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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많은 학생이 죽을 겁니다. 모두 목요일의 아이입니다.” 나는 너무 편안하게 세상을 살았나보다. 이런 내용의 작품들이 나오고 허구가 아닌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기도하는 끔찍한 일을 접할때마다 순간적으로 멍= 그냥 복잡하게 생각하지말고 순간순간의 화들을 잘 다스리고 좋은 방향으로 풀 줄 아는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되었음 좋겠다. 어차피 태어난 인생 돌이킬 수 없잖아? 타인이 아닌 나를 위해서도 그게 훨씬 더 행복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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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 때부터 ‘악인’은 존재하는 걸까 남의 불행을 관망하는 것을 넘어서 주최자가 되어 생과 사를 가르고 싶어 하는 악인. 우에다 유타로가 그렇다. 급식에 독약을 넣고 죽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던 중2병 말기 환자. 저 환자를 추종하고 동경하며 ‘신’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놀랍고 그 정신세계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가정폭력, 따돌림..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심신이 지친 아이들에게는 그가 저지른 일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걸까
중학생 아들을 혼자 키우고 있는 가나에를 만나 결혼하고 가족을 이룬 시미즈. 갑자기 생긴 아들이 서먹하지만 친구 같고 편한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그냥 평범한 42살 남자였다. 그런 그가 아들 때문에 엄청난 일에 휘말리는 것을 보면서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하필이면.. 이런 생각을 계속하게 되고. 친자식은 아니지만 진짜 아버지가 되기 위해 그가 벌이는 사투를 보면서 가족의 힘이란 꼭 혈연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된다.
악의는 곰팡이 같다. 7년 전 시작된 악의가 7년이 지난 후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이 사회의 어딘가 음지에서 곰팡이 같은 악의가 서서히 퍼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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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마쓰 기요시 작가의 목요일의 아이는 쇼핑하면서 우연히 장바구니에 넣게 된 책이었습니다. 어떠한 소개도, 줄거리도, 추천사도 보지 않고 그냥 표지랑 제목만 보고 끌려서 구매하게 되었는데요.
영화를 봤던 3시간 정도를 제외하고는 토요일 내내 이 책만 보게 될 줄이야.. 일단 흡입력이 대단하고, 초반부터 독자들이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는 흥미롭고 자극적인 사건들이 이따라 벌어지면서 보는 이들을 어디에도 못가게 꽉 잡아두면서도 스토리는 멱살을 끌고 갑니다.
심리 묘사도 훌륭할 뿐더러, 꼬리를 무는 반전들도 흥미로웠습니다. 다만 중반 이후, 클라이막스 부분에 이르러 등장하는 두소년에 대한 말들과 이미지는 너무 중2, 일본 특유의 오타쿠 스러워서 약간 계속 읽기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흥미롭게 볼 수 있었습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보고 싶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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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많은 학생이 죽을 겁니다. 모두 목요일의 아이입니다... 라는 띠지의 내용에 이끌려 읽게 된 이 책. 표지에 있는 학생이 과연 발키리를 이용한 미치광이 살인마인지 주인공의 양아들인지 알 수 없다. 많은 상상력과 감정이입을 일으킨 책이었다. 목요일의 아이. 마더구스 시리즈가 이렇게도 많이 재인용될 줄이야. 히가시노 게이고의 회랑정 살인사건인가, 거기서도 마더구스 이야기가 있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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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정말 관심을 가졌을까? ‘목요일의 아이’, 시게마쓰 기요시 지음
‘하루히코가 꾸며 내던 빈틈없는 미소를 꾸짖을 자격 같은 건 내게 없다. 나도 진짜 웃는 표정을 하루히코에게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나는 하루히코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콘크리트 바닥에 찧은 순간 이상한 그리움이 느껴졌다. (중략) 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신의 은총을 받는 사람처럼. 나는 하루히코에게 말했다. “캡슐을…… 아버지에게 전부 줄래……?”’
중2학년 남의 자식을 사랑하는 여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42살에 아버지가 되기로 했던 주인공이 아들에게 간절히 바람을 전달하는 대목입니다. 자신의 생명으로 세상과 맞서기로 결심한 것도 모른 채, 아들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아들은 항상 빈틈이 없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생각했지만 결국 자신도 진심으로 중2의 아들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진심이 진심을 만나게 되고 세상과 맞서 싸우려던 생명은 살고 싶은 본능을 되찾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무기로 세상과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을 억누르고 핍박하고 조롱하는 세상의 사람들을 상대로 싸우다 지쳐 드디어는 자신의 생명을 무기로 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전환 수술을 이유로 그토록 원했던 전차병에서 쫓겨난 변희수 하사는 끝까지 살아서 세상과 싸우기로 했지만 그의 결심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아마도 그가 그녀가 되기까지 누구와도 쉽게 진심을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그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동경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트랜스젠더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추정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외부로 알려진 후부터 우리는 그의 진심을 흥밋거리로나, 또는 성소수자 차별금지 운동권의 동력으로 활용하려는 사람들과 대척에 섰는 사람들의 갈등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도 그의 고민과 진심을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국방부는 분노를 그녀의 전역명령으로 표현했고, 탱크병의 자리는 그녀에게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용기와 위로를 전달하려고 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원했던 자리가 허용되지 않는 것에서 변하사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여군은 허용해도 문제 되지 않지만, 트랜스젠더 여군은 큰 문제라는 발상을 이해할 수 없지만, 만약 우리가 이 문제를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진심으로 접근하였으면 변 하사는 자신의 생명을 무기로 이 세상을 부정하는 식의 싸움은 선택하지 않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듭니다.
이것만 아닙니다. 국방의 임무를 좋아해서 군복을 입은 여군들에 대한 성폭력과 성추행, 그리고 이어진 2차 가해가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숨을 무기로 싸워, 추악한 집단 구성원을 지워버리는 투쟁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자살사건이라 부르지만, 개인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세상을 향한 투쟁으로 전투로 느껴지게 하는 것이 시게마쓰 기요시의 소설 ‘목요일의 아이’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의 외침에 진심을 다해 듣고, 같이 고민하며 곁에 서 있었다면 그들은 생명이 가진 본능을 해치지 않고도 세상과의 싸움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의붓아들인 하루히코가 가진 아픔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를 이해한다는 것은 42살이라는 경륜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루히코의 고통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그와 함께 했을 때 하루히코는 세상과 맞서 한 번 쓰고 버리려던 그의 생명을 다시 돌아봅니다. 만약 변하사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하루히코에게 허용되었던 이해와 진심이 허락되었다면 세상은 훨씬 많이 달라졌겠지요.
이 책을 읽으면서 전 하루히코와 그의 아버지만 보였습니다. 그들의 행복한 관계가 이제 시작되면 바랄 게 없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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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마쓰 기요시 작가의 목요일의 아이.
한 소년이 급식에 독을 타서 같은 반 아이들을 죽인 사건이 벌어진 어느 마을. 그 마을로 이사간 재혼 부부. 주인공은 의붓아들의 마음을 얻고 싶은데 쉽지 않고, 마을 분위기가 요상하다는 걸 느끼기 시작하는데...
시작은 흥미로웠으나 갈수록 "음?"하는 생각이 들더니, 나중에는 너무 오글거려서 보기 힘들었다. 과거 벌어진 사건의 원인도, 현재 벌어지는 사건의 이유도 터무니없고 어색하고 유치해서 별점을 많이 줄 수가 없다. 내 스타일은 아닌 걸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