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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볼때 그냥 내느낌으로 먼저 보고 해설을 들으면서 보게 되면 완전 새로운 그림을 만나게 되는데 이 책이 바로 그런 느낌이다. 어떤 그림은 그냥 보는 것만으로 힐링이 되는가 하면 어떤 그림은 보는게 괴로울때가 있다. 특히 그림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알게 되고 더 좋아지는 그림이 있는데 이 책은 그림에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으로 마치 미술관 해설을 듣는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 큰 고통마저 녹이는 불, 깊어가는 저녁, 깊어가는 겨울에도 꺼지지 않는 내면의 불을 지닌 이들이 있습니다. 고통은 이들에게 이 불을 끄는 찬물이 아니라 불을 더 타오르게 하는 기름이 됩니다. p47 밀레의 만종 그림은 어두운 농부의 기도하는 모습과 그 뒤로 환상적인 노을이 대비가 되어 보는 순간 먹먹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저 농부의 일과의 마지막 순간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그림이려니 하는 생각을 했다면 그림속에 숨겨진 진실을 듣고 완전 다른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기도하는 농부 앞에 놓인 바구니에 놓인 것이 원래는 아기의 시신이었다는 이야기에 그동안 나는 왜 이 그림이 그렇게 먹먹했는지 이제서야 깨닫게 된다. 깊이 머리 숙인 부인처럼 머리를 숙이고 두손 꼭 모아 부부와 함께 기도하게 되는 순간이다. 뭉크의 절규를 보면 정말 어느 공포영화 못지 않은 얼굴 표정과 흐물거리는 배경과 뒤따라오는 두 사람의 정체가 저승같아 보인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절망이랑 희망이 없으면 그려 낼 수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에 새로운 눈을 뜨는것 같다. 절규라는 절망속에서 희망을 찾아 내는 글을 읽으며 나 또한 그림속에서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의 가닥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뒤집어 보게 되는 놀라운 현상이다. 살아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정신마저 온전치 못해 병원 신세를 지고 죽어서도 가족 무덤에 묻히지 못하는 처절한 삶을 살다갔지만 그와는 정반대의 희망의 그림을 그려낸 고흐, 그의 노란 해바라기 그림을 특히나 좋아하는데 그림속에 숨겨진 의미를 해석하는 사람들에 따라 그림이 달리 보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노란빛이 특히나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이 해바라기 그림은 정말이지 살아 움직일거 같은 생동감이 느껴지는데 그만큼 고흐는 자신의 삶이 너무도 절망적이지만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외국의 그림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그림과 함께 그림속에 담긴 숨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시 한편으로 마무리를 짓는 참 낭만적인 그림 해설책, 이제는 어디서건 그림을 보면 그 그림속에 숨은 뜻을 먼저 찾아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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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요세파 수녀의 <그림이 기도가 될 때>는 그림을 통한 묵상이 담겨있는 책이다. 수녀님이 계신 곳은 봉쇄수녀원으로새벽 3시 30분에 기상, 저녁 8시까지 기도, 독서와 노동으로 채운다고 한다. 그토록 거룩한 곳에서 읽고 쓰는 행위가 지속된다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과 그림이라는 추억의 매개가 이 책을 읽고 싶게 만들었다. 물론 제목에 드러나듯 종교적인 부분이 강하지만 자신의 양심과 명상의 방법으로 이 책을 읽어도 좋은 이유를 감상에 더해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우리가 익히 아는 화가들의 작품이 자주 등장 해 학교에서 배운 내용, 졸업 후 사회에 나와 제발로 전시회에 찾아가 마주한 그림의 감상은 같을 수도 있지만 좀 더 벅차거나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밀레의 <만종>이란 작품을 노동 후에 감사와 고뇌가 담긴 숭고한 작품으로 배웠다면 사실 부부 앞에 놓인 농작물은 죽은 아기였다고 한다. 한 아이의 엄마로서 작품의 실제 이야기는 충격이며 애끓음그 자체였다. 어떤 마음으로 저렇게 서 있는 것일까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고통의 승화를 예술가들의 전유물처럼 여겼던 내게 참된 부모와 스승이야 말로 매일 매일 고통을 승화하여 자녀와 제자에게 전해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가하면 뭉크의 <절규>는 어떤가. 지독한 어지러움과 소리마저 삼킨 절망이 두 귀를 막아버리게 만든 것 같은 이 작품을 보고 저자는 놀라운 해석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절망을 뒤집어보면, 이렇듯 깊디깊은 절망은 희망을 보지 못한 사람은 그려낼 수 없지 않을까요? 81쪽 크게 절망할 수 있는 것이 결국 희망을 알기 때문이라는 말에 과거의 나를, 지금의 나의 절망을 생각해본다. 찬란했던 순간을 너무 잘 알아서 그렇게 울고 불고 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절망적인 순간에 희망을 찾기란 너무 어렵다. 이에 저자는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절망이라고 강조한다. 카라바조의 <나르키소스>작품은 미소년이 물에 비친 추한 모습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안과 밖의 다름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추한 모습도 결국 내 모습이며 이를 억지로 떼어내거나 잊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삶이야 말로 진정한 삶이 아닌가라며 이야기한다. 추함의 역사와 현재을 굳이 논하지 않더라도 누구에게나 외적 혹은 내적 추함은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끝으로 평소에 묵주기도를 통해 자주 접했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 이유는 코로나시대의 사회적거리두기로 이전과 같은 대면만남이 어려울 때 필요한 단상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 전에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의 사정을 생각해보면 신실한 믿음으로 견뎌낸다지만 주위의 따가운 눈초리와 수군거림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마리아가 임신 하기에는 이미 나이든 엘리사벳의 임신 소식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 마찬가지로 임신은 하였지만 남편 즈키르야의 침묵과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그 불안과 두려움속에서 마리아의 소식 또한 큰 위로와 응원이 되었을 것이다. 두 여성의 만남은 '복받은 이'라는 신에 대한 감사로 채워진다. 개인의 노력이나 저 혼자 받은 축복이라는 교만이 아닌 겸손과 감사의 나눔만 가득한 만남이 그리운 사람이라면 분명 이 작품을 마주한 순간 마음이 뜨거워졌으리라. 이외에도 읽는 동안 나의 잠재된 폭력성, 억울하다는 심정의 참모습을 깨닫는 등 알지 못하거나 못본 척 했던 나를 맞 할 수 있어 좋았다. 특히 그림을 배워온 정보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좀 더 다양한 시각으로 감상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운 것 같아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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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행인을 붙들고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떠니 하는 등의 행위를 하는 사람은 아마 지구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 책 "그림이 기도가 될 때" 는 그림 앞에 서면 눈이 환해진다는, 침침했던 눈에서 무언가 걷히면서 새로운 광명의 세계를 만나는듯 한 느낌을 얻는다는 장요세파 수녀의 그림에 대한 감상을 넘어 그림이 그녀의 종교적 신념과 기도를 연결시키는 주체로서의 목적성을 가지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전해주며 우리에게도 그러한 의미의 그림 감상에 대한 이해를 독려하는 책이다. 글과 그림으로 이루어진 조화는 글만 따로, 그림만 따로 떼어 놓고 읽고, 보는 경우와는 그 느낌과 살가움이 무척이나 다르게 전해진다. **네이버 카페 책을좋아하는사람의 서평으로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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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기도가 될 때 에세이 / 장요세파 수녀 / 파람북
수도원에서 띄우는 빛과 영성의 그림 이야기 내면에 드리운 어두운 장막을 열어젖히는 그림, 마침내 빛의 세계로 이끄는 언어의 매혹과 신비! - 책 표지 문구 인용 -
이 책은 책 표지가 저의 마음을 이끌었습니다. 책 소개글을 읽어보기 전에 책 표지만 보고서도 마음이 너무 평온해지면서 고요함이 느껴져서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리고 읽기된 소개글에서 저자가 수녀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장요세파 수녀님은 일본 훗카이도 트라피스트 여자수도원에 입회를 했었고 지금은 창원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봉쇄수녀원에서 수도 중이라고 합니다. 요세파 수녀님이 수행하는 시토회는 새벽 3시 30분에 기상해 밤 8시 불이 꺼질 때까지 기도와 독서, 노동으로 수도를 하면서 세상과 담을 쌓고 수행과 노동의 삶을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런 수녀님이 빛과 영성의 그림이야기를 들려주신다고 하니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까 기대가 많이 되었습니다. 수녀님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그림은 딱히 조건을 두지는 않았지만 너무 탐미적 성향으로 아름답게 그려진 그림이나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그림은 눈에 담기지도 않고 마음에 머물지도 않고 그냥 스쳐지나 간다고 합니다. 수녀님이 이끌리는 그림은 생명, 자유, 용서 , 사랑, 초월적인 것,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 종교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그림들이라고 하는데 그런 그림들은 수녀님을 가만히 잡아 당겨 세우게 만든다고 합니다. 실제 이 책에서 소개하는 그림들도 1. 상처 입은 치유자, 2. 감돌아 머무는 향기, 3. 불꽃이어라.... 라는 주제아래 그림을 설명하고 수녀님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것들을 독자들에게 들려줍니다. 아무래도 종교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그림들이 대부분이지만 수녀님의 설명을 듣노라니 몰랐던 성경이야기도 알수 있어서 좋았고 그리고 현실을 살아가는데 힘을 얻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 돌아온 탕아 > 렘브란트 반 레인
모든 것을 탕진하고 삶의 밑바닥에서 후회의 눈물을 쏟으며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는 굽은 등을 더 굽혀 양손으로 감싸 안습니다. 저 아버지의 모습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보여주는데 수녀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보니 정말 아버지의 양손이 현저하게 다르네요. 곱고 여성스러운 손과 거칠과 투박한 아버지의 손 같은 이 양손은 하느님 사랑의 양면성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죄를 허용한 사랑!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랑! 자신을 떠나 가는 것마다 허용하는 사랑! 이게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 아닐런지 .. 수녀님의 설명을 들으니 더 깊게 와닿았습니다.
< 만종 > 밀레
수녀님이 들려주는 그림이야기에는 꼭 종교적인 그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밀레의 만종! 하면은 시골의 목가적 풍경의 대명사라고도 할 수 있죠. 그런데 이 그림의 숨겨진 비화를 수녀님이 들려주십니다. 에전에 얼핏 읽어서 알고 있는 사실인 듯도 하지만 또 이번에 수녀님의 설명으로 들으니 새롭게 들리고 가만히 부부의 얼굴이나 모습 그리고 주변의 모습을 조용히 아주 조용히 바라보게 되네요. 밀레가 처음 그렸을 때는 아내 앞에 놓은 바루니에 담긴 것이 감자가 아니라 이 부부의 사랑하는 아기, 죽은 아기였다고 합니다. 밀레의 친구가 혐오감을 준다고 조언을 해서 그 말을 받아들려 죽은 아기 대신에 감자를 그려 넣었다고 하는데 이런 사실을 알고 나니 그냥 평화롭게만 보이던 목가적인 풍경이 갑자기 다르게 다가옵니다. 한 없는 고요함이 느껴지고 , 삶의 잔인함도 느껴지네요. 그렇지만 그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그 무엇도 ....
수많은 화가가 그 장면을 그렸지만 그 중 렘브란트의 작품이 가장 뛰어나는 평가를 받았다는 < 이사악의 희생 >도 너무나 새롭게 다가왔고, 누구나 다 아는 뭉크의 <절규 >도 , 유다의 입맞춤을 묘사한 익명의 화가의 그림인 < 유다의 배신 >도 , 신약성경 사도행전의 성령강림 장면을 담은 엘 그레코의 그림인 < 성경강림>도 , 최마리아님의 이콘 그림도 등등 수녀님의 그림 이야기를 통해서 몰랐던 사실들도 많이 알게 되고 종교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좋았습니다. 마음이 한없이 고요하고 평온의 세계로 저를 인도 하는 듯한 독서의 시간이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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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기도가될때 #장요세파지음 #파람북 그림영성에세이라고 생각이 되었고, 나는 한 여성이 그려져 있는 그림에 유난히 매료가 된다. 혼자있고픈 나의 소망이 있는건지는 몰라도 그림이 참 나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준다. 이런 생각은 해본다. 한 1박2일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갖고 어디 한적한 바다근처 커피숖에서 좋아하는 체리콕과 함께 책을 하루종일 읽는다. 크... 생각만해도 힐링이다. 그림을 보며 깊은 묵상과 기도를 하는 저자의 수도원에서 띄우는 빛과 영성의 그림이야기이다. 이렇게 기도와 독서가 중심의 삶으로 살고있는 저자는 현재 창원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수도중이다. 외부와 철저히 단절되며 새벽 3시30분에 기상해서 불이 꺼지는 8시까지 기도, 독서, 노동의 싸이클로 생활하고 있다.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채 수행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기도로써 시작하고 기도로써 끝나는 하루일과로 그림이 말을 걸어오면 그 그림들을 저자의 영성의 언어로 풀어놓는다. 그림앞에서면 그림속의 주인공이 되어 침침했던 눈이 걷히며 성령의 눈으로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이게 되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신비의 세계로 여행하며 유영하게 된다고 한다. 감탄의 지경을 넘어서 경탄의 줄기를 따라 공동의 땅에 이르게 되는데 경탄은 그야말로 몹시 놀라며 감탄한다는 것인데 종교를 떠나서 함께 그림을 보면 무언가를 찾아가고픈 얻고픈 탐심의 마음을 보기도 한다. 저자는 그림을 고를 때 따로 어떤 기준이나 루트가 있는 것은 아니며 선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림작품이나 책을 볼때도 무언가에 이끌려 펼치게 되고 보게 되는데 작품을 해석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기도 하다. 같은 그림을 보고 있지만 생각과 사람에 따라 느끼는 포인트는 다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탐미적인 그림이나 너무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작품보다는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초월적인 그림에 이끌려 선택하였다고 한다. 함께 그 초월하고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품을 통해 깊이 있는 영성과 기도로 색칠해져있는 저자의 글을 보며 소장각이라고 소리치고 싶다. 그림을 더 가까이하는 나 자신을 보게 되니 좋았다. 탐미할 수 밖에 없고 그림을 보며 글을 읽으니 깊이가 두배가 된다. #인간의내면 #깊이있는묵상 #화가의삶이녹아있는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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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장요세파는 기도와 독서, 그리고 노동으로 수도하는 트라피스트 봉쇄수녀원의 수녀입니다. 그녀는 그림을 통해 성서를 묵상하고 기도하며, 그것을 책으로 펴냈습니다. 머리글에서 밝혔듯, 그녀는 화가의 삶과 작품을 통해 영원을 향한 창문이 열려 있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모든 화가의 그림을 섭렵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탐미적 성향의 작품과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작품은 길가는 행인처럼 스쳐 갈 뿐입니다. 반면에 생명, 용서, 사랑과 같은 것을 드러낸 작품, 인간의 내면과 종교적인 것을 표현한 작품들에는 강한 끌림이 있어 그것에 집중했다고 합니다. 이 책에 소개된 약 50여 편의 그림들과 이에 대한 저자의 글은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며 신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게 합니다. 특히 렘브란트 반 레인의 작품들과 조르주 루오의 작품들, 그리고 최종태 작가의 조각들을 많이 소개합니다. 이런 작품들과 관련된 작가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신과 인간의 본질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작가는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를 두 번이나 이야기합니다. 한번은 이 그림의 아버지의 손과 얼굴에 집중하면서 신의 사랑의 양면성을 묵상합니다. 또 한번은 인간을 대하는 신의 계산법, 즉 인간을 한없이 용서하고 품어주시는 마음을 시로 표현했습니다. 나는 특히 조르주 루오의 작품과 이에 대한 작가의 글에 끌렸습니다. <성안(聖顔)>의 예수는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있지만 환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고통을 당하면서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상처를 보듬어주는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깊은 고요 속으로 사람을 인도하는 가난한 자 예수를 발견합니다. <트리오>에 묘사된 세 병의 ‘광대’의 얼굴에서 수난받는 그리스도와 일상의 굴레를 벗어난 자유로운 인간, 평화로운 참사람의 얼굴을 봅니다. <성녀 베로니카>에서도 ‘그리스도의 참된 얼굴’인 참된 인간을, <피고인>에서는 가난한 이를 짓밟고 그들의 생명을 부수고 있는 자들을 생각합니다. 곳곳에 실려 있는 수녀의 시 또한 잔잔한 울림을 줍니다. 이렇게 수녀의 그림 묵상은 영혼을 정결하게 하는 기도이며 신의 은총을 보여주는 빛이 됩니다. 삶에 지치고 회의에 빠질 때,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의 자리에 선뜻 다가가지 못할 때, 이 책을 펼쳐 들어 보세요. 마음은 겸허해져 신으로 향하는 여정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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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지치고 집중이 안 될 때 음악을 틀어놓고 에너지를 북돋우길 좋아한다. 머리가 복잡하면 웃긴 동영상, 단순한 게임, 감동과 미소를 주는 동물을 본다. 그런데 이런 테라피가 다 통하지 않는 때가 간혹 있다.
누군가의 목소리도 듣기 싫을 정도로 속이 시끄러울 때, 그림을 보게 된다. 특히 그것이 인물화라면 더 좋다. 평소보다 더 시간을 들여 찬찬히 들여다 볼수록 그림 속의 인물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가 풍랑과 비바람이 되어 마음을 온통 헤집고 탁하게 만들 때 조용한 침묵 속에서 언제고 그 자리에 존재하는 그림이라는 세상은 새삼 든든하고 안정적인 안식처가 되어 준다.
장 요세파님이 쓴 <그림이 기도가 될 때>는 제목과 저자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가톨릭 수도자가 쓴 그림책이다.
저자의 이력을 살펴보면 조금 특이한 부분이 있다. 장요세파 수녀는 일본 홋카이도의 트라피스트 여자수도원에 입회한 뒤 현재 창원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봉쇄수녀원에서 수도 중이다. 대중들과 만나고 목회 및 수도생활을 하는 수녀님이 아니라 새벽 3시 30분에 기상해서 밤 8시 불이 꺼질 때까지 기도와 독서, 노동으로 수도하는 세상과 단절되어 있지만 누구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 세상을 위한 기도를 하는 수도자가 바로 이 책의 작가다.
그래서인지 책에 수록된 작품은 종교화가 많다. 그리고 그 작품이 묘사하고 있는 성서의 일화와 수도자로서의 감상과 기도가 에세이와 시로 담겨있다. 서양 미술사에서 종교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에 종교 전문가이며 수도자인 저자의 해박한 설명을 더 하면 미술 및 예술의 영역으로 보는 작품의 이해와 감상이 훨씬 풍요로워지고 종교화, 라는 이름과는 역설적이게도 더욱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물론 성서의 한 장면을 담거나 종교화만 수록된 것은 아니다. 1. 상처 입은 치유자, 2. 감돌아 머무는 향기, 3. 불꽃이어라 에 수록된 작품들은 서양의 고전 회화 뿐만 아니라 현대의 조각/부조, 그림까지 다양성을 자랑한다. 그리고 각 작품을 오래오래 응시하여 얻은 삶과 영원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더한다.
머리 속이 복잡하여 아무 생각을 들여놓고 싶지 않아 펼친 책이지만 그림을 만나고 보고 읽다가 어느새, 장 요세파수녀님이 조곤조곤 다정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떻게 해야한다- 는 설교나 종교에 대한 설파가 아니라 저자가 그림을 매개로 명상하여 만난 인간의 내면과 부족하고 어둡고 흔들리는 인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사랑과 자유, 용서와 초월로 인간을 품고 위로하는 신의 존재를 기도와 영성으로 풀어내는 그림에세이 <그림이 기도가 될 때>.
슬슬 추워지는 요즘, 향초나 인센스를 옆에 두고 읽기에 좋은 책이다.
#그림이기도가될때 #장요세파 #파람북 #그림에세이 #리뷰어스클럽 #서평이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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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그림을 좋아한다. 그림을 배운 적은 없지만 그림을 감상할 때 그림에서 얻은 영감이 많아 그림 보기를 즐기는 편이다.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어 직접 그리기는 서툴러서 보기만 주로 한다. 가끔은 그림 공부를 해볼까 생각도 하지만 취미로 배우기에는 경제적인 면에서 어려움이 예상돼 아예 그림 그리기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자주는 못 가지만 가끔씩 전시회에 직접 가서 보는 일도 적잖다. 작년부터는 코로나로 인해 전시도 많지 않았고, 직접 관람하는 일도 뜸해졌다. 대신 미술에 관한 책이 많이 나와서 서양미술사와 화가들의 삶과 작품 감상을 위한 조언들이 많이 배웠다. 그림 감상을 읽으면서 오히려 눈의 호사도 누렸다. 인쇄된 책을 통해 그림을 감상할 땐 '영감'이 많지는 않았지만 몰랐던 에피소드를 알게 되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고, 미적 감상 포인트를 배울 땐 풍요로운 느낌을 받아 그만큼 즐겁고 유쾌한 시간이 되었다. 그림 감상을 취미로 삼은 데 대해 큰 만족감을 느낀 때가 최근 1년 반 정도의 기간이었다. 독자가 영감을 얻을 때 이 책 『그림이 기도가 될 때』의 저자 장요세파 수녀는 빛이나 생명의 신비로움을 발견하나 보다. 저자는 「머리글」을 통해 그림을 통해 얻는 점을 명확히 썼다.
“그림 앞에 서면 눈이 환해집니다. 침침했던 눈에서 무엇인가 걷히면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그림은 제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고, 제 몸이 무거워 들어가지 못했던 신비의 세계를 열어줍니다. 생명, 자유, 용서, 사랑, 초월적인 것,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 종교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그림들은 가만히 있는 저를 잡아당겨 세웁니다. 우선 화가의 삶이 그 안에 녹아 있고, 더 들어가면 화가 자신마저 넘어 저 먼 어떤 것, 인간의 눈에 희미한 어떤 것 혹은 실재가 우리 앞에 턱 놓이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어설픈 종교체험보다 훨씬 강렬하게 인간을 초월적 실재 앞에 놓아줍니다. 더욱이 형식적인 예배, 틀에 박힌 기복적 기도로는 가까이 가보지도 못할 세계를 열어줍니다."
저자인 요세파 수녀는 봉쇄수도원에서 세상과 담을 쌓고 수행과 노동의 삶을 살아간다. 요세파 수녀가 수행하는 시토회는 인간 존재 안의 사막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은거하며 공동생활을 하는 성 베네딕도 규칙을 적용한 수도회로, 엄격한 규칙을 지키며 수행생활을 이어간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일과 무관하게 지내는 것은 아니라고 밝힌다. 봉쇄수도원을 정주생활을 원칙으로 하지만 수정만 STX 조선소 건립 반대를 위해 봉쇄를 풀고 수정리 주민들과 항의 데모에 나서기도 했다. 사회정의와 영성은 분리될 수 없는데, 수도회가 봉쇄를 풀고 거리에 나선 것은 모든 것을 다 잃은 할머니 안에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세파 수녀는 시인이기도 하다. 늘 하느님을 생각하고, 세상과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여정을 매일 시로 써 내려간다. 요세파 수녀의 그림 묵상은 독자를 전혀 다른 차원에 놓인 그림의 세계로 초대한다. 그림 속에 깊게 스며든 작가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일과,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독자의 시선의 오류를 다잡아 준다. 독자는 아름다움이란 눈으로 보아 '예쁘다'거나 '고운' 것이지만 저자의 눈은 '신비로움'에 다가가는 것, '진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중요한 점을 배운 느낌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요세파 수녀에게 어떤 그림은 눈을 밝게 해주고 침침했던 눈에서 무엇인가 걷어내며 신비의 세계로 초대해준다. 그렇게 말을 걸어오는 그림을 언어로 표현하면서, 글과 형상이 이미지로 압축되는 어느 지점, 그 공동의 땅에 도달한다. 그러나 저자는 경계한다. 지나치게 아름다움만 강조되는 그림에서는 그러한 신비의 세계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쁘고 곱고 고상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만을 계속 찾다 보면 구부러지고 못나고 일그러진 것은 자꾸 배제하게 되며, 장애인, 사회 저변의 불우한 이들, 난민을 배제하면서 외면하게 된다는 것. 요세파 수녀에게 자신을 잡아당겨 세우는 그림은 생명, 자유, 용서, 사랑, 초월적인 것,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 종교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그림들이라는 저자의 인식이 명확해지는 순간이다. 이 책에는 어떤 그림을 통해 이런 체험을 하는지, 어떤 때 이런 그림을 감사하게 되는지 이 책에 저자의 심경과 그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세심하게 언급돼 있다.
저자는 실례로 고흐의 〈낡은 구두 한 켤레〉를 언급한다. 힘겨운 노동을 감내하며 고달프게 살았을 한 사람을 떠올리며, 누가 구두의 주인일지 생각하게 한다는 것. 요세파 수녀는 구두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인간이 신고 신어 낡아진 구두,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고 헌신한 후 생명마저 내어놓고, 그 몸을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신 하느님의 모습을, 또 인간에게 신겨 그것도 처절한 삶을 산 이의 발에 신겨 함께 처절한 시간을 보내고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구두에서 '예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런 파격적 해석은 고흐가 누구보다 종교적인 인물이었음을 고려할 때, 꽤 설득력을 얻는다. 삶을 사랑하고, 참된 것을 추구하며, 사람과 친교를 갈망했으며, 단순한 외적 아름다움이 아닌 그 존재가 품고 있는 진짜 생명을 찾아내고 묘사할 줄 알았던 고흐이기 때문이다. 고흐의 그림에서 하느님과 예수의 모습을 찾아내는 저자의 해석은 독자에게도 새로운 영감을 준다. 그림 감상에 대한 영감과 그림을 대하는 태도 등에 대해 독자는 마음을 가다듬는 기회를 갖는다.
아들 예수를 잃은 마리아의 그림에서는 애끓는 어머니의 고통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평온함의 승화를 엿보게 해준다. 그런 승화는 비단 자신만의 고통뿐만 아니라 세상의 수많은 고통을 끌어안고 보듬어주는 강력한 치유의 힘으로 작용한다. 요세파 수녀가 수많은 그림에서 끊임없이 찾아내고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깊은 절망에서 희망을 길어내고 죽음 안에서 삶을 길어내고자 하는 갈망이다. 어떻게 보면 이는 종교의 핵심이기도 할 텐데, 굳이 종교를 뛰어넘어서도 인간사의 온갖 고통과 한계를 염두에 두었을 때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게 해주는 힘으로 작용한다. 종교적 서사가 함축된 그림 묵상은 사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깊게 맞닿아 있다. 독자가 중학교 다닐 때 미술 교과서에도 실리고, 이발관 액자에 걸려 있던 그림도 여기에 등장한다. 우리가 잘 아는 밀레의 〈만종〉이다. 그림 속 부부는 곡식이 담긴 바구니 앞에서 기도한다. 하지만 원래 그림에는 바구니 안에 그들의 ‘죽은 아기’가 있었다고 하니, 놀라운 사실이다. 아기의 싸늘한 시신 앞에 선 그들의 자세에는 한없는 고요함이 깃들어 있으나, 고통의 울부짖음으로 무너지고 일그러진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깊은 고통 속에서 기도하는 이 부부 뒤로 해는 이미 넘어가고 붉게 물든 노을로 삶의 잔인함과 처연함이 더 짙게 배어 나오는 풍경이다. 이 풍경 속에서 요세파 수녀는 고통마저 녹이는 불, 깊어가는 저녁, 깊어가는 겨울에도 꺼지지 않는 내면의 불을 발견한다. 고통은 이들에게 이 불을 끄는 찬물이 아니라 불을 더 타오르게 하는 기름이 되고 만다. 종교와 미술이 하나 되는 느낌이다.
요세파 수녀의 그림 이야기는 깊고 묵직하며 우리 안의 잠들었던 감각세포를 깨워준다. 단순한 작품 감상이나 고상한 평을 넘어 맑고 평온한 그림의 세계에 빨려들어가게 해준다. 그렇게 하나의 그림을 통해 삶을 더욱더 깊게 들여다보면서, 살아가야 할 이유와 살아가는 힘을 얻게 해주는 치유의 힘을 선사해준다.
저자 : 장요세파
일본 홋카이도의 트라피스트 여자수도원에 입회. 현 창원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봉쇄수녀원에서 수도 중이다. 지은 책으로 시집 『바람 따라 눕고 바람 따라 일어서며』와 그림 에세이 『수녀님, 서툰 그림읽기』, 『수녀님, 화백의 안경을 빌려 쓰다』가 있다. 트라피스트 봉쇄수녀원은 11세기 프랑스에서 창설된 ‘시토회(ORDO CISTERCIENSIUM STRICTIORIS OBSERVANTIAE)’ 소속으로, 새벽 3시 30분 기상해 밤 8시 불이 꺼질 때까지 기도와 독서, 노동으로 수도를 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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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바라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고, 묵상이 되는 그림이 있다. 더 젊을 때는 그림을 보아도 잘 이해하기 어렵고 성경적인 의미도 잘 몰랐었기에 그림을 감상하는 묘미를 몰랐던 것 같다. 그런데 세월의 풍파를 지나며 ㅎㅎ 몇년 전에는 감흥이 없던 그림도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인 장요세파 수녀님은 일본 홋카이도의 트라피스트 여자수도원 입회하고 현 창원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봉쇄수녀원에서 수도 중인 분이라고 한다.
천주교의 용어는 잘 몰라서 트라피스트, 여자수도원, 입회, 창원수정, 봉쇄수녀원 모두 낯설다. 그래서 찾아보았더니 우리나라 분이셨다. 봉쇄수녀원이라는 곳에서 글을 읽고, 기도하고, 말씀을 보며 하루종일 묵상하는 분의 관점이 담긴 에세이라 더욱 궁금해졌다.
p19 죄를 허용하는 사랑.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랑. 자신을 떠나가는 것마저 허용하는 사랑. 이 비정한 아들은 모든 것을 탕진하고 나서야 마침내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죄가 죄로 드러날 때 비로소 보이는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 자비의 바다에는 죄도 차지할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 앞에서라면 좀 배짱 있게 하나님을 사랑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아흔아홉 번 잘못을 저질러도 백 번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아니 그 이상 헤아릴 숫자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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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의 <돌아온 탕자>는 상상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이야기다. 아버지 앞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돌아와 무릎을 꿇은 탕자, 그리고 그 모든 탕자의 잘못을 용납하고, 오히려 잔치를 벌이며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성경 속의 에피소드다.
그러고보니 탕자의 신발이 너덜너덜하고 한쪽은 아예 잃어버렸다. 그야말로 거지꼴로 돌아왔다. 그에 반해 아버지의 차림새는 부유함을 보여준다. 아버지 곁에 머무르기만 해도 둘째 아들은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을텐데 어리석게도 아버지를 무시하고 집을 나가 모든 재산과 자신의 몫을 탕진한다.
거기서 탕자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과 많이 오버랩된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면서도 그 사랑의 소중함을 무시하고 멀리 멀리 떠나고 싶어한다. 내 힘으로, 아버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성공해서 인정 받고 싶고, 또 아버지의 통제를 벗어나 내 멋대로 자유롭게 쾌락을 즐기며 살고 싶은 마음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등지고 떠난 탕자의 결말은 비참하지만, 그 비참함 조차 용인하고 자식을 안아주는 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그림. 그게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임을 알 수 있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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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종교화를 보며, 그 당시 그림을 그렸던 화가가 어떤 생각을 하며 그림을 그렸을까 상상해보면서 감상해보는 묘미가 색다르다. 또 오랜 기간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며 그림을 바라보고 해석해주는 저자의 관점과 해설이 함께하니 더욱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가 크다.
이 책을 읽으며 그림에 대해 문외한인 나조차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 것 같다. 그림에 대한 책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더 깊이 묵상해볼 수 있게 되는 책. 그림이 기도가 되는 놀라운 순간을 경험하게 되어 감사했다.
출판사를 통해 책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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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님이 쓴 책 미술관 나들이가 취미인지라 조금씩 그림 관련 책들을 읽고 있어요.
만나게 될까 두근두근 합니다.
수도원에서 띄우는 빛과 영성의 그림 이야기
그림은 때로 말이나 글보다 더 큰 위로를 주기도 하고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순간에 집중합니다.
지금은 패러디로 더 유명해져서 어찌보면 웃긴 그림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것 같아요.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절망입니다. 붉은 빛 사이에 푸른빛 작가는 절망 속 희망을 전하고 싶었던 걸까요? 그림이 기도가 될 때에는 종교적 색채의 그림만 들어있지 않아요. 이렇게 유명한 그림들도 등장합니다.
종교적 색채의 그림들이 많아서 그다지 이질감이 들지도 않아요.
천지 창조
저도 교과서에서 일부분만 보다가 실제로 그림을 보았을때의 감동이 느껴집니다. 일단 크기가 압도적이었어요.
서로에 대한 깊은 경이감으로 가득 찬 순간, 세상 온 천지가 이 두 존재만으로 가득 찬 듯 충만함이 빛처럼 사방으로퍼져나가는 듯한 느낌마져 듭니다. 이 충만한 일치의 느낌 가운데서 놀라운 것은 살짝 떨어진 두 손가락 입니다. 아마도 그림에서 이 두 손가락이 떨어져 있지 않고 붙어있다면, 지금 느끼는 경이감은 많이 줄었을 것입니다.
그림의 묘미. 전 책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요 작은 옷핀이 드리운 긴 그림자가 주는 여운을 느껴봅니다.
슬플 때는 가끔 눈물도 흘릴 수 있는 삶,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삶은 그림자가 있어야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장요세파 수녀님의 힐링 메세지,
항상 흥미로와요.
많은걸 느끼고 배울수 있었습니다. 전 언제쯤 장요세파 수녀님처럼 그림에 대한 저만의 생각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열심히 수련하지는 못하지만 책을 통해 수녀님의 안목을 배워봅니다.
미완의 탑 미완의 탑, 그 앞에 우리는 서야 하는지 모릅니다.
가장 따뜻한 말이 생겨납니다
가장 빛나는 빛을 입게 됩니다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 열립니다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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