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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하여 다시 묻고 답하다 <이반 일리치 강의>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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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은 ‘이반 일리치 강의’에서 인생의 변곡점마다 찾았던 사상가를 코로나 팬데믹의 한가운데서 재호출하여, 자연과 환경 파괴가 부른 전염병으로 인해 접촉과 이동이 제약을 받는 상황에서, 학교와 병원이 과연 이대로 괜찮은지 묻는다. 저자가 인물 지도에 꽂은 깃발들을 따라 거리의 사상가이자 변방의 활동가였던 일리치의 머리, 가슴, 발이 가닿았을 지점들을 상상하며 가상의 대화를 이어갔다. 이 글이 그의 분석과 통찰을 ‘지금 여기’로 잇는 또 하나의 에필로그가 되기를 소망한다. 1부에 소개된 책 ‘성장을 멈춰라’는 2-3부의 핵심 내용을 모아 적시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일리치는 개인이 개별 지식체계에 기초해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해석하거나, 타인과 활발하게 교유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근대적 제도들을 추려낸다. 이 작업은 그가 고정되고 갇힌 시선에서 세상을 보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경계를 넘나들며 현장에서 겪은 바를 토대로 삶과 앎이 연동하는 개념들을 가꾸어낸다. 논점은 사회적 표준이나 명령을 수동적으로 받아쓰기보다는 일상생활이 하나의 새로운 시도이자 실험인 활기찬 연결성을 추구한다. 그런 과정 속에 산업사회의 획일적인 관료주의의 병폐를 깊숙이 찌르고 다른 후속 방안들을 타진한다. 그 일환으로 비대한 성장 신화와 강제적 개발에 제동을 건다. 편의성을 증진하기 위해 쓰던 도구가 “반생산성”을 띠는 임계에 다다라, 수단이 목적 자체로 돌변하는 순간 “두번째 분수령”을 맞는다고 경고한다. 실제로 불필요한 소비와 소유에 따른 거대 공장의 검은 매연이 모든 생명의 ‘숨’을 틀어막는 재앙이 되었다. 규모와 속도에 치우친 나머지 지역 특색이나 공동 공간이 줄고 잠식되었을 뿐 아니라 근대화의 제도들이 사회 곳곳을 장악한 결과, 비판적인 사고나 정치투쟁의 맥을 끊는 형국이다. 즉 여러 둘레길이 아닌 통제와 관리가 용이한 일방통행로만 허용하니 ‘선택’의 자율권을 침해한다. 이와 같은 위계와 억압은 여유를 박탈해 이웃을 환대하고 우정을 쌓는 “공생적 도구”를 마비시키는 한편 “조작적 도구”를 득세하게 만든다. 2부 ‘학교 없는 사회’에서는 배움이 학교 밖의 대안적인 공간과 관계 맺기를 통해 활기를 되찾는 데에 주력한다. 상당기간 패키지로 묶인 의무교육은 학교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구속한다는 면에서 유사교도소와 같다. 배움은 언제든 시작해 원하는 데까지 가볼 수 있는 “둥근 원”(열린 문)이어야 함에도, 피라미드형 교육 제도는 우등 ‘상품’과 불량품을 나누어 탈락시키는 비인간적인 모양새인 것이다. 이에 제기된 탈학교의 움직임은 작금의 탈노동의 관점과 궤를 같이한다. 저자 이희경은 코로나19의 시대에 비대면 수업이 증폭시킨 소셜미디어 중독의 유해성을 피력하나 조금 다른 입장이다. 고용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미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이자 문화 구성체인 점을 고려하여, 언플러그 타임을 비롯해 보다 적극적으로 건강한 디지털 교육권 마련에 나서야 한다. 다음 3부에서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를 거점으로 교육 제도 못지않게 논쟁적이고 까다로운 의료제도 카드를 꺼내든다. 의료기술 덕분에 수명이 연장되었다지만 노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두기보다는 관리하고 개선해야 할 치료 대상이 되었다. 이번에는 일리치의 “의원병” 개념을 중심으로 의료진과 환자를 가르는 이분화된 권력 위계와 구속을 꼬집는다. 패키지 형태의 의료서비스 ‘상품’이 되는 순간 고유한 인생 이야기는 제거된 채 차트 위 진단명으로 환원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의무교육이 학생들을 몰아 기우제와 같은 “의례”, 즉 학원이나 과외 등의 보충학습의 족쇄를 채우듯이, 강제적인 백신접종이나 건강검진과 유행처럼 도는 수술들이 과잉 진료와 의료사고와 향후 격차를 벌일 소지가 있다. 이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특수한 이력과 사례와 대응력을 갖춘 개별적인 몸이라는 ‘자체 보고서’가 지워지고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어디까지 교육받고 치료받을지는 개인이 총체적인 인생 그림에 비추어 “맥락적 해석”과 판단하에 자기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코로나 재난 이후 공리주의 발상과 오래 전 전문가들이 정한 관습적인 제도들을 톺아볼 적정 시기임이 공고해졌다. 다만, 포노 사피엔스를 인정하자는 취지의 연장선에서 공공의료정책이나 집단면역체계를 위한 방역은 따르되 그럴 때 야기되는 각종 부작용과 후유증을 터놓고 공유한 끝에 보상과 보완을 아끼지 않는 ‘적극적인’ 돌봄 사회로의 방향을 제언하고 싶다. 이로써 ‘이반 일리치의 강의’는 숨 막히지 않는 수평적이고 느슨한 연대 속에 “앎의 기쁨”과 “삶의 깨달음”이 충만한 세상을 짓는 꿈에 한결 다가서게 이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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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치의 책이 신기한 것이 번역이 되어서 나오면 얼마 안 있어 절판이 됩니다. 중쇄를 찍으면서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없어요. 그런데 또 얼마가 지나면 누군가에 의해서 또 다시 번역되어 책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책도 곧 철판이 되고요. 전 한국에서 일리치의 책이 이렇게 절판과 번역을 반복하는 것이 되게 상징적인 것 같아요. 한국에서 ‘성장을 멈춰라’ 혹은 ‘절제의 사회’라고 번역되었던 이 책의 영문 제목은 Tools for Conviviality입니다. tools는 도구를 말하죠. 어떤 도구냐면 conviviality를 위한 도구라는 겁니다. 이 conviviality라는 단어는 이반 일리치만의 용어입니다. 낯선 단어를 통해서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 일리치의 생각이었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어휘를 이반 일리치는 플라스틱 낱말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경계를 했던 거였죠. ‘성장을 멈춰라’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conviviality를 공생이라고 번역을 했어요. 이반 일리치는 ‘누가 소유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도구의 성격 자체가 어느 시점을 지나면 삶의 편의성을 증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것으로 변한다는 겁니다. 현대 의료의 역사에서 1913년은 하나의 분수령이었다는 겁니다. 1913년이 되면 환자는 의과대학 졸업자를 치료사로 만날 확률이 50% 이상으로 높아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양의 경우 1913년 정도가 되면 사람들은 주술사 대신에 병원을 더 많이 찾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모든 것은 변했습니다. 일리치가 두 번째 분수령이라고 부르는 1950년대가 되자 접골원 같은 것은 다 사라지게 됩니다. 모든 일에 다 병원을 가게 되는 것이죠. 이반 일리치는 각 사회에는 적절한 규모와 속도가 있는데, 어떤 도구가 너무 커지거나 너무 빨라지면 인간의 삶을 돕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삶을 억압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반 일리치가 우리한 테 주는 가장 큰 메시지예요. 도구가 어느 시점까지는 우리의 삶을 굉장히 활기차게 해준다는 거예요. 생산성을 높이고 삶의 질을 개선해 주죠. 일리치는 이런 도구를 공생적 도구라 합니다. 영어로는 convivial tools입니다. convivial은 ‘함께’라는 뜻의 ‘com’(con)과 ‘살다’라는 뜻의 ‘vivial’이 합쳐진 단어로 일리치가 의식적으로 고른 개념입니다. 일리치는 ‘공생’, 즉 convivial을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환경 사이의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상호 작용을 뜻하는 말로 써요. 산업 사회를 넘어 새롭게 대두할 미래 사회의 비전을 함축하는 단어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것에 대비하여 두 번째 분수령 이후의 도구,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 버린 도구를 ‘조작적 도구’, 즉 영어로는 Manipulative tools라고 합니다. 어느 규모를 넘어가면 역치를 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반 일리치의 용어로 리툴링(retooling)이 중요합니다. 도구를 재배치하는 것예요. 삶의 편의를 증진하고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도구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도구를 우리가 다시 재배치, 재도구화해야 한다는 거죠. 강도 높고 규모가 크고 속도가 빠른 도구, 즉 학교, 병원, 대규모 수송체계 같은 조작적 도구를 공생적 도구로 바꿔내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나중에 이반 일리치는 두 개의 개념을 더 소개합니다. 하나는 버내큘러라는 단어이고요 또 하나는 커먼이라는 단어입니다. 우선 버내큘러, 영어로는 vernacular라고 씁니다. 로마에서는 기원전 500년에서 기원 후 600년까지 집에서 만들거나 집에서 키우거나 혹은 하천이나 산림 같은 공유지에서 얻은 것들, 시장에서 사고팔지 않지만 자기 삶에서 가치가 있는 것들을 일컫는 말이었대요. 사회적 명령(대학을 졸업해라, 좋은 직장에 취직해라, 돈을 많이 벌어라, 몸짱이 돼라)과는 다른 선택을 합니다. 그 다음 커먼이라는 단어를 살펴봅시다. 이건 중세부터 이어져 온 영어 낱말이랍니다. 서구의 중세에는 관습적으로 자기 소유가 아닌 곳, 예를 들면 길, 하천, 삼림 같은 곳을 자신과 집안의 생계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는 거죠. 그런데 점점 공용 공간이 사라집니다. 골목은 개발되고 모든 공간의 사유화가 진행되지요. 환경은 이제 커먼이 아니라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자원’이 되어 버립니다. 일리치는 미래 대안 사회를 위해서는 남아 있는 커먼을 방어해야 하고 나아가 새로운 커먼을 창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편의는 즉각적인데 도구의 반생산성은 즉각적이지 않아서 우리는 도구의 리툴링을 잘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편리함을 넘어서는 문제를 개인의 고독하고 윤리적인 결단으로 만들지 말고 다 함께 즐거운 일로 만들어 보자고 제안하고 싶어요.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우리 삶을 돌보는 데 시간을 쏟는 게 아니라 프로그램을 만들고 공간을 유지하는 데 에너지를 다 쏟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모두의 피로도가 높아지고 서로에 대해 까칠해졌어요. 그러면서도 ‘이게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이었을까’라는 것을 생각할 시간조차 없게 되었죠. 어느 순간 공생적 도구로 시작했던 인문학공동체가 더 이상 공생적이지 않게 된 거죠. 지금 저희는 초심으로 돌아가서 다시 논의를 하는 중입니다. 일리치는 학교 없는 사회에서 첫째, 학교가 교육 기회의 평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개발하는 데 있다는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의무교육 제도와 함께 학교가 배움을 독점하게 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의무교육 제도와 근대적 학교에서 우리의 삶과 앎은 분리되는데요. 더 이상 학교가 아닌 생활에서 배우는 것들은 유의미한 배움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립니다. 모든 앎은 삶의 맥락에서 떨어져서 패키지화되고 모듈화된 정보 체계로 변환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가치의 제도화입니다. 모든 가치가 제도화된 사회를 일리치는 ‘학교화된 사회’라고 이야기 합니다. 원 제목은 Deschooling society인데 ‘ 움은 둥근 원과 같아서 어디서도 시작할 수 있지만 결국은 끝나지 않는다.’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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