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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테디 웨인의 <아파트먼트>를 읽고
스물넷, 문학을 사랑한 우리가 만난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과거의 무수한 내가 모여 지금의 내가 만들어지듯, 나의 존재는 무수한 인간 관계 속에서 정립되고 그 관계 속에 있을 때 비로소 나의 존재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정말 나와 마음이 통하고 진정한 나의 'soulmate'라고 생각되는 소위 '잃어버린 나의 반쪽'을 만나게도 된다. 그러나 그런 인생의 동반자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나의 환상이고 착각이라면 어떨까. 나의 마음이 너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너와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떨까. 또는 그렇게 소중한 인연을 나의 이기심과 질투로 인해 영영 떠나보내게 되면 어떨까.
이 책 『아파트먼트』는 그런 인간 관계의 시작에서부터 관계의 상실까지 과정을 스물네살 문학을 사랑하는 두 청년의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섬세하고 날카롭게 잘 묘사하고 있다. 특히 저자가 다루기 힘든 감정과 행동의 변화를 책 속에서 '나'로 지칭되는 한 인물의 성장 과정 속에 잘 녹여내서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빌리라는 한 인물과의 만남, 그와 함께 한 우정, 그 관계에서 오는 기쁨과 행복 등이 빌리와 함께 한 일상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빌리와의 만남은 기쁨으로 시작하였다. 컬럼비아대학 순수예술 석사과정 문예창작 프로그램을 함께 듣는 수강생으로 만났다. 교수를 비롯한 모든 수강생들이 내 소설 작품에 대해 "No' 라고 외칠 때 빌리만이 내 작품을 칭찬하며 ' Yes' 라고 말했다. 나처럼 문학을 좋아하고, 나처럼 소설가가 되기를 꿈꾸며, 나처럼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빌리와 나의 우정은 설레는 기쁨과 희망적인 기대로부터 시작되었다. 빌리는 평생 동안 거리를 두고 사람들을 대해온 내가 신뢰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진정한 친구라는 느낌이었다. - p.157
이렇게 시작된 우정은 빌리와 자신의 아파트에서 함께 동거하면서 발전하게 된다. 바텐더로 일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머물 곳이 없던 빌리를 배려한 선의에서 시작한 이 친밀한 동거가 나중에는 위험한 동거로 발전하게 될 줄은, 결국 '애초에 함께 들어와 살자고 하지 말았어야 했었는데 라고 후회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으리라. 처음에는 '너와 나는 같다' 라는 동질성을 발견했지만, 나중에는 '너와 나는 다르다' 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어쩌면 애초부터 빌리와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합평 수업에서 그가 마치 '나의 모든 죄책감을 덜어주고 나의 존재를 승인해주듯이' '나'의 소설을 변호해주었을 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가 '나를 정말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거겠지' 라고 말하는 데 그것은 내가 느끼는 외로움과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나'는 빌리에게 전적으로, 필연적으로 매료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생각은 '나'의 착각과 환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빌리가 가진 문학적 재능과 그의 작가로서의 진정성은 매혹적인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내가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기도 했다. 또한 중상위 계층에 속하는 '나'는 비록 불법 전대를 하고 있지만, 맨해튼에서 제법 괜찮은 아파트를 소유하고, 부모님으로부터 학비를 보조받는 나와 바텐로 힘들게 일하면서 학비를 버는 그와의 경제적 격차는 결코 좁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모든 혜택과 특권들을 누리고 있음에도 '나'는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충분히 좋아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에 반해 미국 중서부의 가난하고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빌리는 '태어난 환경은 사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거' 라고 자신의 운명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간다. 그리고 자신의 비천한 출신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 속에서 오히려 자신의 고향을 생생하게 묘사하기도 한다.
평생 주변부에서 맴돌며 자신에 대해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는 존재' 라고 느끼며 자신의 진정성을 찾지 못한 '나'와 운명을 개척하고 자신이 가치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빌리는 그렇게 가치관부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빌리의 남성성과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은 그렇지 못한 나와 대조되며, 그것이 '나'의 동경심이 되기도 하지만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많은 차이가 있었음에도 '나'는 빌리와 통하는 면이 많다고, 우리는 서로 닮았다는 착각,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결코 같을 수가 없는 존재인 것 같다. 이 세상에서 나와 똑같이 닮은 사람을 찾을 수 없고, 인생의 동반자라고 여기던 배우자가 사실은 님이 아니라 남인 낯선 사람이라고 느껴질 때가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깨닫게 된다.
작가는 순수한 선의와 호의에서 시작된 그들의 동거 생활을 통해 인간 관계의 균열부터 상실까지 그 과정을 섬세하고 그려내고 있다. 처음에는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동경에서 시작된 마음이 상대방에 대한 시기와 질투,미움,증오로 바뀌는 것은 인간이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인 것일까. 인간의 이런 이기심과 욕심은 어쩔 수 없는 것이란 말인가. 인간이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상대와 자신의 우열을 따져 우위에 있으려고 하고, 경쟁과 권력 투쟁을 통해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고 싶어하는 존재인 것인가. 그런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이 결국은 소중한 존재와의 되돌릴 수 없는 이별과 관계의 파국, 상실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경계가 그려내는 특별한 윤곽선은 우리 자신의 그것과 충돌하고, 남은 평생 동안 사라지지 않을 커다란 구멍을 남긴다. -p.286
외로움, 고독, 동경, 우정, 분노, 시기, 질투, 이기고 싶은 마음, 잃고 싶은 마음이 모든 마음들이 인간이 가진 양면성일지도 모른다. 이 책 『아파트먼트』는 '문학'이라는 같은 공통성과 소설가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섬세하고 복잡한 감정선과 그 감정의 변화를 탁월하게 그려보이고 있다. 소설의 책장을 덮으며 결국 인간은 혼자일 수 밖에 없는 존재인가라는 씁쓸한 깨달음이 온다. 작품 속 두 인물의 인간관계 상실로 인해 결국 쓸쓸하게 혼자 남은 모습에 안타까움이 남는다. 결국은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그들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길 바란 건 나의 욕심이었을까. 나 또한 나의 인생을 살면서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인생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그들의 관계, 그로 인한 변화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싶다면 이 책 『아파트먼트』를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소설 문장의 모범 답안이랄 수 있는 문장들로 이해하게 되는 평범한 소설가 지망생의 고통이라니…그렇게 청춘은 끝난다. 어떻게 하든 청춘은 상실의 과정이고, 그 상실을 통해 우리는 한때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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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 육년 동안 비어두었던 방을 큰조카에게 내주었다. 사실 조카의 본가도 서울이고 학교도 서울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자연이 가까이에 있고 지적 대화와 교감이 일상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같이 지내게 됐다. 어쩌다가 일주일 정도 묵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파트먼트>의 문장처럼 아늑한 밤을 지나 민낯의 서걱거리는 아침이 매일 돌아왔다. 집은 누군가 요리하고 누군가 청소를 해야 돌아간다. 가을이 되자 조카는 셰어하우스를 구해 나갔다. 협업이 많은 과동기와 방을 함께 쓰며 친구의 내밀한 구석들에 노출되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원룸을 구했고, 원룸에 사는 다른 친구가 투룸을 구해 넓게 살자는 제안을 받는다. 조카는 다 좋을 듯했던 관계도 종일 밀착돼 지내면 마찰과 미묘한 감정들이 생긴다는 점을 고려해 거절한다. 이십대 초반에 공간과 거주에 대한 인식과 주관이 형성된 것이다.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 <아파트먼트>의 화자가 빌리에게 호의를 베푸는 데에는 화자의 누적된 외로움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대인기피증이 있는 주인공은 아마 책을 통해 인간관계의 허기를 채웠던 것 같다. 작가 커플이나 동료 작가들의 우정을 접하며 이상적인 ‘결합’에 대한 환상과 열망에 사로잡힌 것으로 짐작된다. 건조하고 하드하지만 왕성한 활동력과 남성미를 지닌 헤밍웨이를 빌리에, 기교적이고 섬세하며 한 여자만 바라보는 피츠제럴드를 자신과 나란히 두지 않았을까싶다. 상호보완적이며 완벽한 페어링을 꿈꾸었으리라. 주인공은 다한증으로 “부드러운 손”을 가진 뼛속까지 중산층 지식인인 자신에게서 남자답지 못한 육체적 결함을 발견하고 집착한다. 어쩌면 그는 빌리가 고치(옷장)에 갇힌 자신을 밖으로 끄집어내어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 테고, 이 점이 브로맨스를 넘어서는 동성애적 욕망으로 비칠 소지가 있다. 외로웠던 사춘기 시절, 비밀과 상처와 문제들로 가득한 예술에 매혹되고 그 힘에 이끌렸지만 자신을 둘러싼 모든 특권과 혜택들까지 내던지고 투신할 자신은 없었던 것이다. 내 경우, 하도 소설을 파니까 주변인들이 “소설 쓸 생각이죠?”라고 묻곤 했다. “제 안에 고유한 이야기가 없는걸요.”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세계에 깊이 속할수록 결핍과 부족함이 늘어난다. 주인공은 문예창작 대학원 과정을 맛보며 결과적으로 워크숍 진행의 꿈을 고이 접는다. ‘진정성’을 검증할 시험대에 오르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 중도中道 추구의 성정에 맞고 자신에게 내장된 문법과 이론과 개념들이 타인의 작품 분석이나 편집에 도움이 되고 쓸모가 있음을 깨닫고, 셔우드 앤더슨 같은 소설가 되기를 중단하고 반려묘 셔우드를 맞이한다. 화자는 한때 들끓었던 열정과 “꿈의 구장”에 빌리가 있었음을 추억하고 그와의 중첩된 시간이 자신과 평화로운 자아상을 찾는데 비싼 수업료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아파트먼트>는 무너지지 않고 그럭저럭 잘 실패하고 잘 이별하며 시간을 건너 독립된 현실 공간에 도달한 중년의 향수 어린 호박빛 시절을 비추어 ‘나’는 곧 나일 수밖에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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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한테나 사각지대는 있어. (157쪽)
테디 웨인의 <아파트먼트>를 읽고 누운 밤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소설의 이름 없는 화자가 마치 나 같다고 하면 지나친 감상이자 동일시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회고하는 시점에서 그의 곁에 남은 장편소설 초고와 고양이 ‘셔우드’, 그리고 가슴에 맺힌 짝사랑이 아릿했다. 그는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이기도 했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화자에 가까우며, 고독함에서는 이셔우드의 <싱글맨> 속 조지였다. 그러면서도 어디에도 섞이지 않는, 활자의 음영 같은 삶이 그(소설)의 전부이다.
무명의 화자는 상대방 ‘빌리 캠벨’을 향한 감정과 마음을 거울삼아 그 자신을 흐릿하게 형상화한다. 빌리가 선망과 숭배의 대상처럼 중심에 놓이나 어떤 점에서 그는 주인공이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잠시 벽장 밖으로 나가게 했던 자극제에 불과하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이, 화자는 쉽게 흔들리거나 자신의 공간과 영역을 함부로 내주는 타입이 결코 아니다.
<아파트먼트>에서 주인공의 강렬한 추억이자 자신을 설명할 대표적인 만남은, 그만큼의 시간을 돌고난 뒤 회고된다. 스물넷 시절은 그게 술이든 황금시절이든 호박빛 기운을 빌려서 기술된다. 중년의 인생 서랍에서 닫아둔 채 간직해온 시간의 문이 열리며 재생된다.
빌리와 합체했다가 멀어진 시공간은 그가 외부로부터 짜깁기되어온 두터운 자아상을 벗을 뻔했던 위태롭고도 순연한 때였다. 자유로운 바람이 일상을 환기시키고도 남을 듯한 뉴욕의 90년대 중후반은 다가올 변화와 열림에 앞서 두려움과 조급함이 대치됐던 시기였던 것 같다. 충분히 누릴 삶의 조건을 갖췄음에도 주인공의 부자유와 조심스러움이 대체 어디서 기인하는 건지 내내 궁금했다.
<아파트먼트>를 읽으며 영단어 passion과 confide(nce)를 계속 곱씹었다. 패션은 열정으로 뜨거운 청춘의 심벌이면서 그리스도의 뼈아픈 수난을 함축한다. 화자는 창작에 대한 열정 너머 사랑을 향해서도 십자가를 짊어질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일까. 그가 원한 것은 육 년 동안 비워둔 방을 기꺼이 내주고, 비밀을 터놓을 신뢰할 단 한사람이었다. 어쩌면 ‘한 몸’에 가둘 수 없는 초월적인 이상과 꿈 자체였을지도 모르겠다.
사춘기 무렵 부모님의 이혼으로 화자는 한꺼번에 터져 나온 고민들을 혼자 끌어안고 지냈다. 그가 가졌을 의문과 믿기 힘든 부재와 설명되지 않는 공백은 그를 침잠하게 했을 테고, 그런 상처입음 자체를 형식이든 내용으로든 품는 ‘셔우드’ 앤더슨의 소설에 반한다. “마음의 지하 복도” 속 한줄기 빛이었을 소설에서 그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물음에 대한 답을 스스로 구하며 탐색을 이어갔으리라.
이혼 후에도 아버지는 재정적인 지원과 도움을 주지만 그는 끊어야 할 ‘기성체제’의 상징이기도 하다. 같은 맥락에서 불법 거주하는 오래된 주택도 관행과 전통을 의미한다. 쉽게 저버릴 수 없는 특혜이자, 겉돌며 상처 입고 불편한 내면을 가릴 경계선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소설창작 대학원에 지원하기 전 이미 각종 유려한 개념과 용어로 수컷새처럼 자신을 휘장하고 있다. 하지만 외부적이고 상징적인 기표는 개인의 내밀한 부분을 품거나 스며드는 데에 한계와 갭이 생긴다. 촘스키나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은 타인의 작품을 객관화하고 분석하는 기틀이 되어주지만 정작 본인의 삶은 담지 못하고 교묘히 비껴가는 인상을 남긴다. 나를 보호할 기제들이 많고 방어적일수록 허깨비나 진실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줄 함정이 따른다.
그는 자기 안의 충동이나 욕망을 그대로 드러냈을 때 잃게 될 정원과 펼쳐질 가시밭을 눈치 챈 듯하다. 촌뜨기에 불과한 빌리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의문이 생길 때쯤 빌리가 완벽한 남성미를 지녔음을 알게 된다. 더이상 잃을 게 없다는 불패 정신이 그를 빛나게 할 뿐더러 ‘깨진 앞니’까지 꺾지 못하는 당당함에는 조각 같은 외모(성적 매력)가 받치고 있다. 문장 부호와 섬세한 디테일에 신경 쓰며 다한증으로 인해 ‘부드러운 손’을 가진 주인공과 대조된다. 빌리는 헤밍웨이의 빙산 이론을 연상시킬 글쓰기로 응축되기 때문이다. 요리와 청소와 술손님 응대는 물론이거니와 연장 세트와 바느질 상자까지 다루는 생존 스킬을 겸비한다.
결국 글까지 점령하는 그림자와 ‘결함’이 화자를 더욱 위축시킨다. 그가 가진 모든 카드를 내보일 수 없는 이유를 수강생들이 알 리가 없다. 주인공이 이해 받지 못할 거라고 믿는 자신의 실체는 신기하게도 글에도 투영되고 마음을 얻지 못한다. 그가 핵심(진짜)에 진입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턱이 벽장 속 정체에서 비롯됨을 오직 그만이 안다. 비겁한 겁쟁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시대라는 관절”을 알고 눈치껏 도망치고 무너지지 않는다.
주인공이 집밖에서 눈에 담고 괴로워하는 것은 육체적(미학적) 결함을 지닌 몸들이다. 사지절단 같은 다른 몸은 낯설고 당황스러워도 세상 풍경의 일부로 수렴되지만, 더 깊숙이 숨겨진 다름(이반)은 아직 수용되거나 개방을 허하지 않는다. 하필 그가 함께하고 싶은 이가 대척점에 놓인 보수적이고 완고한 전형성의 조각상이라니.
안타깝게도 빌리에게 주인공은 “자금 출혈”을 지혈해줄 지원군이었을 뿐이다. 대학원의 장학금 제도나 다른 룸메이트들로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변수이다. 문제는 화자에게 빌리는 인생을 통틀어 “완강한 파스타치오 껍질”을 깨볼 어렴풋한 초록빛 상수로 가슴 언저리에 자리한다는 사실이다.
인간 모두는 누구와 어디에서 살고 싶은지의 꿈을 머금고 평생 고민한다. 그 꿈의 구장을 <아파트먼트>의 한 가운데가 품고 있어 -- 문이 잠시 열렸다 닫혔음에도, 회전식 문처럼 그를 떠밀어냈음에도, 마침내 종이 위에 그가 피 흘리고 있어 슬프고도 아름다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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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생각해보곤 했다. 가난한 재능러와 부자인데 재능없는 사람 중에서 누가 더 나은 인생을 살까? 이 책을 봐도 명확한 답이 나오진 않는다. 근데 주인공의 열등감이 너무 안쓰러울 정도였음.. 그때부터 결말은 예정돼 있었던 걸까. 아무래도 계속 주인공의 시점에서 보다보니 연민이 느껴짐. 상대방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근데 반대 시점에서 보면 아마 주인공이 나쁜놈이지 않을까?) 우리는 다 각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알 수 없는 노릇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