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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유계영 / 꼭대기의 수줍음 / 민음사 / 234쪽 / 2021 (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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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책의 장르 중 가장 언어를 섬세히 다루는 분야는 시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산문은 글을 서술할 문장의 품이 너른데 반해, 시는 여백이 광활하게 펼쳐지는 것이 대부분이니까. 그래서 그런지 시인의 문장은 아무리 산문이라 하여도 더 많은 정서가 담기는 것 같다. 아름답다거나 꾸밈이 많다거나 하는 것보단 말간 얼굴을 닮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 위에 엷은 잉크가 번져 마른 것 같은 주근깨가 묘사되는 것만 같달까? 우리는 어째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쓰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글쓰기는 외부로의 표출이지만 대체 무엇을 그리도 끄집어내려 애를 쓰는 걸까. 종종 에이, 컨텐츠가 없는데—라고들 답했는데, 사실은 꺼낼 말이 많다는 건 그만큼 많은 이야기가 동화 속 요새를 지키는 용의 숨결처럼 고요히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행간에는 분명히 숨겨진 낱말들이 있다고 느꼈다. 그러니 맥락은 읽는 이의 시선마다 다른 뜻을 선사할 것이다. 그것이 시와 시인의 글이 가지는 미학일까 싶다. 이 책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내년의 내게 다르게 읽히겠지. 텍스트는 불변할텐데 내가 변하는 것일 터이다. 나도 가끔씩 행간에 많은 이야기를 숨기려고 하지만 너무나 손 쉽게 읽히기도 하니, 그런 스킬은 역시 이런 책을 읽으며 터득해나가야 하는 영역일까나. 좌우간 아름다운 문장이 많아 풍경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밑줄도 많이 쳤다. 새해에도 아름다운 문장을 많이 만나는, 나아가 쓸 수도 있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며. * * * 어느 날 우리의 창밖이 무척 온화한 햇살로 반짝이고 있어 아름답다 느낀다면, 우리가 보이는 것 이상을 보고 있다는 뜻이다. 10쪽 살아 있는 덕분에 온갖 대가를 치른다. 먹고 사는 문제가 크다.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저들은 왜 나를 함부로 대할까 생각하다가, 그래서 나는 누굴까 생각하다가,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남이 나를 알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나 싶다.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오해하고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한 뒤에 또 오해하는 것이라던 말이 생각난다. 17쪽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닥쳐온 어떤 사실이 아니라, 어떤 사실에 감응하는 우리의 피와 살이기 때문이다. 30쪽 극적인 상상에 비하면 두려움도 슬픔도 가난도 사건이 되지 않았다. 다가오기도 전에 이미 다 써 버린 마음만 앙상했다. 그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죽음 같은 것이었다. 38-39쪽 사실은 질문하자는 게 아닙니다. 삶에 대한 절대적인 방법론이 있을 리 없죠. (중략) 정답이 없잖아요. 어서 오답을 꺼내 놓으세요. 저의 오답 역시 들려주고 싶습니다. 당신의 헛소리와 나의 헛소리가 마찰하는 순간, 짧게나마 삶의 방법이 선명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나요? 돌머리끼리 부딪치면 불꽃이 번쩍번쩍 튀기는 거죠. 저는 그 순간이야 말로 가장 살아 있다고 느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52쪽 남자는 화초를 사랑하기 때문에 염소까지 사랑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반대의 경우일지도. 하나만 사랑해야 할 이유가 없다. 사랑은 독점적인 방식이 아닐 때 더욱 세차게 움직인다. 더 많은 사랑을 낳을 수 있다. 그게 더 사랑에 어울린다. 54쪽 당신과 내가, 우리에게 주어진 칸을 꽉 채우다 그만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 69쪽 무계획으로 살아남기 위해 결과적으로 더 많은 계획이 필요했다. 96쪽 미궁에 빠지는 일은 간단하다. 내가 나의 몇 가지 주요한 기억만 잊어도 나는 나를 실종시킬 수 있다. 109쪽 인간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 인간의 지능이, 인간의 의학이 규명할 수 없는 일들은 의외로 많으니까. 인간의 몸도 우주의 일부라면 우주의 속셈을 못 따라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 112쪽 저는 인생의 결정적인 기작을 너무 일찍 눈치 채 버린 것 같습니다. 진땀 빼며 돌릴 때는 꿈쩍도 하지 않던 밀폐 유리병이, 피클에 곰팡이가 피어, 버리려 할 때에나 맥없이 열렸던 일을 떠올려 보십시오. 인생은 그런 거 아닐까요. 128쪽 양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옳았으며 좋았을까요. 다르므로 다르게 대하는 것이 좋은 것일지, 다르지만 똑같이 대하는 것이 좋은 것일지, 저는 아직도 잘 모릅니다. 150쪽 우리가 시간의 표면에 한 코 한 코씩 수를 놓는 중이라면 어떤 시간은 텅 비어 있고 아무 색깔도 띠지 않지만, 커다란 문양을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꼭 필요한 시간일 거야. 어린이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겠지요. 153쪽 이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 정신적인 에너지를 쏟는 것, 우리가 나 이외의 존재를 사랑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아닌가. 187쪽 항상 같은 자리에 놓여 있던 사물이 사라지고 나서야 제 윤곽을 드러내듯, 삶의 쾌적함 또한 죽은 자들이 간신히 완성한 보금자리다. 210쪽 구원은 그런 것이다. 미래의 시간을 두려워하기보다 미래를 영원히 미래로 둘 때, 포기할 때, 구원은 가능해진다. 원하는 것을 얻는 방식이 아니라, 원하는 마음을 버릴 때에야 비로소. (중략) 미래를 포기한다는 것, 참 희망적이지 않은가. 218쪽 먼 나라의 친구와 조각케이크의 모서리를 번갈아 무너뜨리고 싶을 때에도, 먼 나라의 친구에게 나는 먼 나라다. 225쪽 인간은 자신의 유일함을 감당하느라 유일한 삶으로부터 멀어진다. 나 자신의 유일함 때문에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며, 매 순간의 선택에 신중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유연함을 빼앗는다. 경직된 인간의 삶은 일률적일 수 밖에 없다. 이때 인간의 영혼은 몸 안에 갇힌 수인이다. 225쪽 시인은 자신의 부족한 상태를 채우기 위해, 허공을, 밤을, 우주를 차지하려 들지 않는다. 계단과 옥상의 물탱크, 빗방울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때 자신의 소유였던 육체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결과적으로 다수의 일인칭 ‘나’가 태어나게 되었다, 사랑을 바탕으로 말이다. 아름답다. 228-22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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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만하면 책 2권사지않는데 한권은 사서 소장 한권은 선물함 시인이라 그런가 말의 묘사가 미쳤다 그냥 너무 좋음 난해하지 않고 현란하지 않지만, 뭐랄까 최고임 왕추천! 유쾌하면서 즐거운 에세이♡♡♡♡♡ 선물 받은분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고 만족하심 ♡♡♡ |
| 너무나도 인상적인 제목과 제목을 그대로 나타낸 표지까지. 빌려서 앞부분을 읽다가 줄 그으면서 읽고 싶어서 새로 구매했다. 아름다운 문장에 대한 갈망이 있었는데 어느 정도 채워진 기분이다. 시인은 나와 같은 것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표현하는구나. 강아지 산책 같은 익숙한 소재를 이렇게 표현하다니 감탄하며 읽었다. 코로나19 시기에 쓰여져 지금과 같고도 다른 세상 풍경이 생경하면서 익숙했고, 꼭대기의 수줍음처럼 서로 물러나는 사람들의 거리는 아직 좁혀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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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대기의수줍음 #유계영 / 좋아하는 블로그 이웃 책 목록에서 발견 후, 표지 디자인이 맘에 들어 구매한 에세이. ‘꼭대기의 수줍음’이 무슨 말일까 했는데 키가 높이 자란 나무들이 제일 아래 식물들까지 빛을 볼 수 있도록 가지 사이에 틈을 벌리는 현상이라고 한다. 표지 보면서 이게 무슨 그림일까 추측할 때 상상했던 그대로여서 반가웠던 뜻. / 책 소개 글에 '나무들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유계영 시인의 시선을 닮았다. 큰 나무 사이로 스민 빛 덕분에 작은 풀들이 자라날 수 있듯, 시인의 시선은 삶의 작은 기척들이 한 편의 글로 쓰일 때까지 오래 살핀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책 다 읽고 나서 소개 글 다시 보면 표현 하나하나가 마음에 스며든다. 작디작은 섬세한 시선 아름다운 문장에 마음을 빼앗기는 잔잔한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추천하는 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