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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순자(荀子)인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유가(儒家)의 학통(學統)은 남송(南宋)의 주희(朱熹, 1130~1200, 이하 ‘주자’)에 의해 정립된 것이다. 그에 따르면, 공자(孔子), 안연(顔淵),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의 도통(道統)이 자신의 스승격인 주돈이(周敦?, 1017~1073), 정호(程顥, 1032~1085)와 정이(程?, 1033~1107)]를 거쳐 자신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 ‘주자학(朱子學)’이라고 불리는 성리학(性理學)이 번성할수록 이 계통에서 제외된 순자(荀子)의 학문은 이단으로 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순자>를 옮긴 고(故) 신동준은 들어가는 글에서 흔히 공학(孔學)의 적통(嫡統)을 맹학(孟學)으로 이어진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오히려 한때 이단으로 몰렸던 순학(荀學)이 공학의 적통을 이었다. 순학은 소위 ‘치평학(治平學)’에서 출발한 공학의 이념과 이론을 정치하게 발전시킨 결정판이었다. 맹학은 ‘치평학’에서 출발한 공학의 기본 취지를 망각하고 소위 ‘수제학(修齊學)’으로 함몰된 이단에 해당한다. [p. 8]
오랫동안 맹학이 마치 공학의 정통을 이은 것인 양 왜곡되어 왔다. 이는 기본적으로 송대에 성리학이 등장한 이래 근 1천여 년 넘게 맹학을 공학의 적통으로 선전한 데 따른 것이었다. 본서는 ‘군자(君子) 리더십’에 해당하는 ‘치평학’에서 출판한 공학의 적통이 명학이 아니라 순학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원래 공자를 조종으로 하는 소위 원시유학(原始儒學)은 ‘치민(治民)’의 주역인 위정자의 바람직한 통치 리더십인 소위 ‘군자 리더십’을 연구하는 게 기본 목적이었다. 유학은 출발부터 바로 ‘통치엘리트의 리더십’을 연구하는데 그 기본 취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실질적 위정자인 군신(君臣)은 말할 것도 없고 예비 위정자인 수많은 사인(士人)들에게 공히 적용되는 리더십이기도 했다. [p. 12] 고 말한 것이다.
순자(荀子)는 무엇을 말했는가?
순자의 사상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는 ‘성악설(性惡說)’을 떠올린다. 중국 철학이나 역사에 조금 관심 있는 이라면 여기에 예(禮)를 강조했다는 것까지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면 순자가 얘기한 것은 성악설과 ‘예(禮)’뿐일까? <순자>를 완역한 신동준은 순자의 사상을 크게 4 가지로 얘기한다.
첫째는 인도주의(人道主義)로, 천도(天道)의 천명(天命)과 인도(人道)의 인성(人性)을 구분하되, 천도에 대한 존경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천론(天論)]에서 하늘의 운행은 일정한 법도가 있어 요(堯)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걸(桀)때문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스림으로 응하면 길하고, 어지러움으로 응하면 흉하다. [p. 615] 라고 하여 하늘이 성군(聖君)에게 서상(瑞祥)을 보여 격려하거나 폭군(暴君)에게 재이(災異)를 내려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성선설(性善說)에 따라 천인합일(天人合一)을 강조하는 맹자의 천인관(天人觀)과 대조를 이룬다. 동시에 [예론(禮論)]에서 예(禮)에는 3가지 근본이 있다. 천지(天地)는 생지본(生之本: 생의 근본)이고, 선조(先祖)는 유지본(類之本: 종족의 근본)이고, 군사(君師: 군주와 스승)는 치지본(治之本: 다스림의 근본)이다. ‘천지’가 없으면 어떻게 생을 얻고, ‘선조’가 없으면 어디서 나오고, ‘군사’가 없으면 어떻게 다스려지겠는가. 이들 3자편무(三者偏亡: 셋 중 하나가 없음)면 곧 백성을 안정시킬 수 없다. [pp. 665~666] 고 하여 인도(人道)만 강조하는 법가(法家)와는 달리 천도(天道)가 사람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까닭에 존중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둘째는 정악주의(情惡主義)로 우리가 얘기하는 성악설(性惡說)이다. 하지만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은 인간의 본성(本性)이 악(惡)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욕망으로 인해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라고 한다. [예론(禮論)]에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욕망을 가지고 있다.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면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추구하는 데 도량분계(度量分界: 일정한 기준과 한계)가 없으면 다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투면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워지면 궁해진다. [p. 662] 라고 하여 일정한 기준과 질서[‘예(禮)’]가 없다면, 인간은 물질에 대한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 타인의 욕망을 침해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를 뒤집어 해석하면, 누구나 성인(聖人)이 만든 기준과 질서인 ‘예(禮)’ 혹은 ‘예법(禮法)’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치자(治者)인 군자(君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셋째는 예치주의(禮治主義)로 현실에 입각하여 법(法)의 역할을 수긍하면서도 법을 다루는 사람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는 [군도(君道)]에서 난군(亂君)은 있어도 본래부터의 난국(亂國)은 없다. 치인(治人)은 있어도 본래부터의 치법(治法)은 없다. ~ 중략 ~ 그래서 법은 독립할 수 없는 것이고, 유(類: 제도)는 스스로 시행될 수 없는 것이다. 합당한 사람을 얻으면 실행이 되고, 얻지 못하면 사라지는 것이다. 법은 다스림의 단서이다. 군자는 법의 근원이다. 그래서 군자가 있으면 법이 비록 생략될지라도 족히 다스릴 수 있다. 군자가 없으면 비록 법이 갖춰져 있을지라도 선후의 시행순서를 잃고, 응변(應變: 사태의 변화에 대응함)할 수 없어 족히 천하를 어지럽게 만들 수 있다. [p. 513] 라고 한 것에 드러나 있다.
결론적으로 순자의 예치주의는 순자가 생각하는 ‘예’는 일방적으로 개인의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유지하면서 통일된 조화 속에 평화롭게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순자는 공자가 덕치의 요체를 ‘인’으로 본 데 반해 바로 ‘예’라고 본 셈이다. ‘예’에 의해 그 분수를 한정함으로써 개인간은 물론 개인과 국가 간에도 상호 간의 욕망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 순자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순자가 예치를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군신 상하 간에 원만한 질서와 절도가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예치국가 즉 ‘예국(禮國)’이었다. [p.119]
넷째는 왕패주의(王覇主義)는 예로 다스리고 어진 이를 등용[隆禮尊賢]하는 왕도(王道)가 최선이지만 법을 중시하고 백성을 사랑[重法愛民]하는 패도(覇道)도 난세를 평정할 수 있다면 차선으로 수용가능하다는 선왕후패(先王後覇)의 입장이다. 다만 이 경우에도 이익을 좋아하고 속임수가 많아 힘과 술수에 의지하는 망도(亡道)는 배제하고 있다. 이는 [대략(大略)]에서 군주가 융례존현(隆禮尊賢)하면 왕자, 중법애민(重法愛民)하면 패자, 호리다사(好利多詐)하면 위자(危者)가 된다. [p. 809] 라고 말한 것에서 드러나 있다. 이를 보면,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을 나누어 평가함으로써 대의(大義)에 입각한 패업(覇業)만큼은 인정”하는 공자와 결을 같이 하고, 일체의 패도(覇道)를 배척하고 오직 왕도(王道)만 강조하는 맹자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순자는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으로 흐른 맹자와는 달리 현실에 기반을 둔, 실현 가능한 정치를 주장했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현실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는 순자처럼 ‘예(禮)’를 강조한, 자유(子游) 언언(言偃)과 자하(子夏) 복상(卜商)의 후예에 대한 비판에서 엿볼 수 있다. [비십이자(非十二子)]를 보면, 그 의관을 바르게 차리고, 안색을 엄숙히 하고, 겸연(慊然: 겸손함)히 종일 말도 하지 않는 무리가 있으니 이는 자하씨(子夏氏)의 ‘천유’이다. 투유탄사(偸懦憚事: 마지못해 하면서 일을 꺼림)로 염치도 없이 음식을 밝히면서 입만 열면 ‘군자는 본래 힘을 쓰는 게 아니다’라고 지껄이는 무리가 있으니 이는 자유씨(子游氏)의 ‘천유’이다. [p. 381] 라고 하여 형식적인 ‘예(禮)’에 매몰되거나 ‘예(禮)’를 밥벌이 수단으로만 쓰는 속유(俗儒) 혹은 천유(賤儒)에 대해 과감하게 비판하고 있다.
추가적으로 순자는 법가와 달리 백성을 위해 왕을 존중하는 입장이었다. 이는 [대략(大略)]에서 하늘이 백성을 낳는 것은 군주를 위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군주를 세운 것은 백성을 위한 것이다. [p. 829] 라고 하고, [왕제(王制)]에서 군주는 주(舟: 배)이고 서인은 수(水)이다. 수즉재주(水則載舟: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하고, 수즉복주(水則覆舟: 물은 배를 뒤엎기도 한다)한다. [p. 426] 라고 한 것은 이를 보여준다. 심지어 순자는 [정론(正論)]에서 폭국(暴國: 포학한 나라의 군주)이 독치(獨侈: 홀로 방종한 사치를 즐김)하면 그를 능히 주살(誅殺)하면서도 반드시 무죄(無罪)한 백성을 상해(傷害)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폭국지군(暴國之君)에 대한 주살은 약주독부(若誅獨夫: 독부를 주살하는 것과 같음)이다. 이는 가히 ‘능용천하(能用天下: 능히 천하를 잘 다스림)’라 칭할 만하다. ‘능용천하’하는 자를 일컬어 ‘왕자(王者)’라고 한다. 탕(湯), 무(武)는 취천하(取天下: 천하를 탈취함)하지 않았다. 도를 닦고, 예의를 시행하고, 천하의 동리(同利: 모두에게 이로운 사업)을 일으키고, 천하의 동해(同害)를 제거했기에 천하인이 귀복(歸服)한 것이다. 걸, 주는 거천하(去天下: 천하를 잃음)하지 않았다. 우(禹), 탕(湯)의 덕업을 배반하고, 예의의 분계(分界)를 어지럽히고, 금수의 행동을 하고, 흉잔(凶殘)을 쌓고, 사악(邪惡)을 가득 채웠기에 천하인이 떠난 것이다. 천하인이 귀복하는 자를 왕자, 천하인이 떠나는 자를 망자(亡者)라고 한다. 그래서 걸, 주는 천하를 옹유한 것이 아니고, 탕, 무는 시군(弑君)한 것이 아니다. [pp. 635~636] 라고 하여 맹자의 일부가주론(一夫可誅論)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약주독부론(若誅獨夫論)을 주장한다.
아마도 이러한 순자 사상의 여러 측면이 한때 이단으로 몰려 몰락했지만, 청(淸)나라 이후 재조명되고, 지금 우리가 <순자>를 읽어봐야 할 이유가 아닐까?
옥의 티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번역이다.
첫째, 순자 사상에 대한 해설부분과 <순자> 본문이 번역 표기상 차이가 있다. 君人者, 隆禮尊賢而王, 重法愛民而覇, 好利多詐而危. 를 예로 다스리고 어진 이를 등용하는 통치자는 곧 왕자이고, 법을 중시하고 인민을 사랑하는 통치자가 곧 패자이다. 이익을 좋아하고 속임수가 많은 통치자는 위자(危者)이다. [p. 146] 와 군주가 융례존현(隆禮尊賢)하면 왕자, 중법애민(重法愛民)하면 패자, 호리다사(好利多詐)하면 위자(危者)가 된다. [p. 809] 로 번역했다. 같은 책이니 동일하게 표기하는 것이 좋고, 기왕이면 한 눈에 가독성(可讀性)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전자의 방식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 다른 예로 天地生民, 非爲君也. 天地立君, 以爲民也. 를 하늘이 인민을 낳는 것은 군주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늘이 군주를 세운 것은 인민을 위한 것이다. [p. 129] 와 하늘이 백성을 낳는 것은 군주를 위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군주를 세운 것은 백성을 위한 것이다. [p. 829] 처럼 번역했다. 같은 말을 전자는 ‘인민(人民)’으로, 후자는 ‘백성(百姓)’으로 표기했는데, 당시의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후자인 ‘백성’으로 통일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둘째, 한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한자의 음(音)을 그냥 옮긴 부분이다. 예를 들면, 君者, 舟也. 庶人者, 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 를 군주는 주(舟: 배)이고 서인은 수(水)이다. 수즉재주(水則載舟: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하고, 수즉복주(水則覆舟: 물은 배를 뒤엎기도 한다)한다. [p. 426] 로 번역했다. 이 경우에는 한문을 읽을 때 그 뜻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한글로 조사, 어미, 접사 따위를 붙인 것[현토(懸吐)]에 가깝다.
전체적으로 이런 번역 방식 때문에 일반인이 이 책에 접근하기 어려워서 아쉬웠다.
* 이 리뷰는 도서출판 인간사랑으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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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을 읽다보면 가끔 현재의 우리에게 가장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상이 무엇인가 생각해보곤 한다. 춘추전국시대 출현한 제자백가들의 수많은 사상이 나름대로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사상이 아니라 우리의 실생활을 좌우하는 사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동서양이 다르고 동양이라 할지라도 각기 전통과 환경이 달랐기에 꼬집어서 말하기 어렵고, 또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융합되기도 하였지만 그럼에도 지금의 우리 삶을 가장 강력하게 규정하는 것은 유가와 법가의 사상이 아닐까 싶다. 전국시대를 거쳐 중국이 통일된 후 한나라는 독존유술(獨尊儒術)을 천명하며 유학을 유일한 관학으로 선포하였다.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외유내법(外儒內法)이 통치의 근간으로 자리 잡았고, 우리 역시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런 유가와 법가의 저작 중에서도 가장 관심이 가는 책은 [순자]와 [한비자]이다.
학교 다닐 때 동양고전을 배운 우리는 흔히 유가하면 ‘공맹(孔孟)의 도’를 떠올린다. 순자는 맹자와 더불어 논의되었지만 공자의 사상이 맹자에게로 이어졌다고 보았기에, 순자는 이단으로 치부되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그들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의 머릿속엔 아직까지도 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 그들을 평가하고 있지 않나싶다. 다행인 것은 최근 들어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순자 역시 다양한 관점으로 조명되고 있다는 점 일게다. 그러나 대부분의 [순자]에 관한 해설서들이 막상 순자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다루고 순자의 저작으로 알려진 텍스트에 대한 해석에 치우치는 것 같다. 그렇게 볼 때 고전연구가인 신동준 선생이 역한 이 책 [순자]는 기존의 해설서들과 달리 [순자]라는 고전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사상가로서의 순자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인물론>·<순학론>·<순자론>의 총3부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1부 <인물론>에서는 순자의 생장과 사상에 대해 쓰고 있다. 전국시대 말기 조나라에서 태어난 걸로 알려진 순자는 생몰연대가 정확하지 않다. 역자는 그러한 순자의 생애를 사마천이 쓴 [사기] <맹자순경열전>을 비롯한 다수의 고서를 인용하여 설명한다. 또한 순자의 사상을 인도(人道)주의·정악(情惡)주의·예치(禮治)주의·왕패(王覇)주의라는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본다. 전국시대말기 유가가 작은 예절에 구애되어 뭇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순자는 공자의 정맥을 잇기 위해 제자백가의 사상을 연구한 다음 유가사상을 새롭게 정리했다. 맹자가 왜곡시킨 공자의 모습을 본래대로 복원시키면서 공자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과 이상의 접합을 시도한 것이다. 그래서 대의에 입각한 패도를 인정했고, 맹자가 의(義)를 전면에 내세우며 축소시킨 공자의 인(仁)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놓기 위해 예(禮)를 격상시켰다. 즉, 맹자가 자신의 취향에 따라 공자의 치평(治平)학을 수제(修齊)학으로 변질시켰다면 순자는 치평(治平)학으로 출발한 공학(孔學)의 이념을 발전시켰다고 역자는 말한다.
2부 <순학론>에서는 순자의 역사적 위상과 동아시아 3국의 순학(荀學)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순자에 대한 중국 역대왕조의 평가는 공학의 왜곡사와 일치하고 있다고 한다. 공학은 청대말기까지 존숭되었으나 그 이면은 송대에 성리학이 성립된 이래 유가들이 존숭한 것은 공학이 아닌 맹학(孟學)이었다는 것이다. 역자는 한 제국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맹자가 주류가 되고 순자가 이단시되었는지를 살펴본다. 또한 순학이 왜곡된 근대중국, 순학이 부재했던 조선시대, 순학을 새롭게 발견한 일본 에도막부 시대를 비교하면서 성리학과 순학의 관계를 통해 당시 유가들이 바라본 순자사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3부 <순자론>은 텍스트로서의 [순자]에 대한 설명으로 편제와 주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의 [순자]는 총20권 32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순자 자신이 저술한 것과 제자들의 손으로 옮겨진 것이 뒤섞여 있다고 한다. 전한제국 말기 유향이 [손경신서서록]에 수록된 322편의 중복된 내용을 정리하여 32편으로 편제한 [손경신서]를 펴냈고, 당나라의 양경이 [손경신서]를 새로이 교정하여 주석을 달면서 총32편 20권으로 정리한 [순경자]를 펴냈다. 바로 그 [순경자]가 현존하는 [순자]의 원본이라고 역자는 말한다. 주석론에서는 제1편 권학(勸學)부터 제32편 요문(堯問)에 이르기까지 원전과 해석이 실려 있다.
일찍이 신영복 선생은 독서를 저자를 읽고, 텍스트를 읽고, 자신을 읽는 삼독이어야 한다고 했다. 나 역시도 가능한 삼독을 하려고 노력한다. 특히 고전을 읽으면서는 저자를 읽는 것이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볼 때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순자]라는 고전을 저술한 순자라는 사상가를 읽을 수 있게 해준다는데 있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으면서 1부와 2부는 정독(精讀)을 한데 비해 3부 주석은 통독(通讀)을 하였다. 다시 시간을 내어 3부 역시 정독을 해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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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 순자/신동준 인간사랑/2021.12.31. sanbaram
“순자는 제자백가사상을 집대성해 유가사상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법가나 명가와 같은 다른 학파의 사상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는 유가경전의 연구와 전승에 다른 학자들보다 큰 역할을 수행했다.(p.23)”고 <순자>의 역저자는 말한다. 순자는 전국시대 후기 조나라 출신의 철학자. 이름은 황(況이)며 자는 경(卿)이다. 순자는 15세에 조나라를 떠나 제나라 직하에 유학하였다. 순자는 여기서 20여 년간 여러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초나라 춘신군의 부름을 받아 난릉령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춘신군이 살해되면서 파직되어 제자 양성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기원전 235년경에 여생을 마쳤다.
<순자>의 들어가는 글에서 역저자는 순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경세제민을 위해 평생을 두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진군자’의 모습은 구도자의 모습을 방불하게 한다. 공자사상의 핵심어인 ‘인’을 흔히 ‘도’와 연결시켜 ‘인도(仁道)’로 말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후대인들이 맹자와 주희의 영향을 받아 공자의 ‘도’를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 해석했으나 이는 잘못이다. 공자가 말한 ‘도’는 ‘천도’ 및 ‘천리’와 같은 사변적이 것이 아니라 바로 현세의 치국평천하에 적용되는 통치원리를 말한 것이다.(p.14)”라고 말하며 아리스터텔레스가 말한 ‘민주정’은 왜 동양의 정치사상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것일까? 이는 기본적으로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하는 철인과 유사한 ‘군자’에 의한 통치를 당연시한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 남송대 때 신하들을 스승으로 삼아 제왕학을 학습하는 소위 ‘경연(經筵)’제도가 마련된 이래 간단없이 지속되었다. 당시 제왕들은 정당한 사유 없이 이를 게을리할 경우 이내 폭군으로 몰려 보위에서 비참하게 쫓겨날 수도 있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군주와 출사한 사대부는 말할 것도 없고 사환의 길에 나서지 않은 선비조차 평생을 두고 ‘군자 리더십’을 연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존재한 데 따른 것이라고 설명한다.
“서양은 18세기에 근대국가가 형성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한 번도 이런 정교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적이 없다. 서양은 고대 그리스 이래 시종 도시국가 체제를 유지한 까닭에 동양의 제왕정과 같이 중앙과 지방을 수비하는 상비군체제와 중앙에서 각 지역에 관원을 파견하는 중앙관료체제를 유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서양에서 투표제를 근간으로 한 민주정, 즉 ‘민치’가 발달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p.20)”고 말한다. 이에 비해 동양에서는 학덕을 연마한 군자만이 위정자가 될 수 있다는 불문율이 존재한 까닭에 서양식 ‘민치’ 개념이 용납될 여지가 없었다. ‘군치’와 ‘신치’ 개념은 있었어도 ‘민치’ 개념은 존재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 대신 동양은 수천 년 동안 ‘치민’의 내용 및 형식 등에 대해 줄기차게 검토를 해 왔다는 것이다. 동양이 투표로 상징되는 ‘민치’에 기초한 ‘민주정’을 발달시키지 않은 것은 전문적인 통치자 집단을 뜻하는 ’군자‘의 개념이 일찍부터 정립되어 평생을 두고 ’군자 리더십‘을 연마하도록 한 불문율이 존재한 데 따른 것이었다. 나아가 ’사해(四海)‘로 상징된 천하의 전 인민을 대상으로 한 ’치국평천하‘ 개념을 일찍부터 상정한 까닭에 투표를 통한 ’민치‘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훗날 성리학은 맹자를 맹종한 결과 ‘외왕’으로 상징되는 군주 대신 ‘내성’으로 상징되는 사대부를 통치의 주체로 삼았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처세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으나 내우외환의 난세에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p.56)” 이것은 ‘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외왕’을 폄하한 데 따른 부작용이 아닐 수 없다. 내성에 치중한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중국의 송대와 조선조가 외란에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끝내 패망을 자초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적의 외침 앞에서 ‘외왕’의 힘이 뒷받침되지 못한 ‘내성의 논리는 한낱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것이다.
“순자는 국가공동체 성원 간의 역할분담을 강조함으로써 위로는 덕을 가진 자가 지위를 얻어야 한다는 공자의 이상을 계승하고 이래로는 평민이 경상이 되는 새로운 기풍을 열었다고는 게 그의 평가이다.(p.75)” 공자시대 이전에는 오직 신분이 높은 가문에서 태어나야만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전국시대 중기 이후에는 미천한 출신도 배운 학식과 재주를 한껏 발휘해 재상이 되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학을 배우기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투자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전국시대 말기에 태어난 순자는 제자백가사상을 섭렵한 뒤 맹자에 의해 왜곡된 ‘치평학’으로서의 공학을 본래의 모습에 가장 가깝게 되돌려 놓았다는 점에서 전국시대 최후의 대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공자와 맹자, 순자 등의 유가는 천도와 인도의 절연 강도에 다라 지도 및 덕치의 내용에 차이를 보였다. 우선 덕치면에서 공자가 인치(仁治)를 주장했다면 맹자는 의치(義治), 순자는 예치(禮治)치를 주장했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인치’를 주장하면서 치도면에서는 ‘중앙경패’의 자세를 보였다. 이는 그가 맹자와 달리 천도에 대해 오직 ‘외천명’의 자세만을 유지한 데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p.91)” 맹자는 ‘외치’를 주장하면서 이상적인 치도인 ‘숭앙척패’의 입장을 보였다. 이는 그 스스로가 천도를 전하기 위해 세상에 나타났다고 자부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천도가 바로 인도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순자는 법치에 가까운 ‘예치’를 강조하면서 치도면에서는 ‘선왕후패’의 자세를 견지했다. 이 또한 인도의 독립성을 인정하면서도 천도에 대한 존경심을 버리지 않은 데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순자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욕망으로 인해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이기심에 따른 무질서와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오로지 법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법가의 관점과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순자는 자신의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대담하게 가미한 성악설을 주창한 것이다.(p.103)” 상앙과 한비자 모두 인간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이욕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법가의 인성론은 순자의 그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순자는 인성의 악성을 예로서 교화할 수 있다고 본 데 반해서 상앙과 한비자는 오직 법으로써만이 ‘교정’할 수 있다고 본 점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사적인 이욕 때문에 다투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군거(群居)를 영위하는 한 혼란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이를 군거화일의 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일정한 기준과 원칙이 존재해야만 한다. 순자는 이를 ‘예’에서 찾은 것이다.(p.118)” 공자는 군주를 가볍게 보지도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보지도 않았다. 맹자는 백성을 높이고 군주를 낮췄다. 그러나 그의 ‘귀민경군’사상은 사실 당시의 세태를 비춰볼 때 비현힐적인 것이었다. 이에 대해 순자는 존군의 필요성을 분명히 함으로써 공자사상에 나타나는 존군의 이념을 공식적으로 이론화했다. 그의 존군사상은 군주가 ‘치란’의 유일한 관건이라는 그의 주장에 잘 나타나 있다. 순자의 ‘중민존군’사상은 군주는 자존의 위치에 서 있기는 하되 반드시 인민을 위해 선정을 베풀어야 하고 인민도 상하의 절도를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맹자와 달리 순자는 제환공과 관중으로 상징되는 패자의 공업을 긍정적으로 수용했다. 또한 공자가 ‘화이관’에 입각해 관중의 중원 방어를 높이 평가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제환공의 패업을 높이 평가했다. <순자> ‘왕제’편에 나오는 제환공에 대한 평가가 그 증거다.(p.140)” 현실을 중시하는 순자의 이런 성향이 바로 덕을 바탕으로 한 왕도 이외에 현실적인 힘을 바탕으로 한 패도를 적극 수용하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전국시대처럼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비록 패도일지라도 패천하를 이뤄 난세를 평정할 수만 있다면 이 또한 바람직하다는 것이 순자의 기본 생각이었다. 순자가 왕패문제에서 맹자와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한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 보아야 한다. 순자는 유가의 전통에 따라 왕도와 패도를 구분하기는 했으나 패도에 대한 평가만큼은 맹자와 달리 매우 긍정적이 평가를 내렸다.
“기원전 213년에 이뤄진 분서사건은 기왕에 알려진 것과 같이 무자비하게 유가의 경전과 각국의 역사서 등을 불태워 버린 사건이 아니었다. 당초 이사와 진시황 모두 유가 서적을 비롯한 제자백서와 통일 이전의 각국의 사서를 결코 ‘모조리’불태우려고 명령한 적이 없다.(p.155)” 분서의대상이 된 책은 당시 수도였던 함양의 왕실 서고와 함양에 거주하고 있던 70명의 박사들 개인 서고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이들 박사들이 분서의 대상이 딘 서적을 보유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학자들의 연구 작업만큼은 자유롭게 보장되었음을 의미한다. 정작 이러한 책들이 사라진 것은 진시황 사후 항우가 함양에 쳐들어온 뒤 옥석을 가리지 않고 분탕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원래 성리학은 주희가 정호의 ‘천리론(天理論)’과 그의 아우 정이의 ‘성즉리설(性卽理設)’을 기초로 하여 그 위에 주돈이와 장재 등의 학설을 가미해 만들어낸 것이다. 이론적인 면에서 볼 때 성리학은 나름대로 일정한 공을 세웠다. 우주의 생성과 구조, 인간 심성의 구조, 통치문제 등을 통일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과거 한당대의 훈고학이 다루지 못한 형이상학적 분야에서 샐호운 경지를 개척했다.(p.178)” 순수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나름대로 높은 평점을 받을 만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성리학은 맹자의 성선설을 토대로 공학의 근본 취지를 크게 왜곡시켰다는 점에서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었다. p.178
“민주주의와 과학은 ‘타도공가점’을 구호로 내세운 5.4운동의 가장 큰 이론적 지주였다. 이는 곧 서구화를 의미했다.(p.214)” 낡은 전토에 얽매여 있는 중국은 하루속히 서구화를 이뤄 민주주의와 과학을 생활화해야 했다. 중국의 백성들은 이 구호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백성들이 민주와 과학의 깃발을 들고 공문을 무참히 때려부수기 시작했다.
“조선조의 붕당정치는 퇴계와 율곡이 조선 성리학을 완성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위상은 두 사람이 등장 이후 조선조의 사람들이 모두 퇴율의 문인을 자처한 사실을 통해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p.225)” 물론 조선조에서는 퇴율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이미 태종 때의 권근과 성종 때의 김종직, 중종 때의 조광조 등과 같은 수많은 성리학자들이 출현했다.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천리(天理)를 지고의 절대가치로 상징함으로써 일종의 ‘얼굴 없는 유신론’ 내지 ‘유신론적 무신론’에 해당하는 종교이념으로 작동했다. 이는 붕당정치에 함몰된 조선조의 사대부들로 하여금 권력의 변동을 가치체계의 붕괴로 간주하도록 만들어 피비린내 나는 유혈전을 전개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인조반정을 계기로 서인의 집권이 굳어진 이후 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노론세력이 더욱 철저한 사변론에 함몰된 나머지 이미 패망한 명나라를 기리며 유일무이한 성리학의 나라를 자처한 것은 커다란 비극이었다. 이들은 왜란과 호란으로 거듭 패망의 위기에 몰렸는데도 전혀 반성할 줄 모르고 오히려 소위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내륙을 제패한 만주족의 청제국을 무시하는 등 시종 현실과 동떨어진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인간사랑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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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 순자/신동준 인간사랑/2021.12.31.
“순자는 제자백가사상을 집대성해 유가사상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법가나 명가와 같은 다른 학파의 사상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는 유가경전의 연구와 전승에 다른 학자들보다 큰 역할을 수행했다.(p.23)”고 <순자>의 역저자는 말한다. 순자는 전국시대 후기 조나라 출신의 철학자. 이름은 황(況이)며 자는 경(卿)이다. 순자는 15세에 조나라를 떠나 제나라 직하에 유학하였다. 순자는 여기서 20여 년간 여러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초나라 춘신군의 부름을 받아 난릉령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춘신군이 살해되면서 파직되어 제자 양성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기원전 235년경에 여생을 마쳤다.
<순자>의 들어가는 글에서 역저자는 순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경세제민을 위해 평생을 두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진군자’의 모습은 구도자의 모습을 방불하게 한다. 공자사상의 핵심어인 ‘인’을 흔히 ‘도’와 연결시켜 ‘인도(仁道)’로 말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후대인들이 맹자와 주희의 영향을 받아 공자의 ‘도’를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 해석했으나 이는 잘못이다. 공자가 말한 ‘도’는 ‘천도’ 및 ‘천리’와 같은 사변적이 것이 아니라 바로 현세의 치국평천하에 적용되는 통치원리를 말한 것이다.(p.14)”라고 말하며 아리스터텔레스가 말한 ‘민주정’은 왜 동양의 정치사상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것일까? 이는 기본적으로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하는 철인과 유사한 ‘군자’에 의한 통치를 당연시한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 남송대 때 신하들을 스승으로 삼아 제왕학을 학습하는 소위 ‘경연(經筵)’제도가 마련된 이래 간단없이 지속되었다. 당시 제왕들은 정당한 사유 없이 이를 게을리할 경우 이내 폭군으로 몰려 보위에서 비참하게 쫓겨날 수도 있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군주와 출사한 사대부는 말할 것도 없고 사환의 길에 나서지 않은 선비조차 평생을 두고 ‘군자 리더십’을 연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존재한 데 따른 것이라고 설명한다.
“서양은 18세기에 근대국가가 형성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한 번도 이런 정교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적이 없다. 서양은 고대 그리스 이래 시종 도시국가 체제를 유지한 까닭에 동양의 제왕정과 같이 중앙과 지방을 수비하는 상비군체제와 중앙에서 각 지역에 관원을 파견하는 중앙관료체제를 유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서양에서 투표제를 근간으로 한 민주정, 즉 ‘민치’가 발달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p.20)”고 말한다. 이에 비해 동양에서는 학덕을 연마한 군자만이 위정자가 될 수 있다는 불문율이 존재한 까닭에 서양식 ‘민치’ 개념이 용납될 여지가 없었다. ‘군치’와 ‘신치’ 개념은 있었어도 ‘민치’ 개념은 존재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 대신 동양은 수천 년 동안 ‘치민’의 내용 및 형식 등에 대해 줄기차게 검토를 해 왔다는 것이다. 동양이 투표로 상징되는 ‘민치’에 기초한 ‘민주정’을 발달시키지 않은 것은 전문적인 통치자 집단을 뜻하는 ’군자‘의 개념이 일찍부터 정립되어 평생을 두고 ’군자 리더십‘을 연마하도록 한 불문율이 존재한 데 따른 것이었다. 나아가 ’사해(四海)‘로 상징된 천하의 전 인민을 대상으로 한 ’치국평천하‘ 개념을 일찍부터 상정한 까닭에 투표를 통한 ’민치‘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훗날 성리학은 맹자를 맹종한 결과 ‘외왕’으로 상징되는 군주 대신 ‘내성’으로 상징되는 사대부를 통치의 주체로 삼았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처세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으나 내우외환의 난세에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p.56)” 이것은 ‘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외왕’을 폄하한 데 따른 부작용이 아닐 수 없다. 내성에 치중한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중국의 송대와 조선조가 외란에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끝내 패망을 자초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적의 외침 앞에서 ‘외왕’의 힘이 뒷받침되지 못한 ‘내성의 논리는 한낱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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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있는구절] #靑靑於藍청청어람 제2장 주석론 권학편 君子曰, 學 不可以已. 靑, 取之於藍, 而靑於藍, ?, 水爲之, 而寒於水.(p.295) 얼음은 물이 얼어 되는 것이나, 물보다 더 차다. *위의 靑靑於藍(청색이 남색보다 푸르다.)은 우리가 알고있는 靑出於藍(청색은 남색에서 나옴, 청출어람)으로 저자는 원문의 의도에 맞게 더 푸르다의 의미인 청청어람으로 표기하는 것이 맞다고 봤다. *청출어람은 원래 청출어람 청어람 靑出於藍 靑於藍이다. (여기에서 어조사而와 어조사之를 빼고 청취어람 청어람?取于??于?으로 전함.)
#순자의 예는 외부의 규범에 의거해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제약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의 성악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맹자는 소위 4단설(인의예지(p.54))을 기초로 공자가 전혀 언급하지 않은 인성론을 전개했다. 성선설로 상징되는 그의 인성설은 인의 단서가 모든 사람에게 선천적으로 내재한 자연스러운 본성에서 전재하고 출발하고 있다.(p.53)
#맹자는 인, 의, 예 ,지 4단의 심성적 표현이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을 인간의 신성으로 해석했다. 이러한 신성이 제대로 발현되기만하면 히노애락의 감성은 저절로 억제 될 것으로 보았다.(p.54)
#이에 반해 순자는 히노애락의 감성을 지성과 대비되는 인간 심성의 또다른 측면으로 파악한 까닭에 지성을 동원해 이를 절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순자의 입장에서 볼때 감성은 궅이 맹자의 4단 등과같이 애매한 표현을 동원해 억제의 대상으로 간주할 필요가 없었다. 순자가 인간위 사려깊은 지혜를 바탕으로 한 예치를 강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p.55)
#저자가 생각하는 순자는 법후왕과 관계가깊은 선왕후패, 안과 밖, 내면과 외면, 형식과 태도, 형이상과 형이하, 강약의 리더적 시선 등 한쪽에 치우치지않고 양방향의 넓은 안목을가진 제왕적 통치학의 시각으로 묵가와 같이 중요하게 생각하는듯 하다. 저자가 지적하는 이 부분에서 성선론과 孟母三遷之敎로 더 친숙한 맹자의 감성적인 수제학을 지적하고 있다. 이후 그런측면에서 조선의 사대부가들은 공맥, 즉 공자, 공학의 적통을 맹학, 맹자로 인식하고 이런 수제학은 조선 양반의 학문적 시선을 정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흥미롭게도 배타적인 끼리끼리 계층이 모여 매일 이상향만을 논하다 마는 조선의 시대상황을 생각하게 된다. 저자의 말처럼 현실을 외면한 형식과 체면에 함몰돼 실질적인 측면을 실종하게 만드는 우를 범하는 것은 아니었던지 차분히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는 지적이다.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요즘 읽는 왕도와 패도로 갈라지는 성악론의 순자와 대척점에 있는 맹자에 관한 한 줄 글이 인상적이다. 저자는 그리 생각하진 않지만 요즘 재방중인 사극에 등장하는 태조의 사람 정도전에게 맹자를 선물한 사람이 하필 절친이면서 선죽교에서 태종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는 방원의 스승 포은이였다는 점이다. 만약에 정몽주가 태조의 가신으로 후에 조선을 여는 이성계의 정치에 중요하게 등극하는 삼봉에게 맹자대신 객관적인 통치학의 시선을가진 순자를 선물했다면 어땠을까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그랬다면 이후, 조선시대의 주요 정치사회적 계층들이 형이상학에 빠지지않고 세계사적 시선의 객관성을 가지고 미래로 나아갔을지와 더불어 조선의 앞날이 어떻게 변했을지라는 바램섞인 생각을 해본다.
#본문에서도 저자의 맹자에대한 평가글을 읽으며 고인이 된 저자의 시선을 생각해 본다. 요즘 사극인 태종 이방원의 이런 구도를 생각하며 고려에 마지막 종말을 고하고 조선의 새시대의 문을 여는 태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기억에 선거철엔 권력다툼 드라마였다. 이러한 태조와 태종을 동시에 보고있어 예전에 배운 조선왕계보를 떠올려봤다. 이상하게 옛날부터 틀리는 부분만 틀린다. 둘째마디 예성연중을 왜 예성편중으로, 마지막 순인 고종과 순종은 기억하는데 앞 넷 임금은 기억할 수 없는지. 도저히, 그래 검색해 앞뒤를 따로적어보니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조종종종종종조 종종산종종종조 해조종종종종조 조조종종종종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Have a nice d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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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철학을 다른 말로 '공맹'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공은 유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공자를 뜻하고, 맹은 전국시대에 활약한 맹자를 뜻한다. 공자는 춘추시대에 활약한 철학자고 맹자는 전국시대에 활약한 철학자다. 즉 맹자는 공자의 유학을 계승했다는 평을 받았는데 이렇게 형성된 학문적 도통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견고해졌다. 우리가 흔히 유학이라는 철학을 생각할 때 일반적으로 고루하고 따분하며 지나치게 예의 예법을 강조하는 이미지가 연상된다. 실제로 유가는 온고지신, 즉 옛것을 바탕으로 신분에 맞게 학문과 예의를 강조하고 있으며, 도교와 불교와는 다르게 현실지향적, 참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정리해 보자면 유학은 과거의 올바른 제도를 바탕으로 정치와 사회를 도덕적으로 교화하며 현실의 부패한 모순점을 개선하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옛것을 본받는다는 점에서는 보수주의를 추구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현실을 개혁하겠다는 점에서는 진보와 맥을 같이한다.
하나의 사상이 싹트고 발전할 때, 전대보다는 후대의 사상이 훨씬 복잡해질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당연한 이치다. 전대에 비해 후대의 사상은 새로운 이론과 합쳐지며 발전하는데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는가 하면 내용이 변질되는 경우도 있다. 원시유가라고 할 수 있는 공자의 유학과 이를 계승한 맹자의 유가는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이질적인 부분도 무척 많다. 공자의 시대인 춘추시대보다,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의 시대상이 훨씬 각박하고 잔혹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맹자는 공자의 철학을 자신이 처한 각박한 현실에 대입하여, 자기만의 시각으로 유학을 해석했다. 약육강식의 각박한 현실 속에서 유학를 부르짖었으니, 맹자는 명분에 지나치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공자가 인과 예를 강조할 때 맹자는 그보다 훨씬 강도가 강한 의를 내세웠다. 또한 공자보다 언어적 수사학도 훨씬 현란했으며 유학의 이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마음을 사단(인-측은지심,의-수오지심, 예-사양지심, 지-시비지심)으로 정의하고 성선설을 적극 주장했다.
여기서 잠깐,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짧게나마 배웠던 한 토막 지식을 떠올려보자. '맹자의 성선설 VS 순자의 성악설'. 철학에 문외한인 사람이더라도 맹자는 익숙한 반면 순자는 무척 생소하다. 맹자는 인싸 느낌이 가득하고 순자는 비주류 아싸같다. 그래서일까 윤리를 배운 사람들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혹은 수능 때문에 순자의 성악설을 기계적으로 암기하고 스쳐 지나가는데, 유학의 발전사, 혹은 중국의 철학사에 있어서 순자는 맹자와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아니 그 이상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순자는 전국시대 말기에 활약했던 유학자로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보다 훨씬 후대의 인물이다. 대부분의 제자백가 서적들이 그렇듯 순자의 저술이라고 전해지는 《순자》는 그의 사상을 제자들이 집대성하고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든다. 《맹자》와 《순자》의 차이점은 단순히 인간의 본성을 성선과 선악으로 바라보는 시각차만 존재하는 것일까? 왜 후대의 사람들은 순자가 아닌 맹자를 공자의 적통으로 인정한 것일까?
두 책을 면밀하게 읽어보니 의문점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먼저 《맹자》와 《순자》의 공통점은 공자의 유학을 계승했다는 점이다. 순자 역시 맹자와 마찬가지로 유학자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당대에 학자로 널리 명성을 쌓고 있었으며 한비와 이사 같은 거물급 인사들의 스승이었다. 우리에게는 와닿지 않지만 순자는 전국시대 말기, 당대를 대표하는 유학자였다. 같은 철학을 계승했지만 두 사람의 방향은 무척 상이했다. 맹자는 정치적으로 왕도를 고집했고 집착했다. 당대 전국시대에는 약육강식의 패도가 성행하였는데, 맹자는 이런 금수만도 못한 상황을 무척 비판했다. 그래서 왕도 외에 다른 정치제도는 인정하지 않고 타협하지도 않았다. 그래서일까 《맹자》의 어조는 좋게 표현하면 주관이 뚜렷하고 나쁘게 표현하면 '답정너'라는 인식을 주기에 충분하다.
반면 순자는 어떨까? 순자 역시 왕도를 최선의 방책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왕도만이 답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는 패도를 용인할 수 있다는 일말의 여지를 열어놨다. 순자가 활동하던 전국시대 말기는 중원의 기운이 하나로 통일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중원을 통일하려는 진(秦)나라와 나머지 나라들의 합종연횡이 지속됐는데, 종횡가와 병가를 배운 인재들이 주군을 위해 모략과 군략을 짜던 시대였다. 맹자는 눈앞에 드러난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 굽히지 않았다 이를 좋게 표현하면 '소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고 나쁘게 표현하자면 '나를 세상으로부터 왕따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 순자는 유학을 고집했지만, 맹자처럼 막히지 않았다. 돌아가는 사회의 흐름과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으며 현실과 유학의 타협점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한 철학자였다.
《맹자》가 자신의 목소리로 가득하다면, 《순자》는 여러 학파들의 장점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훗날 유자들은 《순자》를 두고 '잡스럽다. 이단이다.'라고 공격했다. 정리해 보자면 맹자는 왕도를 지향하며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리고 명분과 대의를 극도로 강조한다. 반면 순자는 왕도를 지향하되 패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여지를 남겨둔다. 최선이 되면 좋겠지만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차선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또한 맹자와 비교해 볼 때 형이하학적인 성격을 가지며, 명분과 대의도 좋지만 그 이상으로 현실의 가치를 쫓으려고 노력했다. 이런 순자의 현실주의 사상은 제자인 한비와 이사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는데, 한비는 순자의 사상을 참고하여 《한비자》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겨서 법가의 사상을 집대성했고, 이사는 진시황에게 등용되어 진나라를 통일하는데 커다란 공을 세운다. (이후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만...)
흔히 유가와 법가는 가장 상반된 철학이라고 생각하는데, 《순자》는 기본적으로 유가의 입장을 지지하지만 법가가 가진 현실적인 시각과 견해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렇듯 순자의 노선이 모호하기 때문에 명분론에 입각하여 유학을 집대성하여 성리학을 정립한 송나라의 주희는 순자보단 맹자를 공자의 적통으로 선택하였다. 주희로 인해 《맹자》는 유학의 교과서인 사서에 편입되었고 공자의 《논어》와 더불어 서책 가운데에 가장 권위가 높은 경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우리나라 유학자들이 《순자》를 등외시한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다. 고려와 조선에서 유행했던 성리학의 영향 덕분에, 조선에서는 현실주의 철학이 꽃 피지 못했는데, 《순자》를 비롯하여 《관자》, 《한비자》, 《상군서》 등등의 양서들이 이단으로 치부되었다. 《맹자》가 아닌 《순자》가 널리 보급되었다면, 동아시아의 여러 왕조들의 운명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빠른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작금의 현실 앞에서도 《맹자》의 깐깐함보단 《순자》의 융통성이 훨씬 필요하지 않을까. 명분을 지나치게 내세운 성리학의 기준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기준으로 맹자와 순자를 바라봐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인싸가 되진 못하더라도 아싸의 모습은 탈출한 《순자》의 모습을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