충분히 구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의 우둔함이든 그들의 얍삽함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상간남 두 놈은 장례식에 오지도 않았고 그 중에 로돌프는 카드 한장 달랑 보냈을 뿐이며, 천박하고 나약하고 소심한 레용은 언급되지도 않았다.
에마의 사치와 열정은 빚과 간통으로 돌아와 그녀를 한 입에 집어 삼켰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과 샤를의 죽음 부부의 딸 베르트가 나중에 친척에게 보내어져 어린 나이에 방직공장으로 돈 벌러 보내어지면서 끝날 때 독자로서 멘탈이 철저히 붕괴되는 것을 느꼈다. 그냥 뭐랄까? 분노와 무력감 그리고 안타까움이 덮쳐오면서 만사가 귀찮아졌다.
한 여자의 비극적 삶을 다룬 것인지 아니면 미모와 매력을 겸비한 시골 농부의 딸의 불운한 삶을 그린 것인지에 대한 의견은 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 됐든 간에 읽고 나서 엄습하는 허탈감은 피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슬픈 노래는 듣고 싶지 않는 회원분들에게는 권하지 않는 책이다. 그러나 슬픔을 알아야 기쁨도 알게 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역시 소설은 남이 요약해 놓은 줄거리 쪼금 읽고 서평 읽었다고 해서 그 소설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으로는 얻는 것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읽어 가면서 주인공과 같이 호흡해야만 그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마지막에 에마가 느꼈을 절망감이 온전히 내 마음을 강하게 후려쳐서 무력감에 휩싸였던 듯하다 절망이 뭔지 배신이 뭔지 알고 싶다면 꼭 한 번 읽어 보시길 권한다. 이런 작품을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여자의 행실 어쩌고 저쩌고 훈장질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냥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를 한 증 높였다는 점에서 소설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소설과 어울리는 사자성어 인과응보, 무지몽매, 전전반측, 신부작족, 배은망덕, 토사구팽,구밀복검, 감탄고토
●인상적인 등장인물 에마: 뛰어난 미모와 매력을 지녔으나 바보 샤를 보봐리와 결혼한다. 아들은 원했으나 딸을 낳는다. 첫번째 애인 로돌프는 비열했고 두번째 애인 레옹은 소심하고 나약했다. 이런 멋진 여자가 왜 이런 애인들을 만나며 샤를 같은 우스꽝스러운 자와 결혼을 결심했는지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소설 속에서는 사치와 열정이 넘쳐서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백 번 양보해서 분별력과 매력은 다른 것이라고 인정한다하더라도 안타깝기는 하다. 사를 : 착하다 그러나 바보와 순진함의 차이를 모르는 자였다. 에마를 사랑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로돌프: 에마의 야비하고 무식한 첫번째 애인 레옹: 에마의 소심하고 나약하고 천박한 두번째 애인 뢰뢰: 포목상이며 에마에게 사치에 물들게 부채질을 하였고 빛의 덫을 쳐서 그녀의 파멸에 방 아쇠를 당겼다. 베니스의 상인 같은 자이다. 오메: 약제사로서 자본주의 체제하에 가장 출세할 자이다. 위선적이고 자신의 이득에 따라 철저한 계산 하에 행동한다. 그렇다고 뢰뢰같이 야비하게 부를 불리지는 않는다.
●인상적인 사건 에마가 법원 집행관들에 의해 압류당하고 그 압류를 풀기 위해 레용에게 부탁하나 레옹은 자신의 친구에게 부탁해 본다는 말을 하고 다음 날 세시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기다리지 말라고 한다.
공증인 기요맹을 찾아가나 그는 에마에게 몸을 탐하려 하고 에마는 사정하러 온 거지 몸을 팔러 온 것은 아니라며 거절한다. 그러나 곧 후회하면서 로돌프에게 달려 간다.
로돌프로 만나러 위세트로 출발했는데, 그에게 가는 것이 얼마 전 자신이 그토록 역겨워했던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라는 것도, 그리고 몸을 파는 것이라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였다.
로돌프도 지금 당장은 돈이 없다며 거절한다. 에마는 발 밑의 땅이 물결보다 더 심하게 출렁거리고, 밭고랑은 부서지는 거대한 파도처럼 느껴졌다.
약국으로 간 에마는 오메 몰래 쥐스탱의 앞에서 파란 병에 든 하얀 가루를 한 움큼 집어 입 속에 털어 넣는다.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진정되고 모든 의무를 다한 것처럼 평온해지기까지 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인상적인 장면 p456 한편 에마는 그 모든 배신과 비열한 행동, 자신을 고문하던 무수한 욕망도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더이상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어스름한 혼돈이 내려앉았다. 임종 직전의 에마의 심리
p454 지상의 온갖 영화를 그토록 갈망하던 그 눈에, 따스한 미풍과 사랑의 향기를 그토록 좋아하던 코에, 거짓을 말하기 위해 벌리고 교만으로 신음하며 색욕으로 울부짖던 입술에, 감미로운 감촉을 즐기던 두 손에, 마지막으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달려갈 때는 그토록 재빨랐으나 이제 다시는 걷지 못할 두 발바닥에 차례로 성유를 발랐다. 에마의 임종 후 장례식 준비
p428 그녀 안에서도, 그녀 밖에서도 모든 것이 그녀에게서 멀어져갔다. 길을 잃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속을 아무렇게나 떠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세시까지 오지 않으면 자기를 기다리지 말라는 레옹의 말과 시계가 네시를 쳤을 때 용빌로 돌아가는 길의 에마의 심리묘사이다.
p498 "이건 다 운명 탓이니까요?" 샤를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이 하기에는 지나치게 너그럽고, 나아가 우스꽝스럽고 비겁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에마의 죽음 후에 로돌프를 만나 샤를이 한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로돌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p406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고, 한 번도 행복해본 적이 없는 듯했다. 이런 삶의 결핍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녀가 의지하던 것들이 어째서 이토록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일까? 미소의 이면에는 권태로운 하품이 즈거움의 이면에는 저주가 쾌락에는 혐오가 최고의 입맞춤일지라도 더 큰 쾌락에 대한 실현할 길 없는 욕망만을 입술에 남길 뿐 아닌가 두번째 애인 레옹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며 느끼는 에마의 심리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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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삶에 대해 생각하게된다. 행복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야하는걸까? 라고 자문하게된다.
누군가로 인해, 또 어떠한 상황에따라 크게 좌지우지되는 삶이지만 나스스로, 내 마음가짐으로 행복은 두손에 잡힐수도, 손가락사이로 빠져나갈수도있다.
만약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 행복의 파괴역시 누군가로 인해 쉬워지지않을까?
에마는 아빠의 병을 치료하기위해 찾아오는 보바리에게 낯선 감정을 느낀다. 그 새로운 감정이 사랑이라 생각하지만 결혼으로 이어진 그녀의 삶은 행복으로 느껴지긴 커녕 그남자로 인한 삶의 무료함만이 불행으로 다가온다.
에마는, 보바리와 결혼이니 마담보바리는 결혼으로 인한 행복을 만들어가려는 노력보다는 보바리로 인해 행복이 마구마구 솟아나길 기대한게 아닐까? 사랑을 퍼부었을때, 그사랑이 응답해줄때, 느껴지는 행복함을 알지 못한채 내사랑을 퍼부어서 느껴지지않는 행복이라면, 그건 사랑을 흉내낸 그저 봉사이지않을까?
자신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한채 그저 동경하던 귀부인들의 삶, 소설속 연애담을 흠모하던 그녀 그녀만을 탓할수도없이 그녀를 마구 흔들던 남자 로돌프와 레옹. 그리고 그들과의 연애에서 또 채워지지않던 그녀의 행복은 결국 끊없는 사치로 이어지게된다.
소설의 마담 보바리가 아닌 보바리에서 시작되어, 보바리로 끝나지만, 제목이 마담보바리여서 그런지 자꾸 에마의 입장에서 소설을 바라보게된다. 아니면 내가 여자여서일까?
아마 세상 어느 여자라도 결혼에 대한 환상들은 가지고있을터이다. 헤어질때마다 아쉬워서 꼭잡은두손땀나게 두걸음 돌아가다 다시뒤돌아서 껴안기도해보고 밤을 지새워본적도 그러다 그런 시간들이 아쉬워 하게되는 결혼이아니던가.
그런데 막상 결혼생활은 어떠하지? 하지만그로인해 불평 불만들은 수없이 생겨나지만 그게 불행이라곤 하지않는다. 그로인해 내삶이 망가졌다고 하진 않는다.
정작 내 삶을 망가뜨리는건 현실의 결혼생활이 아니라 상상속 환상속 결혼생활을 계속 꿈꾸며 헤어나지 못할때 그때의 철없던 나의 상상이아닐까?
샤를 보바리가 로돌프를 마주하고, 하염없는 몽상에잠겨 그사내가 되고싶어하던 그 순간. 아무런 부질없는 그순간. 과연 그의 인생은 누구로부터 보상받을수있을까?
"이건 다 운명 탓이니까요!"이라 외치는 보바리가 로돌프와마찬가지로 우스꽝스러운건 나뿐일까?
행복을 거머쥘 준비가되었는가? 멀리 있지않다.
난 지금 아이의 아침을 차겨주고 그곁을지키고있다. 함께 책을 읽기도하고, 함께 눈을 맞추기도한다.
그행복이 사사로워 행복이라 느껴지지않는다면 아마 그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못할 마음 아니던가.
지금 내가 함께하고있는 행복에 집중하자.
그걸 일깨워준 마담보바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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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사랑이란 있기는 한걸까? 내사랑이 너의 사랑만큼, 너의 사랑이 나의 사랑만큼 같을때야 비로소 함께 행복하다. 온전한 사랑을 줄수없을때 그사랑은 기울어지는걸까?
그래도 사랑이다. 그런데..사랑은 대체 뭘까?
기대고픔 맘일까? 기댈수있게 꿋꿋하게 견디어주는맘일까? 아마 "서로" 기대는 맘이지 않을까?
똑같을수없는 사람 맘이기에 온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과 온마음을 다할수없는 사람은 행복할수가 없나보다.
그렇게 부족함을 느끼는 에마는 사치로 그 허전함을 채워나간다.
그녀는. 그는. 그순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 불행해질것이 뻔한데도...말릴수가없다.
소설의 마지막을 적어내려갈수가없다.. 너무나처절한 그녀의 마지막.
하지만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너무나 일상적인 시간이 소름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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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했던걸까? 어리석었던걸까? 순진했다고 믿고싶었던 그녀 에마는 로돌프의 속삭임에 단박에 무너져버린다.
시골처자 에마가 왕진의사 보바리를 만나 결혼하고,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한눈을 팔까 말까하던 그 찰나 등장한 로돌프의 한마디 이 한마디가 에마의 삶이 되어버릴줄이야....
정말 에마는 순수한 열정에 격렬한 쾌락을 위해 변덕을 부리는 어리석음을 행하고 마는가.
보바리와의 결혼생활에서 만족하지 못한 에마에게 그대가 찾아헤메던 보물이라고 속삭이는 로돌프. 심지어 세상의 통념과 도덕을 지켜야한다는 에마에게 보잘것없고, 진부한, 인간이 만들어낸 도덕이라며 반박의 여지를 주지않는다.
레옹의 보비에사르에서 춤춘 자작의 내음새를 잊지못하는 에마는 똑같은 바닐라와 레몬향이 나는 로돌프의 유혹을 결국 뿌리치지 못하는듯하다..
그런 에마를 아무렇게나 다루기까지하는 로돌프...그의 육욕의 습관에 길들여지는 에마가 걱정스럽기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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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한 공기가 모든것을 에워싸고 사물의 표면위를 흐릿하게 떠도는듯, 버려진 성안에 불어 닥치는 겨울바람처럼 슬픔이 그녀의 마음속으로 나직하게 윙윙....
한아이의 엄마가된 그녀가 저렇듯 우울감에 빠져있는 이유는. 그녀의 삶에서 유일한 기쁨이자 그녀가 행복해질 수있는 유일한 희망이였던 또다른 남자. 레옹이 주는 느낌이였으니..
이토록 비밀스럽지만, 이토록 표시나게 그녀의 삶은 빠르게 변화하고있었다. 몸은 여위고, 두뺨이 창백히지고, 표정은 우울해졌다. 갈망과 분노와 증오로 가득차는 그녀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저 내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있다 여기는 보바리.
해서 마담보바리의 분노와 슬픔은 점점더 커나가는데..
누구나 품는 환상속 세계. 그건 그저 환상일뿐이라고 이야기해주고픈 마담보바리. 그녀는 어디까지 걷게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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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에 대해 말하자면 자기 밖에 모르는 남편을 버리고 다수의 남성과 불륜을 저지른 데다 사치와 방탕을 일삼아 가산을 탕진했다. 몹쓸 여자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테지만 의외로 이런 인물의 계보는 길다. 어쩌면 석기시대에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매머드의 뼛조각으로 만든 목걸이를 갖기 위해 다른 남자의 동굴로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에마 보바리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다운 인간, 오히려 유구한 전통을 가진 종족의 후예다. 이 종족의 후손들은 지금도 일일 드라마에 자주 얼굴을 보인다. 우리는 이들을 멸시하지만 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왜 우리는 그녀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일까. 자극적이라서 그럴까? 확실히 우리는 똥이나 토사물, 훼손된 동물 사체 같은 것을 보면 끔찍해하면서도 거기서 눈을 떼지 못한다. 거기에는 단지 혐오만이 아닌 연민이 있다. 훼손된 동물 사체는 끔찍하면서도 불쌍하다. 그리고 똥이나 토사물은 더러우면서도 그것이 누구에게나 있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서 슬프다. 그렇다면 에마 보바리 역시 그렇지 않을까. 우리는 그녀와 우리가 조금도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그녀에게 공명하고 있는 것 아닐까. 매혹이라는 것은 결국 어찌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에마 보바리를 볼 때 우리는 그녀가 우리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는 그녀의 모습과 꼭 닮은, 자기 내부에 있는 그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떠올리고 마는 건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에마 보바리 스스로도 자기가 하는 행동들이 결코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 모든 행동은 그녀가 선택한 것이다. 누가 강요한 적도 없고 약점을 잡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처음 귀족의 무도회를 방문했을 때 자신을 사로잡았던 그 전율이나 로돌프, 레옹을 만나면서 느꼈던 감각적, 정신적 쾌락은 그녀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콘에 올릴 두 가지 맛을 고를 때처럼 고르지는 않았다. 기왕 나온 김에 아이스크림에 비유하자면 그녀는 처음에 그게 뭔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 그걸 먹게 되었다. 기분 좋은 서늘함, 매혹적인 끈적임, 혀를 사로잡는 단맛에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후로 그녀는 남의 눈을 피해 빚을 내서라도 아이스크림을 사먹기 시작했다. 이유는 하나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녀가 살아오면서 맛보았던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불륜이 나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치나 방탕, 허영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불륜은 모든 경우에 불륜이 아니며 사치도 모든 경우에 사치가 아니다. 불륜은 적어도 그 당사자들에게 어느 순간만큼은 사랑이고 어느 순간만큼은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이다. 죽어도 좋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우리는 열에 들떠 있을 때, 정신이 뜨겁게 타올라서 뇌가 익을 것 같은 흥분에 사로잡힐 때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이 올바른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그게 윤리적으로 옳은 일이든 아니든 그 순간만큼은 그 이상의 윤리적인 것은 없다. 사랑을 위해 왕을 배신하는 기사처럼 우리는 거기서 정당성과 순결을 느낀다. 그것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발견한 적이 없는 삶의 정수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위해서라면 말 그대로 죽어도 좋다고, 자기 자신이 파괴되어도 상관없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에마 보바리의 행위는 불륜이지만 그 근간에 있는 것은 열정이다. 모든 사람이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에 한해 말한다면 나는 단 한 번이라도 모든 것을 불살라버리는 열정에 빠져들어보고 싶다. 우리가 아름다운 이성이나 돈에 열광하는 이유도 결국은 그것이 불꽃이라서가 아닐까. 삶이라는 마른 장작을 뜨거운 불길로 만들어줄 불꽃. 미디어를 통해 쏟아지는 불꽃들은 화려하지만 다 쓴 라이터의 마찰열처럼 반짝이기만 할 뿐 우리를 타오르게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디어가 우리를 사로잡는 이유는 그것이 이제까지 우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사소한 문제들을 한 방에 잿더미로 만드는 우리 안의 불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 불을 떠올릴 때 돈이라든가 건강이라든가 이제까지 인생의 한복판에 들어앉아서 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잡동사니들은 겁을 집어먹고 후다닥 자리를 비킨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밤새 글을 쓰는 작가도, 공연을 하는 배우도, 꿈을 위해 시련을 견뎌내는 모든 이들은 아마 그 불이 없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열정은 반드시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타올라주지 않는다. 학생이 공부에 열정이 생기고 직장인이 업무에 열정이 생기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열정은 뜬금없는 일, 이를테면 멀쩡한 사십대 가장이 난데없이 여장에 꽂히는 것처럼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기도 한다. 에마 보바리도 그렇다. 그녀의 열정이 남편과의 사랑이 아니라 은밀한 연애에 생겼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녀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어쩔 수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에마 보바리를 볼 때 느끼는 연민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에게는 삶을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데려가면서도 우리 스스로 가속 페달을 밟게하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 우리는 에마 보바리를 보면서 그것이 삶을 어떻게 들뜨게 하는지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추락시키는지를 본다. 에마 보바리가 환희에 젖을 때 우리가 느끼는 혐오는 열정을 가지지 못한 자의 질투이며 에마 보바리가 파멸을 향해 달려갈 때 우리가 느끼는 쾌락은 안전한 곳에 있는 자의 안정감이다. 에마 보바리의 최후에서 우리는 일종의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는데 그건 바로 마지막 순간까지 사과하거나 잘못을 비는 대신 내면의 불길에 산화하기를 선택한 인간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감정 때문이다. 거기에는 끝까지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던 인간에 대한 동경과 그렇게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슬픔이 복잡하게 섞여 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3부에서 에마와 레옹이 성당에서 만나는 장면이다. 성당에는 에마와 레옹 외에 한 인물이 더 등장하는데 그는 다름아닌 늙은 성당 안내인으로 귀찮아하는 레옹을 끝까지 따라다니며 성당을 안내해주려고 고집한다. 이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짤막한 에피소드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각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에마와 레옹은 자기가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서로 충돌하는 인물들이다. 에마는 유부녀인데 바람을 피우려고 하고 있고 레옹은 미혼이지만 유부녀를 유혹하려고 하고 있다. 반대로 늙은 성당 안내인은 자기가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일치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여기서 인간처럼 보이는 것은 성당 안내인이 아니라 에마와 레옹이다. 내부에 모순이 없는 성당 관리인은 고장난 키오스크처럼 보이는데 반해 모순 덩어리인 에마와 레옹은 생생히 살아있다. 나는 여기서 그런 생각을 했는데 바로 인간다움이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을 포기할 때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정당한 것은 아니다. 위험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 다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역동성이 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고 피가 혈관 속을 거칠게 뿜어져 나오는 것이 느껴진다. 안타까움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열정은 정당하지 않은 꽃을 피우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 꽃을 꺾을 용기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자기 자신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대부분을 에마가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구성 상으로 볼 때 이 소설은 샤를 보바리의 전기에 가깝다. 이 소설은 샤를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중간에 에마의 이야기가 나왔다가 마지막에 다시 샤를의 이야기로 끝난다. 이 구성은 샤를이라는 사람의 한복판에 에마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마음이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열정에 매혹당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우리는 누구나 샤를처럼 이웃에 다정하고 자기 할 일을 성실히하며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만 마음 한복판에는 자기 자신을 하얗게 태워버릴 불의 자리를 비워두고 있다. 플로베르는 이 소설을 썼을 때 에마 보바리는 바로 나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는데 그건 바로 이 불길, 즉 열정에 대한 이야기였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특별히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는 것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뭔가 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도 그것이 정당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만두게 된다. 내면의 충동, 어쩌면 열정을 일으킬 지도 모를 불꽃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다.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참았다고 생각한다. 모두들 참는 거라고, 참지 않는 사람이 이상한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한편으로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정은 과연 참을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정말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정화시키는 불이라면 나의 의지로 그것을 조종하기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참았다는 것은 견뎠다는 말이 아니라 화력이 약했다는 뜻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 존재하는 에마의 후예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것은 타락한 것이고 잘못이고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불이 있다. 올바른 것과 올바른 것을 가리지 않고 살라버리며 매혹하는 불. 우리가 눈을 뗄 수 없는 것은 어쩌면 그 불 때문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