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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지만 읽어내야 하는 기독교 비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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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불편했다. 기독교의 진리를 다시 재고해 보아야 한다는 저자 옥성호님의 논리적인 주장에 반박할 수 있는 정확한 이론적 근거가 내게 없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기독교는 이성적인 종교다. '무조건 믿어라'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종교가 아니다. 마술과 같이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위한 종교도 아니다. 돈을 벌게 해 주거나 출세를 위한 도구로 전락한 기타 다른 종교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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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불편했다. 기독교의 진리를 다시 재고해 보아야 한다는 저자 옥성호님의 논리적인 주장에 반박할 수 있는 정확한 이론적 근거가 내게 없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기독교는 이성적인 종교다. '무조건 믿어라'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종교가 아니다. 마술과 같이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위한 종교도 아니다. 돈을 벌게 해 주거나 출세를 위한 도구로 전락한 기타 다른 종교도 아니다.


기독교는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 종교다. 문제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이다. 저자 옥성호님은 유대교의 경전인 히브리 성경만이 '진리'가 담겨진 책으로 여기고 있는 듯 싶다.  구약과 신약 성경 모두를 근거로 하고 있는 기독교의 왜곡된 면을 부각시키며 기독교의 신약 성경인 마태복음에서 언급한 마리아의 처녀 잉태설 조차도 냉정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의 탄생과 족보를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보면  마태복음의 저자가 과장된 진술을 하지 않았나 의심을 나타내고 있다. 인구조사를 위해 베들레헴에 간 것이 사실인지, 예수의 출생 시기도 정확하지 않다는 점을 예로 들고 있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삼위일체'도 부정하고 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불편하지 않을 수 없는 책임에는 틀림이 없다.


한 가지 더, 저자 옥성호님은 신약 성경의 주요 저자인 바울에 대해서도 불쾌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바울이 쓴 편지에서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그가 편지에서 인용한 구약 성경(히브리 성경) 구절이 맥락이 많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억지로 끼워 맞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한다.


"전체 맥락과 상관없이 히브리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낮에도 등산객이 거의 없는 첩첩산중에 24시간 편의점을 내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217)


히브리 성경을 신뢰하고 있는 옥성호님의 책에서 언급한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스스로 힘으로 죄를 이기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 받을 수 있는 존재다"(70)


"히브리 성경의 하나님은 순종의 대상이었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109)


일부 기독교인들의 이기적인 믿음의 동기를 보면서 저자 옥성호님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행동이 없는 거짓된 믿음의 모습을 보며 성경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실망이 클 수도 있겠다 싶다. 차라리 믿음이 없어도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더 낫게 보일 수 있겠다 싶다. 유대인들은 지금 살아가는 이곳에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소망하는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동경하며 현재의 아픔과 어려움을 이겨내고자 한다. 


저자 옥성호님의 기독교를 향한 비판에 귀를 기울이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의 주장이 불편하다고 해서 마냥 책을 덮기보다는 꼼꼼히 따져보며 스스로 돌아보아 반면교사 삼을 필요가 있다. 오래전부터 기독교를 향해 날카롭고 건전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저자였기에 이번 책이 독자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만 귀를 닫고 믿는 맹목적인 신앙보다는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여 신앙을 재점검해 보는 것은 의미가 크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가치를 절하하고 싶지 않다.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자세를 생각해 본다. 성경을 연구하려는 열심과 폭넓은 독서를 통한 균형잡힌 삶의 태도 말이다.

c*******9 2019.04.03. 신고 공감 5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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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이 아니라 영원한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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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신심 돈독한 그리스도인 중에서는 이 책 첫 장을 펼치자마자 사탄의 목소리라 느끼며 바로 덮어버릴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의 기본 전제를 부정하는 면도 없지 않다. 분명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를 아전인수 식으로 편집해 만들어졌다는 논지가 있다. 그리스도교가 이른바 계시,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성립되었다고 믿으면 경악을 금치 못할 수도 있겠으나,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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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신심 돈독한 그리스도인 중에서는 이 책 첫 장을 펼치자마자 사탄의 목소리라 느끼며 바로 덮어버릴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의 기본 전제를 부정하는 면도 없지 않다. 분명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를 아전인수 식으로 편집해 만들어졌다는 논지가 있다. 그리스도교가 이른바 계시,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성립되었다고 믿으면 경악을 금치 못할 수도 있겠으나, 어떤 종교도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실 종교야말로 편집의 결정체다. 예수를 신으로 고백하는 같은 그리스도교에서 다양한 교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미 편집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자신의 편집을 정통이라 우기고, 다른 편집을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형국이다.

준모태 그리스도인인 내 입장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주장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모든 종교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내세나 구원 개념이 없던 유대 민족에게 그러한 개념을 생겨난 것은 분명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페르시아가 억압받던 유대민족을 해방시켜주었고, 그 페르시아의 종교가 조로아스터교였으니 그럴 만하다. <신의 탄생>이라는 책을 보면, 한 가톨릭 신학자는 그리스도교와 조로아스터교의 깊은 관계 있음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는 그러한 유대교를 편집하고, 또 훗날 이슬람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편집해서 성립한다. 이슬람이 어떤 그리스도교를 편집했을지는 매우 흥미롭고 궁금한 대목이다. 혹자는 이단으로 몰렸던 아리우스주의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을 슬쩍 보기도 했는데, 다양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게 공감하는 대목이 원죄론이다. 초등학교 때 첫영성체 교리 첫 시간에 가톨릭 교리의 구원 여정을 설명할 때도 원죄 교리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 원죄론이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부터 있지 않고, 아우구스티누스 때부터라는 이야기는 훗날 신학을 전공한 지인에게서 들었다. 원죄론을 비교적 충실하게 받아들였던 시절에 의문이 하나 있었다. 만약 하느님이 자신의 아들을 대속의 희생양으로 삼아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시켰다면, 유다야말로 배신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심부름꾼 아닌가.

책을 쭉 읽어가다 저자가 아리우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사실 지금 거의 모든 그리스도교는 아타나시우스의 승리를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수많은 그리스도교의 지류가 자잘한 교리적 차이가 있음에도, <니케아 신경>은 공유한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아리우스의 입장에 더욱 공감이 간다. 하느님 보기에 너무도 사랑스러웠던 한 인간, 그가 결국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 오히려 그렇게 이해할 때 예수가 우리에게 더욱 가깝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예수를 신으로 고백할 때 고개가 갸우뚱해지는데, 아리우스의 입장에 선다면 그럴 여지가 생긴다. 심정적 아리우스주의랄까.

저자는 구약, 철 지난 약속이 아니라 영원한 약속이라 한다. 그래서 굳이 구약이 아니라 히브리 성경이라는 표현을 쓴다. 히브리 성경이 구약으로 재구성됨으써, 유대교에서 이야기하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소멸되어버린다. 에덴 동산 이야기가 갖고 있는 인간 성장의 메시지, 유대교의 현세 중심성, 사탄보다 훨씬 위대한 인간, 나약하지 않고 스스로 책이질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 등. 사실 이러한 대목은 그리스도교가 쇄신되면서 제기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굳건한 신앙이 반드시 도그마에 대한 충실함일 필요는 없다. 조금만 서양사를 들여다봐도 12월 25일이 예수가 탄생한 날이 아니라, 조로아스터의 분파인 미트라교의 축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경에 대한 축자적 믿음이 지구 나이 6,000년이라는 코메디를 낳는다. 도그마의 불완전성에 대한 이해 결핍은 성경에 대한 축자적 믿음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도그마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천의무봉의 편집 과정을 거쳐 고도로 숙성된다.

저자의 기본적 논지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이 스며 있다. 이제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가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교는 어쩌면 재편집과 재숙성의 과정에 직면했는지 모른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 그렇게 읽힌다.

l********r 2018.12.03. 신고 공감 5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