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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명산 금강산 유람기
이 책은
이 책 『천하제일명산 금강산 유람기』는 금강산 유람기인 『영악록』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저자는 정윤영(1833~1898)은 <경기도 화성 출신으로,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군조君祚, 호는 석화石華·후산后山이다. 임헌회任憲晦의 문인으로, 이항로 학파와 교유하면서 심성이기론을 주기의 입장에서 피력했다. 또한 신사척사운동 때의 소장에 연루되어 함경도 이원현에 정배되었다. 소중화 의식을 담아 《화동연표》 등을 저술했고 애국우민의 마음으로 《위방집략》 등을 썼다. 특지로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은 채 포의로 일생을 마쳤다.>
이 책의 내용은
물론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뜸하지만, 여행이 보편화되어서 그런지 많은 여행기를 읽게 된다.
이 책은 시대만 다르다뿐이지 그런 여행기이다. 금강산을 둘러보고 기록한 『영악록』이 원전이다. 그걸 한글로 번역해 놓은 것인데, 1833~1898년 조선 시대를 살았던 저자가 보고 쓴 것이니, 지금의 경향과는 다른 점이 많다.
우선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저자가 인용한 수많은 중국 고전들이다. 금강산을 보고 기록하면서, 저자는 중국 고전에서 많은 구절들을 빌려와 금강산을 묘사한다.
그리고 그 감회를 두보(杜甫)의 시를 인용해 표현한다.
그렇게 해서 이 책에서 수많은 고전과 고전의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해서 저자가 다녀온 금강산을 같이 구경하는 것도 좋았지만, 저자의 글 여기저기에서 발견하는 고전의 풍미를 또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이 책에서 발견하고, 음미하고, 깨달은 것이 무척 많은데 그중 몇 가지 적어둔다.
치도(馳道), 여기서 발견한다.
위의 글 원문은 이렇다.
역자는 그 말에 대하여 이런 설명을 붙여 놓았다.
치도는 진나라 황제인 진시황이 치적으로 내세우는 것 중 하나인데. 중국을 통일하고 중국 전역을 다스리기 위해 빠른 정보 전달을 위해 도로를 건설했는데, 그게 바로 치도(馳道)다. 도로 한 복판에 말이 달리기 좋게 도로를 조성한 것으로, 그래서 치도(馳道)의 치(馳)에 말 마(馬)자가 들어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그 치도를 만난다. 해서, 중국의 치도가 조선에서는 ‘보통 말이니 마차가 다니는 큰 도로’를 말한다는 것, 알게 된다.
아, 그게 『논어』에서 비롯된 것이구나
임진일 아침에 비로봉으로 향하려고 해 승려에게 길을 물으니, 승려들이 모두 “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여 결국 가지 못한다. 이에 이런 감회를 덧붙인다.
이 문장에서 인용된 저자의 발언은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논어』 <자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 글을 읽고나니 스승의 노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스승의 은혜> 가사가 바로 논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 이제 알게 된다.
『맹자』 한 구절, 그 뜻을 깨치다.
『맹자』 <진심>(하)에 이런 구절이 있다. (진심, 하, 14-35)
이 책에서 역자는 이를 이렇게 번역했고, 해설을 붙여 놓았다.
이런 해석에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인다.
『맹자』 한 구절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의미를 새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 비로소 깨닫게 된다. 이 말의 뜻 - ‘위축되지 말아야 한다’ - 을 여기에서 제대로 새기게 되었으니 의외의 수확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산에 제 이름 새기는 건 매한가지
저자의 탄식 소리 들리는 듯한데, 읽어보자.
저자의 인생이 담겨있다.
이 말이 어찌 산수와 목석에게만 해당하겠는가? 저자 정윤영의 삶을 살펴보니, 이 말은 분명 그가 인생을 살아보고 난 뒤 얻은 인생관이 아닐까 생각된다.
덧붙일 것은, 조선조 말의 정치에서 저자가 취한 척화의 신념이 이 책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여러 가지 언급도 그래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해서 이 책을 다만 금강산 여행기로만 읽을 게 아니라, 인생을 관조하는 선비의 인생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시, 이 책은
원래 이 책은 가을이라 읽고 싶었던 책이다. 가을엔 금강산에 단풍이 유명하다고 정평이 나서, 가을에는 금강산을 풍악산(楓嶽山)이라 부른다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못가보는 금강산 단풍을 와유(臥遊)하고 싶었다. 해서 이런 구절로 그런 나의 심사를 달래본다.
그렇게 단풍이 든 금강산, 이 책으로 다녀왔다. 그러니 저자의 이런 말,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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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과 분량 모두 우리나라 유람기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꼽힌다는 글을 만날 수 있는 이번 도서. 1897년 51일 정도 금강산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부터 시작하여 돌아오는 과정까지의 기록을 1800년대 우리나라의 문인의 기록을 통하여 만날 수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책에서 전달하는 전체적인 내용이 결코 쉽지는 않다. 낯설 수 있는 한자 표현과 고전어가 다양하게 들어가 있어 해석하며 읽어가야 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각주와 같은 소개와 설명이 풍부하게 들어가 있고, 다양한 작품과 사진을 넣어 시각적인 부분을 떠올리며 읽을 수 있게 도와준다. 그래서인지 원문의 느낌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최대한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고려하고 번역하였다는 점이 장점으로 다가왔던 책. 보통은 학문적인 부분에 치중하다보니 이런 시각적인 자료나, 쉽게 읽고 이해하는 부분을 놓치지 쉬운데에 반해 많이 고려하였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 역자이신 박종훈 선생님이 여러가지로 고민하며 만드셨을 것 같다. 여담으로 국문학 전공자로 이야기하자면, 선생님의 다음학기 수업 강의와 교재는 이것일 것 같다는 생각을 살짝 해보는데! 고전문학을 공부할 때 프린트와 해설 스터디 등이 힘들었던 나오는 이렇게 책이 출간되는게 너무나도 부럽다. 하지만 저는 일단 졸업을 한지 오래되었고요. 헤헤 )
특히 혼자서 읽는 것보다 해당 분야를 전공으로 하고 있거나 관심있는 분들이 스터디 형식으로 함께 읽고 공부해나가면서 추가로 가지를 치듯히 함께한다면 더 빛을 발휘할 것 같은 느낌의 내용과 도서다. 이를테면 이번 작품은 금강산에 대한 이야기만을 중점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배경과 개인적인 경험, 유배 등의 이야기를 모두 접할 수 있다. 거기다가 시정 ( 한시라고 표현해도 될지 기억이 가물하여 책 소개에 있는 '시정'이라는 것을 빌려 썼다. ) 작품도 다양하게 들어가 있어 구성이라거나 형식 등을 참고하기에도 좋다. 1800년대의 유람기 그 이상의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번 도서. 어렵지만 해당 분야를 공부하는 분들에게 값진 자료가되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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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금강산을 떠올리면 어린 시절에 배웠던 노래부터 떠오른다. 그만큼 친숙하지만 갈 순 없어 괜스레 멀게 느껴지는 것이 금강산이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여느 때나 갈 수 있는 곳이 금강산이었다. 지금은 분단 국가로서 중국을 통해서야 갈 수 있는 그곳이지만 책으로나마 여행해보는 것은 어떨까? 여행 일지 남긴 블로그를 찾아가 살펴보듯이, 금강산의 여정을 담은 『천하제일명산 금강산 유람기』를 읽다보면 옛날판 여행일지를 보는 느낌이 절로 들 것이다.
저자, 정윤영(1833~1898)은 경기도 화성 출신으로, 본관은 초계, 자는 군조, 호는 석화·후산이다. 임헌회의 문인으로, 이항로 학파와 교유하면서 심성이기론을 주기의 입장에서 피력했다. 또한 신사척사운동때의 소장에 연루되어 함경도 이원현에 정배되었다. 소중화 의식을 담아 《화동연표》 등을 저술했고 애국우민의 마음으로 《위방집략》 등을 썼다. 특지로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은 채 포의로 일생을 마쳤다.
⊙ 안성에서 영평까지의 기록. (8월 16일 ~ 8월 27일) ⊙ 영평에서 장안사까지의 기록. (8월 28일 ~ 9월 1일) ⊙ 백천동을 지나 영원암에서 쉬다가 다시 장안사로 돌아오기까지의 기록. (9월 2일) ⊙ 장안사에서 백화암과 표훈사 및 정양사를 거쳐 다시 표훈사로 돌아오기까지의 기록. (9월 3일) ⊙ 표훈사에서 팔담과 보덕암을 지나 마하연암에 이르기까지의 기록. (9월 4일) ⊙ 마하연에서 원통암, 수미탑, 가섭봉을 지나 다시 마하연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기록. (9월 5일) ⊙ 묘길상을 지나 안문령을 넘어 유점사에 이르기까지의 기록. (9월 6일) ⊙ 유점사에서 선담과 내원을 지나 고성에 이르기까지의 기록. (9월 7일 ~ 9월 8일) ⊙ 고성에서 신계사와 구룡연을 지나 만물초에 이르기까지의 기록. (9월 9일 ~ 9월 11일) ⊙ 만물초를 떠나 총석을 바라볼 때까지의 기록. (9월 12일 ~ 9월 17일) ⊙ 총석에서 안성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기록. (9월 18일 ~ 10월 8일)
(저자의 입장에서 본) 안성에서 영평까지의 기록
시집 간 누이의 집에 잠시 들러 이틀을 머물고 다음 날 길을 나서 길을 포천에 도착했다. 포천에 도착하고선 최익현을 만났다. 꼭 오랫동안 만난 벗인 것마냥 최익현과 함께 그간 살아온 날들을 이야기하며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다음 날 길을 나서 영평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살고 있는 이덕수 집에서 하루 묵게 되었다. 8월 25일, 창옥병을 거슬러 동쪽으로 2-3리 정도 가고 나니 산을 둘러 시내가 굽이쳐 흘러가니 그 경치가 매우 아름답고 시원했다. 또한, 시내 입구에 우뚝 서 있는 석벽을 보고 있으니 예전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것처럼 활짝 트인 광경과 그윽한 광경을 동시에 만들어내 아름답고 오묘했다. 8월 26일, 아침 일찍 출발해 송경점에 도착했다. 그 길을 따라 20리 정도 간 후에 왼쪽으로 꺾어 쭉 걸어가니 화적연이 보였다.
예전에 바위의 모습이 볏짚을 쌓아둔 것 같으므로 '화적(볏가리)'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들었는데, 큰 바위가 산에서 구불구불 내려와 물로 들어가려다가 갑자기 머리를 높이 쳐들고 마치 물을 건너려하는 것 같고, 꼭대기는 사슴 머리의 뿔처럼 갈라져 있었다. 산의 등과 옆구리 쪽에서 완만하게 나와 너럭바위가 평평하고 드넓으며 한 줄기 흰 선이 똥구멍에서 등뼈를 타고 올라간다. 바위의 좌우 옆구리 아래로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연못이 있는데, 아마도 용이 사는 곳인가 싶다.
2-3리를 더 가 경허점에 도착했는데 그 길을 놔두고 동쪽으로 10여 리를 가니 삼부연이 나타났다. 물줄기가 길진 않지만 물과 바위가 굉장히 웅장했다. 물줄기가 용화동 입구에서 나와 서쪽으로 흐르다가 그 아래 바위를 만나 두 층의 못이 되는데 마치 검푸른 빛이 꼭 공포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아! 그 아래의 못까지를 아울러 삼부연이라 부른다고 한다. 시냇물을 따라 동쪽으로 좀 가니 산이 펼쳐보이고 평지가 나왔는데 뽕나무와 삼나무가 밭두렁을 이루었고 시야가 활짝 트여 이곳이야말로 무릉도원이 아닌가 싶었다. 그곳에는 호음 정사룡의 후손인 정기하가 거주하고 있어 잠시 들렀는데 하루 묵고 가라며 힘주어 말하는 통에 그 따뜻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곳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저자의 입장에서 본) 마하연에서 원통암, 수미탑, 가섭봉을 지나 다시 마하연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기록
9월 5일, 원통암으로 가기 위해 만폭동의 청학대 아래에서 왼쪽으로 길을 들어서 나아갔다. 조금 올라가니 바로 청호연이 나왔고 이어 용곡담이 보였다. 거센 물결이 내리 퍼붓는 모습을 보는데 그 둥근 것은 병 모양을 이루고 굽은 것은 용 모양을 이루었다. 용추 위쪽이 구류연이며 원통암이 거기에 있었다. 동북쪽으로 수미봉과 혈망봉, 망군봉 같은 봉우리도 보였다. 원통암에서 북쪽으로 향하면 만절담, 태상동, 자운담, 적룡담, 우화동, 청룡담이 보이는데 청호연, 용곡담과 함께 수미봉의 팔담이라고 칭한다. 아! 바위 모두에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자운담에서 왼쪽으로 길을 나서니 진불암의 유허지가 나왔는데 들어갈수록 경치가 참 기이했다. 여기서부턴 돌 길이 꽤 험준했다. 이렇게 쭉 가보니 선암이 나왔다. 붉은 벼랑과 푸른 절벽이 좌우에서 빙 두르고 있어 선암 자리가 조망이 가장 좋은 곳이었다. 원통암을 지나 절벽 틈 사이를 따라 꽤 위로 올라가보니 수미암이 있었다. 수미암은 경치가 활짝 열려 있고 바위들이 꽤 가파랐다. 여의암이 내려다보였고 저멀리 능인봉과 다섯 수미탑이 앞쪽에 줄지어 있었다. 수미탑은 수미암에서 동쪽으로 꽤 올라가야 하는데 비탈진 돌길이 험하고 선암이 보인다. 켜켜이 쌓인 바위를 굽어보니 겹겹이 쌓인 영롱한 흰빛이 마치 민가에서 제기에 음식을 쌓아놓은 듯 했다.
☞ 바야흐로 SNS의 시대라, 우리는 여행지를 정하는 것부터 여행지의 명소, 맛집까지 인스타그램 혹은 유튜브 등을 통해 접한다. 예전같으면 해외여행은 물론 국내여행도 책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지만 요새는 인터넷으로 쉽게 접하다보니 국내 여행지의 경우 책으로 정보 수집하는 수요도가 현저히 줄었다고 볼 수 있겠다. 해외 여행지의 경우는 (현재 코로나 상황을 감안하면) 간접적으로나마 여행하고 싶은 사람들과 더불어 곧 가려고 할 여행지라 생각하고 염두하며 보기 때문에 국내여행을 다룬 책과는 달리 그나마 수요도가 유지되고 있는 듯하다. (여담이지만, 해외여행과 관련된 책을 굉장히 많이 읽는 편인데 이만큼 읽다보니 인기 있는 여행책들은 다 비결이 있었던 것 같다.) 유튜브에서 금강산 브이로그 한 편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어 간략하게 줄거리를 모아 짤막한 브이로그 영상을 만들까 했는데 소요시간이 길어지는 것 같아서 포기했다. 평소같으면 책에 대한 내용을 요약해 올리는데 이 책은 말그대로 여행일지라 요약할 것도 없어 대신 단답식으로 저자의 입장에서 본 일지를 옮겨보았다.
사계절의 절경을 흠뻑 느낄 수 있다는 금강산은 북한, 중국을 통해서나 볼 수 있으니 아마 앞으로도 볼 수 있는 가능성은 현저히 적다. 그러나 내게는 책이 있지 않는가! 책을 읽고 있으면 머릿 속에서 금강산의 절경이 한눈에 그려져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등산은 못하지만 산은 좋아한다. 꼭 정상에 오르지 않더라도 산길만이라도 걷고 있으면 항상 보고 듣고 느끼던 것들이 어느새 잔잔함으로 가득 차 마음 속 짐이 쑤욱 내려간다. 깊게 들여마시고 싶은 맑은 공기 그리고 높이 뻗은 나무들이 주는 울창함과 그 속에서 들리는 짹짹 소리, 산 밑으로 졸졸 흐르는 물 소리까지! 산은 소리까지 완벽하다. 마지막으로 갔던 산이 청계산이었는데, 선선한 날씨를 벗 삼아 산행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니 날을 한 번 잡아야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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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여행 좀 한다는 사람들에게 금강산은 언제나 손에 꼽히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도 금강산 유람은 시인 묵객들의 평생 소원 중 하나였으며, 지금 시대에도 휴전선 너머로의 금강산 여행은 언제쯤 갈 수 있을지 막연한 바람일 뿐이다. 춘하추동 계절에 따라 ‘금강산(金剛山)-봉래산(蓬萊山)-풍악산(楓嶽山)-개골산(皆骨山)’으로 불리우는 금강산을 언제쯤 가볼 수 있을지… 그래서일까. 발로는 언제 직접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글로 먼저 금강산을 가볼 수 있는 이 책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이 책은 조선시대 문인 후산 정윤영(1833~1898)이 금강산을 여행하고 돌아와 쓴 <영악록>을 해석해놓은 책이다. 저자인 정윤영은 65세이던 1897년 8월 16일~10월 8일 사이에 금강산을 여행하였고, 여행 중에 남긴 간략한 기록과 기억을 토대로 같은 해 10월에 <영악록>을 저술하였다. 후산은 총 51일 1,700리에 걸친 금강산 유람을 여정별로 기록하였으며, 우리는 그의 여정을 따라 안성에서 장안사, 표훈사, 보덕암과 마하연암, 묘길상과 유점사 등 금강산의 명소들을 두루 돌아보게 된다. 여정은 다르지만, 옛사람의 글이라 그런지 최남선의 <심춘순례(尋春巡禮)>에서 남쪽의 금산사, 백양사, 내소사, 선운사 등을 돌아볼 때의 느낌이 겹쳐지기도 했다.
정윤영은 유람 중 지은 시편을 통해 자신의 소회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김창협, 이의현, 이곡 등 ‘전대(前代) 문인’들의 기록을 많이 수용하였다. 특히 중국 학자들이 중국 산수에 대해 남긴 기록을 많이 인용한 점이 눈에 띈다. 초반에 소개되는 해제에 중국의 참고 서적이 훨씬 많아서 좀 의아했는데, 이는 <영악록>의 특징이었다. 저자는 중국 산수에 대한 기록과 여러 번 비교하며 금강산의 절경이 더욱 우위에 있음을 말하곤 한다. 이는 자신의 표현보다 전인(前人)의 표현이 더 뛰어나다는 겸손의 표시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한편으로는 척사사상가이자 중국 중심적 세계관을 지닌 성리학자로서 중국 문학에 대한 박학함을 드러내는 일면으로도 보인다.
책은 정윤영이 안성에서 출발해서 돌아오기까지 51일간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금강산 유람에서 돌아온 뒤 여행 중에 쓴 기록을 토대로 여행의 경험을 떠올리며 쓴 글이어서 그런지 여행기도 차분하고 안정적으로 읽힌다. ‘금강산’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마음은 이미 설레고 있기에 여정을 먼저 경험한 안내자의 기록이 차분한 것이 오히려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높여준다. 여러 시편과 금강산의 옛 모습을 알 수 있는 사진 및 서화 작품들이 사이사이 실려 있는 점도 무척 좋았다. 책 말미에는 <영악록> 한문 원문이 첨부되어 있어 자료가 필요할 때 볼 수 있을 듯하다. 지금은 눈으로 읽었지만, 언젠가는 이 책의 여정을 따라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두 발로 직접 가보게 되는 기회가 있기를 빌어본다.
---------------------- * 책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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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절경을 기록한 금강산 유람기! 산수를 통한 성찰과 회고! 천하제일 명산 금강산 유람기의 저자 정윤영은 조선 후기 문인으로 이 책의 부제인 영악록은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적어놓은 기록을 바탕으로 한 유람기로 1897년 8월 16일 안성을 출발해 10월 8일 귀향할 때까지의 총 51일 1,700리 여정에 관한 기록으로 여정별로 기록하고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 유람은 날짜별이 아닌 여정별로 기록되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백화암 마하연, 만물초, 총석등에 이르기까지 금강산 여정을 소개하고 있어 흥미진진하게 따라가 보면서 그 아름답고 경이로운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 그 정취에 빠져들게 하네요. 금강산의 아름다운 절경은 중국 산수유기등을 적극활용하여 간접 방식으로 묘사해서 금강산의 수려한 경관을 상상하는데 도움이 되고 흥미롭게 볼 수 있었어요. 금강산과 관련된 시작품도 만나보고 그림과 풍부한 사진까지 시각적으로 접근해서 볼 수 있어 좋았어요. 금강산 4대 폭포중 절경으로 꼽는 구룡폭포 외에도 비봉폭포, 쌍봉폭포등 저마다의 아름답고 개성있는 모습들을 만나보면서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멋진 풍광에 시선을 빼앗기네요. 총석 귀신 같은 솜씨로 쪼개고 깍아 내어 물가 이곳저곳에 곧게곧게 세웠네 조만간 상제가 멋진 주춧돌 구할 것이니 비바람에 늙어가지 않았으면(p190) 해산도첩 총석과 총석정에서 바라본 사선봉의 모습도 만나볼 수 있는데 주상절리로 이루어진 바위기둥과 절벽의 모습과 그곳에 있는 정자까지 기이한 절경의 매력 속에 빠져들게 하네요. 부록으로 만나볼 수 있는 시편과 내금강산과 외금강산의 유람 노정과 영악록 탈초 원문까지 실려있어요. 금강산 여정에 대해 상세하게 수록되어 따라가 보면서 각 풍경에 대해서 설명해줘서 금강산 유람을 하는 것 처럼 몰입감 있게 보면서 저마다의 특색과 다채로운 모습들이 담겨있는 금강산절경을 입체적으로 접근해서 관심있게 볼 수 있었어요. 금강산 유람을 통해서 그동안 잘 몰랐던 금강산의 모습들을 다채롭고 아름다운 모습들을 시각적으로 즐기고 감성적으로 다가갈 수 있어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수류화개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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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 가보고 싶어하는 명산. 바로 금강산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지금 금강산은 북한땅이고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한때는 금강산 관광이 가능한 때도 있었지만 우리나라 여행객이 북한군 총격으로 사망한 사고 이후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었고 여지껏 재개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북한도 시장경제로 개방이 되어 자유롭게 금강산 관광을 할 수 있기를 바라보지만 희망으로 그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이 책 <영악록-천하제일 명산 금강산유람기>는 조선후기에 살았던 정윤영이라는 분이 금강산을 여행하고 쓴 책이라고 하는데, 이 책은 1897년 8월 16일 안성을 출발하여 10월 8일 귀향할 때까지의 총 51일 1,700리 여정과 관련된 기록이다. 저자는 금강산을 보기 전에 봤던 산들은 한낱 흙덩이와 돌무더기였음을 강조하기 위해 명나라 오정간의 언급을 인용했다. 금강산이 정말 대단하기는 대단한가 보다.
이 책에서는 <영악록>의 의의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가장 특징적인 일면은 전대의 금강산 관련 유기나 단편작품 및 산수유기의 기록을 대폭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김창협의 <동유기>를 중심에 두었다. 여정이나 풍경점, 혹은 그곳에서의 감회를 서술하기보다는 다른 차원의 논의를 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여타의 유기와 변별되는 정윤영 <영암록>만의 특징이다. 또한 간접적으로 금강산을 소개하면서 중국 기록을 언급한 것은 금강산이 비교 우위에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암벽에 새겨진 수많은 이름, 정자에 걸린 작품을 보면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자 몰두한 동국의 습속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고 이런 자세는 진정한 산수유람의 자세가 아니라는 입장을 정윤영은 갖고 있었다. 정윤영의 자연에 대한 시각은 시대를 앞서가고 있었다는 느낌이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여행을 가서도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등의 악행(?)을 저지르고 있으니 말이다.
정윤영의 유람 여정도는 다음과 같다. 안성 - 광주 - 포천 - 영평 - 금성 - <금강산 여행> - 고성 - 해금강 - 외금강 만물초 - 통천 - 안변 - 회양 - 금성 - 춘천 - 양근 - 이천 - 죽산 - 안성. 그리고 금강산 여정도는 다음과 같다. 단발령 - 장안사 - 명경대 - 영원암 - 장안사 - 삼불암 - 표훈사 - 정양사 - 표훈사 - 만폭동 - 보덕굴 - 마하연암 - 만회암 - 백운대 - 마하연암 - 원통암 - 수미암 - 가섭동 - 마하연암 - 묘길상 - 사선대 - 배점 - 유점사 - 만경대 - 고성 - 해금강 - 삼일호 - 고성 - 신계사 - 구룡연 - 신계사 - 온정리 - 만물초 - 통천 - 총석정. 조선시대이니까 이런 금강산 여행이 자유로울 수 있었겠지만 이젠 언감생심 이런 여행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인 것이 정말 안타깝다.
금강산 유람기는 모두 12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1장 안성에서 영평까지의 기록에서 시작하여 12장 총론으로 마무리된다. 일정별로 정리하여 여정별로 상세한 묘사를 통해 후대인인 우리 세대가 읽어도 책을 통해 금강산의 수려한 모습이 머릿 속에 그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중간중간 곁들여진 시는 금강산의 모습을 감성적으로 나타내고 있어서 유람기를 읽는 것인지 시집을 읽는 것인지 다소 헷갈리게 하는 느낌도 들었다.
화적연 가파른 바위가 물 속으로 달려들어
이 책을 읽고 나니 금강산에 다녀오지 못한 것이 매우 한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금강산 관광이 가능했을 때 우리회사의 많은 직원들이 연수겸 해서 금강산 관광을 다녀온 적도 있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록 책을 통해서였지만 금강산의 수려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서 좋았고 언젠가는 통일이 되어서(비록 통일이 되지 못하더라도) 북한 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금강산이 수려한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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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명산 금강산 유람기
나는 평소 멋진 산수를 대단히 좋아했다. 그러나 중년 이래로 가난과 병에 실다려 사방을 맘껏 유람하고자 하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겨우 동쪽으로는 치악산, 북쪽으로는 칠보산, 남쪽으로는 속리산과 계룡산, 서쪽으로는 천마산과 수양산을 유람하여, 사방 수천 리 안에 명성이 자자한 장소에 발자취를 절반 정도 남겼다. 그러나 오직 관동의 풍악산은 가 보고자 했지만 하직 가지 못하여 살아생전의 빚으로 남은 지 오래였다.(8면)
동서남북의 명성이 자자한 산을 나는 여지껏 한 곳도 가보지 못했다. 조선시대 교통이 엄청 불편했을 당시에도 산수를 좋아하는 이들은 동서남북으로 명산을 찾아 유람을 다녔는데, 교통이 편리한 첨단 시대에 살면서 나름 산을 좋아한다고 자부하면서도 치악산과 칠보산, 계룡산, 천마산은 근처에도 가 보지 못했다. 옛 사람들의 산수기를 읽다보면, 여유와 멋, 낭만이 느껴지는데, 그 여유와 멋을 부러워하면서도 왜 나는 명산을 가보지 못했을까 새삼 후회가 밀려온다.
금강산 정말 멋있는 이름이다. 일만이천봉은 산 중에 오직 금강산에서만 붙을 수 있는 수식어이다. 세상살이에 아쉬운 것이 많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아쉬운 것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금강산이 북녘 땅에 있어 가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하여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지만, 딱 하나, 조선시대 금강산을 가본 문인들과 북한에 있는 금강산을 가 직접 가본 사람들이다. 물론 금강산을 사진이나 그림으로 접해 보았지만, 실물과 그림, 사진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봉우리는 모두 수십 개의 바위가 묶인 형상인데, 기둥은 네모져서 반듯하니, 어떤 것은 6면이며 어떤 것은 4면으로 먹줄을 먹여 도끼로 잘라낸 것 같았다.…조물주가 이런 솜씨를 동해 한 모퉁이에만 베풀어 그 승경을 돋보이게 한 것은 어째서인가.(~194면)
옛 문인들이 가서 보고 느낀 점들을 글이 아닌 실제 금강산에 가서 그 실물을 보게 된다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문득 허전하고 아쉬운 생각이 든다. 나는 옛 글을 좋아하고 산을 좋아한다. 옛 문인들이 쓴 <산수유람기>는 정말 좋아하는 문학 장르이다. 옛 문인들이 남긴 산수유기를 읽다보면, 그들은 산에 오르면서도 여유가 있었고, 멋이 있었고, 흥이 있었다. 요즘 산악인들이 산에 오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신발도 장비도 변변찮찮을텐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끊임없이 명산대천을 유람하면서 자신들이 보고 듣고 느낌 바를 가감없이 사실 그대로 기록을 남겼다. 금강산 유람기는 참으로 아름다운 책이다. 이 책에는 조선시대 금강산의 아름다운 매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금강산 유람기는 정윤영이란 선비의 <영악록>이라는 책을 번역한 것이다. 1897년 8월 안성을 출발하여 10월 귀향할 때까지의 총 51일 1,700리 여정을 기록한 것이다. 연암이 중국 북경과 열하를 여행하며 쓴 일기처럼 정윤영 또한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일정과 여정, 감회를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유람 여정도와 금강산 여정도을 보며 관련 기록을 읽다보면 옛 선비들이 산수 유람을 어떻게 했는지 소상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지척에 금강산 두고 가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슬픔으로 다가온다. 금강산이 우리나라에 있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금강산이 있는 금강산과 가까운 강원도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겼을지도 모르겠다. 금강산 꿈에서나마 꼭 가보고 싶은 산이다. 천하제일 명산 금강산 유람기를 읽으며 아름다운 금강산을 머리 속으로 그려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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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산 정윤영은 조선말기 인물(1833-1898)로 관직 자리를 명받았지만 사양하며 나가지 않았다. 율곡 이이와 송시열의 학문을 추종하며 지남철로 삼았다. 평소 멋진 산수를 대단히 좋아했던 후산은 1897년 8월 16일부터 10월 8일까지 총 51일 1700리 여정으로 금강산을 유람하고 <영악록>으로 엮었다. 그가 남긴 기록으로 수려한 절경이 눈과 마음속에 온전하게 펼치게 되길 기대하며 그의 견문과 감동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후산은 사전 조사로 금강산 유람과 관련된 선인들의 기록를 십분 참조했는데, 특히 1671년 유람기 농암 김창협의 <동유기> 내용을 적극 수용하여 많은 부분이 인용되어 있는 것을 알수 있다.
남북 대치후 금강산 관광이 잠시 열렸던 시기가 있었지만 뛰어난 일만 이천봉의 수려함을 후산의 <영악록>에서 고스란히 묘사해주고 있다. 거기에 플러스 알파, 배경 스토리와 첨부된 그림과 사진은 더 실감나게 한다. 비록 120년전의 풍경 묘사지만 그 빼어난 금강산의 유람기는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기록이다. 지금은 갈수 없는 금강산을 인플루언서 후산 정윤영의 현장감있는 <영악록>으로 다녀오길 추천해본다.
"절벽에 구름 끼었고 잔도는 매달려 있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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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선비의 천하제일명산 금강산 유람기
도서출판 수류화개에서 출판한 정윤영 선생의 <영악록瀛嶽錄>은 금강산 유람기이다. 정윤영 선생(1833~1898)은 생몰 연도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후기 철종과 고종 치세 기간에 살았던 분이다. 유학자로 스승 임헌회로부터 석담 이이와 화양 송싱열의 호에서 한 글자를 딴 ‘석화’를 정윤영의 재호로 삼았다.
정윤영은 이이와 송시열의 학문을 추종하였고 삶의 나침반으로 삼았다.
1871년 경기도 안성 후산으로 이사했으며 인근 유생과 교류했다. 1857년 모친상을 당해, 안성 후산에 장사지냈다. 이후 호를 ‘후산’이라 했다. 1881년 개화에 반대하는 신사척사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두 차례 소장을 올렸다. 이 일로 함경도로 유배 길에 올랐다. 1883년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1893년 의금부도사, 성균관직강에 임명되었지만 나가지 않았다. 63세가 되던 1895년 갑오개혁의 하나로 신식 의복제도가 반포되자 의제의 복원에 시사를 논하는 소장을 올렸다. 8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당시의 일을 기록으로 남겼다. 1897년 가을, 내외금강 및 삼일포 등 동해를 유람했다. 이때 남긴 기록이 <영악록>이다.
한평생 벼슬에 나서지 않았으나 존경받는 학자였고, 척화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굳건하게 지켰음을 남긴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영악록>은 1897년 8월 18일 안성을 출발하여 10월 8일 귀향할 때까지의 총 51일 1,700리 여정과 관련된 기록이다.
* 안성에서 영평까지의 기록 (8월 16일 ~ 8월 27일) * 영평에서 장안사까지의 기록 (8월 28일 ~ 9월 1일) * 백천동을 지나 영원암에서 쉬다가 다시 장안사로 돌아오기까지의 기록 (9월 2일) * 장안사에서 백화암과 표훈사 및 정양사를 거쳐 다시 표훈사로 돌아오기까지의 기록 (9월 3일) * 표훈사에서 팔담과 보덕암을 지나 마하연암에 이르기까지의 기록 (9월 4일) * 마하연에서 원통암, 수미탑, 가섭봉을 지나 다시 마하연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기록 (9월 5일) * 묘길상을 지나 안문령을 넘어 유점사에 이르기까지의 기록 (9월 6일) * 유점사에서 선담과 내원을 지나 고성에 이르기까지의 기록 (9월 7일 ~ 9월 8일) * 고성에서 신계사와 구룡연을 지나 만물초에 이르기까지의 기록 (9월 9일 ~ 9월 11일) * 만물초를 떠나 총석을 바라볼 때까지의 기록 (9월 12일 ~ 9월 17일) * 총석에서 안성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기록 (9월 18일 ~ 10월 8일)
마침 박경리 선생의 <토지>를 읽는 중이라 조선 후기 선비가 금강산에 유람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개략적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나라는 급변하고 자신의 이상으로 믿어왔고 평생 공부한 신념이 새로운 도전을 맞이해 심란함을 느꼈을 것이다.
민족의 영산이라는 금강산 곳곳을 둘러보며 평소 산수를 좋아한 그가 기암절벽과 폭포로 이루어진 금강산을 보고 감탄했을 것이다.
금강산 관광이 활성화되었을 때 친구가 당시 금강산 관광시설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터라 꼭 한번 다녀오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영악록>에서 소개하는 금강산의 산수와 기암절벽을 보고 있으니 한반도의 명산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만물초는 내달리는 봉우리와 어지러운 산등성이가 나란히 달려와 사람에게 덤벼드는 듯한데, 삐쭉삐쭉 구름 위로 솟은 것은 바라보니 모두 바위였다. 이것을 구만물초라고 부른다. (177쪽)
특히 총석정에서 바라본 사선봉은 장가계의 우뚝 솟은 봉우리와 흡사하거나 오히려 더욱 특이해 보였다. 그림과 사진으로 보기에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저자의 설명을 살펴보자.
봉우리는 모두 수십 개의 바위가 묶인 형상인데, 기둥은 네모져서 반듯하니 어떤 것은 6면이며 어떤 것은 4면으로 먹줄을 먹여 도끼로 잘라낸 것 같았다. 길고 짧은 것, 두껍고 얇은 것, 크고 가는 것들이 서로 무리지어 정돈되어 있으니 마치 대쪽을 엮어 놓은 것만 같았다. 사선봉만 그런 것이 아니라 총석정 주변 2~3리는 사방으로 쭉 펼쳐져 있는 것은 모두 이러한 모습을 띠고 있으니, 이는 귀신이 깎아 그렇게 만든 것인가. 아니면 풍월의 도끼가 만든 것인가. (192쪽)
금강산 관광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영악록>에 소개하는 금강산의 모습을 새기려 꼭 한번 방문하고 싶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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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오래전 조선시대에서도 '여행자'는 있었다. 때문에 옛 한반도를 여행한 수 많은 기록 중에는 위의 '영악록'과 같은 산수(자연)을 유람한 이야기도 있고, 또는 근대 서양인들의 여행기처럼 각 도시와 인간들(사회)의 삶을 바라보는 등 저마다 추구하는 바에 걸맞는 다양한 풍경들이 각각의 글 속에 녹아들어있다. 이에 쉽게 생각해보면 이 책의 주제는 크게 '자연을 유람한 기록' 이기에 오늘날과 비교하여 독특함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다만 현실적으로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지고 쉽게 갈 수 없는 나름의 특수한 한계가 그 빛을 발할 수 있게 하지만 그래도 사진 속 금강산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그 험난한 모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저자가 표현한 고개와 산봉우리의 모습 그리고 인간의 자취가 남아있는 절간과 불상이 아닌 오롯이 저자 정준영이 기록한 금강산...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가 바라본 금강산의 모습에 주목하고자 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의 여행기는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TV프로그램과 같이 다수에게 해당된 정보를 제공하는 내용, 다른 하나는 오롯이 자신의 존재에 있어 그 여행이 어떠한 가치를 가졌는가를 기록(오늘날에는 이를 공개하고는 한다) 하는 것이다. 이에 따지고 보면 이 책은 두번째에 보다 가깝다고 생각이 된다. 저자 스스로가 금강산을 마주하고자 하는 열망을 실현하고 또 그에 눈에 들어온 금강산을 묘사하면서, 때때로 그 내용은 일기가 되지만, 그럼에도 특별한 점이 있다면? 바로 저자가 조선시대의 선비로서 그의 지식과 정서의 눈으로 금강산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단순히 금강산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언가와 비교하고, 또는 우열을 가리기도 하며, 옛 시대의 역사를 거쳐 금강산이 자신에게 어떠한 생각을 들게하는가...하는 나름 근본 (성리학)에 기댄 감상을 적었다' 그 덕분일까? 이에 더더욱 시간이 지난 오늘날 영악록을 읽고 있자면, (오늘날의)독자들은 이를 단순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 뿐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저자와 독자 사이에 추구하는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허나 그렇기에 그 낮선 차이를 마주하면 '역사'가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비록 어느 사람들은 이를 고루하다 평가할지도 모를일이지만 결국 시대의 흐름 속에서 바뀌어가는 것이 인간의 관점과 가치관이라면... 그것을 더듬고 올라가 마주해보는 것 또한 학문으로서, 또는 여흥으로서도 해볼만한 가치를 지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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