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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 강의]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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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하여 다시 묻고 답하다 <이반 일리치 강의>를 읽고     희망은,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말처럼 정치적 선택이다. 한 치 앞이 내다보이지 않을 때도 한 발을 떼는 것, 희망이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정치적 행동이다.(13쪽)   지난 2년 반은 팬데믹 시대에 인류가 희망을 되찾기 위해 살아온 시간이기도 하다. 늘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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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하여 다시 묻고 답하다

<이반 일리치 강의>를 읽고

 

 

희망은,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말처럼 정치적 선택이다. 한 치 앞이 내다보이지 않을 때도 한 발을 떼는 것, 희망이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정치적 행동이다.(13쪽)



  지난 2년 반은 팬데믹 시대에 인류가 희망을 되찾기 위해 살아온 시간이기도 하다. 늘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일상에 생긴 실금이 한순간에 갈라져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 것처럼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였다. 이제는 날마다 학교와 회사에서 서로 부대끼던 사람들이 집에 격리되어 수업을 받거나 일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은 걸 보면 인간은 적응의 동물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아직 끝나지 않은 코로나 시대는 물론이거니와 다가올 미지의 날들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간헐적 고민을 하던 중 <이반 일리치 강의>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유명한 철학자들의 사상과 통찰을 거울삼아 길을 모색해보는 것도 좋겠지만 대중에게는 다소 낯선 사상가를 통해 생각해보지 않은 대안을 알아가면서 가보지 않은 길을 상상해보는 일도 의미가 있으리라 기대하며 '이반 일리치'를 만났다.
  그와는 구면인 사이다. 일리치 약국(『사람과 글과 약이 있는 인문약방』 리뷰 바로보기)에서 처음 만나 '병원이 병을 만든다'는 문장의 속뜻을 알았을 때 내 머릿속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와 그의 생각을 좀 더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로 『병원이 병을 만든다』를 빌려놓고 뜸만 들이다가 반납하고만 일은 비밀로 해두자. 만일 나 같은 경험을 한 독자가 있다면 <이반 일리치 강의>가 그에 대한 미안함을 덜고 그에게 좀 더 다가설 수 있는 디딤돌과 같은 역할을 하리라 생각한다. 책속에 소개된 일리치의 저서 세 권, 『성장을 멈추어라』, 『학교 없는 사회』, 『병원이 병을 만든다』를 통해 그동안 우리가 당연시 해오던 것들에 대하여 반문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찾고자 한평생 치열하게 궁리했던 그를 소환한다.
  1926년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리치는 차세대 추기경 혹은 교황이 될 재목으로 평가받던 사제였지만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진짜 당연한 건가?'라는 의문을 계속 품으면서 신앙을 내려놓고 남미에서 다양한 교육 관련 실험과 연구를 경험하며 여러 사회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고 그 결과물들이 저서로 남아 있다. 저자는 그와 동갑내기로 두 사람을 소환하여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좀 더 구체화시켜준다. 바로 프랑스의 철학자인 미셸 푸코와 쿠바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이다. 일리치는 두 사람과 단순히 나이만 같은 게 아니라 동시대를 살면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은 사이라는 사실이 퍽 흥미롭다. 전형적인 지식인도 아니고 전형적인 혁명가도 아니라는 일리치에 대한 평가로 곧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가늠해보게 된다.
  『성장을 멈추어라(Tools for Conviviality)』는 일리치의 핵심적인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마르크스의 '생산수단'이 누가 소유하고 있는가를 문제시하는 반면, 일리치는 공생을 위한 '도구'라는 개념을 제시하여 도구의 성격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생산성과 삶의 질을 높이는 '공생적 도구(Convivial Tools)'가 어느 시점을 지나면 계속 증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조작적 도구(Manipulative Tools)'로 변하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재도구화(Retooling)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다시 말해 도구(기술 혹은 제도)의 필요성은 인정하되 그것이 규모와 속도가 커지면 더 이상 생산적이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방식으로 도구와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리치의 사유는 『학교 없는 사회』와 『병원이 병을 만든다』를 통해 구체화된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무작정 학교를 없애거나 병원이 나쁘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학교와 병원의 효용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에 대안적 모델을 고민하고 사회 전체가 참여하는 방안에 대하여 함께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학교 없는 사회』에서 첫째, 학교가 교육 기회의 평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개발하는 데 있다는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의무교육 제도와 함께 학교가 배움을 독점하게 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학교 제도는 교육 기회를 평등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독점한다는 거죠. 의무교육 제도와 근대적 학교에서 우리의 삶과 앎은 분리되는데요. 더 이상 학교가 아닌 생활에서 배우는 것들은 유의미한 배움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일터에서 일에 대해서 배운다거나, 친구들과 놀면서 노는 방법과 관계 맺는 법을 익히는 등 삶의 맥락 속에서 배우는 것들이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리는 거죠. 대신 정치, 경제, 사회 등등, 모든 것을 교과목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75쪽)


  배움을 독점한 학교는 제도적 한계에 부딪쳐 교육 수요자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코로나 시대의 교육현장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오히려 불평등과 상대적 박탈감을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병원으로 시선을 돌린 일리치는 의학 기술의 발달로 확대된 의료 제도가 건강을 증진시키는 게 아니라 환자의 고통을 증가시키고 있다고 분석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의료가 절대로 불필요한 것은 아니며 사람들이 스스로 고통과 건강을 체험하고 살 수 없도록 만드는 의료화에 대해 반대하고 이를 반성해야한다고 강조한다. 의사 때문에 생겨나는 병, 즉 의원병(Iatrogenic)이라는 개념을 임상적, 사회적, 문화적 측면에서 설명하면서 병은 싸워 이겨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다스리면서 그 고통을 통해 삶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며 병원에만 의존하기보다는 스스로 자기 몸을 치료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덧붙인다.
  살아오면서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에 대해 정말 그러한 것인가 되물었던 적이 몇 번이나 있는지 자문(自問)해보지만 쉬이 답을 하기가 어렵다. 수십 년 전 이미 사회를 향해 뼈저리는 질문을 던진 일리치에게 자문(諮問)할 수 있어 참 다행이다. 거듭 말하지만 그는 학교나 병원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교육과 의료라는 '제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속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과 부조리를 볕이 바로 드는 곳으로 끌어 올려서 사회 전체가 마주하고 그것들을 하나씩 해소해나가며 혜안에 다다를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우리 사회 곳곳에 퍼져 있는 온갖 경쟁과 맹신의 과열을 식히고, 삶에 지친 냉소가 아닌 삶의 미소를 꽃피우는 데 일리치의 바람이 불어주길 기대한다.

 

이반 일리치가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특정한 대안이 아니라 대안을 만들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대해서입니다.(136쪽)

 

이달의 사락 k*****o 2022.06.25. 신고 공감 11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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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학교, 탈병원... 함께 배우고 돌보는 탈중심적 공간 모색
"탈학교, 탈병원... 함께 배우고 돌보는 탈중심적 공간 모색" 내용보기
이희경은 ‘이반 일리치 강의’에서 인생의 변곡점마다 찾았던 사상가를 코로나 팬데믹의 한가운데서 재호출하여, 자연과 환경 파괴가 부른 전염병으로 인해 접촉과 이동이 제약을 받는 상황에서, 학교와 병원이 과연 이대로 괜찮은지 묻는다. 저자가 인물 지도에 꽂은 깃발들을 따라 거리의 사상가이자 변방의 활동가였던 일리치의 머리, 가슴, 발이 가닿았을 지점들을 상상하며 가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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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경은 이반 일리치 강의에서 인생의 변곡점마다 찾았던 사상가를 코로나 팬데믹의 한가운데서 재호출하여, 자연과 환경 파괴가 부른 전염병으로 인해 접촉과 이동이 제약을 받는 상황에서, 학교와 병원이 과연 이대로 괜찮은지 묻는다. 저자가 인물 지도에 꽂은 깃발들을 따라 거리의 사상가이자 변방의 활동가였던 일리치의 머리, 가슴, 발이 가닿았을 지점들을 상상하며 가상의 대화를 이어갔다. 이 글이 그의 분석과 통찰을 지금 여기로 잇는 또 하나의 에필로그가 되기를 소망한다.

 1부에 소개된 책 성장을 멈춰라2-3부의 핵심 내용을 모아 적시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일리치는 개인이 개별 지식체계에 기초해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해석하거나, 타인과 활발하게 교유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근대적 제도들을 추려낸다. 이 작업은 그가 고정되고 갇힌 시선에서 세상을 보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경계를 넘나들며 현장에서 겪은 바를 토대로 삶과 앎이 연동하는 개념들을 가꾸어낸다. 논점은 사회적 표준이나 명령을 수동적으로 받아쓰기보다는 일상생활이 하나의 새로운 시도이자 실험인 활기찬 연결성을 추구한다. 그런 과정 속에 산업사회의 획일적인 관료주의의 병폐를 깊숙이 찌르고 다른 후속 방안들을 타진한다.

 그 일환으로 비대한 성장 신화와 강제적 개발에 제동을 건다. 편의성을 증진하기 위해 쓰던 도구가 반생산성을 띠는 임계에 다다라, 수단이 목적 자체로 돌변하는 순간 두번째 분수령을 맞는다고 경고한다. 실제로 불필요한 소비와 소유에 따른 거대 공장의 검은 매연이 모든 생명의 을 틀어막는 재앙이 되었다. 규모와 속도에 치우친 나머지 지역 특색이나 공동 공간이 줄고 잠식되었을 뿐 아니라 근대화의 제도들이 사회 곳곳을 장악한 결과, 비판적인 사고나 정치투쟁의 맥을 끊는 형국이다. 즉 여러 둘레길이 아닌 통제와 관리가 용이한 일방통행로만 허용하니 선택의 자율권을 침해한다. 이와 같은 위계와 억압은 여유를 박탈해 이웃을 환대하고 우정을 쌓는 공생적 도구를 마비시키는 한편 조작적 도구를 득세하게 만든다.

 2학교 없는 사회에서는 배움이 학교 밖의 대안적인 공간과 관계 맺기를 통해 활기를 되찾는 데에 주력한다. 상당기간 패키지로 묶인 의무교육은 학교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구속한다는 면에서 유사교도소와 같다. 배움은 언제든 시작해 원하는 데까지 가볼 수 있는 둥근 원”(열린 문)이어야 함에도, 피라미드형 교육 제도는 우등 상품과 불량품을 나누어 탈락시키는 비인간적인 모양새인 것이다.

 이에 제기된 탈학교의 움직임은 작금의 탈노동의 관점과 궤를 같이한다. 저자 이희경은 코로나19의 시대에 비대면 수업이 증폭시킨 소셜미디어 중독의 유해성을 피력하나 조금 다른 입장이다. 고용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미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이자 문화 구성체인 점을 고려하여, 언플러그 타임을 비롯해 보다 적극적으로 건강한 디지털 교육권 마련에 나서야 한다.

 다음 3부에서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를 거점으로 교육 제도 못지않게 논쟁적이고 까다로운 의료제도 카드를 꺼내든다. 의료기술 덕분에 수명이 연장되었다지만 노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두기보다는 관리하고 개선해야 할 치료 대상이 되었다. 이번에는 일리치의 의원병개념을 중심으로 의료진과 환자를 가르는 이분화된 권력 위계와 구속을 꼬집는다. 패키지 형태의 의료서비스 상품이 되는 순간 고유한 인생 이야기는 제거된 채 차트 위 진단명으로 환원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의무교육이 학생들을 몰아 기우제와 같은 의례”, 즉 학원이나 과외 등의 보충학습의 족쇄를 채우듯이, 강제적인 백신접종이나 건강검진과 유행처럼 도는 수술들이 과잉 진료와 의료사고와 향후 격차를 벌일 소지가 있다. 이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특수한 이력과 사례와 대응력을 갖춘 개별적인 몸이라는 자체 보고서가 지워지고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어디까지 교육받고 치료받을지는 개인이 총체적인 인생 그림에 비추어 맥락적 해석과 판단하에 자기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코로나 재난 이후 공리주의 발상과 오래 전 전문가들이 정한 관습적인 제도들을 톺아볼 적정 시기임이 공고해졌다. 다만, 포노 사피엔스를 인정하자는 취지의 연장선에서 공공의료정책이나 집단면역체계를 위한 방역은 따르되 그럴 때 야기되는 각종 부작용과 후유증을 터놓고 공유한 끝에 보상과 보완을 아끼지 않는 적극적인돌봄 사회로의 방향을 제언하고 싶다. 이로써 이반 일리치의 강의는 숨 막히지 않는 수평적이고 느슨한 연대 속에 앎의 기쁨삶의 깨달음이 충만한 세상을 짓는 꿈에 한결 다가서게 이끈다.

이달의 사락 s********d 2022.05.0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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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속 파괴와 정체를 찾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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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치의 책이 신기한 것이 번역이 되어서 나오면 얼마 안 있어 절판이 됩니다. 중쇄를 찍으면서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없어요. 그런데 또 얼마가 지나면 누군가에 의해서 또 다시 번역되어 책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책도 곧 철판이 되고요. 전 한국에서 일리치의 책이 이렇게 절판과 번역을 반복하는 것이 되게 상징적인 것 같아요. 한국에서 ‘성장을 멈춰라’ 혹은 ‘절제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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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치의 책이 신기한 것이 번역이 되어서 나오면 얼마 안 있어 절판이 됩니다. 중쇄를 찍으면서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없어요. 그런데 또 얼마가 지나면 누군가에 의해서 또 다시 번역되어 책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책도 곧 철판이 되고요. 전 한국에서 일리치의 책이 이렇게 절판과 번역을 반복하는 것이 되게 상징적인 것 같아요.

한국에서 성장을 멈춰라혹은 절제의 사회라고 번역되었던 이 책의 영문 제목은 Tools for Conviviality입니다. tools는 도구를 말하죠. 어떤 도구냐면 conviviality를 위한 도구라는 겁니다. conviviality라는 단어는 이반 일리치만의 용어입니다. 낯선 단어를 통해서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 일리치의 생각이었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어휘를 이반 일리치는 플라스틱 낱말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경계를 했던 거였죠.

성장을 멈춰라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conviviality를 공생이라고 번역을 했어요.

이반 일리치는 누가 소유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도구의 성격 자체가 어느 시점을 지나면 삶의 편의성을 증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것으로 변한다는 겁니다.

현대 의료의 역사에서 1913년은 하나의 분수령이었다는 겁니다. 1913년이 되면 환자는 의과대학 졸업자를 치료사로 만날 확률이 50% 이상으로 높아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양의 경우 1913년 정도가 되면 사람들은 주술사 대신에 병원을 더 많이 찾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모든 것은 변했습니다. 일리치가 두 번째 분수령이라고 부르는 1950년대가 되자 접골원 같은 것은 다 사라지게 됩니다. 모든 일에 다 병원을 가게 되는 것이죠.

이반 일리치는 각 사회에는 적절한 규모와 속도가 있는데, 어떤 도구가 너무 커지거나 너무 빨라지면 인간의 삶을 돕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삶을 억압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반 일리치가 우리한 테 주는 가장 큰 메시지예요.

도구가 어느 시점까지는 우리의 삶을 굉장히 활기차게 해준다는 거예요. 생산성을 높이고 삶의 질을 개선해 주죠. 일리치는 이런 도구를 공생적 도구라 합니다. 영어로는 convivial tools입니다. convivial함께라는 뜻의 ‘com’(con)살다라는 뜻의 ‘vivial’이 합쳐진 단어로 일리치가 의식적으로 고른 개념입니다. 일리치는 공생’, convivial을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환경 사이의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상호 작용을 뜻하는 말로 써요. 산업 사회를 넘어 새롭게 대두할 미래 사회의 비전을 함축하는 단어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것에 대비하여 두 번째 분수령 이후의 도구,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 버린 도구를 조작적 도구’, 즉 영어로는 Manipulative tools라고 합니다.

어느 규모를 넘어가면 역치를 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반 일리치의 용어로 리툴링(retooling)이 중요합니다. 도구를 재배치하는 것예요. 삶의 편의를 증진하고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도구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도구를 우리가 다시 재배치, 재도구화해야 한다는 거죠.

강도 높고 규모가 크고 속도가 빠른 도구, 즉 학교, 병원, 대규모 수송체계 같은 조작적 도구를 공생적 도구로 바꿔내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나중에 이반 일리치는 두 개의 개념을 더 소개합니다. 하나는 버내큘러라는 단어이고요 또 하나는 커먼이라는 단어입니다. 우선 버내큘러, 영어로는 vernacular라고 씁니다. 로마에서는 기원전 500년에서 기원 후 600년까지 집에서 만들거나 집에서 키우거나 혹은 하천이나 산림 같은 공유지에서 얻은 것들, 시장에서 사고팔지 않지만 자기 삶에서 가치가 있는 것들을 일컫는 말이었대요. 사회적 명령(대학을 졸업해라, 좋은 직장에 취직해라, 돈을 많이 벌어라, 몸짱이 돼라)과는 다른 선택을 합니다. 그 다음 커먼이라는 단어를 살펴봅시다. 이건 중세부터 이어져 온 영어 낱말이랍니다. 서구의 중세에는 관습적으로 자기 소유가 아닌 곳, 예를 들면 길, 하천, 삼림 같은 곳을 자신과 집안의 생계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는 거죠. 그런데 점점 공용 공간이 사라집니다. 골목은 개발되고 모든 공간의 사유화가 진행되지요. 환경은 이제 커먼이 아니라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자원이 되어 버립니다. 일리치는 미래 대안 사회를 위해서는 남아 있는 커먼을 방어해야 하고 나아가 새로운 커먼을 창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편의는 즉각적인데 도구의 반생산성은 즉각적이지 않아서 우리는 도구의 리툴링을 잘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편리함을 넘어서는 문제를 개인의 고독하고 윤리적인 결단으로 만들지 말고 다 함께 즐거운 일로 만들어 보자고 제안하고 싶어요.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우리 삶을 돌보는 데 시간을 쏟는 게 아니라 프로그램을 만들고 공간을 유지하는 데 에너지를 다 쏟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모두의 피로도가 높아지고 서로에 대해 까칠해졌어요. 그러면서도 이게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이었을까라는 것을 생각할 시간조차 없게 되었죠. 어느 순간 공생적 도구로 시작했던 인문학공동체가 더 이상 공생적이지 않게 된 거죠. 지금 저희는 초심으로 돌아가서 다시 논의를 하는 중입니다.

일리치는 학교 없는 사회에서 첫째, 학교가 교육 기회의 평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개발하는 데 있다는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의무교육 제도와 함께 학교가 배움을 독점하게 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의무교육 제도와 근대적 학교에서 우리의 삶과 앎은 분리되는데요. 더 이상 학교가 아닌 생활에서 배우는 것들은 유의미한 배움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립니다. 모든 앎은 삶의 맥락에서 떨어져서 패키지화되고 모듈화된 정보 체계로 변환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가치의 제도화입니다. 모든 가치가 제도화된 사회를 일리치는 학교화된 사회라고 이야기 합니다. 원 제목은 Deschooling society인데 움은 둥근 원과 같아서 어디서도 시작할 수 있지만 결국은 끝나지 않는다.’라고 생각합니다.

 

 

 
t****b 2023.01.0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