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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邊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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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월부터 약 6개월간 띄엄띄엄 읽었던 책이다. 12권의 책을 읽기까지 물리적인 시간도 상당히 필요했을 뿐더러 암울한 스토리의 반복으로 피로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하소설의 매력이 그렇듯 드문드문 계속 생각이 나 eBOOK 리더기를 들락날락한 적도 수없이 많았고, 소설에 차츰 적응이 되어 5권부터는 단숨에 읽었다. 앞서 글을 적은 '영웅시대'는 6.25 전쟁이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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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월부터 약 6개월간 띄엄띄엄 읽었던 책이다. 12권의 책을 읽기까지 물리적인 시간도 상당히 필요했을 뿐더러 암울한 스토리의 반복으로 피로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하소설의 매력이 그렇듯 드문드문 계속 생각이 나 eBOOK 리더기를 들락날락한 적도 수없이 많았고, 소설에 차츰 적응이 되어 5권부터는 단숨에 읽었다. 앞서 글을 적은 '영웅시대'는 6.25 전쟁이 작품 주요 스토리라면, '변경'은 휴전협정 체결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살아가는, 월북한 아버지의 부재가 존재하는 한 가족을 그리고 있으며, 1950년대 후반 ~197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글을 적으며 생각해보니, 어쩌면 시대가 시대인지라 더 암울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이 책을 읽어보실 분들은 '변경'(境)이라는 단어를 상기시키면서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다.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변경'(境)이라는 단어가 12권의 책을 함축하는 단어라 할 수 있고, 결론적으로 이 소설도'변경(境)'국가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글 역시 인상 깊었던 문장들에 짧게 생각을 적어보도록 하겠다.


"우리의 체제는 미·소가 부여한 둘 중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그리고 그 선택도 우리의 의지보다는 그들의 실세에 따라 결정된다. 이쪽이냐 저쪽이냐 외에 제3의 길은 없으며,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해도 현실적으로는 그들 두 제국의 협력에 의해 가장 비참한 결말에 이를 뿐이다. 역사적으로도 두 개의 제국 사이에 끼어 있던 변경 국가를 봐라. 둘 중 하나의 선택 외에 달리 생존에 성공한 나라가 있······."(3권, 320쪽)


명훈이 그래 5월의 시위 군중에게서 언뜻언뜻 보는 것은, 진정한 정의감과 용기로 나선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하게도, 바로 그 통장 영감이었다. 그들이 앞세운 플래카드에서는 그 영감이 흔들고 나서던 인공기나 태극기가 느껴졌고, 그들이 외치는 구호도 옛날의 그 목쉰 만세 소리처럼 들리곤 했다. 어떤 때는 신문의 외부 기고란이나 심지어는 어용 교수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 데모에서까지, 절반은 겁에 질리고 절반은 아첨에 찬 그 만세소리를 들을 때가 있었다.(4권, 62쪽)
6.25 전쟁 때, 인공기랑 태극기를 모두 휘날리던, 필요할 때마다 어딘가에 붙던 통장 영감을 말하고 있다. 어린 명훈에게는 그 모습이 큰 충격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아첨에 찬 그 목소리가 뇌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이것 또한 전쟁의 상흔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내가 왜 그 짓을 치앗뿐지 아나? 그 길을 쪼매 알아보이 그 꼭대기에 또 너 아부지 동영 씨가 안 있나? 우리같이 없이 사는 사람들 세상 맨들라꼬 하는 운동인 줄 알았는데 거다가도 대가리는 모도 배운 사람들이라. 다사 아니지만 배운 사람이 곧 있는 집 자슥이고 - 그걸 보이 모든 게 말캉 헛거지 싶더라. 백성에서 인민 된다꼬 뭔 큰 수 날 거 같지도 않고 힘 있고 똑똑은 사람한테 동무라 부른다꼬 참말로 그 사람들 동무 될 것 같지도 않더라. 백지로 이쪽저쪽 똑똑은 사람한테 홀래 댕기다가 징역 맞고 죽는 거는 우리뿐이지 싶더라. 그래 고마 다 치앗뿌랬제-."(5권, 274쪽)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라는 말에 현혹된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가. 어느 쪽이든 우두머리는 존재하기 마련인데 말이다. 반세기를 훨씬 넘은 세월 뒤 어지러웠던 아이러니한 세월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사상과 이념을 떠나 진심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아꼈던 모든 분들에게 위로를 보내고 싶다. 


'나는 정치나 사회에 대한 내 의식의 둔감이나 마비를 변명하는 부적으로 꼭 그래야 할 까닭도 없는 원죄의 개념을 키워 왔는지도 모른다. 원죄란 아버지의 불행한 선택과 실패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나의 비겁과 무력감이 키워온 지극히 편의적인 개념이었다. 그리하여 그 뒤에 숨음으로써 정작 필요한 싸움과 그에 따른 소모를 피해 왔다. 패배의 불리와 고통이 두려워 외면과 유예로 초라한 자존심을 지켜 가려 했다. 하지만 이제 더는 내게 걸어온 싸움을 외면하고 유예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내게는 아직도 이 체제 밑에서 살아야 할 날이 많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의 몇 배가 되는 세월이. 그런데 언제까지고 그들이 자랑하는 그 휘황한 이상과 원리 밖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가. 언제까지고 국외자, 소외자로 이 체제 밖을 맴돌면서 이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변칙에 순응하고 그 불리를 감수해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두렵고 자신 없더라도 이젠 응전할 때다.'(11권,541쪽)
"변경이 변경인 것은 제국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라 변경이 변경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하기 때문이라고 봐. 방금 네가 말한 그 원죄 의식이란 것은 바로 그런 변경 의식 중에서도 가장 조악한 자기 규정일지도 모르고."(11권, 572쪽)
"왜 그런 불합리와 부조리가 있으면 그것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오히려 그 불가피성의 논리를 끼워 맞추지? 내가 보기에 이 땅이 변경의 불행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은 그런 변경 의식의 극복에서 시작될 거야."(11권, 573쪽)
"저는 바로 그 중간계급에서 또 다른 기본계급의 특성을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몰락하거나 소멸할 한시적인 계급이 아니라 두 기본계급의 한가운데 상주할, 가장 주도적인 기본계급으로 자라 갈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얼마나 많은 역사적 비극이 근대의 그 두 기본계급 사이에서 벌어진 극단적인 불화와 투쟁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얼마나 많은 피투성이 싸움이 계급투쟁론 또는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이란 이름의 경제적 헤게모니를 다투며 벌어졌고, 그로 인해 얼마나 끔찍한 비극적 소모들이 있었습니까."(12권, 648쪽)
소설 속 인철이라는 인물은 성숙하다 못해 조숙하고, 생각이 깊은 친구이다. 답답할 때도 정말 많았지만, 사실 6권에서 개간지에 올라 혼자 쓸쓸하게 울던, 암담한 고향과 가족의 상황 그리고 사회에서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인철이 나와 아예 무관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되려 응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원죄의식에서 벗어나 틀을 깨고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행동할 인철을 고대하고, 응원했다. 11권부터 인철은 확실한 스탠스를 보여주는데, 12권 마지막에서 마르크스의 계급론에 빗대어 말하는 모습이 특히 인상 깊었다. 중간계급은 더 이상 마르크스가 말한 언제가 사라지게 되어 있는 계급이 아니라 두 기본 계급의 한가운데 상주할, 가장 주도적인 기본계급으로 자라갈 것이며, 자칫 극단으로 치닫기 쉬운 두 기본계급의 갈등을 조율하는 또 다른 기본계급으로 존재하고 존재하고 살아가겠다는 말이 책을 다 읽고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었다. 현재에도 그 말이 계속 유효하다고 생각되기에 더 인상 깊었는지 모르겠다. 12권의 대장정을 끝내고 나니 인철이를 위시한, 오랜 시간 동안 방황했던 소설 속 주인공들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들이 그들 자체로 존재하고 또 빛났으면, 오랜 세월 뒤 뒤늦게나마 염원해 본다.

r********5 2024.08.27.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