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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틴이 떠난 것은 화자에게 큰 충격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헤어짐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알베르틴이 스스로 떠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결국은 다시 돌아올 거다, 그녀와 결혼을 했어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와 더 나은 조건을 요구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떠난 건가, 그러다가도 헤어짐을 예고하는 남자에게서 떠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알베르틴의 마음이 이해되기도 하면서 오래전부터 도주 계획을 세웠을 거라는 추측을 하는 등 복잡한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베르틴을 다시 찾겠다는 일념으로 가득하다. 생루에게 부탁을 해서 봉탕 부인을 만났다가 알베르틴이 알게 되고 화자를 비난하는 편지를 보낸다. 나를 필요로 했다면, 직접 편지를 썼다면 기쁘게 돌아갔을 텐데, 왜 그러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화자도 편지를 쓰는데 속마음과는 달리 반대로 쓴다. 그러니까 헤어지자 운운했던 말이 진심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심을 표현하지 않는데 알베르틴이 화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알베르틴이 반드시 다시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갖는다. 질베르트와 교제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는다. ‘무관심을 가장했고, 그 무관심이 드디어는 현실이 되었다.’(P84) 알베르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척, 그것이 자존심 때문이었다니! 요즘 말로 하면 사랑 표현을 못 했던 것이다. 남겨진 화자의 마음에서 참담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다지 알베르틴을 좋아하지 않았던 프랑수아는 속마음이 어떨까. 쾌재를 불렀는지도 모르지만 그걸 도련님에게 대놓고 내색할 수도 없었겠지. 화자는 알베르틴이 돌아올 거라는 희망을 자꾸 프랑수아에게 주지시킨다. 아주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프랑수아가 믿지 못하도록. 그러던 중 알베르틴이 서랍에 반지를 두고 갔다는 걸 알게 된다.
한편, 성공하리라 믿었던 생루에게 부탁한 일이 수포로 돌아가자, 화자는 다시 고통에 빠진다. 오히려 생루가 둘 사이를 떼어 놓으려고 음모를 꾸미지 않았을까 의심까지 하면서. 한번 질투와 의심에 빠진 인간의 마음은 한이 없는 것 같다. 알베르틴을 혼자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일이 단 일 분이라도 미칠 지경이었다는 속마음을 드러낸다. 이 정도면 정말 편집증적인 상태가 아닌가. 이러한 화자의 행동을 아무리 무덤덤해 보이던 알베르틴이라도 모를 리가 있을까. 여성 특유의 예민함은 갖고 있을 텐데. 거기다 헤어지자는 예고와 좀더 머물러 보라는(마치 큰 배려를 하듯이)말을 알베르틴에게 했었다.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화자의 너무도 서툰 연애에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앞에서 스완이 오데트가 사고로 죽기를 바라는 장면을 상기시키는 장면이 나왔다. 마찬가지로 화자도 알베르틴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자신은 끊임없는 질투로 영원히 오염되지 않은 채,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평온함은 되찾을 수 있을 거라며. 그러다가도 스완이 살아있다면 그런 소망은 범죄일 뿐이며,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은 그 무엇으로부터도 그를 해방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을 거라며 한탄한다.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돌아와 달라고 애원하려고 하려고 했는데……. 화자는 알베르틴이 산책하던 중 낙마하여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봉탕 부인의 소식을 듣는다.
돌아오리라는, 다시 찾겠다는 일념으로 가득찬 화자의 희망은 이제 기약할 미래도 없었고 아무런 의미도 없어졌다. 알베르틴을 처음 만나고 조금씩 알아갔던, 그리고 사랑했던 날들을 회상한다. 질투로 인한 힘든 마음, 사랑했지만 사랑하지 않는 척 가장해야 했던 복잡한 마음 등을 풀어 놓는다.
‘사랑을 할 때에도, 정신적 대기 상태가 불안정하고 내 믿음의 압력이 변하면 어떤 날에는 내 고유한 사랑의 시계(視界)가 좁아지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무한히 넓어지고, 또 어느 날에는 미소를 짓게 할 만큼 아름답다가도 다른 날에는 폭풍우를 일게 할 만큼 일그러지지 않았던가? 우리는 오로지 자신이 소유한 것에 의해서만 존재하며, 실제로 우리 옆에 있는 것만을 소유한다. 얼마나 많은 추억과 기분과 관념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행을 떠나 우리의 시계로부터 멀어지는가! 그때 우리는 그것들을 더 이상 우리 존재를 이루는 전체 속에 포함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는 비밀 통로를 가지고 있다.’(P125)
알베르틴을 향한 화자의 마음을 너무도 잘 묘사하고 있지 않은가.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것. 더구나 그녀가 죽어 세상에 없다는 것, 그 자체가 화자의 마음을 얼마나 황량하게 했을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함께 했던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내면의 깊은 바닥에 자리하고 있는 비밀 통로에서 알베르틴과의 추억을 되새기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사랑했음에도 왜 알베르틴에게는 그걸 잘 표현하지 않았을까. 질투심에 휩싸여 고통스러운 마음에서 벗어나려고 알베르틴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했을까. 속마음과 전혀 반대된 마을을 함으로써 화자가 말하는 알베르틴의 악행(?)을 막아보려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도와 다르게 알베르틴은 떠나버렸다. 자유롭지 못한 그 ‘갇힘’에서 벗어나고자 떠났을까. 격렬한 질투로 인해 정열적이고, 무관심하고, 질투하는 남자로 시시각각 변했던 자신의 모습에 처절하게 후회를 쏟아놓는다.
한 마디로 11권을 요약한다면 화자를 떠나고 죽은 알베르틴에 대한 애도와 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생루와 에메의 탐문을 통해서 알베르틴이 한 일을 알게 되고 앙드레의 고백을 듣고 알베르틴의 입장은 헤아리지 못한 채 이기적이었던 자신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발베크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랑하게 된 과정, 질투와 의심으로 점철되었던 관계, 질투에 빠져 알베르틴을 죽게 한 죄책감은 할머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며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읽는 내내 화자의 사랑에 대해서 의문을 자아내게 했고, 그가 과연 진정한 사랑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씁쓸한 마음이 컸다. 연인을 ‘소유’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했으며 ‘소유’라는 단어가 너무 많이 나와서 반발심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뒷부분으로 갈수록 안타까운 마음이 되었다. 인간이란 살아가는 내내 얼마나 많은 실수투성이로 살아가는가. 연습도 없고 실전인 삶에서 한번 오류가 난 것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과 삶과 죽음의 문제는 더욱더.
어머니와 베네치아를 여행하면서 어느 정도 알베르틴의 죽음과 상실로 인한 고통이 옅어졌을 때 질베르트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된다. 친구였던 생루와 결혼한다는 소식이었다. 이렇게 당황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스완이 죽고 오데트는 포르슈빌과 결혼하게 되고 스완의 이름은 사라졌다. 오데트와 질베르트를 게르망트가에 그토록 초대받고 싶었던 스완의 소망은 물거품이 된 것이다.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주던 생루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 낯설고 슬픔을 느낀다. 더구나 탕송빌에 갔다가 질베르트의 고백을 듣게 되는데…. 어린 시절 사랑했던 질베르트가 자신을 경멸한다고 생각했는데, 사랑했었다는 말을 듣는다. 결국, 화자는 인정한다. ‘어중간한 감정의 대화를 통해 첫 순간처럼 솔직해지는 것이 두려웠’고, 자신의 ‘서투른 행동이 모든 걸 망쳐버렸다.’고.
아무리 빨라도 ‘후회’란 늦다고 했던가. 화자는 질베르트의 고백을 듣고 생각한다.
‘그날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황혼 속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어쩌면 나의 모든 삶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그때 그 일에 관해 질문을 했다면, 그녀는 아마도 내게 진실을 말해 주었을 것이다. (중략) 또 사실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여인들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만난다 해도 그들이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우리와 그들 사이에는 죽음이 놓여 있는 게 아닐까?’(P470~471)
‘그 먼 시절이 긴 고통에 지나지 않았던 영혼의 상태로부터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마멸되고 사라지는 이 세상에서 폐허로 변하는 것, 아름다움보다 잔해를 덜 남기면서 보다 완전하게 파괴되는 것은 바로 슬픔이기 때문이다.’(P471)
어쩌면 너무 완벽한 사랑을 꿈꾸었기 때문이 아닐까? 질투와 의심에 파묻혀서 혼자 단정 짓고 궁금한 점이 있어도 묻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소통의 부재와 소통이 불능했기에 질베르트와 알베르틴과의 사랑도 모두 어긋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생루와 결혼하게 될 줄 상상도 못 했기에 더욱 참담했을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과 죽음과 사투하며 마지막으로 쓴 것이 이 11권의 내용인 [사라진 알베르틴]이라고 한다. 그만큼, 사랑했던 알베르틴을 향한 회상과 애도, 죄책감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된다. 물론 끝없는 의구심도 들어있다. 그리고 결국은 사랑했던 사람들을 망각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글쓰기를 통해서 구원받지 않았을까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알베르틴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대한 반성과 성찰적인 문장이 많았는데 몇 가지 옮기며 리뷰를 마치려 한다.
‘우리 감각 세계의 건물을 떠받치는 것은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이며, 믿음이 없으면 건물은 흔들린다. 우리는 바로 이 믿음이 사람들의 가치와 무용성을 결정하며 또 그들을 만날 때면 느끼는 열광이나 권태의 감정을 결정하는 걸 보아 왔다. 마찬가지로 오래가지 않아 끝나리라고 확신하는 것만으로도 슬픔이 하찮아 보이기 때문에, 또는 슬픔이 돌연 커져서 한 존재를 우리의 목숨만큼이나, 때로는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기 때문에 믿음은 슬픔을 견디게 한다.’(P57)
‘한 존재와 우리의 관계는 오로지 우리 사유 속에만 존재한다. 기억이 희미해지면 그 관계는 느슨해지고, 우리는 환상에 쉽게 속아 넘어가고 싶어 하면서도, 또 사랑이나 우정, 예의나 체면, 의무감 때문에 타인을 속이면서도 결국은 홀로 존재한다.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며, 자기 안에서만 타자를 인식하며, 그렇지만 그와 반대되는 말을 하면서 거짓말을 하는 존재이다.’(P65)
‘삶을 알고 싶다는 이 거대한 욕망을 나는 예전에 발베크의 길에서나 파리의 거리에서 느꼈으며, 그 욕망이 알베르틴의 마음속에서도 존재한다고 생각했을 때, 나 외의 다른 이들과 그 욕망을 충족하는 수단을 그녀로부터 빼앗고 싶어 했을 정도로 그것은 나를 괴롭혔다.’(P231)
‘그런데 인간이란 불행하게도 우리 사유 속에서 쉽게 마멸되는 수집품 진열대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가 그들에 대해 세우는 다양한 계획에는 사유의 열정이 담겨 있다. 그러나 사유는 피로해지고 추억은 파괴된다.’(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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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이 도착했다. 일찌감치 읽고자 했지만 자꾸만 일이 생겨서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읽게 되었다. 민음사의 잃어버린 시간들은 번역도 좋지만 표지 디자인이 아주 마음에 든다. 색깔별로 있어서 그런지 책장에 꽂아두면 그 아름다움이 배가 된다. 요즘은 책에 대한 장식(?)적 효과도 고려되는 시대이니 말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민음사의 잃어버린 시간들을 순서대로 구입해서 읽고 있다. (참고로 그 종류들을 보면 아래 사진과 같다)
이 책은 순서상은 11권이지만,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들에서는 사실 6번째 이야기에 해당된다. 그 순서를 다시 되짚어 보면 다음과 같다. 1편 '스완네 집 쪽으로' , 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3편 '게르망트 쪽', 4편 '소돔과 고모라', 5편 '갇힌 여인' 그리고 이 책 6편 '사라진 알베르틴'이다. 세간에는 그런 말이 있다. '잃어버린 시간들'을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이런 말이 나도는 데는 이 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분량이 너무 많다. 아니 길다. 너무 긴 이야기라 사람들이 이걸 과연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하는 점 때문이다. 게다가 그 내용 또한 흥미진진한 판타지나 로맨스 소설이 아닌 의식의 흐름을 따라 쓰여졌고, 수많은 은유가 사용되었고, 시대상 또한 읽어내야 한다는 점이 첫장을 펼치고 끝장을 덮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읽기도 쉽지 않고 읽어내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나처럼 수년동안 이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단계들을 극복(?)하고 나면 왠지 모를 쾌감과 함께 처음 읽을 때 느끼지 못했던 즐거움이 차츰차츰 커져감을 느낄 수 있다. 소위 말해, '중독'된 것이다. 또한 프랑스 문화와 19세기의 상황들을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렵고 공감하기 힘들었지만, 책을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그 당시의 상황과 문화들이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잠시 언급하면, 잃어버린 시간들에는 프랑스의 살롱 문화와 시대상 그리고 역사적 사건들이 언급되어 있는데, 살롱문화와 당시 프랑스 사회의 핫이슈였던 드레퓌스 사건을 비롯해 반유대주의와 부르조와 계급의 등장 그로 인한 귀족사회의 흔들림이 그려진다. 그래서 유대인인 스완에 대한 이야기를 오롯이 이해하려면 이런 배경과 시대상에 대한 좀 더 많은 지식과 이해가 요구된다. 하지만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시간들'은 우리에게 100년 전 그 상황들이 지금의 상황과 별반 다를게 없다는 걸 알려준다. 그때의 사건과 사회상은 지금의 사건과 사회상과 대조를 이룰때도 있지만 대입을 했을 때 일맥상통하는 점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들은 이분법을 사용해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고 또 그것들이 뒤섞이며 사건을 만들고 해결하며, 대립하고 화합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11권째인 이 번 책의 부제는 '사라진 알베르틴'이다. 앞서의 권에서 마르셀은 알베르텔을 완전히 소유하기 위해 파리에 정착하며 결혼까지 하게 되지만, 고모라의 여인들이 말하는 불안과 소문 그리고 거짓과 진실들 사이에서 깊은 고민에 빠지고 만다. 사랑은 기쁨만이 아니라 고통도 수반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고통마저도 사랑이었음을 깨닫지 못한 채 이별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 결심이 선 순간 사랑은 다시 찾아들고 시련은 사랑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하지만, 봉탕 부인의 편지는 모든 걸 다시 원점으로 되돌린다. 그 내용은 사랑하는 알베르틴은 더이상 이 세상에 없다라는 것이었다.
사랑이 찾아 올때는 뒤이어 고통도 찾아오고, 사랑에 젖어 몽상이 더해졌을 때 그것은 하나의 방향이 아닌 (본인이 원하지 않는) 다른 방향으로 퍼져 나간다는 것을 깨달는 순간이다. 마르셀은 이에 대해 언급한다. 상상 속 여인을 처음 알게 되는 경우 나는 인간의 상상력이 그 여인과 같은 작은 얼굴 뒤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집어 넣을 수 있는지 깨달았다. 또 반대로 몽상의 대상이었던 것도 그 몽상과 상반된 방식으로 가장 하찮은 사실을 통해 알게 되는 경우에는 얼마나 초라하고 온갖 가치가 제거된 물질적 요소로 분해되는지도 알게 되었다. 이처럼 마르셀은 사랑을 통해 또한번의 고통을 겪었고 또 그만큼 성장한다. 그의 표현처럼 자신의 안에 언급되었던 인물이 일곱 여덟가지로 표현되고 상상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마르셀은 사랑을 뛰어넘은 인간에 대한 통찰을 생에 대한 통찰을 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잃어버린 시간들'에서는 처음부터 이 책 11권까지 줄곳 사건과 화자의 의식의 흐름이 교차된다. 또한 수많은 작가들이 언급되기도 한다. 근데 문제는 이 언급을 이해하려면 그 수많은 해당작가들의 인용된 책들을 읽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 '잃어버린 시간들'을 읽기에도 벅찬데 그것들마저 읽어내야 한다는 건 정말 엄청난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읽기 시작한 거 이왕 읽는 거 제대로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르셀이 이 책에서 언급하는 건 당시의 시대상 뿐만 아니라 인물들에 대한 단상과 함께 주변 풍경들이다. 책을 읽다보며 의외로 풍경에 대한 묘사가 많음에 놀란다. 그런데 이건 단수한 쉼표 수준의 묘사가 아니라 은유 즉 메타포가 담긴 묘사라는 점이다. 그가 말하는 들판, 꽃, 집, 실내 풍경 등등은 모두 등장하는 인물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거나 앞으로 또는 이전의 사건들과도 연관되어 있다. 물론 은유로서 말이다. 무척이나 아름답게 묘사된 그의 문장을 읽고 있으면 이런 것들마저 잠시 잊게 된다. 마르셀의 자전적 소설이라 여겨지는 '잃어버린 시간들'에서는 그가 어떻게 글을 쓸 것이며 또 어떤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부분도 간간이 나온다. 이건 사람들을 만나면서 해당 인물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인데 예를 들면 베르고트가 어떤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주었다면 엘시티르는 어떻게 쓸 것 것인가라는 방법을 알려 준다. 그리고 화자인 마르셀은 여행을 많이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여행의 특별함은 우리가 피곤할때 도중에 내리거나 멈출 수 있는데 있지 않다. 출발지와 도착지를 지각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차이를 깊게 느껴 상상력이 단 한번의 비약으로 살던 장소에서 욕망하는 장소로 데려다 주듯이 우리 생각 속에 있던 차이를 전체 안에서 그대로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또한 그 거리를 뛰어 넘어 하나의 고장에서 다른 고장으로 간다기 보다는 지구라는 전체의 틀 안에서 하나의 이름에서 다른 이름으로 우리를 데려다 주는 것이다. 또 고장마다 다른 사람들, 건축물들, 자연환경, 생활습관 등은 제각각이어서 그곳에 사용되는 적절한 은유또한 제각각이 된다. 이런 은유를 만들어내고 생각해 내는 화자는 다른 고장으로 이동할 때마가 낯섬과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런 새로움은 결국 자신을 변화 변형 시키는 것으로 매조지된다. 이처럼 '잃어버린 시간들'은 읽기가 쉽지 않은 책이다. 문장 하나 하나를 곱씹어 되씹어야 하며 그 맛을 느끼더라도 다음 장 혹은 다음 권에서 다시 한 번 그 맛을 기억해내야 하고 그 맛이 아니었음이 판명되었을 때는 앞서로 다시 돌아가 다시 읽기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의 소요와 생각의 생각을 통한 정반합의 과정이 바로 이 책 '잃어버린 시간들'을 읽는 재미이며 가치인 것이다. 이 책 11권은 앞서 언급했듯이 6번째에 해당하는 '사라진 알베르틴'의 시작점이다. 정확한 정보는 아니지만 아마 민음사의 잃어버린 시간들은 14권 (또는 13권) 정도에서 마무리가 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저처럼 11권까지 읽은 독자들은 이제 거의 종착역에 도착한 느낌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마르셀이 여행이라는 은유를 썼을 때 그러니깐 출발과 종착이라는 그 사이의 시간과 거리는 일종의 무의미에 해당하며 각각의 해당 지점에서 파생하는 은유로 읽어내야 하는 것이니만큼 이 책을 읽고 난 뒤 아 이제 다 읽어가는 구나 하는 느낌 보다는 이 책을 하나의 독립으로 또는 전체의 일부분으로 읽어내며 이 소설의 참맛을 느껴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누군가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난해한 책이며 완독하는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리며 어쩌면 평생 읽어도 다 읽지 못하는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책이 바로 '잃어버린 시간들'이라고. 끝으로 1권 부터 11권까지 읽었으니 앞으로 나올 12, 13 또는 14까지 마저 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반드시 꼭. 그리고 그때까면 다시 한 번 리뷰를 써보리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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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 대한 내 사랑은 단일한 것이 아니었다.다시 말해 미지의 것에 대한 호기심에는 관능적 욕망이,거의 가족족으로 보이는 따사로운 감정에는 때로는 무관심이,때로는 격렬한 질투가 더해졌다.(....) 내 사랑이나 인격의 복합적인 성격이 고뇌를 증식하고 다양하게 만들었다"/128쪽
처음 프루스트.를 읽었을 때도 11권을 천천히 아껴가며 읽고 싶다는 감상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았다.그러나 너무 흥분해서 읽게 된 탓에 아포리즘 같은 문장을 메모해야 한다는 사실을 놓쳤다. 이번에는 아포리즘 같은 문장을 메모해 가며 읽다보니, 속도는 더뎠지만 흐름은 전혀 놓치지(?) 않았다. 물론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도 했다. 11권 덕분에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사랑'에 대한 질투의 세세한 디테일의 감정을 만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잃어버린...을 이야기 할 때 마들렌을 떠올릴 수 있겠으나 나는 '질투'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하게 될 것 같다. 적어도 11권만 놓고 보면 그렇다^^ 거시적으로 보면 인간의 수많은 욕망에 대한 담론일테지만 11권만 놓고 보면 질투에 힘들어 하는 남자의 목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 질투와 사랑은 한몸처럼 움직이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질투, 사라의 그림자' 제목을 보는 순간 얼마나 놀랐던지^^) 알베르틴과 이별을 마주하는 순간까지만 해도 그는 여전히 질투에 사로잡혀 보고 싶지 않은 찌질함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그래서 더 인간적으로 보이는 아이러니) 그런데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그는 깨닫게 된다. 물론 그녀가 죽고 나서도 질투의 화신이란 감정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리고 비로소 깨닫게 되는 순간, 노력을 하지 못한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고 나서야 자신이 질투에 사로잡힐수 밖에 없었는지도 알게 된다. 알베르틴이 죽고 나서도 불쑥불쑥 주인공은 알베르틴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못나보이기도 하고..애잔하기도 하고..그런데..그레서 도대체 언제 알베르틴에게서 자유로워지려하는 걸까..갇힌사람은 알베르틴이 아니라 질투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아니였을까"우리는 고통을 완전히 겪고 나서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훗날 알베르틴이 살아 있다는 생각을 성찰의 토대로 삼은 것과 마찬가지로(....)"/203쪽 화자에게 알베르틴은 사랑의 대상이기도 했지만...인간의 수많은 성격과 감정들의 다양함이 적용되는...상징으로 이해되었다.
"사물이 채색되는 것은 우리가 가진 눈 때문이다.우리에게 수백 개의 감각이 있다면 그 감각 덕분에 사물은 얼마나 다른 수식어들을 받게 될 것인가? 그러나 사물이 가지는 이런 다양한 양상은 우리 삶의 아무리 하잖은 사건이라 해도 우리가 아는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전체를 안다고 믿으며 또 어떤 사람은 집 반대편에 면한 다른 조망을 가진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것처럼 그 사건을 바라본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게 해 준다"/454~455쪽
아직 읽지 않은 책도 많으면서, 잃어버린...을 다시 읽었다. 처음 읽을 때는 엄청난 책을 재미나게 읽는 다는 것 자체가 신기해서 온전히 몰입(?) 하지 못했던 것 같다. 프루스트 말처럼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데도 벅차던 것일수도 있겠다..두 번째 읽기에서는 '질투'라는 주제를 따라 읽는 재미가 컸다...내 시선에 저절로 들어온 화두였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마무리 하는 시점에서 프루스트의 단편집 <질투의 끝> 보게 되었다.(재미나단 생각을 했다^^) 1년 넘게 프루스트와 함께 한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구력이 키워진 것은 기분이 들었다. 두 번째 읽기라 그런지..흐름이 중간에 끊어졌다 읽어도 서먹하지 않았다는 것도 신기했다. 백과사전 같은 책이라...찾아 볼 거리가 많아 즐거웠다. 책을 마무리하자마마자 언제 다시 읽게 될 까를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11권만 먼저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수 있겠다는 생각. 지금 안 것을 그때도 알았다면.. 후회할 일이 조금은 덜 하게 될까..에 대한 느낌은, 다시 읽기에서 '질투'라는 감정으로 바라보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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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 마르셀 프루스트 <김희영 옮김> 사라진 알베르틴
'알베르틴 양이 떠났어요!' 그 말이 마르셀에게 주는 고통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더 이상 알베르틴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마르셀은 알베르틴을 버리고 베네치아로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알베르틴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말이 마르셀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불러일으켰는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마르셀만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알베르틴이 악덕(동성애)를 행하는 것을 저지하려는 욕망에서 생긴 사랑은 단 한 시간도 그녀를 자유롭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알베르틴은 보다 좋은 조건, 보다 많은 자유와 사치를 얻기 위해 떠났으리라고 마르셀은 생각했다. 알베르틴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거기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알베르틴의 갑작스러운 떠남은 그녀가 옆에 있을 때 느끼게 했던 온갖 모순되는 인상이나 감각을 망각하게 했고 그녀와 있었던 행복한 기억만 생각나게 했다. 그녀를 마르셀의 옆에 두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었다. 그녀의 부재가 마르셀을 해방시켜 줄 거라고 믿었던 일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도 가르쳐 주었다. 마르셀의 절친인 생루를 봉탕 부인에게 보내 3만 프랑이라는 거금을 제시하며 알베르틴을 돌아오게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알베르틴은 마르셀이 직접 오기를 원했다. 알베르틴의 요구에 마르셀은 알베르틴에게 롤스로이스와 요트를 사주겠다고 유혹하는 편지를 보냈고 또 알베르틴의 가장 친한 친구인 앙드레와 결혼하겠다며 알베르틴의 질투를 유발하여 빨리 돌아오게 했다. 여러 번의 편지를 주고받은 후 알베르틴이 돌아오겠다는 편지를 한 다음날 봉탕 부인으로부터 알베르틴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를 받았다. 마르셀은 무너졌다. 마르셀은 알베르틴에게 가진 의혹의 실체를 알아보고 싶어 발베크 호텔 식당 책임자인 에메를 발베크로 보냈다. 알베르틴은 죽었지만 그녀가 마르셀에게 얼마만큼의 거짓말을 했는지 여자들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여자들과 자유롭게 사귀기 위해 떠난 것인지 알고 싶었다. 에베가 발베크에서 보내온 편지는 마르셀의 모든 의혹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알베르틴은 발베크에서 다른 여인들과 밀회를 즐기고 그 사실을 연인에게는 모르게 하는데 성공했다고 상상하던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알베르틴이 자신의 취향을 감추었다고 해도 그것은 단순히 마르셀을 슬프게 하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마르셀은 알베르틴의 절친인 앙드레에 의해 알베르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알베르틴에게 청혼자가 있었음을.. 알베르틴이 베르뒤랭 부인의 초대에 가려고 했던 이유는 뱅퇴유 양을 만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녀에게 청혼한 베르뒤랭 부인의 조카인 옥타브를 만나기 위해서였음을 알게 되었다. 알베르틴이 마르셀을 떠난 이유도 봉탕 부인이 알베르틴을 옥타브와 결혼시키기 위해서 오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마르셀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유였다. 마르셀은 알베르틴을 용서했다. 그녀 곁에서 살았던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마르셀의 마음속에 살고 있었다. 마르셀이 신뢰하는 생루를 알베르틴을 다시 오게 하기 위해 봉탕 부인에게 보냈을 때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마르셀의 집 앞에서 그의 하인과 하는 말을 듣고 생루를 향한 신뢰가 사라졌기에 생루가 '배신자'의 역할을 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고 에메는 자신이 섬기는 주인에게 충실하고 이해타산을 따지고 도덕심에 무관심한 사람이기에 돈만 주면 뭐든지 하는 인간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한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알베르틴의 절친인 앙드레 또한 거짓말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앙드레의 진실성을 의심했다. 알베르틴이 결백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알베르틴에 대한 욕망이 아직 남아 있다는 증거이며 만일 알베르틴의 유죄를 믿는다면 그것은 망각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 알베르틴에 대한 욕망도 소멸했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마르셀의 정신 상태가 부재의 고뇌를 감소하기 위해 또는 무의식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만들어낸 산물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대상이 더 이상 존재하는 않는 현실 아래 마르셀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기 위해 그 애착을 다른 대상으로 올기려는 시도를 했다. '망각'은 현실과 지속적인 모순 관계에 있는 우리 마음속에 살아남은 과거를 조금씩 파괴하기 때문에 현실 적응을 위한 가장 강력한 도구 중 하나이다. 망각은 부재하는 여인으로 인한 고통을 잊게 해주고 치유해 주며 자아 상실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망각해야 한다. 이런 회환이나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이다. 마르셀은 어린 시절 질베르트를 사랑하고, 게르망트 부인을 사랑하고 망각했던 것처럼 알베르틴 또한 망각하기를 원했다. 너무 긴 시간적 공백을 견딜 수 없었다. 마르셀은 누군가를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바랐고 그의 곁에서 함께 살 사람을 찾고 싶어 했다. 그것은 사실은 더 이상 알베르틴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로 보였지만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는 표시였다. 우리는 고통을 완전히 겪고 나서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마르셀은 어머니와 함께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난다. 베네치아에서 질베르트의 전보를 받고 질베르의 필체가 알베르틴의 편지로 착각하게 하지만 알베르틴이 살아있다는 소식에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베네치아에서 본 건축물이나 예술작품을 보면서 마르셀의 망각은 진행되고 있었다. 질베르트는 아버지 스완이 죽은 후 어머니 오데트가 포르슈빌 후작과 결혼을 하여 아버지 성을 버리고 포르슈빌 양으로 불리게 되고 파리에서 가장 돈이 많은 상속녀가 되었다. 스완이 살아 있을 때 게르망트 가에 딸을 소개해 주고 싶어 했지만 게르망트 부부는 허락하지 않았지만 부자가 되고 포르슈빌 양으로 불리게 된 질베르트에게 그들은 보호자 역할을 하겠다고 나섰다. 질베르트의 돈 때문에 결혼을 한 생루는 모렐(바이올리니스트)과 동성애 관계를 시작하여 질베르트를 불행하게 했다. 게르망트 공작의 동생이자 생루의 외삼촌인 샤를뤼스 남작은 모렐에게 버림받은 쥐피앵의 조카딸을 양녀로 삼고 캉브르메르 후작의 아들과 결혼을 시키지만 조카딸 올로롱 양은 장티푸스에 걸려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다. 올로롱 양은 샤를뤼스 남작의 양녀가 되어 귀족이 되고 올로롱과 결혼한 가난했던 캉브르메르 후작은 샤를뤼스의 사랑을 받으며 게르망트 가문과 교류를 하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권 <사라진 알베르틴>편은 알베르틴의 도주와 죽음으로 인한 마르셀의 괴로움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현실, 결코 끝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날들을 집요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새로운 자각이 가능하게 된 마르셀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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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권 - 마르셀 프루스트 2024년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그저... 어휴 금쪽이가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모두 모부의 행동의 영향입니다... 되는 것입니다. 저 친구를 좀 달래가며 어케저케 해 보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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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부재와 기억의 왜곡 대한 생각을 하며 읽었습니다. 고통은 우리 마음속을 심리학 보다 얼마나 더 깊이 탐색하게 하는가! 행복할 때면 우리는 생각 속에 내내 이름을 다시 쓰지만, 불행할 때는 더 많이 쓴다. 행복은 오로지 우리 불안의 끝에 달려 있었다.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며, 자기 안에서만 타자를 인식하며, 그렇지만 그와 반대되는 말을 하면서 거짓말하는 존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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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10권까지 읽고 새 책 출간을 기다렸다. 김희영 교수님이 프랑스 갈리마르 플레이마드 전집판으로 번역하여 2022년 프루스트 사후 100주년에 맞춰 전 권 완역 출간을 목표로 준비중이라고 했는데, 약속대로 지난달 마지막 7편까지 완간이 됐다. 2년 전에 읽었으니 이번에 처음부터 다시 읽을까 하고 아주 잠깐 살짝 고민했으나 예전의 피드를 읽는 것으로 마음을 접고, 11권 6편 '사라진 알베르틴'을 읽었다. <책의 구성> 1편 _스완네 집 쪽으로(1, 2권) 2편 _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3, 4권) 3편 _게르망트쪽(5, 6권) 4편 _소돔과 고모라(7, 8권) 5편 _갇힌 여인(9, 10권) 6편 _사라진 알베르틴(11권) 7편 _되찾은 시간(12, 13권) 마르셀이 그토록 사랑하며 질투하며 집착하며 의심하는 알베르틴이 사라진다. 요즘으로 하면 '밀당'과 비슷한데 사랑하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무심한척 굴며 자기 마음을 안보이다가 막상 알베르틴이 사라지자 '나'는 온갖 추측으로 거의 미쳐버린다. 알베르틴이 어디 있는지 알게 되자 절친인 '생루'를 보내보기도 하고 맘에도 없는 질투 유발 편지를 써보기도 하지만 반드시 돌아올거라는 믿음과는 다르게 알베르틴이 죽었다는 전보를 받고 만다. '나'는 알베르틴의 행적을 추적하며 그녀의 충격적인 실체를 알게 된다. 과장도 어느정도 섞여 있겠지만 알베르틴은 '나'에게 갇혀 있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와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나고 '질베르트'의 결혼 소식을 듣는다. 스완이 그렇게 애써서 게르망트가에 소개시키려 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던 질베르트가 포르슈빌양으로 변신하여 생루와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다. 탕송빌에서 '사랑했었다'는 질베르트의 고백은 더욱 '나'를 회한에 잠기게 한다. ''그날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황혼 속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어쩌면 나의 모든 삶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삶이 그렇지. 결정적인 오해와 추측이 사랑을 어긋나게 만들고 전혀 다른 삶을 살게도 만들고. 오랜만에 읽은 프루스트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웠지만, 프루스트 특유의 아름다운 문장과 통찰력을 집착과 질투와 의심에 다 써버린 느낌이라 아쉽기도 했다. 그래도 질베르트와의 대화는 너무 좋았다. 이제 마지막 한 편 책으로 두 권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