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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당쟁사2'를 읽으면서 역사는 단순히 과거를 비추는 거울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이 망한지 한 세기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사회 각 분야에서 여전히 당쟁의 유습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분명히 사림 정치, 당쟁의 긍정적인 점보다는 부정적인 면의 영향을 받고 있어서, 필자는 후기(後記)에서 여전히 우리 사회 여러 분야, 특히나 아직도 후진 형태를 보이고 있는 정치 분야에 남아있는 당쟁의 부정적인 모습에 대한 염려를 감추지 않고 있다.
점점 나아지고 있다지만 개인의 능력 외에도 여전히 학연, 지연, 혈연에 얽매여 있는 우리의 조직 문화를 보더라도 그렇다. 심지어는 같은 이념을 공유하며 정강과 정책을 가진 정치 조직인 정당에서조차도 학연과 지연 혈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현 정권만 보더라도 고소영 내각이나 영포라인이 실세이고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세간의 평가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만큼 당쟁사의 폐습은 여전히 우리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고, 우리 사회와 정치 문화가 전 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조선시대 당들이 공존이나 타협을 통한 해결보다는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달으며, 현안에서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모습 또한 현재 우리 국회에서 자주 목격되고 있다. 이렇게 당쟁의 부정적인 영향은 질기게 남아서 투명하고 수평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합리적인 사회, 제대로 된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공익보다는 자파의 이익에 매달리는 파벌 중심적 사고도 그러하고.
그렇다고 해서 당쟁에 대해 부정 일색으로 평가할 일만은 아니다. 우리가 계승해야할 장점 분명히 존재한다.
'조선시대 당쟁사2'에서는 숙종조에서 고종조에 이르는 당쟁사를 다루고 있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이미 당쟁의 고질적인 병폐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서 숙종은 서인과 남인의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집권당을 바꾸는 환국을 자주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거나, 축출되는 인재 또한 적지 않았지만, 그럼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방식을 구사했다.
영.정조대에 이르러 당파싸움을 진정시키기 위해 탕평책을 시도하는데, 영조는 외척과 손잡고 당파들의 세력을 견제했고, 정조는 규장각이나 초계문신 제도 등을 통해 자신의 친위세력을 키우는 한편, 탕평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정조 사후, 어린 왕이 보위에 오르면서, 정순왕후가 수렴 청정을 하게 됐고, 외척 세력들은 다시 발호하게 됐다. 이후 사림 정치는 급속도로 몰락하게 됐다.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일부 벌열 가문에 의한 세도 정치가 이어지면서 그렇지 않아도 허약해졌던 조선의 통치 기강은 맥없이 무너져 버렸다.
왕의 권위는 실추됐고, 실질적인 권력을 지닌 가문들의 매관매직에 부패, 삼정의 문란, 탐관오리의 성행 등으로 조선은 이미 안으로 썩을대로 썩었고, 곪을 대로 곪아갔다. 그러면서 조선은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지도층들이 세계 정세의 변화에 전혀 대비하지 못하는 사이 외세의 침입까지 겹치면서 몰락의 길을 재촉하게 됐던 것이다.
사림들의 당쟁이 격화되면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기는 했지만,조선의 정치는 사림 상호간에 견제와 비판이라는 문치주의 틀 속에서 이루어져왔다. 세도 정치는 그 견제와 비판, 그리고 책임이 결여된 정치가 얼마나 내부적으로 허약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림정치, 당쟁의 또다른 장점으로는 관료들이 학문적인 수양과 도덕성을 추구하는 전통 또한 수립했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이런 풍토는 다양한 언로가 개방됨으로써 가능했다. 그런 활발한 언론 활동과 상호 비판은 사림들이 스스로 조심하고 긴장하는 풍토를 조성했고, 조선이 높은 수준의 정치를 펼쳐가는 힘이 됐던 것이다.
이렇듯 조선시대 사림정치와 당쟁은 그 성과도 많았지만, 후기로 갈수록 비생산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와 함께 부정적 평가 또한 지나쳤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우리가 당쟁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게 된 데에는 식민사관의 영향이 없지 않다. 당쟁을 분열적인 민족성 탓이라고 강조했던 일제시대 일본 학자들의 주장, 그것은 식민 통치를 합리화 시키기 위해, 설파됐던 측면이 컸다.
당쟁이 남긴 긍정적인 측면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장점을 후손들이 이어받지 못했기 때문에, 폐단만 더욱 도드라지게 강조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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