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사회의 언어가 점점 더 노골적이고 파괴적인 악담으로만 채워지고 위협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렇듯 광장은 오염되어 공적 담론이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정책과 제도와 법규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심각한 정치적 교착상태로 빠져들게 하고, 해결되거나 준비되어야 할 이 사회의 제반 현안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그 고통을 고스란히 시민 대중들이 감수하여야 하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고 있다.
정책안이 제시되면 그 사안에 대한 심층적이고 비판적인 논의가 아니라 정책 제안자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본질을 호도하여 대중의 관심을 정책안으로부터 차단시키는 프로파간다의 흥미로운 쇼 무대로 변질시킨다. 이제라도 시민 대중들은 프로파간다와 당파주의라는 폭력으로부터 '광장'이라는 공유지를 보호하기 위해 깨어나야 한다. 이 책은 바로 이 노력을 위한 실천적 산물이다.
이렇듯 광장이 오염된 것은 '상대방'의 사악함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하는 대화, 즉 상대에 대한 혐오와 불신을 품고 하는 논쟁이란 사실 참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의 근원을 다른 누군가라 생각하는 한 해결책을 찾을 가능성은 사라진다. 서로 상대의 말에 귀를 닫은 상태이니 해결책은 커녕 문제의 이해조차 불가능할뿐아니라 오직 상대를 거꾸러뜨리거나 의도적인 비방, 왜곡된 정보로 당해 문제의 본질을 혼란시키려는 분열이 획책되기까지 하는 양상을 낳을 뿐이다.
상대방을 적화(敵化)하는 것은 '나는 문제가 없고 문제도 내 책임이 아니라는 자기 정당화를 마련해'주니 차이에 대처하는 안락하고 유혹적인 방법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 해결과 창의성의 공간을 차단하고 갈등과 분열을 심화시킬 뿐이다. 우리는 지금 앞으로 나아가려면 호감도 신뢰도 없는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하는 난관에 봉착해있다. 시민 대중을 볼모로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만을 위해 공적 담론의 장을 피폐화시키는 작금의 상황을 방치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한국 사회에는 언젠가부터 진정한 담론(dialogue)의 장은 사라지고 상대 생각의 약점을 찾아 승리하는 싸움인 논쟁(debate)만 성행하며, 그나마 남아있는 이 공간은 상대에 대한 욕설과 모욕, 주장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으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 추악하고 역겨운 현장이 되어버렸다. 상대의 생각에서 강점과 가치를 찾으려는, 협력을 기울여 공익을 도모하는 활동의 장인 공공 담론의 장을 복원하여야하는 것은 이 땅의 정치배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시민 대중의 삶이 우선되는 사회를 이루기 위한 긴급 현안이리라.
1. 담론의 장을 황폐화시키는 우리는 누구인가?
1-1. 옹호의 덫 오늘 우리는 극단적인 사고(思考)의 양극화를 목격하고 있다. 어떠한 공통된 이해나 사고 방식을 공유하지 않기에 전형적인 공적 담론 모델은 모든 논의를 왜곡하기 일쑤이다. 서로 자신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본다고 생각하며 이를 결함으로 인지하지 못한다. 이러하다보니 확실한 증거를 마주하고도 기존 신념을 고집하고 닫힌 사고로 자신만의 믿음, 일종의 망상 속에 안주한다. 그리곤 자신과 같은 믿음을 지닌 무리와 '도덕적 매트릭스(moral matrix)'라는 위험한 덫에 갇혀 기존의 신념을 강화, 고착화한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인식(태도, 생각, 믿음, 의견 등)이 심리적으로 충돌할 때 이 긴장상태(불편한 감정)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인지 부조화'라는 심리적 기제가 작동하여 자기기만 방식으로 불안감을 해소한다. 나아가 이 불편한 감정을 회피, 부인하기위해 자기 합리화를 통해 기존 판단을 고수하며 수구화된다. 진리에 반동적인 태도가 고착화되는 것이 우리네 인간이란 것이다.
더구나 세월이 흘러 이러한 판단 고착에 시간, 돈, 노력이 투입되게되면 '노력 정당화 현상'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여 매우 강력한 자기 정당화 기제를 발휘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신의 의견과 반대되는 메시지가 인지되면 즉각적으로 '인식 내재 편향'이라는 심리적 반응으로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는 정보나, 동류의 무리를 찾으려 하며, 동시에 해당 정보를 반박하고 왜곡, 외면한다. 여기에 자신이 속하고 있는 경제적, 이념적 요구가 더해져 고착 경향은 더욱 강화된다. 진지한 논의가 불가능한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며, 어떠한 협력이나 해결이란 아예 물 건너간 형국이 되고만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들이고 우리네 사회이다.
1-2. 문화적 인식이론
에일大 법과대학원 교수인 '댄 카한'은 "사람들은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결정하는 가치들에 순응"한다며 '의도적 합리화(motivated reasoning)'와 '확증 편향'이란 심리적 속성을 통해 '문화적 인식이론'을 설득력 있게 전개했다. 즉 "자신의 정체성를 위협하는 정보를 거부하는 것인데, 정확한 믿음보다는 자신만의 특정한 목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왜곡 처리하려는 무의식적 경향"과 "자신의 믿음과 충돌하는 정보를 무시하거나 내치고 자기 믿음을 확증하는 정보에 매달리는 경향(79쪽)"이 사실과 증거를 바탕으로한 논증의 전개를 무익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처럼 부패한 문화적 연결망이 인간의 이해와 판단에 심중한 영향을 미치다보니 양극화된 사고 집단의 충돌, 갈등, 혐오, 증오의 양상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리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들이 "믿음(신념)이라 이해하는 것이 '의지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82쪽)"을 알려준다. 아마 다음의 문장은 이러한 현상에 대한 간결한 설명이 되어 줄 것 같다.
이것은 난무하는 허위 정보와 가짜 뉴스가 그토록 활개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러다보니 이런 현상을 잘 알고 있는 정치꾼들과 장사꾼으로서 자기 이익에 매몰된 언론 매체들은 거짓 정보와 논점 흐리기, 도덕적 공포와 분노를 자극하는 전술을 이용하여 여론을 조작하고, 건강한 공적 담론 세계를 말살한다.
2. 양극화 사고를 이용하는 파괴적 전술의 세계
파리 정치大 교수인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는 이 물음은 고려할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못 박는다. 오늘의 문제 해결책은 사실을 바로잡거나 치장된 수사(언변)로부터 진실을 가려내는 데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현실은 신중한 조사와 탐구를 논의의 근원으로 하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투여되는 노력(시간)을 기울일 여유가 없기도 하거니와 "사물과 사안이 이전 어느 때보다 훨씬 다양하고 불확실하며 복잡하고 폭넓으며 이질적이고 위험하기까지"한 객관성의 개념이 급변하는 거대한 변화의 시기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투명하고 확고부동한 사실, 그 증거를 제시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또한 정치의 언어란 "사실 문제가 논의나 대화를 촉진하기보다는 단지 '논쟁 도구'로 사용될뿐, 증명이 필요없는 무기쯤으로 여긴다"고 지적한다. 결국 오늘날 순수한 증거(사실)만 가지고 광장에서 제대로 된 기초를 놓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러한 니전투구(泥田鬪狗)의 양상을 보이는 정치적 현실에서 이견의 여지가 있는 진실이라는 낡아빠진 개념을 걷어차고 그 대신 '관심 문제(주장)'를 비교하는 관점을 지녀야 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인지 부조화, 확증편향, 자기 합리화 등 타고난 어리석음에 기초한 시민 대중의 무지라는 고질적인 함정이 있으며, 게다가 우리들은 관심 문제를 다루는 법을 배운 적도 없다. 언론 철학자인 '월터 리프먼'이 『환상의 대중; The Phantom Public』에서 지적하였듯이 대중이란 "연극 2막에 늦게 도착 했다가 (...) 연극이 끝나기도 전에 떠나면서 누가 착한 역이고 나쁜 역인지 성급하게 판단하는 관객과 같"으니 말이다. 이러한 대중의 무지를 '고의적 무지' 혹은 '문화적으로 유도된 무지'라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발설되는 정치적 언어에 관심과 이익의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하여야 하고, 상대의 주장에서 강점을 찾기 위해 자기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적극적인 앎의 인식 없이 이러한 무지에 기초한 줄서기의 태도는 우리네 삶의 위기를 스스로 불러오는 비극적 현실이 되고만다.
2-1. 여론조작, 그리고 프로파간다
오늘 한국사회의 미디어 매체는 KBS와 MBC, EBS 세 개의 공중파 방송을 제외하고는 모두 민간, 혹은 종교집단이 운영하는 기업이다. 기업이란 자신의 이윤을 저해하는 그 어떤 행위도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집단이다. MIT大의 명예교수인 언어인지학자 '노엄 촘스키'는 따라서 "이들에게 사회적 이익에 대한 책임을 기대한다는 것은 넌센스"라고 지적한다. 이들 미디어들은 자기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틀잡고 왜곡하는 주체가 되어, 대중을 조종하는 부패한 형태의 레토릭을 널리 퍼뜨리는 등 여론을 조작하는 '프로파간다 생성의 핵심 기구'로서 대중의 시민적 연대를 분열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를테면 미국 극우 성향의 미디어인 FOX 뉴스 경영자의 "우리가 흘리는 정보가 사실일 필요는 없지, 사람들이 믿게만 만들면 되니까!"라는 말에 이 모든 현실을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2. 낙인찍기, 프레임 씌우기
미국 정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수법으로 최근까지 한국의 검찰 집단이 모방하여 사용한 것인데, 반대 세력, 자기 공격 행위로 간주되는 정책을 부정한 집단, 또는 무능한 정책으로 몰아 붙이기 위해 정책 발안자(그 대표자)를 국가 안전(국방),경제를 훼방놓는 적대자, 비윤리적 인물로 낙인 찍어 "먼지 한 톨이라도 찾아낼 때 까지 뒷조사(158쪽)"하며 보복하는 것이고,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기업인 미디어들은 이러한 행위에 가세하여 조작 여론을 형성하고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여 분열의 씨앗을 꼼꼼히 심는다.
사람들의 공포와 탐욕과 분노를 이용하는 면에서 이들은 탁월하다. 대중은 이러한 부정성에 현혹되어 열중하고 반복된 고의적 정보 혼합과 소음으로 진실의 분별이 불가능하게 된다. 민주주의를 위기로 모는 획책임에도 대중은 분별력을 이미 상실하고 분열된 상태이기에 이들 기업인 미디어 매체들과 이를 이용하는 정치 집단은 변화를 위한 많은 정책적 노력을 저지하고 현상 유지라는 수구적 성과를 얻는다.
한편, 세계를 해석하거나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비유 혹은 인식론으로서 반복된 언어 이미지를 통해 잠재 의식속에 각인시켜 어떤 특정 언어를 말할 때마다 이미지를 활성화시키는 수법을 프레임 씌우기라 한다. 아마 '빨갱이'같은 적대적 이미지는 그 대표적인 프레임이라 할 것이다. 요즘들어 '일자리 창출'이라는 프레임이 수구집단에서 활성화시키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말이 나오면 기업 세금 감면이나 기업 보호를 위한 정책과 자연스레 연결되어 이와 관련된 어떤 이의도 부정적인 것으로 그 목소리를 아예 잠재우는 수법이다. 이밖에도 근거없는 혐의 제기, 의미 곡해, 대중적 신뢰를 무너뜨리기 위한 단어의 악랄한 악용, 반복 의미 주입으로 정신 교란상태를 이용하는 가스 라이팅(gas-lighting) 등 상대의 목소리를 침묵시키기위한 무수한 전술들이 바로 지금의 현실에서 활용되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상대의 논리가 아니라 메신저(상대방)를 겨냥한 비방이 효과적으로 먹히고 있기에, 소위 미디어 매체를 기웃거리는 담론 장사치들이 활황을 맞이하고 있다. 미학한다는 자, 기생충 연구한다는 자, 과학 저널리스트라 떠벌리는 자, 산부인과 의사라는 자 등등 담론 권력을 얻은 자들이 자신들의 질투심과 이익을 위해 공익 담론의 장인 광장을 시궁창 냄새가 진동하는 몹쓸 곳으로 훼손하고 있다. 사실 이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서슴치 않고 왜곡과 조작, 상대를 향한 모욕과 증오의 폭력적 언행들을 뱉어내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행세도 하고 싶고, 돈도 벌고 싶은 욕망이야 무엇이라 하겠는가?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는 진실 왜곡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다는 것이 진정 문제라는 것이다. 이 사회를 극단적으로 양극화시키는 그 혐오와 증오의 분열을 만드는 악의적 씨앗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3. 결어-시민 대중의 역할과 이해
민주주의는 시민 대중이 얼마나 중분한 정보를 가지고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가에 달려있다. 사실 감기든 아이 돌보랴, 대출금 갚으랴, 하루하루 정신없이 살아가는 시간 부족의 삶 속에서 불평등, 양극화, 보편적 기본소득, 디지털 프로파간다, 지구 온난화니 하는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깊이있게 생각하고 정치적 과제나 논의를 제기하고 참여한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어렵거나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역겨운 오물 냄새가 진동하는 광장에서 서로들 진실을 말한다고 할 때 그것들에서 진실을 판별한다는 것은 무책임하거나 왜곡된 편협성의 옹졸한 줄서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대중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린 적어도 고의적 무지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최소한 "이데올로기의 영향, 여론 조작, 자기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미디어, 비판적 사고 능력을 훈련 받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지식이 구축되는 방식에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사회 기득권 계층은 대중의 인식이 높아지는 일을 위협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계속해서 이들의 형편없는 무책임성과 곡해를 방관 할텐가? 특정한 정보에 갇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지금과 같은 폐쇄적 인식은 우리를, 우리가 함께하는 사회를 그저 퇴행시킬 뿐이다. 지금처럼 오염된 정치 담론의 장, 진정 필요한 공적 담론이 설 수 없는 상황의 외면, 옹호, 방치가 계속된다면, 이 혐오와 분열의 정치 문제를 해결할 길을 찾지 못한다면, 상대방 의견에서 건설적 반대의 길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가 맞닥뜨린 사회적 문제에 결코 제 때에 답을 내놓지 못할 것이다. 그 고통은 기득권을 지닌 계층이 아니라 바로 대다수인 시민대중, 우리들이 겪어야 할 몫이다. 그 때 누굴 원망할 것인가?
분열이 점점 극단화될 때 협력하라고 국가 갈등 해결의 전문가인 '애덤 카헤인'은 말한다. 대립적인 사회 정책 문제에서 하나의 토대를 찾으려는 것은 문제의 본질상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다원적인 사회에 반론의 여지없는 공익이란 존재하지도 않을뿐아니라 최적 해결책이란 것은 있을 수도 없다고 지적한다. 상대를 바꾸려 할 것이 아니라 열린 태도로 자신의 방식, 태도, 사고를 바꾸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서로 통제하려하지 않고 전진하기 위한 협력의 장소, 건전한 도덕적 담론과 정책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광장을 재정립토록 정치인들을 종용하여야 한다. 이대로면 진보도 수구도, 여도 야도 다음의 선거에는 존재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대중들이 보내야 한다. 상대방의 진실성을 공격하고 약화시키려는 목적에만 비상한 열정을 보이는 비열하고 분열적인 언어가 자리 잡을 수 없는 풍토를 대중이 만들어 내야 한다.
'제임스 호건'의 이 책은 기후변화에 대한 환경 보존론자로서 진실이 통하지 않는 세계를 규명하기 위해, 나아가 건강한 담론 세계의 구축을 통한 인간 삶의 개선을 위한 치열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훼손된 광장을 되살려내기 위한 혜안으로 가득하다. 교착상태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오늘의 분열된 우리 정치 현실의 타개를 위해 우리 시민 개개인은 물론 담론의 권력을 지닌 모든 이들이 꼭 읽어 주었으면 하는 그런 역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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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요즘 공적인 대화가 왜 이렇게 지치고 소모적인지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광장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그 안의 공기는 탁해졌다는 표현이 딱 맞는다. 사실보다 감정이 앞서고, 토론보다 공격이 쉬워진 현실이 낯설지 않았다. 이 책은 누군가를 비난하기보다, 우리가 어떤 환경 속에서 말하고 듣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읽고 나니 뉴스를 소비하거나 댓글을 볼 때 한 발짝 물러서게 된다. 광장을 깨끗하게 만드는 일은 거창한 행동보다, 내가 어떻게 말하고 판단하는지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오래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