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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이름 석자를 안 지는 오래됐지만 독립운동을 한 꼿꼿한 인물이라는 정보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게 된 순간, 부끄러움과 동시에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그는 고향에서도 유림을 대표하는 요주의 인물이라 일경의 감시를 받았고, 고향을 떠나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됐다. 그러느라 가족을 돌보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생이별을 해야 했다. 심지어 큰 아들도 불러 들였지만 결국 아들은 고문을 받다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몇년 뒤 독립 운동에 참여했던 둘째 아들 역시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그는 피를 토하는 고통을 감내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위험을 무릎쓰고 국내에 잠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도 했고, 나석주 의사 등 일본을 공격하는 인물과 단체를 지원하기도 했다. 일본은 온갖 달콤한 제안으로 그를 회유하려 들었지만 한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병원에 입원하고 있다 체포돼 일본으로 송환됐고, 그곳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다리를 쓰지 못하는 몸이 되고야 말았지만 재판에서도 변호사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 포로이고, 일본의 법체계를 인정하지않겠다는 의지를 꿋꿋하게 밝혔던 것이다. 독립이 되자 김창숙은 희망을 품고 귀국을 하지만 그의 행보는 순탄하지 못했다. 그는 정권을 잡은 이승만과 쭉 대립각을 세우며, 그의 독재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게 됐다. 김창숙의 독립운동을 보면 이회영이 연상되기도 했다. 그 헌신성. 고국에서 적당히 일제와 타협했더라면 일제 치하에서 대접 받으면서 살 수 있었을텐데, 그 안온한 삶을 마다하고 기꺼이 가시밭 길을 택했던 것이다. 김창숙 선생도 선생이지만 가족들은 또 얼마나 힘겨운 삶을 살면서 희생을 감내했을까. 일제의 감시와 생활고..이중고에 시달렸을 것은 불문가지였을 것이다. 김창숙은 선비다운 기개와 꼿꼿함으로 일관한 삶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에 나선 선조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니..자괴감과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같이 부끄러운 후손이 나오지 않게 초등학교 고학년과 청소년 대상으로 만들어진 '마지막 선비 김창숙'같은 책이 요즘 많이 나와 있다는 것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김창숙 선생의 묘지가 수유리에 있다고 한다. 검색을 해봤더니,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의 묘 주위에는 독립운동가 두분의 묘도 함께 있다고 하니, 봄기운이 돌면 묘지를 찾아가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