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시를 보면 시에 줄을 먼저 긋게 되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 아닐까. 그저 제도교육의 병폐라고 치부해 버리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에 대한 관성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저 없다. 그러한 나에게 시란 무엇인지 알게 해 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시는 나비와도 같다. 살아서 꽃밭을 날아다니는 나비는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그 나비를 잡아서 박제한다면 그 아름다움의 대부분은 사라진다.
우리가 그 동안 시를 대하는 태도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더 잘 이해한다는 명목아래 시를 죽인 후에 도마 위에 올려놓고 이리 저리 뒤집어 보는 그런 모습으로는 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저 시에 쓰인 말의 뜻을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시의 세계와 정신을 이해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감수성의 극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현대시의 이해에서 이야기하는 이해라는 것은 대부분 이것을 의미한다.
은사시나무라는 시를 읽었을 때 그 나무가 의미하는 상징을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살아 움직이는 은사시나무를 본 적이 있느냐가 더 중요한 질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시의 이해이다. 살아 날아다니는 나비를 죽이기 보다 살아 날아다니는 나비와 함께 춤출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시를 진정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현대시 교실은 자유롭다. 내가 가진 부끄러움을 모두 솔직히 내보이고 내가 가진 무모함도 모조리 까뒤집는 학생이 좋은 학생이다. 엄숙하고 위선적인 학생은 배척 당한다. 어떤 학기에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가장 치욕적인 경험을 쓰라는 시험문제를 내고 또는 <은사시나무>라는 시를 이야기한 학기에는 답안지위에 은사시나무 잎새를 한 개 따서 붙여오라고 숙제를 내는 것도, 시를 어떤 축적적인 지식으로만 생각하는 학생들을 혼내주기 위함이다. 아울러 시는 자유롭게 이해하고 경험해야만 시의 본질에 대하여 눈을 뜬다는 확고한 의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
|
대학을 졸업하고 보니 기억에 남는 교수가 몇 분 계시다. 그 중에서도 오탁번 선생은 그 특이한 교수방법으로 인해, 졸업생들이 모이면 자주 화제로 오르는 분이다. 중간기말 시험 문제로는 학교 도서관 앞 은행나무는 몇 그루?, 우리 학교에서 자목련이 있는 곳은?, 매미를 그려라, 올 봄 우리 학교에서 가장 먼저 핀 꽃을 시선독 수강생답게 표현해 보라 등의 문제가 나오곤 했다.. 다소 황당하기도 했지만, 선생님의 수업을 통해 내가 시의 곁으로 바짝 다가갈 수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현대시의 이해"는 현대시선독 수업 시간에 사용되던 일종의 교재였다.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시를 읽으면 나누었던 이야기가 그대로 담겨있다. 시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들, 시와의 거리감을 줄여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선생님의 그 수업이 그립다. [인상깊은구절] - 좋은 시는 정말 좋고 나쁜 시는 정말 나쁘다! <내 문학의 숨결 1>(1992)에서 "나는 배고픔과 가난 속에서도 순은이 빛나는 아침을 기도하며 여기까지 왔다. 마침내, 여기까지 왔고, 이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아득한 길로 나선다"라고 심정을 토로한 바 있는데, <내 문학의 숨결 2>를 마감하는 지금의 마음도 이와 꼭 같다. 어린 시절의 가난이 단순한 빈궁의 의미로만 작용하는 게 아니라 내 문학을 지탱시켜 주는 어머니의 힘으로 승화되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놀랍다. 이제 여기까지 왔지만, 잠시 쉰 다음에 내가 걸어가며 죄 짓고 벌받을 '아득한 길'이 못내 두렵기만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