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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者)도 아닌 ‘목사 주제에’ 웬 《금강경》 읽기? “평소에 존경하던 이현주 목사님이 《기독교인이 읽는 금강경》을 출판한다기에 기쁜 마음으로” 썼다는 이 글에서 법륜 스님은, “성경 공부를 마쳤다는 이가 불경을 보고 그 뜻을 모른다면 어찌 성경을 제대로 안다 하겠으며, 불경 공부를 해서 깨쳤다는 이가 성경을 보고 그 뜻을 모른다면 어찌 그가 진리를 깨쳤다고 할 수 있겠느냐” 대체 뭔 얘기를 했길래? ‘기독교인이 읽은 금강경’을 통해 종교와 나의 종교관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 하지만, ‘나는 기독교인이다.’ 라고 자신있게 말하지 않고, 말하지 못한다. 우리집안은 불교를 한 종교로 여기고 믿기에 기독교는 그야말로 낯설고, 먼나라 코쟁이 종교로 치부하고 극단적으로 거부하기에, 은연중에 불교에 반감과 괴리감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과연 한 종교의 교리나 말씀만이 옳은 것인가? 종교란 무엇인가?'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의문을 품은 채 금강경을 읽게 됐다. 불교 경전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에 금강경에 대한 정보를 찾아 정리해 보았다.
"금강(金剛)"은 깨달은 지덕이 굳고 단단하여 모든 번뇌를 깨뜨릴 수 있음을 뜻하고, "반야(般若)"는 산스크리스트어 프라즈나(prajna)를 한역한 것으로, "분별이나 망상을 떠나 깨달음과 참모습을 환히 아는 지혜"를 뜻한다. "바라밀(波羅蜜)"은 ‘바라밀다’의 준말으로, 역시 산스크리트어에서 한역된 것이다. ‘현실의 나고 죽는 차안(이 언덕:此岸)을 건너 열반의 피안(저편 언덕:彼岸)에 이른다[도피안]’는 뜻으로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보살 수행을 이르며, "경(經)"은 견성(見性)에 이르는 길(道路), 방법이다. 따라서, "저편 언덕에 이르게 하는 금강석 같은 지혜를 담은 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금강’과 ‘지혜’란 강력한 이미지는 실체에 머무르려는 우리들의 인식을 타파하는 투철한 부정 정신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자기에 대한 부정과 존재에 대한 부정 위에서 비로소 커다란 자유를 성취할 수 있다. 금강경이 유정(有情)들의 존재방식에 대해 자세히 해명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내용상, 부처가 인도 사위국을 배경으로 제자 수보리를 위해 설한 문답형식의 경전이다.
제자 수보리가 세존에게 하는 첫 물음은 다음과 같다 "선남자 선여인이 아누다라삼먁삼보리심(무상정등정각: 無上正等正覺)을 낼진대 어디에서 마땅히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무릎 꿇릴 수 있겠습니까?".... 이는 “최상의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을 낸 사람이 그 마음을 어디에 두며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가?” 라는 질문임을 책의 해설을 통해 알 수 있다. 불교에서 ‘도에 트기’위해서는 저런 질문에 적절한 답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최상의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을 갖는 것, 그러한 마음을 어떻게 두고 다스릴 것인가 하는 것. 바르게 살고자 하는 것, 그렇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삶을 실천함으로써 삶에 충만감을 느끼고 현실에 충실할 수 있는 길을 이 책의 입구에서 묻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이건 또 뭔 부처님 도 닦는 소리인가?’ 하는데, 생각해보면 역시 ‘부처님 도 닦는 소리’였다. 역설의 말들이다. 역석의 철학. 철학의 역설. 역설은 어떤 모든 종교적 가르침에나 있는 것 같다. 그런 역설적 표현이 보다 더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나타낼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어떤 하나와 정반대가 부정되면서 그 둘은 긍정이 되고, 하나가 부정되고 정반대의 것이 긍정되기도 해서 ‘아닌 것’은 곧, ‘그런 것, 그러한 것’.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역설은 마치 어느 면이 안쪽 면이고 바깥 면이라고 딱 잘라 단정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느껴진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그들이 받드는 존재의 고귀함과 보통 사람과 다른 비범하고 뛰어난 점을 계속적으로 보여 주려 하고 강조한다. 그래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알게 모르게 받드는 존재를 계속 추구하지만, 결국 위와 아래의 존재로 보이지 않는 차이와 벽이 생긴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초기 불교의 가르침을 옮겨담은 이 책은 어떠한 종교를 믿고 그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 해당하는 신적 존재의 지배 아래에 있거나, 개인이 종교에 ‘귀속’ 되거나 ‘갇히게 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고 해석해본다.
내가 금강경을 통해 불교를 멀게 느끼지 않았듯이 불자들은 성경을 통해 기독교를 만나고 하느님의 말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든 기독교든 종교는 나름의 형태로 역사와 세계관을 가졌지만, 모든 종교는 세계의 모든 것을 꿰뚫는 진리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고 보다 높은 가치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추구해야할 것을 알려주는 가르침이자 현자들의 친절한 인도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리 생각하니 제(祭)에 올리는 각기 다른 과일과 같이 콧대높고 각각의 자리에서 번쩍이며 근엄을 유지하기에 여념이 없어 보이던 종교가 색색의 꽂이전으로 느껴졌다. 이 꽂이전들이 내게 말한다. 종교란 현세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있는 시간과 자리에서 보다 충실하고 옳게 여기는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자 힘이 되는 것이라고. 그래서 종교는 아름다운 것이며 떠받들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금강경에 거의 모든 질문-답변(말씀)의 패턴을 '역설'이란 단어로 일축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런 역설은 어떤 관념과 개념에 주착하거나 붙들리지 않도록 일깨워준다. 사람이란 대개 모든 것을 자신의 가치관이나 주관으로 먼저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는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을 알고, 경계하도록 한다. 이런 경계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관대로 판단하고 결정하여 과오를 저지르는 경우도 잦다. 하지만, 오늘날에 수많은 사람들의 무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 말씀들은 허황된 느낌도 든다. 인터넷이 널리 이용되면서 정보는 흘러넘치고, 사이버 공간뿐만 아닌, 현실의 공간에도 온갖 정보가 흘러 넘친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가치관이나 관념을 보다 분명하게 갖고 비판적인 눈과 귀와 입을 갖지 않고서는 자신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물론, 어떤 주관에 주착하지 않고 존중하여 생각의 폭을 넓히는 것은 또 별개의 사항일 것이다. 자신의 주관을 갖는 것과 다른 것들에 대한 견해와 의견을 존중하는 것은 동시에 행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 의견을 있는대로 다 수긍하는 데 역점을 두다 종국에 더 큰 혼란에 진절머리가 나서 귀와 눈을 틀어막는 방관자나 회피자가 되어선 안될 일이다. (한마디로 이 책을 감명깊게 읽었긴 하지만 부처처럼 머리깎고 보리수아래서 도닦고 싶진 않다는 말과 일맥상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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