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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대답이고 부탁인말..
"[84] 대답이고 부탁인말.." 내용보기
[ 가로등 끄는 사람 ]   새벽 다섯시는 외로움과 피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간 외로워서 냉장고를 열거나 관 속 같은 잠으로 다이빙을 해야 한다.   만약 외로운데 피곤하거나 피곤하지도 외롭지도 않다면 우리는 산책로의 가로등 들이 동시에 꺼지는 것을 보거나 갑작스레 시끄럽게 울어대는 새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잠시 뒤엔 불 꺼져 깜깜한 길을 힘차게 걸어
"[84] 대답이고 부탁인말.." 내용보기

[ 가로등 끄는 사람 ]


 

새벽 다섯시는 외로움과 피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간

외로워서 냉장고를 열거나

관 속 같은 잠으로 다이빙을 해야 한다.

 

만약 외로운데 피곤하거나

피곤하지도 외롭지도 않다면 우리는

산책로의 가로등 들이 동시에 꺼지는 것을 보거나

갑작스레 시끄럽게 울어대는 새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잠시 뒤엔 불 꺼져 깜깜한 길을 힘차게 걸어가는 암 환자가 보일 것이다.

구석으로 숨어든 어둠의 끄트머리를 할퀴는 고양이의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외로움과 피곤과 배고픔과 살고 싶음이 집약된,

더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열정으로 고양된 새벽,

죽고 싶지만 죽을 수 없는 열정으로 살아 있는 다섯시.

저기 어디 가로등을 끄는 사람이 있다.

고요히 다섯시의 눈을 감기는 사람이 있다.

 

[ 호밀밭의 파수꾼 ]


 

조각 이불 같은 햇볕을 덮고 자던 개가

갑자기 깨어 허공을 향해 컹컹 짖는다.

애를 재우고 나오다가 깬 아이를 다시 다독이듯

개집을 빠져나오던 햇볕이 개를 토닥인다.

두어 번 짖고 두리번거리다가 개는

모은 두 발 이에 턱을 고이고 다시 잔다.

이따금씩 귀만 쫑긋 일어났다가 다시 잔다.

 

꿈에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은 적 있다.

귀에 대고 현승아, 아버지는 영락없었다.

세 음절 목소리가 너무 선명해

벌떡 일어나 앉아 보니 오히려 멍했다.


 

나는 불행의 맛을 알지만

불안의 냄새는 더 정확하게 알고 있다.

확신이 필요한 사람들은

손톱을 물어뜯거나

겨드랑이나 사타구니에 손을 넣었다 빼 냄새를 맡아본다.

 

개를 깨운 것은 냄새였을까 소리였을까.

벗은 양말을 코로 가져가는 사람처럼

심증은 있지만 확증이 없는 자들은 자꾸만 킁킁거린다.

허공의 팔뚝엔 아직 개 이빨 자국이 선명한데

코끝으로 어디선가 시큰한 불안의 냄새가 스멀스멀 흘러든다.

 

[ 텅 빈 악수 ]


 

온기를 나르지 않는 악수를 나누며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다는 것을

 

솔잎의 여러 갈퀴를 두고

햇빛은 철철 흘러 내리지만

죽어서 가는 길엔

아홉 겹의 물길이 있다는 것을

나는 물에게서 배웠다.


 

배워도 수 없는 곳이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뼈아픈 후회인가.

 

그러니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자.

전날 너무 뜨겁게 엉긴 사람들이

다음 날 되레 서먹한 법이다.

 

흙탕물 위에 둥둥 떠서

무지갯빛을 되쏘는 기름방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 바닥이라는 말 ]


 

우리들의 인내심이 끝난 곳.

 

사는 게 도대체 왜 이러냐고 묻고 싶은 사람들은 하늘을 본다.

별 볼 일도 없는 삶이라서

별이라도 보는 일이 은전처럼 베풀어지는 거겠지만

 

사람이란

후회의 편에서 만들어지고

기도의 편에서 완성된다고 할까.


 

부드럽게 호소해도 악착스러움이 느껴지는,

그 많은 간구의 눈빛과 목소리를

신은 어떻게 다 감당하고 있는 걸까.

콩나물처럼 자라 올라오는 기도들 중에서

제 소원은요 다른 사람 소원 다 들어주고 나서 들어주세요.

하는 물러빠진 소원도 없는 않겠지만.

 

결국 우리가 발 딛고 선 곳

 

그러니까 풍문과 추문을 지나

포기와 기도를 지나

개양귀비 뺨을 어르며 불어오는 바람이

가까운 진흙탕 위로내려앉는 것을 본다

 

아무리 맑은 우물이라도

바닥 사정은 비슷하다.

그러므로 함부로 휘젓지 말  것.       

                                             

[ 영월 혹은 인제 ]

 

아픈 마음엔 풍경만한 것 없어라.

안팎으로 찢어진 것이 풍경이리라.

 

다친 마음이 응시하는 상처

갈래갈래 갈라져나간 산의 등허리를 보는 마음은

찢긴 물줄기가 다시 합쳐지는 것을 보는 무연함이라네.

거기, 어떤 헐떡임도 재우고 다독이는 힘이 있어

산은 바다는 계곡과 별들은 저기 있네.

 

크레바스 사이로 빨려들어간 산사람처럼

상처 속의 상처만이 가만히 잦아드네.

 

찢긴 풍경에겐 상처 입은 마음만한 것이 없어라.

외로운 사람의 말동무 같네 저 상처. 

 

 

[ 중요한 일 ]

떡갈나무 가지 끝에서 잎 나오는 걸 본다.

얼마나 힘센 속도로 봄은 오는가.


저 작은 눈 속에 저렇게 큰 잎이 다 접혀 있었던 걸 보면

봄은, 터질 수밖에 없을 때 터진 거다.

매번 하는 일인데, 한치의 어긋남이 없다.

위대한 자들이 쓰는 시간처럼 낭비가 없다.

협량한 자들은 곁에서 가만히 숨죽일 수밖에 없다.

화약고를 지키는 촛불의 마음으로.

하지만, 다 짠 치약처럼 온 힘을 다 써봤다면

제발 그걸 저절로, 라고는 생각하지 말자

 

...  소/라/향/기  ...

s******8 2021.11.07. 신고 공감 19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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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건네고 싶은 다정다감
"너에게 건네고 싶은 다정다감" 내용보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유난한 마음들이 담긴 시집을 읽었다. 온갖 종류의 아픈 것들의 대변자처럼 왜 슬퍼야 하냐며 위로를 건넨다. 편향적인 시선을 넘어 반대편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이편의 이야기를 하다가 저편이 이렇다고 역지사지를 한마디 더 한다. “냄새의 이편이 식욕이라면 저편은 구역질이다”(「미식가들」), “코를 고는 쪽이든 듣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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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유난한 마음들이 담긴 시집을 읽었다. 온갖 종류의 아픈 것들의 대변자처럼 왜 슬퍼야 하냐며 위로를 건넨다. 편향적인 시선을 넘어 반대편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이편의 이야기를 하다가 저편이 이렇다고 역지사지를 한마디 더 한다. “냄새의 이편이 식욕이라면 저편은 구역질이다”(「미식가들」), “코를 고는 쪽이든 듣는 쪽이든”(「마이닝 크래프트」) 등  

   

“존재”에 의미를 부여한다. “공기조차 표정을 갖고 있다”(「Bird View」에서) 공기에서도 존재를 찾는다. “없어서 더 분명 해지는 존재”, “필사적으로 내가 되어야”(「펜 뚜껑」) 존재하고 싶은 항변이다. “우선 존재는 하고 싶어요”(「플랜 B」)라고 이 시집의 주제 같은 말을 토해 내듯이 말한다. Bird View를 세 편이나 쓰면서 “분명한 목격과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음 사이에서 공기들이 갖는 최대의 밀도”(「Bird View」)라고 비밀을 말할 수 없음 같은 고백을 한다. 존재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느껴진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그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음을, 불안한 마음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음을 생각한다.     

 

  할 수 있었지만 안 한 것, 그게 바로 못한 것이다.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우리는 또 몰랐지.

  따뜻한 말 한마디, 악수라도 건넬 것, 도 아니고 

                                        ― 「자각 증상」 부분    

 

누군가를 황망히 보내고 후회 같은 걸 했을까? 존재하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부재로 인한 뒤엉킨 줄기들을 적다가 괜스레 영혼 따위를 끌어다가 “집을 안 산 것, 아니 못 산 것”이나 쓰고 앉아 있는 것은 아닐까 “가장 뼈아픈 후회”들을 “그때 손이라도 잡아줄 걸 지금은 없는 사람을 두고”라고 뼈아픈 후회를 한다.  

    

“외로움과 피곤과 배고픔과 살고 싶음”(「가로등 끄는 사람」)이라니? 그냥 사는 것이 아닐까? ‘살고 싶음’이라는 말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나는 불행의 맛을 알지만 불안의 냄새는 더 정확하게 알고 있다.”(「호밀밭의 파수꾼」)불행의 맛을 알다니? 불행을 예감하는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을 만큼 철두철미한 현실주의자지만”(「은유로서의 질병」)이 부분에서 큰 의문이 들었다. 사람이나 사물까지도 ‘존재’의 소중함을 주창하며 의미를 강조하던 시인이 갑자기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삶이란 늘 의미에 목말랐던 것”이라는 말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불운한 사람들에게 모자란 것은 인내심이며 참으로 다급한 쪽은 언제나 불운한 사람들”(「불운의 달인」)무슨 일 생기면 목소리부터 키우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아픔을 잠시 잊은, 언제고 불쑥 찾아올 아픔을 기다리는 나는 이따금 시가 이런 통증”(「다정다감」)이라고 말을 건넨다.   

   

위와 같은 시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시가 슬픔과 불행을 위로하는 시들로 묶여 있다. 그것이 아픔인지도 모르는 사람들 편에서 지지대 역할을 해주고 있는 이현승 시인이 있어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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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이고 부탁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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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승 시인의 네번째 시집 <대답이고 부탁인 말>을 구입했습니다. 이전에 출간하신 세권의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 『친애하는 사물들』, 『생활이라는 생각』 을 구매해서 소장했기에 네번째 시집도 소장하게 되었습니다. <아이스크림과 늑대>는 문학동네포에지 시리즈로 복간이 되기도 했는데 복간 시집도 구매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침대 옆에 놔두고 한편씩 아무데나 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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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승 시인의 네번째 시집 <대답이고 부탁인 말>을 구입했습니다. 이전에 출간하신 세권의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 『친애하는 사물들』, 『생활이라는 생각』 을 구매해서 소장했기에 네번째 시집도 소장하게 되었습니다. <아이스크림과 늑대>는 문학동네포에지 시리즈로 복간이 되기도 했는데 복간 시집도 구매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침대 옆에 놔두고 한편씩 아무데나 펼쳐서 읽고 있습니다. 좋아요. 

e*****e 2021.12.13.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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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이고 부탁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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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이현승 시인의 시집 대답이고 부탁인 말을 읽고 나서 쓰는 리뷰입니다. 예전엔 종이책으로만 보다가 시집이라 보는 게 크게 어려울 것 같지 않아서 이북으로 소장하게 됐어요. 너무 아쉬운 점이 하나 있는데 본문 편집이 이상해서 제목하고 시가 간격이 좁아서 예쁘게 정렬되지 않습니다. 문학과 지성사 시집도 이북으로 사고 문학동네 시집도 이북으로 샀는데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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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이현승 시인의 시집 대답이고 부탁인 말을 읽고 나서 쓰는 리뷰입니다. 예전엔 종이책으로만 보다가 시집이라 보는 게 크게 어려울 것 같지 않아서 이북으로 소장하게 됐어요. 너무 아쉬운 점이 하나 있는데 본문 편집이 이상해서 제목하고 시가 간격이 좁아서 예쁘게 정렬되지 않습니다. 문학과 지성사 시집도 이북으로 사고 문학동네 시집도 이북으로 샀는데 편집에서 차이를 느낍니다. 시는 제 취향의 시가 많았어요. 요샌 시를 읽어도 공감할 수 없는 게 대부분이었다면 이 시집은 시집 제목과 동일한 시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소장 가치가 있는 시집이었습니다.
l****a 2024.12.3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