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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동안 가장 많이 생각났던 사람은 알베르 카뮈였다. 카뮈도 알제리 태생이고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 그리고 알제리 독립을 지지했다. 물론 그는 프랑스 사람이었지만, 노동자인 아버지가 알제리로 이주한 후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청년기까지 자랐다. 그는 프랑스인이긴 하지만, 알제리는 그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카뮈는 마흔네 살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타고,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영화를 누렸다고도 할 수 있지만, 사실 사는 동안 내내 알제리와 프랑스 양쪽으로부터 항상 너는 어느 쪽이냐는 질문과 공격, 비난을 많이 받았다. 공산당에 가입까지 했던 카뮈는 알제리의 독립을 지지했지만, 알제리의 입장에서 그는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배신자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카뮈는 알제리를 지지하는 배신자였다.
이것을 일종의 '유명세'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카뮈가 죽었던 나이보다 오래 살고 보니(카무는 47세에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그 나이에 그런 식의 '조리돌림'을 당하는 게 한 개인에게 얼마나 치명적이고 가혹한 일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아시아 제바르는 같은 알제리 사람이었지만, 카뮈와는 달리 아랍인이었다. 적어도 카뮈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면서 본인의 정체성에 대해 갈등하거나 고민하지는 않았겠지만, 아랍인이었던 아시아 제바르는 피식민지 국민으로서 지배 언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하며 글을 쓰는것에 대해 스스로 모순과 이질성을 느끼며 그것이 점점 극대화되는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정체성의 혼란도 가져왔을텐데, 그것은 여성으로서의 삶과 중첩되어 이중의 고통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작가로서 자신의 도구로 아랍어 대신 프랑스어를 선택한 것은 프랑스어를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복잡미묘한 작가의 심리상태는 이 소설의 주인공인 베르칸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프랑스에서 학교를 다녔으나 알제리를 위해 시위를 하다 수용소를 끌려가고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한 베르칸이 '다시 살기 위해' 고향인 카스바로 귀환한 것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귀환한 그의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언어의 문제가 대두된다. 모국어이자 가족들의 언어인 아랍어와 자신이 글쓰기의 언어로 선택한 프랑스어. 그러나 이 두 언어는 피지배자의 언어와 지배자의 언어라는 점이 베르칸의 갈등의 지점이다.
'글쓰기'는 이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화두 중 하나인데, 그것은 이 소설의 2부의 제목에 '글쓰기'가 들어가는 것으로도 잘 드러난다. 글쓰기의 도구는 언어인데, 베르칸이 선택한 언어는 프랑스어였기 때문이다. 베르칸은 프랑스어와 아랍어라는 두 가지가 혼재된 세상 속에서 산다. 자신의 근본을 잊은 적은 없고 애국심도있지만, 알제리에서 그는 이방인이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그는 이방인이었고 거기서는 알제리를 꿈꿨다. 그렇다면 조국이란 어떤 곳인가?
'조국'과 '언어'는 그가 사랑했던 두 명의 여성으로 압축되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베르칸에게는 두 명의 연인이 있다. 마리즈는 베르칸이 프랑스에서 사랑했던 연인의 이름이고, 나지아는 귀환한 후 만난 여인이다. 마리즈는 프랑스어를, 나지아는 아랍어를 각각 상징하는 사람이자, 각 언어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귀환 후 만난 나지아는 베르칸처럼 프랑스어와 아랍어를 모두 사용하지만 사랑을 할 때나 사랑을 한 후 아랍어로 말한다. 그것은 모국어로만 가능하다는 듯이. 그녀와 사랑을 나눈 후 베르칸은 마리즈에게 썼던 편지를 찢는다. 하지만 두 언어의 경계에 있는 베르칸은 여전히 프랑스어로 글을 쓴다.
그리고 어느 날... 베르칸이 실종된다.
마지막에 베르칸이 자동차 사고를 당하는 것으로 처리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조차 알베르 카뮈의 마지막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아시아 제바르가 프랑스에서 학교에 다녔던 청소년기는 한참 알베르 카뮈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였다. 아시아 제바르는 알베르 카뮈의 작품을 읽었을 테고, 어쩌면 그를 만났을 수도 있다. 그의 죽음도 매체를 통해 알았을 테고, 어쩌면 그의 장례식장에 갔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겹침들은 피지배국, 피식민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의 삶이라는 게 어떤 것이었을지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시아 제바르를 카뮈가 함께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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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아프리카 식민지화에 의한 폐해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륙 아프리카는 유럽열강들의 지배와 수탈속에 살아왔고 지금까지도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지배를 받고있다 이 책에서는 슬픔과 대립 분열을 넘어서 가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이 투영된듯하지만 가해자들은 과연 진정한 사과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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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가끔씩 손에 잡히는 프랑스 소설들이 그렇듯이 관념적인 서술이 뜬구름 같이 섞여 있어 이야기를 따라가는데 집중도는 떨어졌다. 그러한 스타일, 그리고 그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등장인물들의 갈등과 고민을 그려내기에 적절한 문체일 수 있다고 생각은 드는데... 사실, 딱히 맘에 들진 않는다. 그러한 대체로 뿌우연 이야기들 가운데 중심이 되는 부분을 '우리나라'식으로 적어보면.... 일제 식민지 시절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그쪽에서 직장을 잡고, 일본 여자와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하던 조선인이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어릴적 꿈인 소설을 써 보고자 한다. 한국은 독립된 상황. 하지만 그가 소설을 쓰기 위해 선택한 언어는 일본어다. 그리고 잠시지만 한국에서 만난 여인과 뜨겁지만 짧은 사랑을 나눈다. 일본 여자와 사랑을 할 때 사용된 언어는 일본어, 한국여자와는 한국어. 이 사랑의 언어가 한국어임에 대해 남자는 여러가지 생각을 한다. 일본 여자와 사랑을 할 때에도 한국어는 맛보기 식으로 개입된 적이 있었기에. 소설의 언어와 사랑의 언어가 차이가 나는 것에서 일면 내면의 불안함을 느낀다. 남자는 한국에서 어릴적 부모형제가 항일 저항에 참여했다는 명목으로 목숨을 잃었던 일들을 겪었고, 본인도 청소년때 관련되어 투옥되었던 사실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 하는데, 그게 일본어이다 보니 주변 한국사람들에게서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소설의 내용이 한국 정부의 비민주적인 혹은 정파주의적인 갈등에서 질시를 받기도 하는 가운데, 이 남자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행방불명된다. 이게 알제리-프랑스의 이야기로 읽힐 때와, 한국-일본으로 읽힐 때 여러가지 역사적, 문화적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위에서 처럼 우리의 경우로 바꾸어보면... "도대체 왜 일본어로 글을 쓰려고 하지? 재일교포 2세 이야기야?"라는 질문이 바로 들게 되는 차이가 생긴다. 하지만 알제리-프랑스의 이야기일 경우 소설가를 추구하는 주인공의 고뇌와 프랑스 애인, 알제리 애인의 입장은 조금 더 포용적이기도 하고 지적으로 그려지는 것도 같다. 그 미묘함이 무조건 부정적인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동네의 이야기가 되었다면, 주인공이든 주변인물 누구에서는 '왜 알제리어로 쓰면 안되는데?'라는 이야기가 나왔을 것만 같은 찜찜함이 좀 있다. 그런 이동네 민족감정을 그럼에도 넘어설 수 있는 부분은, 어찌보면 사랑의 언어로써 프랑스어와 알제리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 에로틱함을 잘 표현한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을 민족주의적으로 읽게 되면 매우 평면적이면서 이해가 안되는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주인공이 살아가면서 사랑을 하고 느끼고 표현하는 언어의 실존과 소멸에 대한 이야기로 읽기를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