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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를 바라보는 독일어 번역가 조한나의 본명은 변이숙입니다. 제주 4.3사건과 ‘빨갱이’ 낙인은 수십 년에 걸쳐 그녀의 가족을 산산조각 냈고, 20대에 이른 그녀는 결국 한국을 떠나 독일 유학길에 오릅니다. 이름까지 바꾸며 과거와의 단절을 바랐지만, 얼마 못가 어처구니없는 누명과 함께 또다시 조국의 잔혹한 폭력에 짓밟히고 맙니다. 악몽과 착란에 시달리며 20여년을 지낸 조한나는 2015년, 다시 한 번 한국을 떠나고 싶은 간절함에 사로잡힙니다. 가까스로 봉인했던 공포와 분노를 되살아나게 만들 가당찮은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번역한 소설의 원작자인 마르코 라디치의 초대를 받은 조한나는 멀고도 먼 발칸반도를 향해 먹먹한 여정을 떠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녀가 마주친 것은 너무도 낯익은 상처들입니다.
내전과 인종청소로 얼룩진 발칸반도의 비극과 대량학살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제주 4.3사건을 주된 화두로 삼고 있지만, ‘밤이여 오라’는 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한 고발장입니다. 특히 이념, 민족주의, 종교를 앞세운 국가(혹은 그에 준하는 권위)에 의한 거대한 폭력이 어떻게 개개인의 삶을 궤멸시키는지, 또 수십 년이 흘러도 결코 아물지 않을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를 집요하면서도 차분하고 명징한 태도로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중심 이야기는 20여 년 전 참혹한 내전과 인종청소가 벌어졌던 발칸반도 곳곳을 여행하는 조한나의 여정입니다. 자그레브, 비셰그라드, 부코바르 등 가는 곳마다 추모비가 이정표처럼 세워져있는 발칸반도는 거대한 무덤과도 같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한국에서 국가폭력에 의해 심신이 완전히 파괴됐던 조한나에게는 발칸반도의 상처들이 낯설지 않게 다가옵니다. 또한 자신의 가족을 붕괴시킨 제주 4.3사건과 ‘빨갱이’ 낙인을 상기시키는 닮은꼴의 흔적들을 발칸반도 곳곳에서 목격합니다.
“나는 발칸에서 제주를 보았고, 제주에서 다시 발칸을 보고 있었다. 발칸에서 나는 살아서 지옥을 배회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중략) 내가 정말 무서웠던 건 그토록 참혹한 비극이 도무지 낯설지가 않다는 것 때문이었다. (p207~208, ‘작가의 말’ 中)
발칸반도에서 조한나가 만난 사람들은 여전히 20년 전에 얻은 상흔에 갇혀있습니다. 아내와 딸을 잃고 폐인이 된 남자, 군인들의 윤간으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어떻게든 발칸반도를 떠나려는 청년, 내전의 피해자지만 비무장 상태의 적군을 죽인 일로 트라우마를 겪는 남자, 고향은 같지만 종교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운명을 물려받은 연인 등 “살아서 지옥을 배회하고 있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조한나는 때론 그들에게서 ‘일란성 쌍둥이’ 같은 동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은 물론 철저히 망가진 가족과 연인을 떠올리게 만드는 공통점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들여다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탓에 다시금 악몽과 착란에 시달리기 시작한 조한나는 오랫동안 봉인해둔 기억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릅니다.
다소 주제의식이 강한 작품인 건 맞지만, 선언적이지도 않고 교훈적이지도 않은 서사 때문에 오히려 깊은 인상과 여운을 음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조한나의 상처의 근원이 제주 4.3 사건을 비롯하여 한국에서 겪은 국가(혹은 그에 준하는 권위)에 의한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닮은꼴의 상처를 지닌 발칸반도에서의 여정을 통해 간접적으로, 하지만 훨씬 더 피부에 와 닿게 그린 점은 이 작품만의 가장 특별한 미덕입니다. 또 발칸반도의 풍광을 손에 잡힐 듯 사실적으로 그려낸 문장들은 그곳의 비극과 대비되어 더 처연하게 느껴졌고, 흥분이 최고조에 이르는 대목에서조차 서늘함을 유지했던 차분하고 정갈한 문장들은 역설적으로 작품 속 인물들의 공포와 분노를 더 강렬하게 만들었는데, ‘제9회 제주 4·3 평화문학상’은 바로 이런 점들이 높이 평가받은 결과라는 생각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들여다보는 것이 괴로워서 일부러 과거의 참혹한 이야기를 외면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밤이여 오라’는 고통스럽긴 해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는, 그래서 더더욱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에 좀더 다양한 계층의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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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 - 신간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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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로도 불리지만, 어쨌든 나는 국가 간, 인종 간, 민족 간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이다. 전쟁이 없는 환경이 기본 값이라고 여기는 운이 좋은 삶을 살았는데, 역사를 봐도 현실을 봐도 전쟁이 사라진 세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전쟁 선포를 하고 포로규약을 지키고 시작일과 종전일이 명확한 전쟁들 이외에도 삶의 많은 영역들이 전투태세를 방불해 하는 곳들도 아주 많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표현에 이렇게 많은 군사주의적 표현들이 생생할 리가 없다.
한 때 그런 표현을 제외시켜보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으나, 삶은 고군분투, 악전고투, 각개전투를 벌여야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나는 목표를 조준하거나 겨냥하는 태도와 집중을 요구받았다.
자신의 전투를 치르는 일이라면, 명분이 확실한 전쟁이라면 놀랍게도 아주 드물게 솔직한 대결 상황일 수 있다. 가장 악랄한 방식은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대리전을 시키는 짓거리다.
당시 세르비아군에게 내려진 명령은, “스레브레니차 거주민들에게 생존의 희망도 느낄 수 없도록 불안한 상황을 제공할 것!”이었다. 1984년 제주도의 토벌군에게 내려진 명령은, “모조리 다 쓸어버려라”였다.
희생이 필요 없는 안전지대에 머무는 이들, 전쟁은 권력과 자본과 이익 수단을 가진 이들에게 호기로 작용하고 이익을 남긴다. 영문을 모른 채 상대방을 미워하고 죽이고 자신도 죽임을 당하고 혹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은 동원된 피해자들뿐이다.
“살인마들이 정당성을 주장하는 걸 보고 있으면 구역질이 나. 그런 자들의 변명을 지켜보고 있어야 되다니.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되는 거 아니야? 그들에게는 언제 한번 마이크를 줘봤냐고.”
가정폭력의 소식을 거의 매일 듣고, 노동현장에서 사망한 분들의 소식도 계속해서 듣고, 바이러스로 사망한 이들의 숫자도 매일 확인하고, 거짓말과 혐오와 갈라치기로 누가 망하든 누가 죽든 권력을 잡아보자는 문명화한 전투 소식도 듣는다. 그리고 담요와 옷을 보내 도우려던 타국에서 산 채로 불 태워 죽임 당한 이들의 소식도 듣는다.
“우리가 뻔히 알고 있는 진실을 법정에서 가려보겠다는 건데, 애초에 법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학살자들에게 민주적인 법 절차라니, 이럴 땐 민주주의에 회의를 느껴.”
제주의 학살자도 광주의 학살자도 편안하게 장수하다 편안하게 죽은 기막힌 현실을 씹으며 뱉으며... 제주 4.3.의 직접적인 피해자의 후손이자 유족인 오랜 지인과 함께 읽었다. 무섭고 분하고 아팠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전에는 사과도 용서도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섣부른 화해나 용서는, 제스처일 뿐이야. 정작 가해자들은 침묵하거나 발뺌만 하고 있는데 (...)”
내전이란 용어는 올바르지도 정확하지도 않는 표현이다. 두 세력이 힘을 겨루기 위해 전쟁을 발발한 것이 아니다. 빌미는 이유는 핑계는 어떤 것이라도 좋았다. 세르비아에서도 제주도에서도. 종교와 정치의 외피를 쓴 근거도 없는 정체성들. 학살을 위한 변명은 얼마나 엉터리이든 비겁하든 비극적으로 잘 작동했다.
“국가폭력이라니, 나는 그 말도 받아들일 수 없다. 때릴 수도, 침을 뱉을 수도, 그가 가진 꿈과 사랑을 짓밟고 망가뜨릴 수도 없는 국가가 가해자란 말인가? 그렇다면 나의 원한은 어디를 향해야 한단 말이냐.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누구의 설계란 말이냐. 결국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극단의 고독이 나를 집어 삼켰다. 그게 암 덩어리가 되었겠지.“
발칸 반도를 피로 적신 비극도 제주를 피로 덮은 학살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위계와 계급과 빈부가 있는 모든 곳에는 국경으로 가를 수 없는 상처들이 새겨져 있다. 남편은 총에 맞아 죽고 아내는 집단성폭행을 당한 후 태어난 톰, 제주4.3 평화공원의 각명비에 태아로, 신생아로, 이름도 생기기 전에 살해당한 어린 생명들, 아무도 가리지 않는 살해를 명령하는 종교와 이념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 제주 4.3 학살: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에 걸쳐 자행되었다. ** 세르비아/발칸반도의 학살: 강간 캠프까지 만들어 무슬림 여성들을 조직적으로 강간하고 수용소에 감금했다는 증언도 있다.
나중을 살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는데, 나중에, 나중에, 라는 답변만 들린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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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발표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사상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p.110)
<밤이여 오라>는 제 9회 4.3평화문학상 수상작으로 내전과 인종청소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온 발칸반도와 한국 현대사의 국가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생겨나고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아픈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고통을 남긴다.
'별일 아닌 것이 의식하는 순간 그것은 별일이 된다'처럼 우리는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 아직 끝나지 않는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되풀이되는 현실들을 지금까지도 볼 수밖에 없다. 언제쯤이면 끝날까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과연 그것은 끝이 있을까?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존재한다면, 더욱 대답하기 힘들 것이다. 자신이 태어나고 싶어서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이름이 아닌... 그리고 자신의 나라도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에...
한국 전쟁의 시작과 끝에서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기회는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또한 분단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하는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분단이라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 분단을 초래한 기득권층의 욕심으로 우리는 분단의 아픔과 동시에 반토막 난 조그만 나라에서도 서로 편을 가르고 싸우게 된다. 그리고 그 싸움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정말 궁금한 것은 대부분 베일에 싸여 있으니까. 하지만 정말 그럴까?" (p.30)
만약에... 이방인으로... 다른 나라에서... 자신의 나라에서 일어난 일을 듣게 된다면... 당신의 기분은 어떨까?
그리고 그 사건을 또 다른 이방인에게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밤이여 오라>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으며, 과연 지금 우리는 바른 길로 가고 있는가를 묻는 듯 하다. 또한 같은 민족끼리 편을 가르고 싸우는 과정 속에서 서로를 죽이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죄책감을 느끼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수없이 많은 비극의 역사들중에서 <밤이여 오라>를 통해서 제주 4.3 사건에 대해 확실히 알아두고자 한다.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서는 '제주 4.3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복합적인 원인들이 모여 사건이 발생하였지만, 8년이라는 시간동안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희생된 사건이다. 정치적 이념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들의 억울함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날 우리가 죽인 것은 무엇인가. 사람인가, 짐승인가, 두건을 쓴 신(神)인가. 너는 부끄러운 죄인의 자손인가. 총구에서 피어오르던 연기의 나신을 본다. 빠져나온 칼날이 다시 내 몸에 들어온다. 죽음에 끌려가던 행렬이 죽음을 끌고 간다.
정의는 비겁했고, 죽음은 달콤했다. 기억은 처참했고, 영혼은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 책 속에서 -
리딩 투데이 지원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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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대적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자는 어떤 모습일까. 제주 4.3평화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이끌리 듯 책장을 펼쳐들었고 그곳에서 만난 한나는 지극히 한국적이라 서러웠고 모든 걸 버리고 떠날까 두려웠습니다. 처음 60쪽까지 읽는 동안 추호의 의심도 없이 여행과 전쟁에 대한 에세이라고 여기며 이렇게 크나큰 아픔과 절망을 찾아 여행을 가는 이 사람은 뭘까...왜일까를 거듭 고민을 하다 마침내 장편소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냅니다. 2015년의 가을, 자그레브행 버스에 올라타는 오십대를 바라보는 한국의 번역가, 그녀 조한나가 가슴에 담고 있던 20년 전의 그날들을 이야기 합니다. 그녀가 다시 유럽에 오게 된 이유는 독일어로 소설을 쓰는 마르코 라디치 덕분 입니다. 독일계 유대인 어머니와 크로아티아인 아버지를 둔 마르코의 소설을 한국에 출판하게 되어 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작자와 번역자의 관계일 뿐이었지만 특이하게도 마르코는 톈진에서 열리는 중국번역문학원 포럼에 동반 초청을 함으로써 만남의 기회가 되었고 농담처럼 건넨 그의 고향집이 있는 프라하 자그레브로의 초대에 응하게 될 줄 그땐 몰랐습니다. 그에게 자그레브의 뜻을 물어보니 "세 가지 의미가 있어. 하나는 그레이브(grave)가 자그레브가 된 거야. 또 하나는 물을 찾아서 땅을 판다는 뜻, 그리고 언덕이라는 의미."(21쪽) 라고 말합니다. 그레이브...무덤...으로의 초대였고 마르코의 사소한 행동들은 옛 기억속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20년 전의 그날들과 함께. 크로아티아가 갑자기 여행지로 뜨기 시작한 그즈음에 관광지로만 훝어보던 얉은 지식 위로 유고슬라비아 내전과 유태인들, 난민들, 코소보를 두고 세르비아와 알바니아 간의 싸움-폭력사태에 이어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에 이르기까지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밤이면 잠들지 못하는 마르코처럼. 한나는 변이숙이라는 이름과 함께 가족을 버리고 독일로 유학을 떠났으나 또 도움을 요청하는 학교 선배 기태를 무시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무시하지 못한 댓가로 사람을 잃고 정체성도 잃고 국가권력에 의해 와해 된 정신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에 둘러 쌓인 과거의 망령은 여자가 독일로 유학을 갔었다는 사실에, 약혼녀가 있는 사람과 사랑을 했다는 이유로 함부로 취급당해도 되는 사람으로 낙인을 찍고 법의 이름으로 죄를 씌워 감옥에 넣어 버렸습니다. 국가권력의 날카로운 칼날은 전쟁 중에도 전쟁이 끝난 후에도 거듭 변신을 하며 자유롭던 청년들을, 자라나는 소년들을, 사랑스러운 소녀들을 사상범으로 간첩으로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엄마의 성을 따 '조한나'가 된 화자를 덮쳤던 비극과 시대가 낳은 아픔,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내딛는 발걸음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먹먹함 너머로 제주의 푸른 바다가 밀려드는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사그라든 생명들, 비탄의 목소리들을 외면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아름다운 풍광 아래 잠들어 있는 비극이 아직도 규명 되지 않았으며 이름조차 찾지 못해 비석도 없다는 것이 쓸쓸하게 다가옵니다. 직접 읽어보시길, 잊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 찾으시길 바래 봅니다. *출판사 제공도서 #밤이여오라 #이성아 #장편소설 #은행나무 #제주43평화문학상수상작 #책추천 #책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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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지원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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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아닌 것이 의식하는 순간 그것은 별일이 된다'처럼 우리는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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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지원받은 도서입니다.
아. 한국전쟁이 안 날 수도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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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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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지원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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