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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에 이름을 올린 여인들 3명을 주제로 하는 책인데 여후,무측천,양귀비 3명 입니다.
이 3명 이외에도 조비연,서시,초선,왕소군등 많은 여인들이 황제와 관련이 되어서 역사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는데 중국 역사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 치고 욕을 안 먹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어떻게 보면 욕 먹을 일을 한 경우도 있지만 역사가 남성을 중심으로 전개가 되다 보니까 그 사이에 관련이 되었던 여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책의 여후와 무측천은 사회의 억압을 벗어 버리고 황제인 남편이 죽은후 자신들의 이상과 포부를 펼친 여걸들 입니다.
1장 여후
아버지인 여공의 마음을 사로잡은 무뢰배인 유방에게 시집을 가서 손에 물 안묻히고 살던 아가씨가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였는데 이러한 고생끝에 낙이 와야 되는데 진나라의 혼란으로 시작된 전쟁으로 인하여서 남편의 얼굴은 못보고 유방의 적대 세력들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의면서 살고 잇는데 두명도 아니고 한명뿐인 남편이 자신들의 가족을 보살필 생각은 없고 난봉꾼 기질을 발휘 하여서 어린 여인들에게 파묻혀서 살고 있다는 소문만 듣고 고생을 하려니 성인군자라도 열받고 성격이 괴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유방은 여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행동을 많이 하였는데 그중에 하나가 시집을 가서 잘 살고 있는 딸을 외교적인 고려로 인해서 흉노의 선우에게 다시 재가를 시키려고 한 일이 있고 여후의 아들인 혜제가 유약 하다는 이유로 태자에서 폐하고 사랑하던 척부인의 아들인 여의를 태자로 삼으려고 한적이 있다.
이러한 일들은 자신의 위치를 여성중에서는 최고로 만들어준 남편 보다는 그러한 남편의 사랑을 빼앗고 자신의 아들의 지위를 뒤 흔들었던 척부인에게 분노가 향할수 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인간 돼지를 만든 행위는 조금 심하였다고 생각을 한다.
여후는 유방의 사후에 아들인 혜제를 움직여서 자신의 일족인 여씨들을 왕으로 삼았는데 이러한 이유는 자신이 황제의 사랑을 못 받고 자식들이 위기를 맞아도 그것을 도와준 유씨들이 없어서 원한을 가진것으로 추측이 된다.
여씨 일족은 여후가 생존시 에는 권력을 누리지만 여후의 사후에는 권력을 읽고 역사의 뒤로 사라진다.
2장 측천무후
당태종의 비빈으로 입궁을 하였던 무씨는 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있다가 태종의 아들인 이치와 정분이 생기었는데 이러한 사유는 구중궁궐에서는 남자 라고는 오직 황제 한명인데 이러한 황제를 보는 여인은 수만명 이라서 자신의 살길을 미리 찾았던 지혜로운 여인 이라고 생각을 한다.
태종의 사후 전 황제의 비빈들이 들어가는 감업사로 들어간 측천은 당시 고종의 사랑을 놓고 경쟁을 벌이던 왕황후가 자신의 지원군으로 생각을 하고 황제를 움직여서 측천을 황궁으로 불러 들이는 악수를 두고 만다.
측천의 악행 중의 하나로 불리는 어린딸의 희생으로 자신의 라이벌인 황후와 숙비를 제거한 행위는 논란이 있는 행위이다.
이렇게 생각을 할수도 있는데 영아 사망율이 높던 당시의 사회상으로 볼때 죽은 아이를 발견한 측천이 이를 이용 하여서 자신들의 라이벌을 제거하는데 사용하였다고 생각을 할수있다. 이러한 생각은 측천이 황후로만 머물렀다면 역사에는 이름이 없는 사람으로 남을 것인데 나라를 창립하는 대역사를 이루어서 욕을 먹는 경우도 발생을 하였다고 생각을 한다.
당시 황제인 고종은 병약하고 의지가 약하여서 많은 일을 무후에게 의지를 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은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는 사람도 권력욕을 불러 일으키는 행위인데 원래 권력욕이 강한 무후의 경우에는 최고의 상황이 이루어져서 고종 사후 자신의 아들을 폐위 시키고 자신이 권력을 잡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권력을 잡은 무후는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일소 하기 위하여서 밀고를 장려 하는데 이러한 밀고에 의하여서 많은 이씨 종친과 반대 세력을 일소 할수가 있었다.
무후의 대단한 점은 이러한 밀고를 자신의 제위 기간동안 계속 한것이 아니고 반대 세력의 일소 후에는 밀고를 없애고 혹리들을 처형 하므로 백성들의 분노를 풀어준다.
귀족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조정을 일소한후에 과거 시험을 치른 새로운 세력을 형성 하면서 당시의 사회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간다. 무제의 시기에 등용된 인물들이 사후 현종의 개원의 치의 주역으로 활동을 하는 것을 보아도 무제의 정치력은 대단하였다는 것을 알수있다.
무제의 즉위시 많은 남자들을 노리개로 활용 하였다고 말들이 많은데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사회가 남존여비의 사회라서 여성의 활동을 억제하는 사회 분위기가 포함된것으로 현대의 역사가들은 보고있다. ( 남성황제는 만명 단위로 놀았다 )
3. 양귀비
양귀비의 이름은 양옥환인데 현종의 아들인 수왕비로 있던 여인을 현종이 사랑하던 무귀비 사후에 모든것에 흥미를 읽고 있자 그러한 황제를 위하여 환관들이 미인으로 소문이난 양귀비를 소개 하여서 거기에 마음이 움직인 짐승인 현종이 양귀비를 다른 사람의 눈을 위식 하여서 이혼을 시키고 도사를 만들어서 시간을 보낸후 다시 궁으로 불러서 자신의 귀비로 삼았다.
이러한 일은 문제가 많은데 자신이 사랑한 무혜비가 낳은 아들인 수왕의 시녀도 아닌 왕비를 시아버지가 가로 챈다는 것은 많은 문제가 있는 행동이다.
현종의 총애를 받았던 양귀비는 그러한 총애를 이용 하여서 사치를 하였는데 이러한 사치는 당시 지배층의 부패로 인한 당연한 행위 이므로 마외역에서 교살을 당할 정도의 죄는 아니라고 생각이 든다.
당시 정치 상황은 현종 치세 초기의 개원의 치라는 말이 무색하게 정치에 흥미를 읽어버린 황제로 인하여서 정치가 문란 해지고 조정에는 간신이 들끌는 수준 이었는데 권력 싸움을 벌이던 재상 양소와 절도사인 안록산 사이에서 양소의 부추김 으로 인하여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러한 반군을 막을 힘을 읽어버린 황실은 피란을 가게 되는데 이러한 사태를 맞게한 인물로 재상인 양소와 양귀비가 지목이 되어서 목숨을 읽게 된다.
사랑하던 양귀비를 떠나보낸 현종도 태자에게 권력을 빼았기고 상황으로 물러나서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당시의 사람들은 영민한 황제를 양귀비가 미색으로 홀려서 반란이 일어나고 살기가 힘들어 졌다고 생각을 하고 양귀비를 원망 하였는데 당시 역사를 보면 양귀비는 놀이와 사치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여후,무후와는 다르게 권력욕은 없던 여인이라고 전한다. 이러한 여인을 방패로 삼은 황제가 비루해 보이는 내용이다.
자신의 책임하에 벌인일은 자신이 책임을 지는 자세가 지도자의 모습이라고 생각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