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하운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에 교과서를 보고 알게 되엇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분의 시가 궁금해서 한권 샀죠 ^^ 문둥이 시인. 한하운 님의 시를 읽다보니 어느 새 그 슬픔을 같이 공유하게 되는 느낌이엇죠. 갇혀지내게 되면서 자유를 갈망하는 모습은 정말 읽으면서 가슴 아팟습니다. 이제는 이런 일이 없어야되겟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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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중 하나인 한하운 시인의 시집이다, 월북과 월남을 두번이나 반복했단 그는 그 월남,북 경력으로도 알 수 있듣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다. 그는 문둥이(지금은 한센병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시인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는데, 그의 시의 보면 대부분 문둥이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특히 '보리피리', '파랑새', '무지개' '소록도길', '손가락 한마디' 등의 시에는 그런 마음이 뼈저리게 나타나있다.
특히 소록도길 이나 손가락 한마디에는 섬뜩하리만큼 표현이 잘되어 있다. 소록도 길의 "신을 벗으면/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 벗으면/발가락이 또한개 없다." 이라 구절이나 손가락 한마디의 "간밤에 얼어서/손가락 한 마디/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이 뼈 한 마디 살 한 점/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하얀 붕태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둔다. 날이 따스해지면/남산 어느 양지터를 가려서/깊이 깊이 땅파고 묻어야겠다." 는 부분을 읽어 보면 문둥이로써의 고통을 생생히 느낄수 있다, [인상깊은구절] 파랑새 - 한하운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러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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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우리시대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이기주의(자신들이 말할 때는 항상 개인주의라고들 말한다.)를 가지고 산다. 자신에게 이해 득실을 따지면 항상 살아간다. 만약 우리 주위에 문둥이가 산다면, 사람들은 그들과 말하길 꺼리고 보는 것 조차 꺼릴 것이다. 아니, 쫓아 낼 수도 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그럴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마 이 시집을 보고는 감명 깊다며 눈물을 흘릴 지도 모른다.
이 시집은 자신의 체험시와도 같다. 그렇다. 체험일 것이다. 자신의 체험을 읽는 사람은 두려울 정도로 책에 빠져 들어 읽고, 정작 시인 자신은 담담한 문체로 그 두려움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 들에게 주는 멸시와.......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참고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그는 아마 이 세상은 싫어 했을 것이다.아니 증오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세상을 개혁하고 바꿀 힘이 없었다. 그는 문둥이 였기 때문에.. [인상깊은구절] 손가락 한 마디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 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이 뼈 한 마디 살 한 점 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 하얀 붕대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둔다. 날이 따스해지면 남산 어느 양지터를 가려서 깊이 깊이 땅 파고 묻어야겠다. 罰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罰이올시다. 아무 法文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 옛날부터 사람이 지은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벌을 받게 했다. 그러나 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내세워 놓고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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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하운 시인의 詩들을 중학교 문학 교과서에서 읽었을 때엔, 다만 그의 시를 소리내러 읽었던 것 뿐이었다. '나는/나는/죽어서/파랑새 되리(「파랑새」)'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참고서를 통해 어렴풋이 알았지만, 그의 詩가 가진 슬픈 힘과 절규를 우리는 보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했던 어른들의 모종의 의도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십자가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한평생 희생을 알게 된다고 양귀자씨가 그랬던가.. 한하운 시인은 자신을 문둥이라고 서슴없이 부른다. 그러나, 그렇게 불러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못내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예컨데, 쿨리(C. H. Cooley)의 면경자아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자신을 스스로 문둥이라도 불러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정한 도시의 사람들이 강요하는 것이다.
나는 알지 못했다. '신을 벗으면/버드나무 밑에서 찌까다비를 벗으면/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全羅道길」)'와 같은 싯귀를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지금까지 그들을 혐오하고 기피하고 손가락질하는 법만을 배웠지, 그들과 대화하고 부대끼고 마음을 털어놓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나를 도양하는 것이면서, 더 나아가 세상을 정화하는 것이다.
시인의 「어머니」와 같은 시를 읽으면 나는 그들의 소수이면서 특이한 삶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그를 낳고서도 기뻐했던 어머니인데, 그런 어머니인데 세상은 어떤 용서나 화해도 주지 않는다. 다만 양지를 위해, 음지에서 숨어있으라고 전라도행을 강요할 뿐이다. 그런데도 '아 하나밖에 없는/나에게 나의 목숨은/아직도 하늘에 별처럼 또렷한 것이냐(「목숨」)'고 외쳤던 시인. 살아있으면서 끊임없이 죽어줬으면, 내 곁에 오지 않았으면 하는 시선에 시달렸을 시인. '그래도 살고 싶은 것은 살고 싶은 것은/한 번밖에 없는 자살을 아끼는 것이요(「봄」)'라고 체념했던 시인. 그러나 시인은 나즈막하게, 그러나 또렷또렷하고 힘있게 말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라고. 당신들이 생각했던 문둥이가 아니라고. 정말 아니라고.
나는 장애인의 한 사람으로 당신의 말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당신의 말에 깊은 신뢰를 보내며, 당신의 행동에 두 손 잡고 연대하리다. 한하운이여, 아파하지 마라. [인상깊은구절]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전라도길" 가운데) |
| 한하운의 시는 체험의 직설적 묘사와 그 직설성을 절제하는 시 쓰기의 방법이 잘 조화되어 있다. 매우 시를 잘 쓰는 시인이다. 또한 그의 거의 모든 시(이 시집은 한하운 전집이다)가 그 수준을 고르게 유지하고 있음도 주목된다. 그의 시가 가진 정조는 김소월의 '한'과 같은 것이지만 김소월의 시가 형식적-율조적 정제에도 불구하고 감성 노출이 많다고 한다면, 한하운의 시들은 박목월적인 감정 절제가 되어 있다. 또한 김소월의 한이 좀 막연한 감이 드는, 실체가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한하운의 시는 자신이 문둥이라는 경험이 그의 한의 실체를 제공해 주어서 더욱 무거운 느낌을 가져다 준다. 그의 초기 시들은 문둥이로서의 체험을 직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가히 충격적이다.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전라도 길] 중에서)이라든지, "간밤에 얼어서/손가락이 한마디/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손가락 한마디] 중에서)와 같은 문둥이만이 경험할 수 있는 육체의 일부분이 어이없이 절단되는 것을 담담히 묘사할 때, 그는 그 누구도 쓸 수 없는 슬픔과 한을 그려낸다. 이러한 한 체험의 실체성은 후대의 민중 시인들에게 영향을 준 것 같다. 김지하의 [황토]라든가 박노해의 [손무덤] 등은 [전라도 길]과 [손가락 한마디]와 그 모티브가 비슷하다. 또한 김지하나 박노해 시의 고난스러움과 분노의 감정들은 7-80년대 가혹한 사회 상황으로부터 그 내용을 얻고 있는데, 그렇다면 7-80년대에 산다는 것이 결국 문둥이로서 산다는 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것을 한하운의 시를 통해 역으로 느낄 수도 있음직 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다른 시들, 가령 문명 비판 시들은 그 예각이 별로 날카롭지 않다. 또한 음성 나병으로 판단되어 사회로 복귀한 이후의 시들은, 이전 시에서 느낄 수 있었던 체험의 직설성에 의한 충격이 시에서 별 느껴지지 않는다. 이 시기의 문둥이에 대한 시들은 서정주가 쓴 문둥이에 대한 시와 같이 일정 정도 대상화되어 인생의 비극을 나타내기 위한 제재 정도로 쓰이고 있다는 느낌이 짙다. 하지만 그의 후기 시들의 서정적 연시들은 매우 빼어나다. "꽃잎이 알려서/문둥이에 부닥치네/시악시처럼 서럽지도 않게/가슴에 안기네"(踏花歸 중에서)와 같은 시 구절은 매우 아름답다. 사랑의 대상은 이미, 시적 화자가 문둥이로서 유형 간 동안에 멀리 가버렸던 것이어서, 꽃잎을 사랑의 대상과 동일화시켜 그 대상을 육체적으로 생생하게 느껴보려고 하고 있다. 그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의 슬픔이 꽃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단정히 그려져 있다. 그의 후기 시들에서 보이는 경향은 또한 탐미적 성향이다. [은진 미륵불]이나 [한 여름밤의 빙궁],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서는 대상의 아름다움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시인의 노력이 보인다. 물론 그 아름다움은 공허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후기시의 또 다른 특징은 실험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언어 절제, 반복의 잦은 사용을 들 수 있다. 시의 형식에 대한 집착이 후기시에 올 수록 깊어진다는 것을 그것은 나타낸다. 그러나 역시 김소월-박목월 식의 직설성과 절제의 조화에 비하면 그 감화력은 그다지 깊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성과로서 축적되진 않아서인지 그의 다른 시에 별 그 실험의 영향이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 |
| 오랜만에 한하운의 시를 읽어 보았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잘 몰랐었는데 이제 다시 읽으니 안타까운 마음이 배어 나온다. 그땐 내가 어려서 삶을 잘 몰랐나 보다. 물론 지금도 아주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삶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 그때보다는 분명 많을 것 같다. 한하운이 지닌 슬픈 운명은 그로 하여금 이렇게 슬픈 시를 쓰도록 한 모양이다. 나는 이 시들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과연 한 사람의 삶이 이토록 아픔으로 얼룩졌다는 것이 마냥 가슴아프다. 문둥이의 아픔과 서러움을 이야기한 시들. 그래서 우리들도 이 시를 읽으면 마음이 아픈가 보다. |
| 한하운님의 두번째 시집 보리피리. 그의 힘겨웠던 삶을 시로써 보여주었다. 학교를 다 마치기도 전에 나병에 걸려 하루하루가 괴롭던 시절. 시로써 탈출구를 찾았고 시로써 자신의 삶을 달랬다. 너무나 괴롭던 시절. 자신의 여인과 헤어져야 했고, 하고싶은 많은 일들을 접어야 했던 그. 그래서 평범하지 못한 사람을 살아야 했다. 어릴적 부터 비범한 그였지만 그의 병으로인해 그의 삶은 빛이 나게 된 듯하다. 평생 허리한번 펴보지 못한 우리 할머니의 주름이 아름답듯이 그의 고난과 역경이 고스란히 담겨진 그의 시집은 빛을 더한다. 첫번째 시집은 파랑새도 좋지만 나에겐 보리피리가 더욱 인상에 남는다. 가도가도 황톳길... '전라도 가는 길'은 그의 시들 중 자신의 처지를 처절히 표현해 다른 시들보다 더욱 심금을 울렸다. 길을 발가락이 떨어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다. 고통을 호소하기 보다. 그냥 지나가는 일인냥 별것 아닌냥 그래서 더욱 슬픈 그런 시였다. 두번을 읽고 세번을 읽고 여러번을 읽을 수록 더욱 저려왔다. 그리고 그를 사모한 한 여인을 생각하며 쓴 시는 좋아하지만 그 여인을 잡을 수 없는 안타까움에 또 한번 눈가를 훔치게 만들었다. 끝내 양성반응을 얻어 병에서 헤어나게 되었지만 이미 뭉그러진 몸과 상처받은 마음은 치료되기가 어려웠다. 아마 시집은 그의 이런 아픔을 어떤 치료제보다 더 확실한 비방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시집을 구하려 대구 시내 서점을 거의 다 뒤졌지만 찾지 못했는데 여기서 우연치 않게 찾게 되어 당장 주문을 했다. 너무나 뿌듯했다. 기쁨을 추수르지 못했다. 다 읽고 나서 파랑새에 관한 글도 올려 보려 한다. 추천 메일을 쓰는 것도 생각 중이다. 이렇게 좋은 시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그의 시집을 본 나로서는 의무인것 처럼 느껴진다. 그에 대한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대부분의 사람이 그에 대해 잘 모르고 있어서 너무나 안타깝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