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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오늘의 우리는 상상력 부재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타인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이해의 무지가 도처에서 날뛴다. 오직 자기중심주의의 오만이 설쳐댄다. 타인의 상황에 대한 상상력의 빈곤, 무관심과 철저한 무지. 아니 혐오와 위협과 배제, 절멸을 외쳐대기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다. 서인도제도의 작은 섬, 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어 수치심과 굴욕의 삶을 강요당했던 한 인간의 분노와 이 굴레로부터 벗어나려는 내적 자유의 권리를 향한 자기 성찰의 분투기인 이 작품을 읽게 된 동기라 하겠다.
직접적 계기는 ‘리베카 솔닛’이 《맨스필드 파크(Mansfield Park)》를 쓴 ‘제인 오스틴’의 시선에 대한 무감각, 혹은 무지에 대한 비판이라 하겠다. 그것은 소설 속 영국인들의 풍요롭고 안락한 삶과 식민지에서 착취당하는 노예들의 노동과 그 피맺힌 산물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몽매함과 무관심에 대한 지적이다. 백인 사회가 칭송하는 19세기 제국주의 영국 계관시인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 〈수선화〉의 그 무심한 아름다움의 관조가 “실제로 보지도 못할 꽃을 노래한 긴 시를 열 살의 나이에 암기해야했다”는 피정복민의 비통함과 왜 연결되어야 하는지의 앎에 대한 일깨움이다.
열아홉 살 여자아이 ‘루시’는 수치와 굴욕으로 점철된 지긋지긋한 경멸의 세계인 고향을 떠나 자기 안을 점령한 타자의 관점이라는 위협을 떨쳐내려 대양을 건넌다. 부유한 상류 집안의 입주보모가 되어 그들의 관찰자이면서 자기 내면의 변화, 즉 열린 미래를 찾기 위해 고정된 기대를 벗어나 내면의 확장을 위한 치열한 내적 전쟁을 치른다.
집의 안주인 ‘머라이어’가 아름다움을 보는 곳에서 루시는 비통함과 원한만을 본다. 그녀는 “워즈워드의 시 〈수선화〉를 내 마음에서 그 시 한 줄 한 줄, 단어 하나하나 남김없이 모두 지워버리겠다고 맹세했”었던 기억을 들려준다. 지배자의 여유와 관조의 시선 뒤에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지를. 소설의 축을 이루는 제재는 이처럼 사람들이 당연시하고 있는 안락과 풍요의 이면에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의 고통과 울분이 있음을 줄 곧 현시(顯示)한다. 그리고 또 다른 축은 ‘엄마’로 상징되는 내적 검열관으로서의 비존엄의 그림자를 떨쳐내고 온전한 주체로 성장하려는 여자 아이의 새로운 정체성을 향한 걸음일 것이다.
머라이어와 루이스라는 가족에게서 발견되는 일견 견고하고 진실해 보이는 것의 위선, 그것에 내재된 폐허성에 대한 깨달음, 자아성찰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머라이어의 관대함, 자신의 양면성에 대한 자각들,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열리는 자기 몸과 정신의 반응들이 지면을 채워나간다. 이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제한했던 선택지들을 확장해 나간다. 그것은 나의 필요가 상대의 바람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이기도하며, 삶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허위의 발견이고, 박물관에서 보게 된 프랑스 남자가 그린 그림으로부터 세계의 규칙을 자의적으로 조종하는 남자들의 권력의 편향성이며, 자기 삶에서 쫓아내 버릴 수 있으리라는 경멸의 편재(遍在)이기도 하다.
그것은 경멸해 마지않았을 그럴 여자들이 낼 법한 즐거운 척 꾸며대는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한 남자에 대한 욕망으로 자신이 동일한 웃음을 짓는 것처럼 성적 성숙에 대한 각성으로 드러나기도 하며, 엄마같은 보호의 손길을 주었던 머라이어에 대한 고마움의 발견이기도 하다.
자유를 향해 가는 길은 “누구는 재물을 얻고 누구는 죽음을 얻”듯이, 자신에겐 분노와 절망, 기억이라는 직감, 화가의 방식으로 자신을 새로 만들고 있음의 이해에 이른다. 루시퍼를 줄여 루시라고 지어진 이름, 신의 자식인 악마,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음식이나 생명이 꺼져버린 여러 존재의 사진을 찍어 잡지사에 파는” 스튜디오의 허드레 작업자로 취직한다. 실재 자체보다 더 흥미로운 실재를 찍는 사진. 자기만의 시선이 응축된 사진을 찍는 한 인간의 목소리가 책의 전편을 눈물의 얼룩이 되어 번진다.
그녀는 머라이어가 준 공책에 ‘루시 조지프 포터’라고 자신의 이름을 당당하게 적을 수 있게 된다. 그녀가 적어 넣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 ”사랑해서 죽을 수 있을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문장에 수치스러움으로 하염없이 우는 장면은 어쩌면 그 굴욕의 얼굴을 보았음, 즉 자아성찰을 끝냈음의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세상 대부분의 불행에 책임이 있는 정확한 방식을 안다고 자처하는 우리들은 정작 그 책임에 눈감고 모른 체 하거나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인식자체가 없기도 하다. 빈곤해진 상상력, 그것이 지시하는 곳을 바라볼 수 있기를 외치는 주인공의 목소리가 처연하게 흐르는 이 소설에 빠져들 수 있었던 이 시간을 고맙게 생각하게 된다. 우리들이 지닌 선함과 상냥함, 안락한 환경이 우리들의 눈앞에서 사라져가는 것들과 관계가 있음을, 그 연결됨의 상상력을 깨워내야 할 시간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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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네이버 책방 메인에 한참동안 올라와 있었던 소설이다. 나름 책 수집, 다독 성애자 성향이 다분한 성격 탓에 그런 책들은 읽던 안읽던 일단 구매하고 본다. 이 책도 사 놓은지 몇 달 된거 같은데 이제서야 읽는다. '루시'. 익숙한 이름이다 싶더니 얼마전 읽었던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오, 윌리엄!'의 주인공 이름과 같아서 그런거였다. 미국에선 흔한 이름인가 보다.
작가 저메이카 킨케이드는 서인도제도의 앤티가섬에서 태어나 뛰어난 학업능력을 보여줬지만, 남동생 셋이 연이어 태어나면서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학교를 그만두고, 10대후반에 미국으로 건너가 보모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이십여년간 의도적으로 가족과 단절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작가 소개만으로 따로 요약이 필요없을 정도로 자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소설로 옮겨 쓴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불우한 성장기를 보낸 피식민 소녀 루시의 (스스로 밝혔듯이) 서글픔보다 묵직한 감정에서 비롯된 가족에 대한(특히 엄마에 대한) 재단할 수 없는 냉담함을 그린다. 루시는 식민지의 원주민 태생에다가 연이어 태어난 남동생들 때문에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해야 되는 가난, 가정에 무책임한 아빠는 물론이고, 남성을 위한 여성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고 강요하는 엄마까지, 자신의 운명을 벗어나는 것이 행복이라고 굳게 믿는다.
보모로 일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와 익숙한 불행으로부터 벗어나 공간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계에 발 딛었지만, 루시는 결코 행복해지지 않는다. 편견없이 자신에게 친절을 베푸는 머라이어 부인을 사랑하게 됐을때나 사랑하지 않게 됐을 때나 엄마가 떠오르고, 낯선 남자를 만나 섹스를 즐길때도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던 엄마의 말을 무시하고 마을 남자와 섹스했던 경험이 생각나고... 그토록 벗어나길 갈망했던 환경과 부정했던 엄마를 결코 완전히 떼어놓지 못한다.
여자들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는 얘기를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는데, 남자라서 그런지 막상 그런 애증의 모녀관계를 잘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러기에 이 소설도 나에게는 애증의 가족관계로 다가온다.
가족과 단절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사망소식과 장례비마저 빚져야 한다는 소식에 그 동안 모아놓았던 돈을 보낼 수 밖에 없는 루시의 복잡다단했을 심정에 동변상련을 느낀다. 루시에게 비할 바는 못되지만, 노동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또래 아이들에 비해 항상 많이 부족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나의 어린 시절도 절반은 벗어나고 싶은 것들이었다. 지금이야 일찍 돌아가신 아빠가 아련하고 이제 할머니가 되어버린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글썽거리고, 형제들이 경제적으로 나에게 의지하는 것에 연민을 느끼지만, 한 때는 그런 것들에 힘겹고 괴로워 했던 시절이 스쳐 지나간다.
어른이 된 루시와 만날 수 있다면, 서로의 괴로웠던 시절을 안주삼아 소주 한잔 기울일 수 있었으면 딱 좋을 거 같은데 아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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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너무 좋은데… 막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좋고 고개를 살짝 흔들면 눈물이 넘칠 정도로 좋은데 왜 좋은지 설명 못하겠는 책. 너무 좋아서 친구에게 선물했는데, 그는 해외 문학을 전혀 읽지 않는 사람이라 아마 지금까지 한 번도 펼쳐지지 못한 채 책장 한 구석에 쳐박혀 있겠지만. 그냥 대충 거기 있다는 걸 짐작만 해도 그럭저럭 뿌듯한 책. 아니 그래도 읽어 주면 좋겠는데 애니 존도 읽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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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 소녀의 성장기이며, 아웃사이더 미국인 이야기이다.
미국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역사를 알고 있음에도 일단 백인이 떠오르고, 흑인이 떠오른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오는 흑인은 남북전쟁과 노예 해방의 후예들이다. 대단히 섭섭한 이야기지만 아시아계나 아메리카 원주민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루시는 서인도 제도 출신 흑인으로 미국에 와있다. 세상의 많은 딸들이 그렇듯 엄마와는 애증관계를 가지고 있고, 아빠를 혐오하는 편이다. 그녀의 아빠도 세상의 많은 아버지들처럼 책임감 없고 무능력한 존재이다. 화가 많은 소녀 루시 함께 살고 있는 백인은 너무나 선량하지만 무지하고 엄마는 사랑보다는 억압의 존재이며, 아들과는 차별적인 기대로 딸을 키워왔다. 가부장적 억압과 여성차별, 그리고 계급, 인종, 제국주의까지 이 모든 것에 둘러싸여 있기에 그녀는 화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성장은 막을 수 없다. 마이너의 자리에서도 꿋꿋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고 꿈을 키워가고 있다. 루시는 저자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분신이다. 루시의 이야기가 미국으로 와서 1년 동안의 이야기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녀가 성공하고 인정받는 내용까지 더해졌다면 아마도 흔한 성공 스토리가 되어 또 다른 소녀들의 화를 돋우며 억압했을 것이다.
한 아이가 질문했었다. 세상은 공정하냐고 아마 그런 세상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가까워지기 위하여 인간은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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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친구 중에 문학에 조예가 정말 깊은 친구가 있어요! 이 책은 그 친구가 인스타 스토리에 강추해둔 걸 보고 혹해서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ㅎㅎ 친구가 이야기한 대로, 문장력이 정말.. 압도적입니다. 어떻게 번역을 했는데도 그 우수함이 느껴지지? 이렇게 느끼는 책이 정말 많지 않은데.. 보물 같은 책을 만나 기쁘네요 ㅠㅠ 더 많이 알려지면 좋겠고,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습니다! 또 문학동네 말고 다른 출판사에서도 출간되면 번역 비교도 해보고싶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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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압제 속에서 살던 루시는 늘 독립된 삶을 꿈꾸어 왔다. 미국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기까지 자신이 아이들을 돌봐주던 가장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만의 집을 꿈꾼다. 불행을 맞은 머라이어에게 루시의 독립선언은 청천벽력이었으리라. 넷이나 되는 아이들을 혼자 건사해야 했으므로, 하지만 루시는 당장 자신을 생각해야 했다 쌓인 울분은 불쑥불쑥 나타나고, 생활고로 자신을 팔아넘기다시피 한 부모를 다시 보고 싶어 하지 않아 한다. 오랜 식민지배를 받았던 저자의 조국,독립을 원했던 루시의 모습은 바로 작가 자신의 투영일 수 있겠다. 자신의 이야기를 소서로 쓰면서 작가는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을 다시 떠올려보았을 것이다. 그것이 치료였을 수도, 또 다른 아픔이었을 수도 있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