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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땀. 눈물.
- 시인의 말 中 -
[ 흐르다 ]
좋아하는 동사를 묻자 그는 흐르다, 라고 대답했다 나도 그 동사가 마음에 들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흐르다, 가 흘러내리다, 의 동의어라는 것을
몇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기 전에는 실감하지 못했다 눈물의 수직성을
눈에서 입술로, 상류에서 하류로, 젊음에서 늙음으로, 살아 있음에서 죽음으로, 높은 지대에서 낮은 지대로 어제에서 오늘로, 그리고 내일로, 최초의 순간에서 점점 멀어지는 방식으로, 에너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의 방향으로, 기억의 밀도가 높은 시간에서 낮은 시간으로
흐르는 모든 존재는 흐르는 동시에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아래로 아래로 떠밀려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흘러오르다, 라는 말이 어디 있는가
고요 있거나 갇혀 있지 않는 한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물과 흙 피와 눈물 세포와 원소 사랑과 우정 또는 시간과 기억
원치 않았지만 그것이 끝내 우리를 데려다 부려놓는 곳 어떤 하류의 퇴적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하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다 흐르다, 라는 동사는 흐르지 못한다는 것을
[ 찢다 ]
모든 기록은 일종의 얼룩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찢을 때마다 들리는 종이의 비명 그러나 정작 찢어야 할 것들은 손도 대지 못했다
저 나무 상자에는 오래 열어보지 못하는 것은 찢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고 찢을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예의를 아직은 완전히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상자도 아닌데 나는 왜 열지 못하는가
그렇게 찢기고 찢겼으면서, 차마 찢지 못한 한 줌의 사랑이 남아 있지도 않은데
찢으면 찢을수록 끝내 찢지 못한 것들이 떠오른다
나는 이루는 마지막 페이지 또는 첫 페이지
한 번도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그걸 찢는 순간에야 비로소 이해하게 될 편지들
[ 사라지는 것들]
하나씩 사라졌다
정수기가 사라졌다 전기 콘센트가 사라졌다 벽에 걸린 티브이가 사라졌다 보이지 않게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방역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무엇이든
자정 넘으면 쉼터도 문을 닫고 방문자센터도 폐쇄되고 공공화장실도 잠겨 있고 급식소도 당분간 열지 않는다
역에서 잘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천막을 칠 수 있는 곳을 찾아냈다 날이 추워지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겠지 여자들은 천막도 칠 수 없다 한밤중에 누가 덮칠지 알 수 없기에 그나마 여자화장실이 안전하다 똥 묻은 휴지가 넘쳐나고 오줌 섞인 물이 바닥에 흥건해도 어쩔 수 없지만
길에서 자는 사람들이 실제로 바이러스의 숙주가 된 적은 많지 않다 도시의 섬처럼 각자 떠다니니까
그런데도 왜 하나씩 사라지는 것일까
우리를 사라지게 하려고? 멸종저항운동이라도 벌여야 할까?
그들이 사라지게 하고 싶은 것은 정수기나 전기 콘센트나 티브이가 아니라 거기 줄을 대고 있는 존재들, 가장 확실한 시각적 방역을 위해 사라져야 할 존재들
사라지는 것들은 어느새 사라진 것들이 되었다
[ 가능주의자 ]
그렇다고 제가 나폴레옹처럼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불가능들로 넘쳐나지요 오죽하면 제가 가능주의자라는 말을 만들어냈겠습니까 무엇도 가능하지 않은 듯한 이 시대에 말입니다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산산조각난 꿈들을 어떻게 이어붙여야 하나요 부러진 척추를 끌고 어디까지 가야 하나요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요
저는 가능주의자가 되려 합니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려 합니다
큰 빛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반딧불이처럼 깜빡이며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에 대해 그 어긋남에 대해 말라가는 잉크로나마 써나가려 합니다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이빨과 발톱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찢긴 살과 혈관 속에 남아 있는 이 핏기를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무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떤 어둠에 기대어 가능한 일일까요 어떤 어둠의 빛에 눈멀어야 가능한 일일까요
세상에, 가능주의자라니, 대체 얼마나 가당찮은 꿈인가요 -------- * 오시프 만델슈탐,「시대」 ,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조주관 옮김. 믄학의숲, 2012, 96쪽
[ 여행은 끝나고 ]
미루어둔 불행이 일제히 들이닥쳤다 벽장문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잡동사니들처럼
예외적인 날들은 끝났다고 그것 보라고 이게 바로 도망칠 수 없는 네 몫의 삶이라고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앰블런스에 아버지를 태우고 응급실 가는 새벽, 비에 젖은 도로 위에는 점멸등이 깜빡거리고 브론테 자매가 살았던 목사관에서처럼 음울한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불우한 가족사가 그녀의 고장을 먹여살라고 있었지만 여기서는 나의 가족사가 깃발처럼 나부꼈다
남동생은 고속도로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고 점점 여위어가는 어머니의 얼굴, 아버지가 몇 해째 응급실과 중환자실과 입원실과 집을 오가는 동안 폭풍은 우리를 막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더, 더, 막다른 곳으로
꿈에서 깨어난 듯 고통스러웠지만 고통을 음미할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신의 벽장 속에는 뜯지 않은 불행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여행은 끝나고, 이제 쓰디쓴 풀과 거친 빵을 삼켜야 하는 시간 물을 긷고 또 길어야 하는 시간
구멍 뚫린 독에 끝없이 물을 길어 부어야 했던 다나이드처럼 ******* 음력생일인 나.. 그해엔 12월 31일이 생일이였고.. 부안 해넘이축제에 가는 길에 너무 교통이 막혀서 도로에서 시간을 보내다 새벽녁에서야 집에 도착하니 아빠는 응급실에.. 몇 해지나.. 아빠는 하늘나라로.. 돌아오지 않을 소풍을 떠나야했다..
... 소/라/향/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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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가 있을 수 있으니 싫으시면 피해주세요) 개인적으로 굉장히 인상깊게 읽은 시집입니다. 갈수록 제 한몸 가누기도 힘겨워지는 세상을 시를 노 삼아 저어나가는 시인의 운율이 비장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또 빛이 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 중 제일 좋았던 시는 “꿰메다”였는데 이 구절이 제일 기억에 남네요. 뜯어진 바짓단이든 구멍난 양말이든 떨어진 단추나 후크든 조금 해지거나 터진 구멍쯤 아무것도 아니라고 실패를 두려워할 것 없다고 바늘구멍한한 진실은 어디에든 있다고 꿰매다 실이 모자라면 실패를 집어올려 새로 꿰면 된다고 무언가 꿰고 꿰매는 동안에는 다정한 이가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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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닥 시인의 시집 ‘가능주의자’입니다. 문학동네시인선 167번째 시집으로 나희덕 시인의 시집이 나왔더군요. 시인이 등단한 지 30년이 넘었고 내가 나희덕 시인의 시를 처음 읽었을 때가 언제인지 더듬어 봤습니다. 시가 무엇인지도 모를 어린 나이에 산생님께서 빌려주신 시집들 속에 나희덕 시인의 시집이 있었습니다. 그 뒤로 띠엄띠엄 잊지 않고 챙겨서 너희덕 시인의 시를 읽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시인은 희망을 말하고 가능성을 노래하며 우리를 알으켜 세우려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가능주의자가 되려 합니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려 합니다 큰 빛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반딧불이처럼 깜박이며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에 대해 그 어긋남에 대해 말라가는 잉크로나마 써나가려 합니다 「가능주의자」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