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춘 ★★★★★ 마치 어머님이 시집올 때 해오셨다는 마호가니 장농처럼 "청춘"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순수함을 잃어버린 단어처럼 퇴색된 듯한 느낌이다. (책 표지 또한 헌책방 구석의 먼지와도 같은 빛바랜 분홍 -_-;;;) 비오는 날, 썩은 담배 냄새 찌든 지하 음악다방에서 울려퍼질 듯한 김창환의 "청춘"이라는 노래가 떠오르는 제목과는 어울리지않는 정교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래서 낭만적인 젊은 남녀의 연애담이라고 생각하고 책을 읽다가는 큰 낭패를 보게 될 것이 틀림없다. 책의 광고문구에 나오는 일본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말에 기대지는 말자. 누구는 일본의 셰익스피어라는 둥, 누구는 일본의 도스프예스키라는 둥, 누구는 일본 소설계의 하느님이라는 둥... 마치 남의 명성을 모방한 듯한 요란한 광고문구가 책을 팔아먹는데 얼마만한 효과가 있을런지는 몰라도 아류로 전락할 수도 있는 천재작가의 본질을 흐리게 된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하여간, 독자에게 작품을 읽고 싶지않게 만드는 여러가지 요소 중 두가지 "천박한 표지"와 "요란한 광고문구"를 무시하고 선택한 책을 통해, 이름도 낯선 대단한 작가와의 만남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 책의 묘미는 탄력있는 줄거리와 사건전개가 가진 구성의 흡입력, 담담히 흝어내리는 사실적 묘사, 역사적인 사건과 결합된 절묘한 시대적 군상들의 이야기... 여러 종류의 만남과 죽음 그리고 시대의 아픔을 통해 고뇌하는 청춘들의 모습이 절절하게 나의 마음 한 자락에 매달린다. 그리고 짤막하지만, 한국전쟁에 대한 당시의 일본의 풍경과 시각 또한 하나의 읽는 재미일 것이다. 또 하나의 "록탈관 이야기"도 비밀스럽게 공유하는 우리들의 이야기 또 다른 풍경이다. 1. 청춘 2. 록탈관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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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어느 가을날 전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곧 무너질 듯한 헌책방 선반에서 H 전집을 뽑아든다. 그리고,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적지 않은 돈을 치르고 그 전집을 구입한다. 이 소설은, 이렇듯 주인공이 구입했던 H 전집에서 시작해 주인공의 약혼녀인 세쯔꼬의 자살로 끝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전집은, 그 역시 자살했던 세쯔꼬의 대학 시절 지인, 사노의 것이었다. 이 소설에는 이처럼 이상한 인연으로 만나고 죽는 사람들이, 일본의 어느 한 시절이라는 공통된 배경을 뒤로 하고, 등장한다. 주인공이자 화자가 작품의 말미에서 말하듯, 그가 전집을 구매한 행위는 그의 의지가 아니었고 그때 그가 느낀 오한, 그에게 감겨오던 기이한 분위기도 그의 것인 것만이 아니었다. 90년대 들어 쏟아져 나왔던 '후일담' 소설들에 비해 볼 때 이 소설은 얼마나 훌륭한가, 는 투로 장정일은 독서일기에서 적은 바 있다. 우리나라 작가들의 이른바 후일담 소설에 비하자면, 이 소설에는 도저히 거부하기 힘든 호소, 같은 것이 담겨 있다. 뭐라 할 말을 잃게 하는.. [인상깊은구절] 애초부터 부재였다-그것을 나는 사실로써 말한다. 거기에는 다소의 선망은 있다 해도 실망은 없다. 우리 세대는 기대하고는 인연이 없는 세대이다. 혹은 우리 세대라기보다는 나는, 이라고 말해야 할까? 나는 내일 일어날 일을 예언자에게 배우는 그런 의미체계를 갖는 세계에서 자란 것은 아니다. 내 앞에 있던 것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실들 뿐이었다. 나는 사실을 보고 세계란 무엇인가를 배웠다. 나는 실망하고는 인연이 없었다. (p. 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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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건 사건의 본질에서 두 세발 쯤 떨어져 있는 사람이다. 사건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기 때문에 사건 현장에 직접 뛰어들 수도 없고, 의도적으로 피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근처에서 아무것도 모른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사건과 관계된 두 종류의 등장인물. 1. 사건의 본질을 알고 있고 현장에도 뛰어들었던 사람. 2. 사건의 본질을 알고 있으나 현장만은 철저히 외면한 사람과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인연의 끈이 닿아 있어, 두 인물 모두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완벽한 제 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아야 할 운명을 타고 났기에, 주인공일 수 밖에 없다. 두 인물 중 한 편에서 써버린 소설이었다면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이거나 쓸데 없는 자기 연민, 혹은 자기 비하로 가득찬 것이라서 거의 읽을 가치조차 없는 이야기가 되었겠지. 관찰자는 관찰 대상에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따라서 안정감있는 주인공은 관찰자 일 수 밖에 없다. 한 인물에 대해 제대로 알려면 자서전보다는 전기를 읽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월이 흘러간 후 우리앞의 생이 끝나갈 때 누군가 그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오면 대답할 수 있나 지나간 세월에 후횐 없노라고. 이 노랫말과 비슷한 질문을 담은 한통의 편지는 정말 완벽하게 소설 전체에 나열된 개개의 사건들을 꿰뚫고 있다. 그 편지는 '현장'에 뛰어 들었던 '사노'가 현장에서 철저하게 '비켜서'있었던 '소네'에게 보낸 것으로, 사노는 그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는 편지만 남기고 자살해 버렸다. 그들의 '현장'이란 고교시절 '메이데이 시위'에 관한 이야기로, 비슷한 이념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사노는 뛰어 들고, 소네는 비켜섰다. 그런가하면 우리의 주인공 오하시는 사노와는 전혀 모르는 사이고, 친한 친구인 소네가 사노란 사람과 어떤 관계였는지 흥미조차 없으며, 더구나 '이념'이니 하는 말과는 거리가 멀고, 시위 비슷한 일엔 관심조차 없었을 사람이다. 그런데 왜 난 '사노의 편지'와 '메이데이 시위'부터 되짚을 수 밖에 없는 걸까.
오하시가 사노의 소유였던 모 작가의 전집을 산 것부터 그에 맞물린 약혼녀 세츠코와 사노의 이야기, 사노의 편지, 그리고 결말까지. 어떻게 보면 지나친 우연의 지독히 우연한 연속이지만 결말마저 끝나버린 후엔 누구도 그 은밀한 필연성을 부인할 수 없을 듯 싶다. 그 전집으로 시작된 사노와의 인연은 분명 우연이었지만, 소설 전체를 보면 오하시와 세츠코가 맞았을 필연적 위기를 조금 서둘러 가져다 준 것에 불과하며, 그 두사람 역시 그런 전환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편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권태, 단어를 떠올리는 것조차 농담거리인 '청춘'의 오하시와 세츠코는 권태의 상태였다. 한 때 찬란했던 사랑이 지나간 후에 찾아온 권태도 아닌, '약혼'이란 시작부터 체념을 내포해 버린 청춘의 권태. 서로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벗어나기위한 노력조차 체념해 버린 상태에서 사노의 등장은 차라리 자연스럽다. '이념'의 공허를 피하려고 치열한 현실에 몰두했지만 결국 문제의 본질은 예전 그대로임을 깨닫고 자살해 버린 사노의 모습은 오하시 커플에 비해 훨신 행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로 보인다. 물론 '적극적인 삶의 자세는 곧 자살이다.'라고 감상주의 적인 주장을 늘어 놓으려는 건 아니다. 다만 사노가 "나는 내 삶에 이렇게라도 적극적일 수 있었어. 근데 당신은 얼마나 적극적일 수 있나?"하고 다소 거만하게 묻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서 하는 이야기다.
편지의 등장이후 사노와 오하시간의 대비는 오하시와 세츠코간의 대비로 이어지고, 결국 그녀는 사노처럼 대담하고 적극적인 최후의 시도까지 보여 주지만, 우리의 주인공 오하시는 마지막까지도 '공허'혹은 '권태'의 자각조차 불분명했던 탓에 자기를 둘러산 주변의 모든 삶이 붕괴되는 것마저 다소 무심한, 관조하는 자세로 지켜보다가, 조금이나마 남은 공허한 현실속으로 힘겹게 숨어버린다. 아마 그에겐 자신의 삶조차 지켜보기만 할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그의 무심한 말투는 차라리 희망적이다. 적어도 적극적이기위해 죽으려 하지는 않을 테니까. 처음으로 돌아가서,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사노의 편지' 아니, '메이데이 시위'를 기억하는지. 사노의 편지가 싫든 좋든 오하시커플에게 삶의 본질에 대한 회의의 계기가 되었듯이 메이데이 시위는 사노가 '공허'를 자각한 계기였다. 내가 시작부터 주인공의 관찰자적 역할 운운하며 유난히 그 사건에 집착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 계기로 인한 전후의 대비랄까...세츠코는 오하시에게 같은 질문을 이야기의 전반부와 후반부에 두번 반복한다. "전 이제 이렇게 한평생 당신을 위해 밥을 짓게 되는 건가요?" 같은 질문이지만 전반부의 그것이 일종의 체념이었다면 사노의 편지를 계기로 후반부의 그것은 저항 비슷한 것으로 바뀌어 있다. 사노의 경우에도 그의 열렬한 극좌파 활동은 메이데이 시위를 계기로 두려움이 끼어들면서 공허한 것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러나 오하시만은 메이데이 사건에서도, 사노의 편지로 인한 그 험한 비바람에서도 예의 그 관찰자 자리를 바보스러울만큼 충실히 지켜 항상 본질에서 슬쩍 비켜서 있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피하지도 않은 채로. 아마 영원히 그렇게 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번엔 한결같은 그의 모습에 박수라도 쳐 주어야 하는 건가?
낯선 작가의 책, 더구나 이름쓰는 형식조차 낯선 외국 작가의 책을 읽을 땐 작은 모험이라도 하는 기분이다. 책을 집어드는 순간, 시작 자체를 후회하다가도 독특한 표현들과 전개에 조금씩 흥분하다가 결국은 이야기에 푹 빠져 버리는 다소 복잡한 과정이랄까. 프롤로그가 주는 '묘한' 기대를 조금도 저버리지 않는 만족스러운 책이었다. 주인공이 정작 자신의 삶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는 일에서 완벽히 비켜선 채 세츠코의 뒷 이야기마저 덤덤하게 써내려버린 점이 끝내 아쉽기는 했지만. 그리고, 대학시절 자살한 여자친구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큼은 자신의 과거, 즉 삶에 대해 작게나마 책임을 느끼는 듯 싶어, 그 회상 에 대한 소제목인 '하얀바다의 기억'을 글의 제목으로 골랐다. '친구'에서 동수가 자기집에 돈뭉치를 던져 넣고 돌아서던 장면의 그 느낌 정도라고 해두자. 청춘. 그 화려함에 가려진 의식하지 못한 권태, 혹은 그 해맑은 푸르름에 숨은 공허에 대해 생각하라. 적어도 그대가 청춘이라고 생각한다면. [인상깊은구절]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내 마음에 음화처럼 새겨진 너무도 어두운 부사장의 표정을 반추하고 있자니, 인간의 행복이란 대체 무얼까하는 의심이 점점 마음 속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그토록 어두운 표정을 지어야만 한다면 인간이 살아서 누리고 있는 행복이란 대체 무엇일까 하는 의심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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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고른 이유가 있다면, 아쿠타가와상 수상작품이었기 때문이리라. 왜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에 그리고 그 작가들에게 관심이 있냐고 물으면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은 항상 본질을 꿰뚫는다.'라고 답할 것이다. 물론 이 작품 또한. 내면으론 리얼한 성 묘사, 즉 스토리 속에 내재된 하나의 장면을 보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가식. 그러나 인간의 본질이란 필연 성과는 떼 놓을 수 없는 관계. 그런 이유로 제 51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을 펼쳐들었다. 책을 읽는 도중에는 아무런 파동도 읽지 못했다. 그저 그 시대에 어울리는 평이한 얘기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이런 책을 두고 모든 청춘의 필독서니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동격으로 인정받느니 하는 겉표지의 선전문구는 무슨 이유인가.
인간의 고독을 그린 작품이다. 한 인간 존재는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란, 이성간의 사랑이란 서로가 서로를 원하지만, 자신이 아닌 한 존재를 갈망하지만, 결국 얻을 수 있는건 그 존재가 아닌 육체덩어리. 물론 육체가 없이 존재가 있을까. 하지만 인간은 결국 암흑속에 둘러싸인 고독한 존재가 아닌가. 과연 다른 존재와 하나의 공통의 의미를 갖는다는게 무엇인가. 모든 청춘의 필독서 라는 것은 우리가 찾아야 할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번역체의 문장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시대적 공백 때문인가. 그렇게 절실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는 어떻게 이 책이 읽혔을 지는 모르겠지만, 시대적 색채가 깊은 소설이라 그 감흥은 덜 한것 같다. [인상깊은구절] 그럼에도 당신은 오로지 집요하게 자기 과거의 자기 전개를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그것에새로운 타당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노력은 결단코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당신이 어떻게든 지키려고 했던 건 무엇일까요? 우리 두 사람의 내일이 아니었습니다. 무언지 몰라도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그 무언가 불모의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내가-어렸을 적 나무 쌓기 놀이 때와 마찬가지로-당신이 나를 보아주길 얼마나 기다리는지, 조금도 알아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밤, 우리는 서로 다른 마음을 갖고 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있고 나서 곧 당신 논문 때문에 만날 수 없는 날이 계속됐습니다. |
| 시바타 쇼의 <청춘>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제목때문이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들르게 된 어느 서점에서 '청춘'이라는 제목의 책을 만났고, 며칠 동안 고민을 해야 했다. 요즘같이 일본 소설 전성기에 몇 권의 책은 적잖은 실망을 안겨주었기에 선뜻 골라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제목은 며칠 째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결국 읽기 시작했다. <청춘>은 1955년 공산당 방침의 전환에 따른 혼란의 시대를 지나온 일본의 젊은이들의 이야기다.신념의 붕괴에 따른 혼란을 겪은 청춘들은 나름대로 현실속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듯 하지만, 결국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허함속에서 결국 자살에 이르게 되고... 이런 일련의 주변의 변화를 겪게 되는 주인공 후미오를 통해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책 서두에 쓴 것처럼 '삶이란 결국 갖가지 시간 보내기의 퇴적일 뿐이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무엇인가에 열중하고픈 욕구가 가장 왕성한 시기. 우리는 그 때를 <청춘>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길은 끝까지 가는, 그래서 삶이 단지 '시간 보내기'에 그치지 않는 의미있는 <청춘>을 보냈으면 하는 것이 작가가 보내는 메시지가 아닐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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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작가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다. 인터넷을 뒤져 알 수 있게 된 것은 『그래도, 우리 젊은 날』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는 사실 정도. 나로서는 처음 읽는 작가이다. 소설의 내용 중에 한국전쟁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오십년대이거나 많이 잡아도 육십년대 즈음에 세상의 빛을 본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 단지 일본에서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필적하는 작품이라는 설명이 책의 날개에 실려 있다. 작품의 내용은 『그래도, 우리 젊은 날』이든 『청춘』이든 상관없이 딱 그렇게 삶의 정점이라고 불러도 민망하지 않은 순간들에 대한 작가의 조근거리는 듯한 기록과 인물들이 주고 받았던 편지글들로 채워져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 보이지만 그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요동치는 바람의 회전으로 소란스러운 젊은 그 한때, 그 청춘들에게 내재되어 있던 실핏줄처럼 잘고 길게 구불거리는, 그 부질없어 보이는 감정의 지층 바로 아래에는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나 오하시와 세츠코는 이년전 쯤 약혼을 한 사이다. 대학교에 다닐 때는 학생운동(전공투 이전인 듯 보이는데,그 당시의 일본 학생운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공산주의 혁명사상과 견주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짐작은 된다) 에 심각하게 빠져 있기도 했지만, 이제는 소박한 삶의 목표를 향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 그렇게 살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오하시는 헌책방에서 H전집을 사게 되고, 그 책들 중 한 권에서 대학 시절에 알고 지냈던 사노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사노는 이미 자살은 한 뒤이다.그리고 자살에 앞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그가 고뇌하던 바의 일단이 드러난다. 그것은 현재의 자기 자신을 존재하게 만들었던 과거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게다가 그 자유롭지 못함이 더 이상의 미래를 허용하지 않을만큼 치열하다는 것.
오하시에게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않던 세츠코는 사노의 편지와 자신의 과거를 되새기면서 오하시와의 결혼보다 더욱 중요한 무엇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각(사츠코 또한 편지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오하시에게 알린다. 편지가 애용되던 시절인 것이다),그만 결혼을 포기하고 멀리 여행을 떠난다. 오하시 또한 그런 세츠코를 이해한다는 것이 소설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청춘은 흘러간 어느 한 시점에 대한,현재에서 과거를 향해 보내는 연서같은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청춘은 오히려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보내는 충언같은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소설인가? 청춘의 고뇌 따위 거추장스러우니, 그것을 버려야 지금 현재에 충실할 수 있고,그것이 또한 발랄하고 현대적이며 자기충족적인 미래를 보장한다고 말하는, 이놈의 사기충천한 현재에 탁, 하고 침이라도 뱉는 모양을 가진 고전적인 작품이다.
일면으로는 수긍, 또다른 일면으로는 반감. 거둘먹거리던 청춘시절 (내게 있어 이 시절이 현재진행형이라고 끊임없이 우기기는 하지만) 의 그 호기롭던 우울과 배반의 섬뜻함 가득한 추억들을 빈 입모양으로 깨물어 본다. ps. 장편분량(중편일 수도 있겠다)의 소설 뒤에「록탈관 이야기」라는 단편이 하나 더 실려 있다.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은 청소년기,주인공을 휘어잡았던 전기 배선, 그 감추어진 세계의(과학 또는 이성의 세계)매혹적인 명확함. 그리고 그 명확한 세계를 향한 동경과 희망, 그 동경에 이르지 못해 또는 그릇되게 도착하여 갖는 심란함이 섞여 있는 성장.교과서처럼 질서가 반듯한 성장소설이다. [인상깊은구절] 그러나 그 격렬함은 허무를 버텨내지 못했다. 그 격렬함은 허무와 아무 상관없이 공존하다 이윽고 소멸했다. 그 격렬함이란 그런 성질의 것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이내 알아차렸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나는 그 격렬한 감정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이 나를 전적으로 채워주지는 않음을 처음부터 알아버렸다. |
| 시바타 쇼가 누군지도 몰랐다. 다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 구의동 헌책방 한구석에서 언제까지나 외롭게 주인을 기다리게 내버려두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골랐다고 할까. 마치 신경숙 초창기의 작품처럼 작가는 화자들의 내면세계에 깊숙이 천착한다. 나의 아버지가 10대였던 1950년대를 배경으로 무언가 생을 바쳐 열중할 것을 찾아 헤매는 젊은이들의 초상이 그려지고 있다. 후미오가 느끼는 허무감은 어두운 색채이지만 그렇다고 무기력하거나 무책임하지는 않다. 세츠코가 보여주는 초조함의 연원도 삶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기에 두 사람과 주변의 특질있는 인물들이 자아내는 이야기들은 어느것 하나 가볍거나 무의미하지는 않다. 그래서인지 전반적인 작풍은 차분하고 무거워 쉽게 읽히는 요즘 스타일의 책은 아니다. 내 취향이 책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진지하고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였기에 얼마만큼의 공감과 젊은 시절의 향수를 느끼게 해준 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