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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본이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접하기 좋습니다.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이해하기 보단 서평집같은 느낌입니다. 공감가는 책이라서 추천합니다. 여러모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가벼운 마음으로 훑어보기 좋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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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東仁은 日帝?占期 積極的인 親日協力을 한 作家이다. 그는 解放 直後에 發表한 短篇小說 <김덕수>에서 親日 警察 김덕수를 내세워 親日行爲에 對해 辨明한다. 解放 直後였다. 나는 어떤 同業 日本人 辯護士의 집을 한 채 讓渡받아가지고 이 동네로 移徙를 왔다. 移徙를 와서 大綱 한 整理도 된 어떤 날 집으로 돌아오니까 아내는, “김덕수네가 이 동네에 삽디다그려.” 하는 報告를 하였다. “김덕수란? 刑事 말이요?” “네…… 愛國班長짜리, 애희의 男便.” “班長도 그럼 함께?” “네…….” “녀석도 敵産 한 채 얻은 셈인가?” “아마 그런가봐요. 게다가 그냥 이 解放된 나라에서도 警官 노릇을 하는지 金빛이 번쩍번쩍하는 警部 차림을 하고 다니던걸요…….” “흠…….” 우리가 敵産인 이 집으로 移徙오기 前에 ○○동네에 살 때에 덕수네와 서로 이웃해 살았다. 덕수는 警察 高等係의 刑事였다. 高等係의 刑事로 日本人 上典 아래서, 많은 사람을 잡아서, 罪를 만들어서 功勞를 세워, 우리 韓人 사이에는 相當히 미움과 무서움을 받던 人物이었다. 그의 아내 애희는 또 그 동네의 愛國班長으로…… 男便은 刑事, 아내는 班長이라, 그 동네에서는 相當히 勢道를 하고 있었다. 1945年 8月 15日의 偉大한 解放이 이르러서 김덕수의 손에 걸려 監獄살이 하던 많은 人事들이 갑자기 出獄하자 或 매 맞아 죽지나 않는가 근심했더니 덕수네는 어느덧 그 동네에서 자취가 없어져서 그저 그만그만 잊어버렸는데, 이 새집으로 移徙오고 보니, 덕수네는 우리보다 먼저 이 동네에 와 살고 있다는 것이다. 前番 동네에서 덕수네와 이웃해 살기를 5年이나 하였다. 그 5年間을 내내 덕수의 아내 애희는 愛國班長으로 있었기 때문에 自然 相從이 잦았고, 그런 關係로 나는 덕수라는 人物을 比較的 여러 角度로 볼 수가 있었다. 더욱이 내 職業이 前 裁判所 判事요, 現 職業이 辯護士였더니만치 덕수는 自己 獨特의 優越感으로써 동네의 다른 사람과는 相對가 되지 않는다 하여 내게 찾아와서 自己의 心境이며, 環境을 하소연하고 하더니만치 그를 比較的 正確히 알았노라고 나는 스스로 自信한다. 덕수는 日本의 大正 中葉에 世上에 난 사람으로서 그의 父母는 구멍가게를 經營하는 零細한 市民이었다. 僥倖 小學校는 無事히 卒業하고 그러고는 警察署의 給仕로 들어갔다가 本是 英特한 資質이라 어름어름 ‘끄나풀’로 다시 刑事로까지 陞差를 한 것이었다. 그가 끄나풀에서 刑事로까지 오른 그 時節은 한창 日本의 軍國主義가 滿州를 征服하고 中國을 征服하며 一邊 韓人의 日本人化(所謂 內鮮一體主義)가 猛烈히 進陟되던 時節이라, 本是 民族思想이라는 基礎 訓育을 모르고 지낸 덕수는 自己는 한 皇國臣民으로, 그 點을 자랑으로도 여기고 그래야 할 義務로도 믿었다. 이 思想에 背馳되는 行動이거나 運動을 하는 ‘不逞鮮人’ 은 마땅히 排除해야 할 것이며, 그런 逆徒를 驅逐 排除하는 責任을 띤 自己의 職業은 아주 神聖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지라 그는 氣를 써서 朝鮮人 가운데 逆徒를 배제하기에 努力하였으며, 國家의 逆賊을 없이해서 ‘半島人’의 名譽를 毁損하지 않기 爲해서는 最善의 힘을 아끼지 않았다. 拷問 名手, 自白 자아내는 名人이라는 稱號가 어느덧 그네에게 씌워지고, 上官의 信任도 次次 두터워질 때에 그는 이것을 秋毫도 自責하는 마음이 없이, 自己의 자랑으로 알고 名譽로 알고 自己의 天職으로 알았다. 金東仁(1900年~1951年)은 小說家. 號는 琴童ㆍ春士. 1919年에 우리나라 最初의 純粹 文藝 同人誌 ≪創造≫를 發刊하였고, 事實主義的 手法과 文章의 革新을 보여 주었다. 作品에 短篇 <弱한 者의 슬픔>, <배따라기>, <감자>, 長篇 <雲峴宮의 봄> 等이 있고 親日反民族行爲者이다. 그는 日帝 末에 內鮮 一體와 皇民化를 主張하고 日帝의 植民支配 統治 理念을 作品에 內面化한 親日 作家이다. 따라서 金東仁은 民族文學作家會議, 民族問題硏究所 等에서 發表한 親日 文人 42名의 名單에 이름이 올라 있으며, 民族問題硏究所가 發刊한 ≪親日人名辭典≫에도 그의 이름이 包含되어 있다. 또한 ‘親日反民族行爲 眞相糾明委員會’에서 發表한 ‘文學 分野 親日反民族行爲者’ 31名의 名單에도 그의 이름이 收錄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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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東仁은 日帝?占期 積極的인 親日協力을 한 作家이다. 그는 解放 直後에 發表한 短篇小說 <김덕수>에서 親日 警察 김덕수를 내세워 親日行爲에 對해 辨明한다. 解放 直後였다. 나는 어떤 同業 日本人 辯護士의 집을 한 채 讓渡받아가지고 이 동네로 移徙를 왔다. 移徙를 와서 大綱 한 整理도 된 어떤 날 집으로 돌아오니까 아내는, “김덕수네가 이 동네에 삽디다그려.” 하는 報告를 하였다. “김덕수란? 刑事 말이요?” “네…… 愛國班長짜리, 애희의 男便.” “班長도 그럼 함께?” “네…….” “녀석도 敵産 한 채 얻은 셈인가?” “아마 그런가봐요. 게다가 그냥 이 解放된 나라에서도 警官 노릇을 하는지 金빛이 번쩍번쩍하는 警部 차림을 하고 다니던걸요…….” “흠…….” 우리가 敵産인 이 집으로 移徙오기 前에 ○○동네에 살 때에 덕수네와 서로 이웃해 살았다. 덕수는 警察 高等係의 刑事였다. 高等係의 刑事로 日本人 上典 아래서, 많은 사람을 잡아서, 罪를 만들어서 功勞를 세워, 우리 韓人 사이에는 相當히 미움과 무서움을 받던 人物이었다. 그의 아내 애희는 또 그 동네의 愛國班長으로…… 男便은 刑事, 아내는 班長이라, 그 동네에서는 相當히 勢道를 하고 있었다. 1945年 8月 15日의 偉大한 解放이 이르러서 김덕수의 손에 걸려 監獄살이 하던 많은 人事들이 갑자기 出獄하자 或 매 맞아 죽지나 않는가 근심했더니 덕수네는 어느덧 그 동네에서 자취가 없어져서 그저 그만그만 잊어버렸는데, 이 새집으로 移徙오고 보니, 덕수네는 우리보다 먼저 이 동네에 와 살고 있다는 것이다. 前番 동네에서 덕수네와 이웃해 살기를 5年이나 하였다. 그 5年間을 내내 덕수의 아내 애희는 愛國班長으로 있었기 때문에 自然 相從이 잦았고, 그런 關係로 나는 덕수라는 人物을 比較的 여러 角度로 볼 수가 있었다. 더욱이 내 職業이 前 裁判所 判事요, 現 職業이 辯護士였더니만치 덕수는 自己 獨特의 優越感으로써 동네의 다른 사람과는 相對가 되지 않는다 하여 내게 찾아와서 自己의 心境이며, 環境을 하소연하고 하더니만치 그를 比較的 正確히 알았노라고 나는 스스로 自信한다. 덕수는 日本의 大正 中葉에 世上에 난 사람으로서 그의 父母는 구멍가게를 經營하는 零細한 市民이었다. 僥倖 小學校는 無事히 卒業하고 그러고는 警察署의 給仕로 들어갔다가 本是 英特한 資質이라 어름어름 ‘끄나풀’로 다시 刑事로까지 陞差를 한 것이었다. 그가 끄나풀에서 刑事로까지 오른 그 時節은 한창 日本의 軍國主義가 滿州를 征服하고 中國을 征服하며 一邊 韓人의 日本人化(所謂 內鮮一體主義)가 猛烈히 進陟되던 時節이라, 本是 民族思想이라는 基礎 訓育을 모르고 지낸 덕수는 自己는 한 皇國臣民으로, 그 點을 자랑으로도 여기고 그래야 할 義務로도 믿었다. 이 思想에 背馳되는 行動이거나 運動을 하는 ‘不逞鮮人’ 은 마땅히 排除해야 할 것이며, 그런 逆徒를 驅逐 排除하는 責任을 띤 自己의 職業은 아주 神聖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지라 그는 氣를 써서 朝鮮人 가운데 逆徒를 배제하기에 努力하였으며, 國家의 逆賊을 없이해서 ‘半島人’의 名譽를 毁損하지 않기 爲해서는 最善의 힘을 아끼지 않았다. 拷問 名手, 自白 자아내는 名人이라는 稱號가 어느덧 그네에게 씌워지고, 上官의 信任도 次次 두터워질 때에 그는 이것을 秋毫도 自責하는 마음이 없이, 自己의 자랑으로 알고 名譽로 알고 自己의 天職으로 알았다. 金東仁(1900年~1951年)은 小說家. 號는 琴童ㆍ春士. 1919年에 우리나라 最初의 純粹 文藝 同人誌 ≪創造≫를 發刊하였고, 事實主義的 手法과 文章의 革新을 보여 주었다. 作品에 短篇 <弱한 者의 슬픔>, <배따라기>, <감자>, 長篇 <雲峴宮의 봄> 等이 있고 親日反民族行爲者이다. 그는 日帝 末에 內鮮 一體와 皇民化를 主張하고 日帝의 植民支配 統治 理念을 作品에 內面化한 親日 作家이다. 따라서 金東仁은 民族文學作家會議, 民族問題硏究所 等에서 發表한 親日 文人 42名의 名單에 이름이 올라 있으며, 民族問題硏究所가 發刊한 ≪親日人名辭典≫에도 그의 이름이 包含되어 있다. 또한 ‘親日反民族行爲 眞相糾明委員會’에서 發表한 ‘文學 分野 親日反民族行爲者’ 31名의 名單에도 그의 이름이 收錄되어 있다. |
| 일제의 가혹한 시절의 소재로 다루고 있다. 정확히는 해방후의 인간들의 모습이었는데, 일제를 겪은 이들의 가치관 혼란과 우리가 진정 가져가야할 우리의 참 가치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일제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고 그 시대를 산 젊은이들은 오로지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인간이었다. 이런 이들이 해방과 함께 새로운 나라를 살아가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갖추게 되면서 보여줄 수있는 갈등이 잘 묘사된 작품이었다. |
| 김동인 작가는 최초의 문학동인지 [창조]를 발간하였습니다. 김동인 작가는 배따라기, 감자, 광염 소나타, 발가락이 닮았다, 젊은 그들, 운현궁의 봄 등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만족하며 읽은 단편문학입니다. 이 시리즈 전자책은 김동인작가의 김덕수 - 한국문학전집 316은 우리의 훌륭한 문학작품들을 묶어놓은 좋은 시리즈 전자책이라는 생각이 들게하는 작품이라 확신합니다. |
| 이 전자책시리즈는 짧은 분량이라서 금방 읽을 수 있어서 부담이 없습니다. [김동인 저- 김덕수 - 한국문학전집 316] 오래 간만에 훌륭한 우리 단편문학을 다시 읽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김동인 작가는 1919년 최초의 문학동인지 창조를 발간하였습니다. 김동인작가의 주요작품은 배따라기, 감자, 광염소나타, 발가락이 닮았다, 젊은 그들, 운현궁의 봄 등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