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인석보는 세종 대왕이 쓴 '월인천강지곡'과 수양대군이 쓴 '석보상절'을 훗날 합한 것으로 조선 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한글로 쓴' 한글대장경이다. 월인석보를 풀이한 이책에서 중세국어와 현대 한국어, 불교가 만났다. 책소개에 보면 '팔만대장경 다이제스트'라고 표현되면서, 이 책은 팔상도의 첫 번째 그림 ‘도솔래의’와 두 번째 그림 ‘비람강생’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가 도솔천에 호명보살로 계시다가 어머니 마야부인의 태몽으로 등장하는 이야기, 가비라국 룸비니 동산에 태어날 때 인도와 중국에서 일어난 상서로운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월인석보 1권이 총 108장인 것에 비하여 2권은 79장으로 원래는 1권과 2권이 하나의 책이다. 월인석보의 구성은 일종의 단편 모음집이다.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설법을 엑기스만 모아서 중요한 것은 상세히, 생략할 것은 과감히 줄여 편집한 팔만대장경 다이제스트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월인석보는 어디서부터 읽어도 무방하다."
그러니까, 조선 시대 한국어, 불교 쪽에 문외한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국어학, 불교계 쪽에서 보면 매우 의미있는 책이다. 그런데 문외한인 내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옛날 조선시대 언어를, 훈민정음을 통해 엿볼 수 있고, 내가 알지 못했던 불교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다.나는 이런 책은 천천히 소리내어 읽어 본다. 그럼 조선 시대 세종 시절로 돌아간다. 어떤 언어는 생소하고, 어떤 언어는 같다. 거기다, 저자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만 현재에도 살리고 싶은 어휘들이 종종 보인다.
'추솔하다 = 들까불어 찬찬치 못하다.' '거칠고 찬찬하지 못하다' 라든지, 함함하다(15세기에는 흠흠하다) - 소담하고 탐스런, 털이 보드랍고 반지르르하다라는 뜻.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함함하다 한다' 할 때 쓰는 표현이라 한다. 또 '흐웍흐웍하다' - 서로가 윤택하게 빛나 흐뭇하다....등등 고어이면서도 살려보고 싶은 단어들과 그 풀이들이 다가왔다.
추솔하다. 들까불다, 함함하다, 흐웍흐웍하다...요즘 경박한 신조어도 많은데 이런 옛 말들은 얼마나 우리 말의 깊고, 넓은 뜻을 간직하고 있나? 이런 말은 자꾸 사용해보고 싶다.
그 외에도 어려운 한자어로 접한 불교가 우리 조상들의 언어, 한글로 표현되어서 새로운 불경을 보는 기분이 든다. 12인연, 마야 부인, 부처의 32상 80종호 등은 불교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하겠지만 그것을 한글로 풀이한 것은 새롭게 다가온다. 또 석가모니 부처의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접하는 것이다.
이런 고어를 현대어로 번역하는 것은 국어학을 전공한 학자의 몫이지만 불교를 소개하는 '월인석보' 해석은 불교에 해박한 지식을 갖지 못하면 힘들텐데 정진원 박사는 그 작업을 하기에 딱 맞는 인물인 것 같다. 국어학자이면서 불교학을 공부한 철학박사다.
결국 '월인석보'를 풀이한 책을 낸다는 것은 단순한 번역의 문제가 아니다. 고어에 관한 풍부한 지식, 경험, 훈민정음에 대한 이해, 그리고 불교에 대한 지식은 물론, 체험, 애정이 결합되어야만 할 수 있는 작업이다. 결국 책은 한 권이지만 수십년 세월이 녹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에게도 소중하지만 국어학, 불교학에서도 소중한 책으로 보인다. 나는 글쓰는 사람으로서, 또 여행하는 사람으로서 지식 여행을 하고, 언어 여행을 했다.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며 인도 여행도 떠올리고, 중세 언어들을 보면서 시간 여행도 했다.이것은 직접 읽어보아야 한다. 에를 들면 부처님의 80종호 중에서 스물 여섯번부터 서른 번째.
스물여슷차힌 성가신 양ㅈㆍㅣ 업스시며 스믈닐굽차힌 擧動(거동) ㅎ야 ㄷㆍ니샤미 象(상) ㄱㆍㅌㆍ시며 스믈여듦차힌 양ㅈㆍ ㅇㆍㅣ 식식ㅎㆍ샤미 獅子(사자) ㅣ ㄱㆍㅌㆍ시며 스물아홉차힌 거름 거루미 곤 ㄱㆍㅌㆍ시며 설흔차힌 머리 마타나(摩?那)ㅅ 여르미 ㄱㆍㅌㆍ시며
이것을 풀이하면 스물 일곱째는 거동하여 다니심이 코끼리 같으시다. 스물 여덟째는 모습의 엄숙하심이 사자와 같으시다. 스물 아홉 째는 걸음걸이가 고니와 같으시다. 서른 째는 머리가 마타나의 열매 같으시다.
뜻풀이를 보는 재미도 있지만 나는 이책을 읽으며 서툴지만 고어를 소리내어 읽곤했다. (여기 표현된 것은 정확치 않다. 자판기에 고어가 없어서...) 읽으며 그 발음을 내 귀로 듣다 보면 내가 조선시대 선비가 된 기분. 그러니까 이 책은 여러 각도에서 보면 좋다. 중세 국어의 형태, 불교를 그 시절에 어떻게 보았나, 중국어로 접한 불교의 관념어를 어떻게 우리말, 한글로 표현했나, 불교에 관한 설화, 의미 등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는가 하면 (즉 시니피에의 세계), 중세 국어 자체를 읽어보는 재미 (시니피앙의 세계)도 있다.
나는 여행이나 삶에서도 역사, 의미, 뜻을 살피는 세계를 즐기지만 종종 의미없는 세계에서 드러난 형태, 형상, 소리, 맛 즉 시니피앙의 세계를 즐기기도 한다. 햇살, 바람, 음식, 소리...그것 자체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낄 때가 있다. 이 책 역시 가끔 현실이 복잡하고, 힘들고, 머리가 아플 때 그냥 엣날 조선 시대 여행하듯이, 혹은 불교의 세계를 여행하듯이 소리내서 읽고, 또 상상하는 즐거움이 있다. 단, 천천히...
이책을 통째로 이해하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다가가면 버겁다. 물론 전공자들은 그렇게 다가가겠지만 그렇지 않은 일반 독자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어느 곳이든, 잡히는 대로...마음 가는대로 따라 읽다 보면 즐거운 여행길이 될 것 같다.
저자도 에필로그에서 그동안 치열하게 공부하고, 선생이라는 직업병에 걸려 살았는데 이젠 놀이하는 인간, 여행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있다. 어차피 '인생은 나그네길'이란 유행가도 있듯이 잠시 왔다 가는 길.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잘 살다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저자는 이미 삼국유사, 원효 대사, 월인석보 등에 관해 4권의 책을 낸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