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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총점 종이책
거스름돈에 대한 생각 ㅡ 나희덕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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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거스름돈에 대한 생각나희덕 시 ㅡ삶은 왜내가 던진 돌멩이가 아니라그것이 일으킨 물무늬로서 오는 것이며한줄기 빛이 아니라그 그림자로서 오는 것일까왜 거스름돈으로서 주어지는 것일까거슬러 받은 오늘 하루 ,몇개의 동전이 주머니에서 쩔렁거린다종소리처럼 아프게 나를 깨우며삶을 받은 것은무언가 지불했기 때문이다( 본문 81 쪽 )나희덕 시집, 그말이 잎을 물들였다 중에서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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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름돈에 대한 생각

나희덕 시



삶은 왜
내가 던진 돌멩이가 아니라
그것이 일으킨 물무늬로서 오는 것이며
한줄기 빛이 아니라
그 그림자로서 오는 것일까

왜 거스름돈으로서 주어지는 것일까

거슬러 받은 오늘 하루 ,
몇개의 동전이 주머니에서 쩔렁거린다
종소리처럼 아프게 나를 깨우며

삶을 받은 것은
무언가 지불했기 때문이다

( 본문 81 쪽 )

나희덕 시집, 그말이 잎을 물들였다 중에서 ㅡ



장자의 대종사가 등장하는 시를 찾다가 그의 시집 전체를 다 뒤진다 .

뒤진 김에 , 아무 시라도 좋았을테지만  ㅡ 거슬러 받은 오늘 하루 , 라는 말이

풀린 실밥에 손이 걸리듯 툭 걸렸다 .
대종사가 나오는 시는 ' 마른 물고기처럼 ' 였고

이 시집이 아닌 ㅡ 사라진 손바닥 ㅡ 였다 .
나는 이 시를 거슬러 받았나보다 . 그의 시집 몇권에서 ...




y*****7 2018.03.09. 신고 공감 7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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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내려와서 술 한 잔 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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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위의 잠                          나희덕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 들었습니다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그 못이 아니였다면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눈이 뜨겁도록 올려다 봅니다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한 사내
"아버지, 내려와서 술 한 잔 하실래요?" 내용보기

 못 위의 잠

                          나희덕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 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였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 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 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 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아빠가 된 지 5개월 째. 아직 그 무게를 실감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 시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아들로서 아비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짐작해 볼 수 밖에. 아이를 낳아놓은 만큼 집을 확장할 능력은 없고, 그렇다고 새끼들을 이슬 맞게 재울 순 없으니 둥지 밖으로 나와 밤을 지샐 참인데, 그나마 엉덩이라도 대고 졸기라도 할 수 있을 못이 마침 둥지 옆에 박혀 있다. 운이 좋다.

 

십수년 전, 수능시험을 치렀던 그 해. 시험일이 며칠 지나지 않아 우리 집엔 드라마에서나 보던 '빨간 딱지'가 붙었다. 시험을 제법 잘 봤으니 당연히 명문대에 입학할 거란 부푼 기대는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곧장 바뀌었지만, 어디론가 사라진 엄마와 언제나처럼 일찍 나가서 늦게 들어오시는 아버지에겐 그 원망을 돌릴 기회조차 없었다. 아버지는 어디서 밤을 지샜던 건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마침 그때 아버지 역시 이십년을 다닌 직장에서 해고당했고 몇 푼 안되는 퇴직금도 빚잔치로 날아가버렸다.

 

쉽게 감당하기 힘든 그 사실들을 노모와 아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던 아버지는 꽤 오랜 시간을 도서관에 위장 취업하며 못 위의 잠을 외롭게 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운좋게 한 염색공단에서 꽤 큰 규모로 돌아가는 공장에 취업하게 되면서 주야간 2교대의 삶을 또 10년 넘게 살고 계시니 못 위에서 시작한 잠은 쉽게 떨쳐지지가 않는 놈인가보다.

 

시 속에서 역시 실직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비는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일 나갔던 아내를 기다린다. 아버지라는 이름에 요구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아비는 아이들을 엄마의 손에 넘겨주고선 좁은 골목을 핑계로 대며 뒤로 몇 발 떨어져 걷는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의 시적 화자 역시 못 위에서 자고 있는가보다. 시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못 위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아버지들에게 위로의 술 한 잔 건네고 싶다.

s*************k 2015.08.03.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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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들은 어두워져서야
"사랑하는 것들은 어두워져서야" 내용보기
아이를 놀이방 또는 유치원에 맡기고 출근해야 하는 맞벌이부부의 아침은 분주하다. 아이가 말을 안듣고 꼼지락거리면 목소리가 높아지기 마련이고, 마침내 아이의 울음이 터져나오게 된다. 간신히 달래면, "엄마, 오늘은 안 가면 안돼?"라고 아이는 눈물어린 애원을 한다. 그 애원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어머니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희덕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그 말이 잎을 물
"사랑하는 것들은 어두워져서야" 내용보기
아이를 놀이방 또는 유치원에 맡기고 출근해야 하는 맞벌이부부의 아침은 분주하다. 아이가 말을 안듣고 꼼지락거리면 목소리가 높아지기 마련이고, 마침내 아이의 울음이 터져나오게 된다. 간신히 달래면, "엄마, 오늘은 안 가면 안돼?"라고 아이는 눈물어린 애원을 한다. 그 애원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어머니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희덕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에서 우리는 그러한 아침의 풍경과 만난다. 시인은 칭얼거리는 아이의 팔을 끌어당기며 "이따 저녁에 만나려면 가서 잘 놀아야지"라고 달랜다. '아침부터 아이에게 저녁을 가르'쳐야 하는 이 풍경은 눈물겹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아이를 남에게 맡겨야 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다른 것들에 더욱 매달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그게 삶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들은 어두워져서야/ 이부자리에 팔과 다리를 섞을 수 있다'는 이 진실 앞에서 시인은 '문득 이 눈부신 햇살을 버리고 싶다.' 시인의 이러한 희망은 저물 무렵의 어둠과 그늘과 쓸쓸함에 바쳐진 여러 시편들로 구체화되고 있다. 시인이 눈부신 대낮의 햇살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삶이 '너무 맑게만 살아온 삶'이라는 사실의 자각과 '큰 빛을 보아버린 두 눈은/ 그 빛에 멀어서 더듬거려야' 한다는 진실의 깨달음에 연유한다(「흐린 날에는」). 시인은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지는 못했지만,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항상 바르고 착하기만 하였다. 첫 시집 『뿌리에게』는 그러한 곧은 신념과 따스한 모성으로 어긋나고 병든 삶과 세상을 바로 잡고 치유해 보려는 열정의 소산이었다. 그런데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선에 의문에 던지고 자신의 열정에 제동을 건다. 그것은 시인이 기대었던 신념인 이데올로기가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시인은 '모든 것이 무너지고 사라졌다고 믿어버리는 시대에, 그 썰물 앞에 시인이 끝내 디디고 서야 할 개펄은 얼마나 넓은 것인가'라며 막막한 심경의 일단을 후기에 적고 있다. 이 막막함 속에서 시인은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序詩」)고 자조한다. 시인에게 이러한 자각은 고통스럽겠지만, 시인은 '폭포여, 나를 내리쳐라/ 너의 매를 종일 맞겠다'(「풀포기의 노래」)며 기꺼이 이를 감내한다.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견디고 있는 빗방울처럼(「찬비 내리고」) 시인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내가 이렇게 고통스럽다면 '네 몸은 얼마나 또 아플 것이냐'(「풀포기의 노래」)라는 사실을 이제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희덕 시인에게 큰 변화다. 따뜻한 삶과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이제 접고 삶과 세상에 깃든 어둠과 그늘과 쓸쓸함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수락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절망의 아가리 속으로 막 들어서는 순간조차/ 고개를 돌리지 않고 지켜보아야 하는/ 참담함, 이 느리고도 쓸쓸한 대면'을 기꺼이 수락하며, '어서 나를 찌르라고''천천히 제 옆구리를 보여'주는 기차(삶)의 허(虛)를 외면하지 않고 응시한다(「허」). 시인은 이제 '어둠이 빛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나무의 나이테를/ 내 속에도 둥글게 새겨넣으며/ 가만 가만히 거기 서 있으려 한다'(「그런 저녁이 있다」). 시인은 이제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아프지도 못'한다(「찬비 내리고」). '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어둠 하나/ 옹이로 박힐 때까지'(「그런 저녁이 있다」) 아프다고 말하지 않고 견디어 내면 그의 시는 마침내 '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 향기'처럼 무르익는다. 그렇지만 시인은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라고 말한다(「찬비 내리고」). 이 절제와 조심스러움을 시인은 '당신이 힘드실까봐'라고 변명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아직 시인이 자신의 향기(시)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시인은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멀리서 밝혀져오는 불빛'에 안도하지만(「산속에서」), 아직 얼마나 가야할지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가게 만드는 이 '먼 곳의 불빛'이란(「산속에서」) 결국 삶에 대한 시인의 전망이 될 터인데, 아직은 그 모습이 희미하고 불분명해 보인다. 시인은 「거스름돈에 대한 생각」이라는 시에서 '삶은 왜/ 내가 던진 돌멩이가 아니라/ 그것이 일으킨 물무늬로서 오는 것이며/ 한줄기 빛이 아니라/ 그 그림자로서 오는 것일까'라고 질문한다. 물론 시인은 그 답을 알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다시 질문을 던진다. 삶은 왜 '거스름돈으로서 주어지는 것일까'라고. 이어서 내가 '삶을 받은 것은/ 무언가 지불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다. 즉 삶은 내가 삶보다 더 가치있는 무언가를 지불하고 받은 거스름돈이라는 것이다. 시인이 무엇을 지불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 거스름돈(삶)이 아프게 나를 깨운다는 진술로 추측컨대, 그것은 삶보다 소중하게 여겨지는 정신적 가치, 나에게 일깨움을 주는 어떤 가치로 여겨진다.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추정해본다. 시인은 삶과 세계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시세계를 열었었다. 그 사랑은 잘못된 삶과 병든 세계를 바로잡고 치유하려는 곧은 이념이자 따스한 모성이었다. 그러나 이념은 무너졌고 모성은 부정되었다. 시인이 사랑을 지불하고 받은 것은 그 사랑보다는 항상 부족한 그래서 거스름돈일 수밖에 없는 삶일 뿐이었다. 사랑이 삶과 등가를 이루지 못할 때, 사랑은 치욕이 된다. 그래서 시인은 '결국 치욕과 사랑은 하나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라고 고백한다(「나 서른이 되면」). 치욕이 된 사랑의 속도는 '솔잎혹파리가 숲을 휩쓰는 것과 같'아서 '한 순간인 듯 한 계절인 듯' 솔숲(삶)을 점령해 버린다(「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병든 솔숲이 '멀리서 보면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단풍이 든 것만 같아/ 그 미친 빛마저 곱'게 보이는 것은 그것이 치욕에 물든 삶이자 동시에 사랑에 물든 삶이기 때문이다. 이제 시인은 '흐린 날 속을 오래오래 걸어야'하며 '서로 뒤엉켜 찢겨지고 있는/ 저 잎새의 날들을 넘어야 한다'(「흐린 날에는」). 어두워져서야 만나게 되는 사랑하는 것들을 위하여 시인은 저녁을 향해 걷고 있는 것이

[인상깊은구절]
저녁을 위하여 “엄마, 천천히 가요.” 아이는 잠이 덜 깬 얼굴로 칭얼거린다. 그 팔을 끌어당기면서 아침부터 나는 아이에게 저녁을 가르친다. 기다림을, 참으라는 것을 가르친다. “자, 착하지? 조금만 가면 돼. 이따 저녁에 만나려면 가서 잘 놀아야지.” 마음이 급한 내 팔에 끌려올 때마다 아이의 팔이 조금씩 늘어난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아이를 남에게 맡겨야 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다른 것들에 더욱 매달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그게 삶이라는 것을 모질게도 가르치려는 것일까. 해종일 잘 견디어야 저녁이 온다고, 사랑하는 것들은 어두워져서야 이부자리에 팔과 다리를 섞을 수 있다고 모든 아침은 우리에게 말한다. 오늘은 저도 발꿈치가 아픈지 막무가내로 울면서 절름거린다. “자, 착하지?” 아이의 눈가를 훔쳐주다가 나는 문득 이 눈부신 햇살을 버리고 싶다.
c*****t 2002.06.13.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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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함의 재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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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잘 느끼는 사람이라던가. 재능 있는 시인들은 분명 민감하고 예민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남들보다 잘 느껴서 평범한 것도 평범하지 않게 받아들인다. 오버하고 과장하고 엄살부리는 '능력'이 그들에게는 있다. 그들의 엄살이 하나의 '능력'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엄살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도 하나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이 '오버'의 기술자들에게는, 예민함도 하나의 재능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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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잘 느끼는 사람이라던가. 재능 있는 시인들은 분명 민감하고 예민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남들보다 잘 느껴서 평범한 것도 평범하지 않게 받아들인다. 오버하고 과장하고 엄살부리는 '능력'이 그들에게는 있다. 그들의 엄살이 하나의 '능력'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엄살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도 하나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이 '오버'의 기술자들에게는, 예민함도 하나의 재능이고, 실력이다.

아름답게 엄살부리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궁금한 분들께서는 나희덕의 두 번째 시집을 펼쳐 보시면 되겠다. 여기에 실린 시들은 예민함이 어떤 경지에 이르렀을 때에만 겨우 쓰일 수 있는 시들이다. 예민하다는 것은 그 예(銳) 자에서도 짐작되듯 날카롭고 섬세하다는 것이고, 그렇게 예리한 촉수는 뭉툭하고 무딘 끝이 들어갈 수 없는 곳까지도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 가볍고 뾰족해야만 들어가볼 수 있는 미묘한 틈새들이 있다. 삶의 어떤 틈새들은 날카롭고 예민한 자에게만 그 사이를 들여다 볼 것을 허락한다. 예민함의 재능을 타고난, 혹은 오랜 기간 자신의 예민함을 피땀으로 갈고닦은 이 '뾰족한' 이들은,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발견하고도 들어가지 못하는 아주 미세한 균열 사이를 들락날락하는 이들이다. 그 주름의 틈새를 만져볼 수 있을 만큼 뾰족해지는 데 성공한 이들이다. 그런 이들을 우리는 시인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 창문은 내 발길 아래 있다.

지하의 방 한 칸,

세상의 볕이 잠시 모였다 흩어지고

별조차 내려오지 않는 창문에

달개비꽃 먼지를 뒤집어쓰고 피어난다.

버석거리는 밥술과

자욱한 꿈자리, 창에 들이친 흙탕물은

지나가던 내 발걸음 때문이었나.

한때 가난은 나의 것이기도 했는데

가난조차 잃어버린 발길이

함부로 내딛다가 멈춘 자리

지하의 방 한 칸,

오랜만에 불기를 넣었는지

낮은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탄가스가

서성거리는 내 발목을 휘감는다.

가난의 독기는

이제 땅 위의 목숨에게로 흘러간다.

달개비꽃

파랗게 질린 입술로 떨고 있다.

- 50~51면, 「달개비꽃 피는 창문」 전문

 

이 시인이 '가난'이라는 소재를 어떻게 다루는지 보라. 이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는 빈과 부를, 가난한 삶과 넉넉한 삶을 단순하게 비교하지 않는다.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시인의 예민함은 부와 가난 사이의 작은 균열 하나를 파고든다.

우선 지상의 존재들이 반지하의 작은 방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거리의 소음과 먼지는 "내 발길 아래 있"는 창문을 통해 방안으로 당연한 듯 흘러들어갈 것이다. "버석거리는 밥술"이 아프게 이 사실을 환기한다. 화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창에 들이친 흙탕물은/지나가던 내 발걸음 때문이었나." 요컨대 지상에서 벌어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들은 지하의 존재에게 얼마든지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지상의 발길들은 이 시의 표현대로 "함부로 내딛"은 발길들이다.

그러나 이 사실에서 놀라울 것은 없다. 이 시가 진정 섬세해지는 대목은 바로 "가난의 독기는/이제 땅 위의 목숨에게로 흘러간다"인데, 여기에는 앞의 것과는 역방향의 폭력이 나타난다. 지상이 지하에게 가하는 폭력이 아니라 지하가 지상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추위를 견디다 못해 "오랜만에 불기를 넣"은 지하방. 제대로 된 보일러조차 갖추지 못한 곳에서 살기 위해 겨우 때운 불이었을 텐데, 이 연탄가스는 거리로 흘러나와 사람들의 숨을 막는다. 그 유독한 가스가 "가난의 독기"가 되어 "땅 위의 목숨들"을 위협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상/지하로 구별된 빈과 부의 양측은 이제 서로에게 위해를 가한다. 그간 어느 한 쪽만 고통받거나, 어느 한 쪽만 일방적으로 악하게 그려져왔던 빈과 부의 관계가 재설정되고, 이제 서로는 서로를 죽음으로 내몬다. 지상은 저도 모르는 새에 지하에게 폭력을 행하고, 지하는 제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지상에게 폭력을 행한다. 그리고 이 비정한 싸움을, 지상도 지하도 아닌 곳에 핀 "달개비꽃"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예민하다는 것은, 그리고 섬세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세상을 뭉툭하게 봐서는 저 슬픈 싸움에 질려버린 달개비꽃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섬세한 눈과 손으로 "달개비꽃"을 포착할 때, 이 시가 그의 예민한 재능이 낳은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더 있다.

아마도 누구든지 이 시 「달개비꽃 피는 창문」를 읽으면서 비슷한 풍경을 떠올렸을 것 같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어쩌면 나희덕의 이 시를 읽고서 구상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이 두 작품은 다루는 소재도 물론 닮았으나 그 소재들을 다루는 방식도 닮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지하의 가족들이 지상의 가족들을 죽이는 씬은, 이 시에서 지하가 지상에게 폭력을 가하는 모습과 통한다. 이를 나희덕 식으로 말하면 "가난의 독기"가 "땅 위의 목숨에게로 흘러"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폭력을 당할 뿐 아니라 폭력을 가하는 가난. 한 편의 시와 한 편의 영화는 섬세함과 예민함을 매개로 비슷한 지점에서 만난다.

시가 할 수 있는 일과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크게 다르지 않겠다. 좋은 시든 좋은 영화든, 예민한 사람이 만들 수 있다. 사람이 과연 어디까지 예민해질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이 그 예민함의 여정에서 가능한 가장 멀리까지 가게 되기를 바란다. 이미 날카로운 그들이지만 더 날카로워지기를 기대한다. 위에서 말했듯, 우리로 하여금 그런 기대를 품게 만드는 이들을 시인이라고 부르기로 했다면, 「달개비꽃 피는 창문」을 쓴 나희덕 선생도 시인이고 『기생충』을 찍은 봉준호 감독도 시인이겠다. 두 시인의 작품들은 우리를 한층 더 예민해지게 만들 것이다.

 

k********n 2022.05.15.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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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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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 것을 보는 어미 마음         어디서 나왔을까 깊은 산길   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새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맑은 눈빛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고집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어린것들은   내 앞에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   나를 어미라 부른다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   젖이 차올라 겨드랑이까지 찡해오면   지금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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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린 것을 보는 어미 마음 

 

 

 

  어디서 나왔을까 깊은 산길

  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새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맑은 눈빛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고집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어린것들은

  내 앞에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

  나를 어미라 부른다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

  젖이 차올라 겨드랑이까지 찡해오면

  지금쯤 내 어린것은

  얼마나 젖이 그리울까

  울면서 젖을 짜버리던 생각이 문득 난다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난만한 그 눈동자,

  너를 떠나서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고

  갈 수도 없다고

  나는 오르던 산길을 내려오고 만다

  하, 물웅덩이에는 무사한 송사리떼

  - 나희덕, 어린 것

 

 

어미는 어린것의 기원이다. 어미가 없으면 어린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어린것이 어미의 기원이 되는 역설이 생명의 세계에서는 일어난다. 어린것으로 하여 어미는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상황을 수없이 경험한다. 나희덕은 이러한 어미의 마음을 깊은 산길에서 만난 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새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라는 시적 상황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다람쥐새끼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고집할 수 없다라고 시인은 고백한다. 다람쥐새끼는 지금 무방비 상태로 시인을 바라본다. 어미의 젖을 문 아기처럼 다람쥐새끼는 바라보는행위만으로 어미의 마음을 울린다. 어린것의 난만한 그 눈동자는 어미의 굳었던 젖을 돌게 한다. 어미라는 존재의 생명성을 들뜨게 하는 어린것의 눈부신 형상은 나희덕의 시에 새겨진 모성의 맥락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하여 깊은 산길을 오르던 시인은 다람쥐새끼와 마주침으로써 오르던 산길을 내려오고 만다”. 다람쥐새끼의 난만한 눈동자가 어미의 젖을 돌게 만들었으니, 어미는 젖을 물릴 아기를 찾아 산을 내려가는 것이다. 이유가 있어 어미는 깊은 산을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도망갈 생각조차 없이 바라보는 다람쥐새끼의 시선을 어미는 차마(!) 외면할 수 없다. 다람쥐새끼의 눈망울은 어미의 젖을 그리워하는 아이의 눈망울과 자연스럽게 겹친다. 젖이 겨드랑이까지 차오른다. “울면서 젖을 짜버리던 생각에 시인은 서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내려오고 만다는 서술어가 어미의 마음을 에둘러 드러낸다. 오르던 산길을 내려오는 건 어미의 운명이다. 새끼를 떠나서는 아무데도 갈 수 없는 게 거역할 수 없는 어미의 운명이라는 것을 시인은 다람쥐새끼의 난만한 눈동자를 통해 다시금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나희덕의 어린것에 나타나는 이러한 어미의 형상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시와 비평의 경계 지점에서 나의 생각은 흔들리고 있다. 여성과 모성의 차이를 들어 어미의 삶에 드리워진 가부장제의 논리를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인이 이 점을 모를 리는 없다. 모성이 여성의 삶을 가두는 틀이라는 이성의 시각을, 시인은 다람쥐새끼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감각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여성이 이성의 논리와 결부된다면, 모성은 감각의 논리와 이어진다. 다람쥐새끼를 보고 시인은 울면서 젖을 짜버리던기억을 감각적으로 떠올린다. 어린것에 대한 기억은 이성의 판단으로 이루어지는 희생의식과 연관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린것은 이미 어미의 몸에 감각으로 새겨져 있다. 다람쥐새끼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어미-시인의 몸은 젖을 품은 어미의 몸으로 화한다. 어미의 젖을 앞에 두고 새끼는 도망치지 않는다. 당연히 젖을 물릴 새끼를 두고 어미가 계속해서 깊은 산길을 걸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린 것은 어미와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나는 아무것도 고집할 수 없다라는 시적 진술은 어미가 곧 어린것이 되는 세계의 운명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여성모성의 문제는 여전히 논란거리로 회자되고 있지만, 나희덕의 이 시를 보면 여성과는 다른 모성의 감각이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이러한 모성의 감각을 가부장제의 논리로 합리화하여 여성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해 온 이성의 역사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린것들의 죽음이 만연된 이 시대에 여성과 남성의 성적 논리를 뛰어넘는 모성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는 여전히 필요해 보인다. 다람쥐새끼의 난만한 눈동자를 지켜줄 존재는 결국 어미밖에 없지 않은가. 아가의 고통스런 비명에 무관심한 세상이라면, 그 세상은 그 자체로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닐까. 어린것을 향한 나희덕의 모성-감각이 그래서 더욱 더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혹시나 하나만 더 언급한다. 이 글에서 말하는 모성의 맥락을 생물학적 여성으로 한정해서 읽지 않았으면 한다. 부성 또한 모성과 다르지 않다. 아니 모성 속에 부성이 들어가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생물학적 남성에게서도 모성의 맥락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2. 귀뚜라미 소리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 나희덕, 귀뚜라미

 

 

 

여름이다. 매미 소리가 높은 가지를 흔들며 허공에 울린다. 온 도시를 점령한 매미 소리에 묻혀 다른 소리들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다고 다른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희덕은 매미 소리에 묻혀 존재감을 상실한 소리에 주목한다. 지금은 들리지 않는 소리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소리는 매미 소리처럼 온 도시를 뒤덮을 수도 있다. 매미 소리라고 처음부터 이 도시를 지배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7일의 울음을 위해 7년의 세월을 견딘다는 이야기가 있듯, 매미 또한 제 소리를 내기 위해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왔다. 매미 소리는 매미가 보내온 삶의 절실함을 표현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소리이지만, 매미에게 소리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증명하는 매개이다.

 

그러니 이 시에 나오는 매미 소리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이 있었기에 귀뚜라미가 제 소리를 내는 가을이 올 수 있다. 매미가 우는 계절에 귀뚜라미는 지하도 콘크리트 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울고 있지만, 매미의 계절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귀뚜라미는 지하에서 나와 지상에 제 소리를 마음껏 퍼뜨릴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귀뚜라미가 가을에 제 소리를 내려면 매미 소리가 울리는 여름을 지하도 콘크리트 벽의 좁은 틈에서 견뎌야 한다는 대목에 있다.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그곳에서 귀뚜라미는 귀뚜르르 뚜르르누군가에게 타전소리를 보낸다. 지금은 그 타전소리를 받을 사람이 없지만, 그 소리는 시간이 흐르면 누군가의 귀를 울리게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귀뚜라미 노래가 매미 소리를 대신하여 이 세상에 퍼지게 될 것이다.

 

언뜻 단순한 자연 현상일 뿐인 듯싶은 이 시의 내용 속에는 그러나 생명을 향한 나희덕 시인 특유의 시적 감성이 담겨 있다. 매미 소리가 울려 퍼지는 시절에도 귀뚜라미는 지하도의 좁은 틈에서 끊임없이 타전소리를 내보낸다. 사람들의 발길에 눌린 소리가 세상으로 뻗어 나가지 못하는데도 귀뚜라미의 타전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타전소리가 그치는 순간이 곧 귀뚜라미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귀뚜라미에게 타전소리는 나 여기 살아 있다라는 시구에 나타나거니와, 자신의 살아 있음을 입증하는 감각-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살아 있으니 귀뚜라미는 소리를 내고, 그 소리는 시간이 무르익으면 세상 사람들과 만나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 가는 노래가 된다.

 

가을이 되면 우리는 무심하게 귀뚜라미 소리를 듣지만, 나희덕은 그 소리를 귀뚜라미라는 존재의 전체를 드러내는 생명의 울음으로 듣는다. 매미 소리가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귀뚜라미의 소리는 수많은 생명들로 이어지는 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계임을 에둘러 보여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선 수많은 생명들이 제 소리를 내기 위해 간절하게 타전소리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나 그런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의 소리와 단절된 채 도시의 온갖 소음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귀뚜라미 소리는 다만 소리로만 인식될 뿐이다. 생명의 간절한 소리는, 그것을 간절하게 들으려는 존재들의 귀에만 들린다. 귀뚜라미라는 존재에 대한 관심 없이 귀뚜라미 소리가 제대로 들릴 수 있을까? 시인은 지금도 귀뚜라미는 어딘가에서 우리들에게 타전소리를 내보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그 소리를 듣는 몫은 고스란히 우리들이 짊어질 수밖에 없다. 이 시를, 혹은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귀뚜라미의 그 타전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o*****s 2018.04.30.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世界에 대한 Agape적 모성애
"世界에 대한 Agape적 모성애" 내용보기
사랑이 무언지 몰라,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하고 하다, 사랑을 쪼개볼 때... 가장 높은 사랑이라고 칭송받는 사랑이 있다. 아가페(Agape)라고 불리며 대표적으로 꼽는 것이 神의 사랑이며 그리고, 父母님의 사랑이다. 하지만, 호미의 날이 낫처럼 날카로울리 없듯이 아버지의 사랑이 아무리 깊은들, 어머니의 사랑을 따를 수는 없는 것이다. 나희덕 시인은 어머니다. 몸으로 낳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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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무언지 몰라,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하고 하다, 사랑을 쪼개볼 때... 가장 높은 사랑이라고 칭송받는 사랑이 있다. 아가페(Agape)라고 불리며 대표적으로 꼽는 것이 神의 사랑이며 그리고, 父母님의 사랑이다. 하지만, 호미의 날이 낫처럼 날카로울리 없듯이 아버지의 사랑이 아무리 깊은들, 어머니의 사랑을 따를 수는 없는 것이다. 나희덕 시인은 어머니다. 몸으로 낳은 자식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조그마한, 길 잃은 다람쥐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의 시는 착하다. 그리고 그는 시인이다. 시인이기 때문에 그는 처마 밑에서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본다. 시인이기 때문에 세상의 가장 불쌍허고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고,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것을 안타까워할 수 있는 것이다. 일일이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시집에서 가장 많이 쓰인 단어를 찾아본다면, 아마 어머니(혹은 엄마)와 아버지일 것이다. 어릴 적,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셨던 사랑,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던 사랑이지만, 이제선 깨달은 사랑... 그리고, 때로는 자식 한 명의 어머니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오륙십 명의 어머니가 되어야 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세상의 어머니가 되기도 했던 자신의 모습들... 경력 난의 몇 해를 차지하고 있는 고등학교 교사 경력은 때문에 무척이나 소중하달 수 있을 것이다. 스승으로 학생들을 바라보기보다는 자식으로 바라보는 어미로서, 교사란 <한 그릇의="" 밥을="" 푸면서/한="" 알도="" 흘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 말하는 그의 마음씨는 "곱다"고만 하면 너무 흔한 표현일 것이다. 어렸을 적엔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모습들이 그에게 큰 인상을 주었고,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모양이다.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그는 어머니가 되었다. 자식을 가졌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아이를="" 남에게="" 맡겨야="" 하고/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다른="" 것들에="" 더욱="" 매달리지="" 않으면/안된다는="" 것을,="" 그게="" 삶이라는="" 것을=""> 깨닫는 어머니가 된 것이다. 어머니로서의 그는 절대적이다. 진정 다 줄 수 있는 Agape적인 사랑을 가졌지만, 세상이 그를 그냥 두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모성애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의 어머니다. 그는 판자집 열살바기들의 어머니다. 시인은 열살바기들을 보고서도 시를 쓴다. 자기의 일인양... 심지어 그는 <세상의 모든="" 어린것들="">의 어머니가 된다. 그가 사랑하는 대상은 구별이 없다. 세상을 지은 조물주가 세상을 내려다보며 사랑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의 사랑은 그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나뭇잎들은 떨어져="" 나가지="" 않을="" 만큼만/바람에="" 몸을="" 뒤튼다/저렇게="" 매달려서,="" 견디어야="" 하나=""> 하며 스스로에 대해 연민과 사랑을 가진다. 그의 가장 소중한 테마는 사랑이다. 어머니의 사랑, 아버지의 사랑, 침범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이를 수 없을 것 같았던 神의 사랑까지도. 작품엔 가족사나 개인사가 많이 나온다. 개인의 체험이 詩의 주제가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작품의 대부분이 가족사와 개인사에서 비롯된 것 같다. 물론, 모성애를 말하려다 보니 그럴 지도 모른다.하지만, 너무 개인사의 영역에서 머물다 보면 시를 주입시키는 결과가 있지 않을까? 경험했던 자신과 읽는 사람은 분명히 다를 텐데... 읽는 이에게 자신의 경험을 주입시키는 결과가 있지 않을까? 아이를 키우기 위해 아이를 맡겨야 하는 상황에서의 그의 모습은 어쩌면 자신의 감정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기우인지도 모르겠다.

[인상깊은구절]
... 아이를 키우기 위해 아이를 남에게 맡겨야 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다른 것들에 더욱 매달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그게 삶이라는 것을 ...
s******z 2000.05.17.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내용보기
시민단체에서 발행하는 월간지의 추천 도서(?)에서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를 읽으면서, 또 한번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빨래는 얼어서 뻣뻣해 보이지만 그 과정에도 마르고 있고, 저 멀리 별빛은 희미하지만 결코 꺼지지 않는다에서 생명력을 느끼고, 비록 고통스럽지만 포기하지 않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가슴속에 담아 두고 있다가 시집을 찾아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내용보기

 시민단체에서 발행하는 월간지의 추천 도서(?)에서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를 읽으면서, 또 한번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빨래는 얼어서 뻣뻣해 보이지만 그 과정에도 마르고 있고, 저 멀리 별빛은 희미하지만 결코 꺼지지 않는다에서 생명력을 느끼고, 비록 고통스럽지만 포기하지 않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가슴속에 담아 두고 있다가 시집을 찾아 읽었다.

 

 시집을 읽고 리뷰를 작성하려다, 앞서 글을 작성하신 두분의 글을 읽으면서, 아 어머니들은 이 부분을 더 안타깝고 감동적으로 생각하는구나. 안타까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저녁을 위하여>를 여러번 반복하여 느껴 보았다.

 

 나는 이 작가가 빛이라는 메타포가 있구나란 생각을 좀 했었고, 그래서 <어느 봄날>이런 스타일이 세상을 잊어버리고 풍경에 푹 빠지는 것이 좋다. 하지만 이분의 시는 소위 건강한 시이다. 결코 생활과 떨어져 있지도 않고, 또 생활을 부정적으로 보지도 않고, 담당하게 그리고 묵묵하게 나의 할일을 하며 고통의 과정을 지나가는 것이다.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용기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힘들고 괴로울 때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는 그런 느낌이다. 마음의 위안을 찾을 수가 있다.

z******g 2009.03.10. 신고 공감 1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