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오랫동안 합의되고 받아들여온 명제를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김홍중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어떤 경우 '연결하고' 어떤 경우 '연결을 끊는' 동물이라고 주장한다. 김홍중은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은둔할 줄 아는 동물'이라 정의한다.
여기서 김홍중이 개념화하는 '은둔'이란 봉쇄수도원에서 연상할 수 있는 탈속이나 고고한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물건이나 장소 따위가 공간적으로 떨어진 길이' 혹은 (주로 시간의 길이를 나타내는 명사 뒤에 쓰여) 일정한 시간 동안에 이동할 만한 공간적 간격'을 의미하는 '거리의 생산' 혹은 '간격의 조립'과 같은 미시정치적 실천을 가리키는 것이다.
정리해보자면, 그래서 이 책은 '은둔기계'의 삶에 관한 책이라 할 수 있는데,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은둔 기계'란 생존을 위한 생명의 필사적 재조립이 된 은둔 속에서 노동하고 생각하고 산책하고 읽고 쓰고 견디고 저항하고 소통하고 창조하며 다른 무언가로 생성되어가는 인간을 의미한다.
분량의 측면에서도 대체로 이런 류의 글들이 기존에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을 엮어서 출간하기 때문에 일정 정도의 분량을 넘지 않는 짧은 글들인데 비해, 여기 수록한 글들은 한 편의 분량이 꽤 된다. 더욱이 서론이나 도입부라 할 부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글들이 많아서,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산문은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에세이 정도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러나 건조하고, 진지하며, 산문적이고, 고독한 글들을 통해 사회학자의 시선으로 익숙해진 것들을 다시 볼 수 있다.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나온 심보선 시인의 산문이 시인이자 사회학자, 그리고 생활인으로서의 시선을 모두 담고 있다면, 김홍중의 글은 좀더 학자이자 교수의 시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궁금해하거나 고민하는 독자들이라면, 이 시점에서 읽어볼 만한 글이다. 예전엔 사회적 동물이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다면,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새로운 경험 하에서는 사회적 동물들이 공동체를 가장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은둔 기계'로서의 인간에 대한 논의가 이 시점에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
| 정치학 전공자 친구의 추천을 받아 읽게 되었습니다. 사회학자가 바라보는 세상과 삶, 인간상에 대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다만 제목에서 암시되는 바와 같이 다소 우울합니다. 감정적인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
|
<프롤로그> p06 은신처를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 은신처 속에 숨을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것, 사회의 지배적 여론과 정동으로부터 집요하게 탈주하는 것, 과잉 연결된 관계들을 해체하는 것, 인간들의 세계를 떠나 비인간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 과열된 자본주의적 삶의 형식을 벗어나는 것,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새로운 가능세계를 발명하는 것, 이것이 21세기의 새로운 은둔의 실천이다. 은둔은 이제 생존을 위한 생명의 필사적 재조립이라는 의미를 띤다. 은둔 속에서 노동하고, 생각하고, 산책하고, 읽고, 쓰고 , 견기고, 저항하고, 소통하고, 창조하며 다른 무언가로 생성되어가는 이들을 나는 은둔기계라 부른다. <서바이벌> p28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 선하다. 그러나 단 한 순간, 단 한 시간, 단 하루, 단 한 시절, 단 한 상황에서 인간은 악하다. 선은 존재지만, 악은 행위다. 악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다. <은둔지에서> p93 매미들이 고막을 찢을 듯 울어대다가 갑자기 울음을 멈춘 잛은 순간, 굉음의 여운 속으로 환각 같은 고요가 찾아든다. <좋은 글을 쓰는 법> p115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나쁜 글을 쓰지 않아야 한다. 나쁜 글을 '쓰지 않는 것'이 좋은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어렵다. 무언가를 '쓰지 않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무언가를 '쓰는 법'도 알지 못한다. <문학의 체험> p130 문학이 없었다면, 어떤 시절들을 헤쳐나올 수 없었을 것 같다. p132 창조가 아닌 위로, 도덕도 유희도 아닌 견딤. 우리 시대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독자는 자기 자신이다. <모든 것을 단순하게> p302 어진 이는 허술하다. 규칙이나 규범을 어기며, 심약하고, 애매하고, 어리숙하다. 어진 자는 잘 속고, 매번 진다. 그러면서도 마음을 상실하지 않는다. 침묵하고 웃는다. 어리석음과 어짊 사이에는 은밀한 연관이 존재한다. 어리석음을 통해서, 이 타협주의와 우유부단을 통해서, 어진 사람은 주어진 관계를 파괴하지 않고 이어나간다. 그는 세계를 멀리서 본다. 세계가 그저 존재하는 무언가로 나타나는 지점까지 물러가서, 세계가 그저 생존하는 무언가로 나타나는 지점까지 물러가서 바라본다. 어짊은 생존주의다. 생존을 존재보다 더 성스러운 것으로 읽는, 처절한 실용주의다. p315 청춘의 맹목. 자신을 아끼고 사랑할 줄 모르는 어리석음. 무언가 되기 위한 발버둥. 참된 통찰 따위는 없이, 참된 통찰을 갈구하는 텅 빈 자의식의 과잉, 진실을 사랑하기 보다는, 진실을 추구하는 몸짓의 처절함을 사랑했던 시절. 처절함을 수행하고 연기했던 시절. 몸짓의 냉철한 연출자이자 관객인 자신에 사로잡혀 있던, 상처 입은 나르시즘의 시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