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타인과 얘기할 때 정치와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피하려고 한다. 설사 친구나 가족이라 할지라도 정치나 종교이야기가 나오면 얼굴을 붉히기 일쑤이다. 온화하고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잘 기울이는 사람도 그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쉽게 자신의 생각을 양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상에서 정치와 종교를 빼놓고 살아가기란 어렵다.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고 또한 각자 생각이 다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의 문제이며 정치는 그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김영민 교수이다. [공부란 무엇인가],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이란 저서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그가 이번에는 ‘정치적 동물의 길’이란 부제가 붙은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란 책으로 찾아왔다.
그는 인간은 싫든 좋든 타인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타인과 더불어 사는데 정치가 있고 욕심과 질투와 배척을 넘어서 타인과 공존을 모색하는데서 정치는 시작된다고 말한다. 또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고 정치는 바로 그런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삶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산다는 것은 고단함을 집요하게 견디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인의 삶이 쉬울 거라고 함부로 예단하지 않는 것이 사람에 대한 예의라며, 이처럼 당연해 보이는 것이 더 이상 당연해 보이지 않을 때 정치가 시작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치의 시작과 끝, 정치의 필요성, 권력, 국가, 선거, 대의정치, 정치 리더십 등 우리가 흔히 싸잡아 정치라 부르는 것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꿈·사랑·신 등 모든 것이 허구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런 허구를 통해 하루를 살아가고 삶을 지탱하고 있다. 국민주권 역시 마찬가지이다. 국민주권이란 허구로 인해 대의정치가 유지되고 이런 허구들이 있기에 인간의 삶이 지탱된다는 것이다. 즉, ‘허구는 삶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고, 허구와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허구를 믿고 즐겨야 하지만 사실로 혼동하지는 않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욕망과 목표가 있는 곳에 권력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정치는 파워를 지향하고, 파워는 소프트파워를 지향하고, 소프트파워는 ‘생각 없음’을 지향‘한다. 사람들은 제정신이 돌아온 다음 ‘생각 없음’을 두고 자신을 설득하기 시작하고, 그것에 대한 정당화는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또한 우리는 정치가 우리의 삶과 거리가 멀고, 정치인이란 마치 외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야유하고 냉소를 보낸다. 이처럼 저자는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다양한 정치적 논의 - 허구를 사실로 혼돈하고, ‘생각 없음’을 지향하고, 야유와 냉소를 보내는 것 등 -를 다룸으로써 정치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다시 말해 정치는 어디에나 있고, 우리가 사는 삶 그 자체가 정치임을 알려주고 있다. 정치란 무엇인지에 대해 스스로 정의하고, 정치가 내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그러기위해서 우리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정치에 접근해야 하는지를.
저자는 현실 정치의 폐해나 아쉬움에 수동적으로 반응하기보다 생각하는 시민이 되어줄 것을 주문한다. 권력은 항상 ‘생각 없음’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사회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다. 저자는 ‘여기에 쉽고 확실한 답은 없다. 오히려 쉬운 답이 있는 것처럼, 자기는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 일시에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 그러기에 다음 세대만큼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끔 양질의 선택지를 마련해 주려는 사람 말을 경청해야 한다. 우리 자신에게 좋은 선택지는 아마 이미 소진되어버렸음을 인정하면서’라고 말한다. 모든 대안은 그 나름의 부작용이 있다는 걸 그리고 일에는 비용이 따른다는 것을 감안하고 있는 사람 말을 경청하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을 두고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 다가오는 선거로 인해 유난히도 시끄럽다. 우리가 싸잡아 부르는 정치/정치인만이 난무한다. 그래서인지 ‘특정 정치인에 대해 열광하는 마음은 식고 정치에 대해 생각해보는 마음이 뜨거워지길’ 바란다는 저자의 말이 유난히도 마음속에 남는다. |
정치적이라는 말을 싫어했던 나는 이 책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정치적 동물의 길이라는 부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독서모임(트래블링 솔)의 첫 번째 책이므로 읽어야 했다. 이 책을 선정한 선생님의 의도를 고민하면서 표지의 그림에도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자 김영민은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다. 산문집으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공부란 무엇인가>와 연구서로 <중국 정치사상사>가 있다. 이 책에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그 안팎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정치에 대한 사유를 폭넓게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치의 개념부터 시작해서 실질적인 생활의 정치까지 다양하게 설명하고 펼쳐진다. 중간중간 그림들이 삽입되어 있고, 영화, 음악, 드라마까지 다양하게 넘나들며 생각을 이어 간다. 저자의 의도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 마치 신발을 벗고 전력질주하는 마음으로 책을 마주한다.
미성숙한 인간들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의 성숙과 덕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어느덧 다수의 지배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버리고 현자의 인자한 독재에 기대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권력의 전횡을 제어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정치는 어디에나 있다고 설명한 저자는 파리대왕을 예로 들어 정치의 시작과 끝을 설명한다. 파리대왕의 등장인물이 모두 어린이인 점도 유아적인 미성숙함으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을 보여준다고 한다. 한 사람의 민주 시민으로 길러져야 함을 강조했던 김누리 교수의 책과 연결되어 공감이 많이 간 부분이다. 또 현자의 인자한 독재라는 말이 크게 와닿았다. 현자라고 해도, 인자하다고 해도 결국은 독재가 아닌가? 인간의 존엄에 대해 말한 뇌신경 과학자는 뇌의 특성을 들어 설명했다. 뇌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편리성을 추구한다고. 현자라는 좋은 핑계를 대면서 정치에 쏟는 에너지를 줄이는 것이다. 그것이 뇌의 본질에도 맞고 인간의 귀찮음에도 맞는 것이니까. 그러면서 현자가 하는 정치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관심과 에너지를 줄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현자도 시간의 흐름을 감당해 낼 수 없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선의는 시간을 당해내지 못하며 정점에 달했다고 방심해도 좋은 것이 정치는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일상을 관리하여 건강을 챙기는 것처럼 정치도 관리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 관리가 제도적 장치인 것이다. 제도적 장치를 시대에 맞게 소외되는 사람들 없이 만들어 가기 위해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정치에 관심과 에너지를 써야 한다. 부정적인 정치의 이미지를 통해서 통치자들은 일반인들의 무관심을 바라는 것은 아닐까? 저자의 말처럼 인간은 결국엔 혼자서 살 수 없는 존재이므로 모든 곳에 정치가 있다. 그 정치를 인정하고 정치적 동물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해야 함을 깨닫는 부분이다.
전체를 볼 수 있는 시선, 이것이야말로 리더의 핵심 자질이다. 전체를 볼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특정 욕망에 함몰되어서는 안 되고 대상과 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모자를 사랑하지만 모자를 좇아서는 안 된다. 그에게는 몰입의 쾌감 대신 아득한 피로와 슬픔이 있다. 그것이 전체를 생각하는 리더가 치러야 하는 대가다. 사유하는 정치학 교수의 시선으로 정치적 리더에 대한 부분을 읽는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처럼 지금 시대에 이런 정치적 영웅을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얼마나 현재의 정치인들과 괴리감이 생기는 것인지도. 일종의 거울 같은 문장을 통해 리더들을 본다. 모자를 너무 사랑해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모자를 갖기 위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국민 주권이라는 허구를 거창한 연설로 포장하고, 깔끔하게 씻고 대중 앞에 나오는 정치적 행동을 한다. 어쩌면 정치인들은 몰입의 쾌감을 버리지 못하고 아득한 피로와 슬픔을 견디지 못하는 것일지도. 정치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이 몰입하지 못한다는 대가는 생각보다 클 수 있다. 모두가 환호하고 즐거워할 때 그 장면을 찍어야 하는 촬영기자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작은 모임에서조차 소외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본성을 거스르고 기어이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간혹 생겨난다는 저자의 말처럼 간혹 이런 정치 리더들이 생겨나기를 바라본다. 현자의 인자한 독재를 바라듯이 나는 아니지만 누군가는 해주길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특히 약자는 계약서의 조항보다는 강자의 가변적인 선의에 의존하게 된다. 유사 가족 사회인 우리나라에 대해 말하면서 쓰는 표현이다. 이 짧은 문장 안에 그려지는 듯한 약자의 삶이 보인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모, 고모, 삼촌이 넘쳐 난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음식점에서는 거의 모두가 이모를 부른다. 처음 함께 식당에 간 일행을 통해 들었던 이모라는 호칭은 낯설고 이상했다. 그 호칭을 부르는 일생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왜 많은 호칭 중에 이모인가? 뭔가 좀 더 가까운 상태, 저자의 표현대로 유사가족관계를 의미하며 자신을 잘 대우해 달라는 무언의 압력이 들어간 호칭이지 않을까? 남자들은 거의 형, 동생이라고 하는데 저자의 표현이 통쾌하다. ‘내가 모르는 아버지의 아들이 있었던가?’ 이렇게 유사가족관계가 난무하는 사회 안에서 약자는 강자의 가변적 선의에 의존한다는 말이 정확하면서도 아프다. 약자는 계약 조항보다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강자의 선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비슷한 맥락으로 지난해 유행했던 “주라 주라”트로트는 우리의 이런 상황과 마음을 대변했다. “가족은 집에서나 찾으세요. 사장님 입은 닫고 지갑은 벌리세요.” 등의 가사가 모두가 품고 있던 말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강자의 가변적 선의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좋은 모양새고 시원한 복수일 테지만 이젠 계층 간 이동이 쉽지 않다. 강자, 약자에 대한 개념도 조금 다르게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권력은 어디에나 있는 정치처럼 어디에나 있다. 권력을 냉소하는 사람에게도 권력이 있으며,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버티는 사람에게도 권력은 있다. 자신의 자리에서 권력을 인지하고, 강자로서 가변적 선의로 약자를 대하지 않은 자세를 꿈꿔본다. 자녀들에게도 엄마라는 권력을 가변적인 선의로 사용하지 않도록 다짐하는 문장이 되었다.
책의 제목처럼 인간으로 사는 일이 하나의 문제이기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생각을 하자 인간으로 사는 일의 하나의 문제로 저자는 정치를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구나! 그만큼 정치가 우리와 밀접한 관계이며 중요하다는 말이겠지. 완전한 자연상태에서 새롭게 정치적 제도를 세팅하고 성숙한 민주주의 인간을 함께 세팅하지 않는 한 완벽한 정치는 힘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를 부정적인 개념과 시각으로 보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정치에 주체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제법 잘 살 수 있는 인간이 하나의 문제인 정치를 이해하고 공유하고 발전시키면 약자가 강자의 선의에 의존하는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정치는 편 가르고, 자기 욕심만 채우고, 비난과 비판이 난무하고 말 바꾸기가 일상이라고 생각했던 부정적인 시선을 많이 바꾸는 계기를 만들어준 책이다. 어쩌면 민주주의를 말하고 배우기 전에 먼저 이 책을 통해 정치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읽음으로 김누리 교수의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정치를 하고자 하는 순수한 젊은이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정치에 대해 부정적인 개념과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권한다.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일상에서 모든 것이 정치임을 인지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행간의 의미까지 깊이 있게 깨닫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실망하더라도 괜찮다. 자기만의 이해와 감상을 하면 되는 거니까. 모르는 것이 잘못은 아니니까. 끝으로 정치를 가장 잘 표현한 부분이라 생각하며 책의 비유를 적는다. 정치는 과일 수레를 엎어버리고 싶은 원한이 애당초 생기지 않게 하는 일, 쏟아져 굴러다니는 사과를 차근차근 주워 담는 일, 그리고 제풀에 무너지지 않도록 사과들 간의 균형을 잘 잡는 일이다. 비록 엎어진 수레를 방관하거나 과일을 밟고 다니거나 등 뒤에서 과일을 깎아 먹거나 굴러다니는 과일을 훔쳐 달아나는 이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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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성상 정치적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정치적 동물이란 무엇일까? 남극에 사는 황제펭귄의 생존전략에도 정치는 있다. 영하 50도라는 극한의 추위 속에서 황제펭귄은 허들링 ‘(huddling)’이라는 방법으로 살아남는다. 허들링이란 서로 몸을 동그랗게 겹겹이 밀착시키면서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견디는 것이다. 안쪽은 따뜻한 반면에 바깥쪽은 차가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안쪽의 따뜻한 펭귄은 바깥쪽으로 나가고, 바깥쪽의 차가운 펭귄은 안쪽으로 들어온다. 허들링은 어느 하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 함께 사는 ‘사회적 체온’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우리 인간도 본성이라는 잣대로 보면 정치적 동물이다. 하지만 동물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본성만으로 살 수 없는 존재다. 본성대로 산다고 하면 적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설령 문제가 있다고 해도 인간보다는 고달프지는 않을 것이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리 없겠지만 우리는 그렇게라도 살아가야만 한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축복이면서도 고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현실적인 고민 앞에서 김영민은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라는 돌직구를 던지며 정치적 동물로 사는 법을 깨우쳐 주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적 동물에게 정작 정치가 없다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세상만사를 권선징악으로 보는 것이나, 권태로운 삶이 싫다고 하여 산 속으로 칩거하는 것이나, 누운 채 몽상하면서 걱정하는 하 것이나, 아무런 노력 없이 무임승차하는 것이나, 이 모두는 정치가 없다는 블랙홀이다.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체, 그러니까 정치적 동물로 살지 않는다고 해서 지구가 한 순간 멈추는 일은 없다. 만약에 그렇게 되면 지구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지구가 자전한다고 해서 지구가 꼭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천국이라고 하면 모를까, 지옥이라고 하면 지구의 자전과 상관없이 지구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 멸망의 중심에는 비정치적인 동물이 있다. 비정치적인 동물은 황제펭귄처럼 허들링을 할 줄 모른다.
그래서 정치적인 저자는 비정치적인 사람들에게 욕심을 가지라고 호소한다.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하소연 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말만 거창하게 할 뿐 몸소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멸망하게 하는 큰 재앙이다. 일찍이 조선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은 <명론(名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릇 천하의 재앙 중에서 담백하게 욕심이 없는 상태보다 더 참담한 것은 없다.
세상일은 불공평하다. 잘 되는 경우보다 잘 못되는 경우가 많다. 불공평한 세상에 맞서는 방법으로 욕심이 있어야 한다. 욕심은 우리가 더 잘 살기 위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욕망이 있어야 인간이 인간다워진다. 잘못된 세상을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모든 사람이 욕망하는 것은 아니다. 담백하게 욕심이 없는 사람은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욕망은 귀찮은 존재에 불과하다. 귀찮은 존재는 구경꾼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니 귀찮은 존재에게 당연히 정치는 없다.
하지만 정치는 귀찮은 존재가 아니다. 정치는 잘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삶의 근본적인 처방전이다. 우리가 정치적 동물이라는 것은 운명이다. 비록 민주주의의 공화국에서 헬조선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공화국이라는 허구에서 벗어나 생각의 공화국에서 정치적 동물로 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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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책을 받아들고 심장이 한번 쿵 떨어집니다. 인간으로 살아감과 인간으로 살아냄이 좀 더 가치를 가질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늘, 교수님의 책 제목에 놀랍니다. 어쩌면 이렇게 듣고싶었던 이야기를 들려줄법한 기가막힌 제목을 정하시나요. 그것도 ‘내가 이걸 뽑아야 할 만큼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았나.’싶은 생각이 드는 21년 11월에 말이죠. |
역시 명불허전. 김영민 교수의 신작 에세이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는 곤란하기 짝이 없는 현실 속에서 안온한 삶을 꿈꾸는 사람들을 일깨워 지적인 사유로 이끌어 줍니다. 삶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위트있는 채찍질로 어떻게 각자의 삶을 책임져 나갈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귀찮다는 이유로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들을 아무에게나 내맡겨 버리지 않도록,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늘 갈팡질팡 하더라도 눈을 크게 뜨고 내 갈 길을 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따끔한 조언과 친절한 안내입니다. 이 책은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무엇인지, 각자의 입장만이 있을 뿐인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끝내 정치적 존재로서의 주체성을 포기하면 안되는지 알려줍니다. 애매함을 한치도 허용치 않는 저자의 명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냉소와 냉철의 차이가 무엇인지, 무모과 열정은 어떻게 다른지 알게 됩니다. 정치가 한 개인의 삶을 어떻게 흔들어 놓을 수 있는지 참으로 오롯이 느낄 수 있었던 지난 시간들,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취했던 태도들을 돌아봅니다. 이것이야말로 함께 잘 살 수 있는 공존의 길이라는 여러 외침 속에서 나는 나에게 주어진 권리와 책임을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 곰곰이 생각합니다. |
* 타인의 수단으로 동원되기를 거부하고, 자극에 단순히 반응하는 일을 넘어 타성에 젖지 않은 채, 생각의 모험에 기꺼이 뛰어드는 사람이 만드는 터전 * 비행기의 발명은 추락의 발견이자 선박의 발명은 난파의 발명이다. 인생의 발명은 고단함의 발명이다. * 자신이 가진 힘 이상으로 상대가 두려워 하는 바야말로 권력자가 원하는 바이다. * 권력자가 토론회- 관건은 정답을 말하는게 아니라 좋은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다. |
3~4쪽 분량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에세이 집이다. 이 책에서 하나의 단편은 하나의 방이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까지는 방안의 구조를 알수 없다. 방들은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기 때문이다.때론 재미없는 뻔한 구조의 방이 있기도 하며, 혼자 잘난척 하는 듯한 방안의 인테리어가 좀 별로일 때도 있다. 덕후 냄새가 찐하게 나는 방도 있어서 코를 틀어막아야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어떤 방은 당초 예상과는 다른 길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내 경우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 편이 그렇다. 방문에 걸려 있는 명패(제목)는 방안에 별볼일 없음을 짐작케 한다. 문 앞을 열고 들어간 순간 역시 뻔한 안내문이 반긴다. ‘사회과학적 학문 용어 중애 소프트파워와 하드파워라는 것이 있다.’(p.59) 블라블라블라. 그러나 조금만 더 걸어나가다 보면 길들 주변으로 생각지 못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첫 풍경은 김두한이다. 김두한은 구마적을 물리친다. 하드파워를 통해 권력을 쟁취한 것. 하지만 김두한도 매일 싸움질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싸우지 않고 이기는(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방법이 필요하다. 그러한 경지야 말로, 손자가 추구한 최고의 경지 아니던가. 안싸우고 이기는 힘은 소프트 파워다. 저자는 김두한의 소프트 파워를 구전으로 전해지는 무용담이 아니라, 김좌진이라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지위라고 규정한다. 누구든 위상을 인정하는 김좌진 장군이라는 네임밸류는 저자의 말대로 김두한에게 ‘광휘를 선사한다.’ 김두한이 주먹만 쎘다면 그토록 후대에 기억되지 않았을 터. 소프트파워는 하드파워에 비해 강력한 생명력과 권위를 넘어선 신성까지도 부여한다. 두번째 풍경에서는 국가가 등장한다. 국가는 하드파워를 통해 권력을 쟁취한 김두한과는 달리 하드파워를 이미 가지고 있다. 국민들은 국가가 가진 하드파워에 대항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반도체가 우리나라의 경제무기라고 할지언정, 영업이익 최고치를 매년 경신하는 반도체회사가 자신들이 번돈으로 사병육성, 국가 전복 따위를 꿈꾸지 않는다. 국가의 하드파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물론 국내 한정이지만. 소프트파워에는 국민들은 기꺼이 반응한다. 부동산 정책을 보라. 정책에서 헛발질을 연속하면 , 인터넷 뉴스 댓글에 격한 반응들이 올라온다. 지지자들이 막아보려한 들, 개똥볼을 넘어선 자살골 수준의 정책에는 지지자들의 선동 전술은 역효과만 난다. 소프트파워를 잘못쓰면 정부의 권위는 크게 흔들린다. 소프트파워의 원천이 선거로 뽑은 사람이 아닌 얼토당토안한 제3자인 것을 알았을 때, 사람들은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을 탄핵하지 않았던가. 반대로 코로나19 초기 정부대응이 좋았을 때에는 정부의 소프트파워는 강력했고 권위는 올라갔다. 사람들은 세계가 우리를 주목한다는 원문 기사들을 관음하면서 소프트파워가 마치 자신의 것 마냥 흡족해했다. 그즈음에는 정부가 무언가 잘못했다고 비판이라도 하는 날에는, 신상털기가 횡행한다. 정부를 비판하는 놈들은 정부가 직접 처치하지 않는다. 소프트파워가 작동할때 지지자들은 손에 피를 묻혀 처치해준다. ‘궁극의 정치적 정당화가 권력자가 아니라 추종자의 몫인 것처럼. ‘ 세번째 풍경은 인플루언서다. 구독자 100만의 인플루언서가 xx호텔의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먹는다. 구독자들은 너도나도 할 것없이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따라 먹는다. 소프트아이스크림이 맛있어서 인플루언서가 먹고 그걸 따라서 먹는게 아니다. 인플루언서가 먹어서 따라 먹을 뿐이다. ‘먹어보니까 이래서 맛있는 거네’ 일단 먹은뒤 맛있는 이유를 찾는다. 맛의 ‘정당화는 소프트아이스크림 제조업체의 몫이 아니라 소비자의 몫이다.’ 반대로 인플루언서의 선택이 연속해서 실패했을 때에도 인플루언서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선택은 인플루언서가 아닌 본인이 했을 지언정 탓은 남탓을 해야한다. ‘일이 잘 못되었을 때 남 탓을 못하게 하면 그만 돌아 버리’기 때문이다. 길의 종착점에서만 자신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조망 가능하다.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 편은 따분해 보였던 길 초입과는 달리, 생각지 못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종착점에서 길을 조망했을때에는 또다른 풍경이 있었다.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를 욕망하는 치자들 뒤에 가려진 피치자들의 욕망의 풍경이. 생각지 못한 풍경은 다시한번 그곳을 찾게 만든다. |
얼마전 친구들과의 독서모임에서 김영민 교수의 책으로 토론을 했었다. 헌데 김영민교수 책을 몇 권만 읽었다고 했더니 왜 책을 다 읽고 뭐를 읽어라 라고 안해주느냐며 친구들이 당당히 요구를 해서 어이가 없었다. 해서 야단맞은 김에 이 책을 읽었다. 사실 이 책에서 브레이크가 걸렸었다. 부제가 '정치적 동물의 길'이었고 올라오는 피드도 정치에 관한 책이라고 해서 망설여졌다. 정치와 종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버린 요즘, 나 역시 여러 모임에서 정치 얘기가 나오는 걸 꺼린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빨간색이야, 파란색이야, 무슨 당이야, 누구를 지지해,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일엔 정치가 있을 수 밖에 없고 정치를 따로 분리해서 몹쓸것들로 치부해버리지 말고 진짜 정치적으로 살아보자는 것이다. 김영민교수 특유의 촌철살인 문장은 여전히 빛난다. 책을 읽으면서 카타르시스가 느껴질 만큼 시원하다. 가장 인상적인 비유는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 예를 든 부분이다. 오래전에 이 책을 읽었는데 아주 무서웠었다. 너무 섬뜩했는데 현실을 정말 예리하게 잘 보여줘서 읽으면서 소름이 끼쳤었다. 이 책으로 정치의 예를 설명하는데 ??. 타인과의 공존을 모색하는데서 정치는 시작한다는 말씀에 핵공감. 정치인이 아닌 정치에 대해 생각보자 했는데 진심 모두에게 생각해보라고 묻고싶다. 정치는 무엇일까요... 궁금하다면 이 책을 한번 읽어보세요. 아, 혹시나 '정치싫어! 읽기싫어!'할 분들이 있다면 걱정마세요. 정말 재밌답니다.^^ |
서울대 김영민 교수의 신간이다. 이미 그의 전작들인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와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등을 구입한 경험이 있기에 이번에도 바로 장바구니에 담았다.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이며, 그 문제를 다루는 데 정치가 있습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문장이다. 인문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현실 정치의 다양한 측면들이 꼼꼼히 결을 이루며 그 모습을 드러낸다. 왜 여전히 인문학이 중요한지에 대한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는 책이다. |
인간의 삶에 어째서 ‘정치’라는 것이 필요한가. ‘어떤’ 정치를 우리는 원하나. 정치는 ‘본질적’으로 어떻게 생겨났나. 사람은 왜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김영민 교수님의 해학이 담긴 책이다. 언뜻 질문만 보아서는, 이 책 진짜 따분하고 재미없고 도대체 뭐야? 싶겠지만, 글 속에는 여러 편의 영화와, 책, 전시 작품들과, 미술과, 시와… 역시나 늘 그렇듯이 김영민 교수님이 선별한 다양한 예술들이 등장하여, 정치와 삶과 예술이라는것이 결코 나의 일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아주 재미있는 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