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꽤나 잔인한 내용이다. 어린 아이를 좋아하는 식인족의 남자가 고용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식인을 금지당하고 수프속으로 뛰어들어 죽어 수백명의 식인족들을 남긴다는 중편과, 자신의 삶에서 재미를 전혀 발견하지 못한 한 화학자가 어느날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페인트를 개발하고 그것으로 단지 즐겁게 떠든다는 이유로 질투하던 아이의 얼굴을 지운다는 중편. 이 두 이야기 모두 소재가 참신하고 독특하지만, 특히 앞의 [아이를 먹는 식인귀]는 어찌나 재밌는지. 단숨에 읽으면서 여러번 웃었다. 아이를 먹지 못하면서부터, 즉 본성을 억제당하면서부터 비만등 여러가지 병에 시달려 다시 아이를 입에 대는 식인귀, 그에게 식인은 미식일뿐 아니라 처절한 생존이며, 억압받아서는 안될 본능이다. 그의 본능이 사회에 대치된다는 점이 그저 슬플 뿐이다. 식인귀를 교화시켜 보기 위해 고용인은 최선을 다한다. 여자를 소개시켜 주기도 하고, '새삶을 꿈꾸는 식인귀들의 모임'에 가입시키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묶어버린다. 그덕에 삶의 희망을 모두 잃어버리고 수프가 되어 자살하는 주인을 보며 자책할 그를 위해 앞으로 자라날 수백명의 식인귀를 남겨놓는 주인이나. 그지없이 잔혹하고 또 유쾌하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본성이란 억압당하면 다른 방향으로 폭발하는 것, 본성이 다른 인간의 사회와의 불화, 또 금지된 본성일수록 그에 대한 욕구를 참을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 글이다. |
| 새 삶을 꿈꾸는 식인귀들의 모임? 무슨 내용일까? 라며 우연히 집어들었다. 그리고 한 두장 읽다 보니 어처구니 없게도... 정말 식인귀가 새 삶을 꿈꾸는 내용이 아닌가?! 정말 저 대로의 내용일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정말 저 내용이 나오니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내용으로 글을 쓸 생각을 했을까...? 그런데 한자 두자 한장 두장 읽다 보니 그 신선하고 참신한 발상과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묘하게 사람을 끄는 구석이 있다. 이 책은 두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 편은 앞의 새 삶을 꿈꾸는 식인귀들의 모임이고 두 번째 글은 '아이를 지우는 과학자'이다. 이것 역시 제목 그래도 아이를 지우는 과학자에 관한 내용인데 전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이것 역시 나름대로 재미있다. 하지만 역시 전편이 너무 강렬했던 탓인지 제대로 와 닿지를 못한다. 차라리 이 것이 앞 쪽에 배치 되어 있었던 편이 더 좋았을 법도 한대... 두께도 얇팍한 것이 부담 없이 시간 보내기에 매우 좋다. 뭔가 재미있는 글을 찾고 계셨다면 주저 하지 마시길! |
| 책을 주문하고 먼저 읽기 전에 빌려달랜 사람이 있어서 빌려 주었었다. 그 사람이 며칠 후 책을 들고 오더니 영 시원찮다는 표정으로 이거.......별론데? 하고 만다. 그런가? 재밌을 것 같은 제목인데 ...의아해 하며 나는 이쁜 주황책의 책을 펴 들었다. 그리고 연달아 달려 오는 충격과 거침없는 말투 그리고 너무나 상징적인 단어 선택이나 설정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람의 성향이나 취향에 전혀 상반된 의견이 나왔지만 나에게는 아주 굿인 책이다. 자극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그런 책이다. 이 책을 더욱 즐겁게 감상하는 법이 있다. 충분한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주위 환경을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표지를 이분 정도 노려 보며 무슨 내용이 안에 있을지 만반의 준비를 해 둔다. 하지만 이 상상은 여지 없이 깨지게 될것이다. 작가의 얼굴을 주인공이라고 딱 설정을 해 놓고 눈앞에 상상의 화면을 그려 놓는다. 자 시작이다. 이제 작가가 등장 시키는 인물들을 하나하나 설정해 가면서 최대한 글 하나도 빼 놓지 말고 나 만의 만화나 영화를 만들어 내면 그만이다. 이제 대단히 풍자적이며 감각적인 글을 만나게 될것이다. 아이를 먹는 식인귀는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이거나 한 번 맛들인 것의 유혹. 그 풀려날 수 없는 마법의 족쇄에 걸리면. 그것은 말 그대로 풀려 날 수가 없다. 이것은 현대 사회인들 그리고 인간의 속성을 말하는 것이다. 아이. 모테는 아이이다. 아이의 식탐으로 인해 아이를 먹는 식인귀와 천진 난만한 아이들의 모습 웃음이 싫어 아이의 얼굴을 지우는 화학자. 아이는 무엇인가. 흔히 말하는 꿈을 꾸는 그리고 천사의 웃음을 품고 있는 악에 침식 되지 않은 존재이다. 그것을 먹고 지우려 하고 결국 그것을 키우고 보살피게 되는 어른. 그것은 이기적인 어른들의 욕망이 아닐까? 그 상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독자의 마음일 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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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가볍다. 무게도 가볍고 술술 읽히는게 가볍다. 이 책은 <아이를 먹는 식인귀>와 <아이를 지우는 화학자>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조적인 두 제목만큼이나 식인귀와 화학자가 아이를 보는 방식은 확연히 다르다.
우선 이 책을 펼치자마자 작가의 위트가 배어나온다.
"언젠가 자신의 식인귀를 만나 그를 잡아먹을 안나를 위해 자신의 식인귀를 이미 먹어치운 에릭을 위해"
제목도 그렇고 이런 헌정에도 알수 있듯이 이 두편의 꽁트 중에서 <아이를 먹는 식인귀>편이 더 재밌고 위트가 넘친다. 주인의 식인습관을 고치려고 온 삶을 바쳐 노력하는 하인이자 공식적인 보호자인 카르치피오 덕(?)분에 완벽했던 그의 사회적인 지위와 품격을 읽어버리고 떠돌이 서커스 유랑단에 들어간 식인귀 발튀스는 마지막으로 몸을 바쳐 종족(식인귀)번식에 공헌한다.
작가는 이 부분을 통해 뭘 이야기하려고 했을까? 단순히 자극적인 결말을 위해써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bad habit die hard" 혹은 "악의 재생산"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던 걸까 혹 그것도 아니면 "내좀 내버려둬~~" 라며 타인의 취향에 대한 존중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걸까
<르 푸앵>지에선 자본주의 정글에서 타인을 먹어치우는 우리자신을 그려낸 어른 동화라고 소개하기도 하지만 이런책의 결론은 결국 독자의 몫으로 남겨질수 밖에 없어 보인다.<아이를 지우는 화학자>편에서는 아이의 얼굴을 페이트로 지우려다가 실패하자 유괴해버린 어느 냄새나고 추잡한 한 노인네가 그 어린아이를 어쩌지 못하다가 결국 어린아이를 통해 남을 돕고 사는 남과 더불어 사는 네트에 대해 눈을 뜬 노인이 집에 화재가 나자 아이를 구해주고 죽는 결말로 끝나는 동화같은 이야기다. 군더더기 없는 문체와 기교로 독자를 이끌고 있는 브뤼크네르의 이책은 지루한 하루를 날려버리기에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친구가 될수가 있을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치료는 지나칠정도로 엄격했다. 발튀스는 탁아소나 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아야 했다. 침을 흘리는 즉시 그는 혀가 얼얼해질 정도로 따귀를 맞았다. 두눈을 감으면 온몸에 또다시 전기가 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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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좀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새 삶' 이라든가 '꿈꾸는' 처럼 소녀같은 단어와 '식인귀' 라니. 이런 제목에 어울리는 얄팍한 두께의 책이었어요.
제목은 무슨 은유 같은 게 아닙니다. 짤없이 진짜 식인귀가 나와서 진짜로 아기들을 잡아먹는 이야긴데, 전혀 무섭거나 슬프거나 끔찍하지가 않아요. 하도 무덤덤하게 이야기해서 그냥 맥주에 환장하는 남자라든가 케이크에 환장하는 여자 이야기를 읽는 것 같습니다.
주인공 발튀스는 겉보기에 완벽한 현대 알파남입니다. 번드르르한 직업과 재력과 덩치와 외모를 갖추었죠. 이런 자들은 나약한 보통 사람들을 맘껏 짓밟으며 산다는 점에서 현대적 의미의 식인귀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이 책에서는 그런 은유적인 의미로 식인귀라는 말을 쓴 건 아니라고 이미 말씀드렸지만요.
그리고 발튀스의 집사가 발튀스의 식인 버릇을 고쳐보려고 애를 쓰다가 대박 역효과가 나고 만다는 결말은... 포식자라는 건 그냥 자연의 일부니까 생긴대로 내버려 두라는 느낌이랄까.
요즘 들어 사이코패스 범죄자에 대한 공포와 함께 이런 시각도 꽤 많이 보여요. 너무나 삭막하고 끔찍한 현대 사회, 더 이상 포식자가 없는 인간들의 사회에서 사람 잡는 사이코패스의 출현은 오히려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 말이죠.
물론 실제 사건에 대고 이런 견해를 펴는 사람은 못 보았습니다. 영화나 책 같은 데서 통용되는 시각이지요. 이렇게 초 인간적인, 전혀 이해할 수 없어서 어느 정도 경외감까지 불러일으키는 포식자란, 픽션 밖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다크 나이트의 조커가 그렇고 이 책의 발튀스가 그렇지요.
악의와 의도를 품고 행동하는 '보통' 악당들이 아니라 그저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 난 포식자, 파괴자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인간의 윤리로 판단하기 어렵지 않은가. 이런 아이디어에는 섬뜩한 재미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초 인간적인 포식자는 현대 사회의 냉혈한 시스템 자체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