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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통행증, 사람들과 상황』-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나는 예전부터 러시아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심취했다.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닥터 지바고 Doctor Zhivago』이다. 이번에는 그의 자전적 에세이 『안전 통행증』과 『사람들과 상황』을 통해 『닥터 지바고』와는 다른 감흥을 느낄 수 있었다. “진실된 상황에 놓여 있는 곳은 전선이었다. 심지어 애써 일부러 허위를 키우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후방은 거짓된 상황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당시 아직 아무도 도둑을 잡으려 하지 않았지만, 후방 도시는 궁지에 몰린 도둑처럼 번지르르한 말 뒤로 숨었다. 모스크바는 모든 위선자들처럼 한층 더 외면적인 삶을 살았으며, 겨울 꽃가게의 진열장과 같이 부자연스러운 활기를 띠었다.”(p.140)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격변기의 러시아에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한 작가의 고뇌를 되짚어 보며 또한 나를 되돌아 본 귀중한 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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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사를 넘어 문학사에서 내가 존경해오는 분은 톨스토이다. 그 분이 가진 인간에 대한 통찰과 스스로의 실천은 놀라울 정도로 철저했기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본'이 되실 수 있는 분이라 여기며 아직은 작은 그릇과 모자라는 식견으로 아웅다웅 살고 있지만 그분과의 만남을 감사히 그리고 소중히 여기고 있다. 여기 또 한 분, 그 분과의 인연에 감사하는 분을 만났다. '닥타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르테르나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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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자전적 에세이 왜 제목이 안전 통행증일까? 안전 통행증이라는 말이 낯설다. 책을 펴자마자 해설을 찾았다. p. 299 ‘안전 통행증’ 이란 과거에 출입 금지 구역을 통행하도록 허용하는 증서였다.~ 따라서 불신과 신분의 위협이 날로 커지던 당시 소련 사회에서 『안전 통행증』은 작가에게 예술가로서의 신분을 보장해 주는 증서를 뜻한다고 하겠다.
제목의 의미를 알고 보니 책이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안전 통행증: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기념하며라는 부제도 달려 있다. 파스테르나크는 작곡가 스크랴빈에 빠져 작곡 공부를 하다가 그가 철학 공부를 추천하자 바로 과를 바꾼다. 그러면서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여행을 통해 경험한 것들을 자세히 묘사한다. 파스테르나크의 묘사는 읽는 동안 상상을 하게 해 준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지만 글을 읽고 있으면 그 공간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은 언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파스테르나크의 에세이를 통해 볼 수 있다. 만약 스크라빈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파스테르나크는 작곡가로서의 삶을 살지 않았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여행과 만남, 사람과 자연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그것들이 삶을 이룬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아이에게 어떠한 경험을 줄 수 있을까? 자연 속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경험들과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면서 사는 삶을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도 해 본다.
삶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안전 통행증과 사람들과 상황을 다시 한 번 더 읽으면 어떨지 기대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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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다소 지루한 문체때문에 힘들었으나 독서편식을 하지않기로한 결심을 다잡아 읽어내려갔다. 젊은시절 3년에걸쳐 집필되었다는 자전적 에세이 안전통행증과 노년에 청년시절의 에세이를 보완하기위해 썼다는 사람들과의 상황. 만약 내가 지금 책을 내고 후년에 그첫책을 되짚어보았을때 느낌은 어떨까란생각이 문득들었다.물론 저자는 초기 에세이집에서도 문학가로써의 자질이 충만하기에 흠잡을곳 없는 글쓰기 실력이 검증되었지만 내가책쓰기를 목표로 하고시점에서 이책은 많은 영감을 실어주었다. 30대와 60대의 시간차를두고 한시대를 고스란히 풍미해주고 있는 에세이집이니 만큼 그 문학적 가치도 가치지만 그 안에 녹아있는 삶의 애환이라던가 그만의 색깔있는 글쓰기가 인상깊은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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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통행증·사람들과 상황>을 읽고 나는 <닥터 지바고>를 아직 읽지 않았다. 그만큼 나의 독서력이 약하다. 이번에 읽게 된, <안전 통행증·사람들과 상황>을 보고, 위 소설도 찾아 읽어보고 싶어 졌다. 자전적 에세이 2편이 한 권에 있다. 전편은 30대에 쓴 것, 후편은60대에 보완의 의미로 쓴 것. 나는 그 뒤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적으려 한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자신의 세 친구를 언급한다. 이 부분은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의 내면의 힘과 창조적 잠재력을 흠모하면서도 친하지 않았다고 표현한 마야콥스키가 그 첫 번째 인물. 이 인물의 정신과 외모를 묘사한 부분에 나도 모르게 그에게 이끌렸다. 두 번째 시인 친구 예세닌. 허물없이 너, 나하고 지낸 사이였지만 때때로 감정이 격해져 헤어지기도 했단다. 눈물을 흘리며 서로 진실한 친구가 되기로 맹세했다가도 피 튀길 때까지 싸우기도 했다는데. 순간 나는 나의 절친한 친구 한 명이 떠올랐다. 이 대목에서. 그리고 츠베타예바. 처음 그녀를 과소평가했음을 시인하고, 놀랍도록 극찬하기도 한다. ‘그녀는 확고하고 분명한 것에 도달하기 위해 저돌적이고, 간절하게, 또 거의 탐스럽게 애를 썼고, 그리하여 멀리까지 나아갔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앞지르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세 명의 친구를 먼저 떠나보내게 된다. 그들이 얼마나 힘들었을 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을 테지만,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상황이나 선택에 가장 많이 아파했을 것 같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조금 어릴 적, 저자는 스크랴빈의 음악에 빠져 6년간 음악 속에 살았지만, 절대음감과 표현 기술이 자신에게 없음을 깨닫고, 음악과 이별한다. 그는 이 능력들이 그에게 음악인으로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그대로 그것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아가 그를 괴롭혔을 테지...... 음악에서 문학으로 자신을 끌어들인 사람은 ‘세이게이 니콜라예비치 두릴린’이라고 한다. 유명인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던 화가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를 둔 그는 그로 인하여 더 쉽게, 더 자연스럽게 많은 시인, 화가, 음악가 등의 예술인들을 벗으로, 스승으로 둘 수 있었던 것 같다. 왠지 이 에세이를 읽고 있으면, 천재들의 삶을 살짝 씩 엿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나도 톨스토이, 츠베타예바, 마야 콥스키, 예세닌,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또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고 싶다. 스크랴빈의 음악까지. 그리고, 이 저자의 삶의 무대였던 러시아에 대한 지식을 갖고 이 작품을 접했다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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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파스테르나크~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지만 "닥터 지바고" 만은 거의 알고 있을 법한 저자의 이름이다. 저자가 유년시절부터 써내력간 자전적 에세이를 보며 괜히 책장에 있는 "부활"을 다시 뒤적여보고 릴케의 시도 찾아보고 스크랴빈의 음악도 찾아보며 저자와 함께한 동시대의 거장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한껏 누릴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안전 통행증은 아직 다 읽지 못했지만 또 어떤 만남들이 이어질까? 하는 작은 설레임이 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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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통행증·사람들과 상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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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통행증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글쓰기를 그만둘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삶과 예술을 종하여 정리하는 마지막 작품으로 쓴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나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에 대해 누구보다도 순수한 열정과 사랑으로 온 힘을 다해 헌신했던 그가 작가로써 인정받고 주목받던 그때 그만둘 생각으로 쓴 것이라 하니 그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졌다. 유년시절부터 시인이 되기까지의 여정이 내내 그만이 가지고 있는 삶과 예술에 대한 관계와 신념을 보여 준다. 특히 안전통행증에서는 자신이 너무나 좋아하고 따르고 싶어 하는 영향력 있는 인물에 대한 존경과 영웅의 면모가 돋보인다. 그러나 사람들과 상황에서는 왜 그들과 결별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탈피와 성장의 모습으로 다음과 같이 말해준다. “그와 나의 작품에 이미지 구축과 압운 패턴의 유사와 같은 예상치 못한 기법상의 일치가 드러났다. …… 나의 내부에서 싹트고 있던 그의 작품과 공통되는 요소들을 억제하기 시작했다. 이런 조치는 나의 문체를 좁히고 말끔해지게 했다.” 자신만의 색깔을 갖고자 했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그의 자전적 에세이를 서로 다른 시간대에 비교해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읽는 내내 한 시대를 풍미해 온 작가의 삶을 전체적으로 아우르고 또다시 아우르는 특이한 경험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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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궁금증을 자아냈다. 무슨 안전 통행증, 어디 갈 때 쓰는 통행증이지 무척 어렵게 읽었다. “내가 이걸 왜 읽고 있지?” 라며 나를 인내하게 만들어준 책이다. 주석이 없으면 뭔 소린지 결코 알 수 없는 그냥 “어렵네.” “글자를 읽었네.” 하며 작가가 왜 이 작품을 남겼는지 이해해 보려는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몇 번에 집어 던짐으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라는 이름만 내 머릿속에 각인될 책이었으나 주석의 힘으로 끝까지 읽었다. 그 시대 러시아 작가의 고뇌를 공감할 수 있어 가슴 아팠다. 음악가와 화가는 그 재능을 펼치는 순간순간은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시인은 그 순간순간이 고뇌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좌절은 자신을 자멸시키는 형벌로 돌아올 만큼 컸던 것 같다. 파스테르나크는 예술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유명한 음악가와 화가들 속에 살다 자신에겐 천부적 재능이 없다는 결론을 내고 음악의 길을 접고 철학을 거쳐 문학의 길로 들어갔다. 처음엔 “천부적인 재능이 없다고 음악을 포기해”라며 저자를 깔봤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난후 난 내 생각의 부족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음악이 운명이나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한다는 그의 좌절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기억 속 첫 장면인 삼중주의 가슴 점임으로 시작된 음악을 자신은 이룰 수 없다는 걸 운명으로 받아들였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 그 격변의 시대에 러시아에서 작가로서 산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위험한 일이었다. 조국을 사랑하고 국민을 사랑했던 작가의 비참한 죽음들을 보며 삶과 죽음의 자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진 작가들의 죽음에 눈물이 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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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겪는 일상을 풀어 놓은 이야기가 에세이다. 모닝커피, 지나간 사람들, 비오는 날, 눈 내리는 날 등등 일상의 작은 이야기들이 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 책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자전적 에세이이다. 30대 후반과 60대 중반에 쓴 같은 이야기이면서 다른 시점. 러시아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작가로서의 삶은 미로 속을 걷는 것과 같았다. 30대의 열정은 만연체의 화려한 문장 속에 녹아든다. 60대의 기억은 간결하면서도 절제된 문장 안에 스며든다. 작가는 자신이 살아온 주변을 스케치 하듯이 글을 쓰고 사람들을 소개해 준다. 곧, 작가는 주변의 인물들을 묘사하면서 자신을 투사시킨다. 그가 아낀 스크라빈과 릴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음악과 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작가에게 있어서 작곡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연주는 달랐다. 작가에게 연주는 스스로에게 무력감을 주고 절대음감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재능은 기적이자 운명인 것으로 여긴다. 고의적이거나 계획된 것, 의도적인 것, 제멋대로인 것은 재능이 아닌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 가장 순수하면서 그 자체로 빛나는 것이 재능이자 스스로를 빛나게 해주는 것이다. 문학은 릴케의 문학처럼 확고한 내용,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 진지한, 의도된 언어를 가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문학은 능변, 상투어, 원만한 문구의 세게, 추상화, 자신 이전의 글들의 되풀이를 가진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인위적인 영역이 문학인 것이다. 공자는 인의 마지막을 음악으로 보았다. 즐기고 나눌 수 있는 흥은 인의 종착점이자 누구나 누려야 할 것으로 말이다. 작가에게 있어서 음악은 스스로를 위한 창작 세계이지만 그 누군가와 나누어야 할 순간에는 흥이 아닌 부담감과 압박감으로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다는 것과 누군가를 동경하기 위한 거리감은 노력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결국 스스로가 즐겁게 할 때, 그 즐거움이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시를 쓰고 그 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스스로 말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랬다. 책을 읽으면서 인상 깊은 구절이 있다. ‘우리가 우는 것은 슬퍼서가 아니라 내면의 감정에 아주 정확한 처절한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라는. 우리가 감명을 받고 공감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그 작품이 주는 내 안의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작품만이 아닌,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이감은 내게 미치는 울림의 정도에 있는 것이다. 말도 아닌, 그 사람이 보여주는 행동과 내어주는 마음의 깊이에 따라 내 안의 울림의 깊이도 달라지는 것이다. 시대적 상황, 사람과 상황, 상황과 상황의 안에서 온전한 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다. 온전하게 내 안의 떨림을 받아들이고 나를 표현함에 있어서 거짓도 없이 완전하게 풀어 놓을 수 있는 것. 그것은 아마도 작가에게는 글이 아니었을까. ‘어머니의 발아래 깊은 심연’은 무섭고 두렵던 당시 상황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발아래에도 깊은 어둠이 있고 그 어둠 아래 또 다른 어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도 전쟁의 역사와 맞물려 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수탈과 약탈에 흔들리던 우리네. 일제강점기나 6.25전쟁 등의 큰 역사적인 사건 아래, 우리의 문학은 어떠했는가. 아프고 찢기고 어긋나고 벗겨지고 없어졌다. 지키지 못한 그네들의 마음의 울림이 참으로 슬프고 가련하게 느껴진다. 그 상황에서 가장 자신을 오롯이 지키는 일이 시인 이상처럼 벽 한가득 글을 쓰는 것이 아니었는지. 지금 우리에게 온전한 자신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넘기 위한 발걸음은 무엇인지 이 책은 끊임없이 묻고 있다. ‘당신의 떨림은 무엇인가’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