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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은 모르겠지만 시인은 현재(혹은 이 시들을 쓰던 당시) 투병중인듯하다. 요양을 위해서라도 산골로 들어가 오두막이라도 짓고 살고 싶지만, 그 오두막을 지을 한 평의 땅조차 없는 게 시인의 현실이다. '나는 이제 화전민이라도 되어야 하는 것인가' (p.87)* 시인의 푸념이자 탄식이다.
원래 시인이 하고 싶었던 건
'내가 산책하고 싶은 곳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이번 생을 횡단하'(p.87)는 것이었으나, 실상은 '내 몸 하나 뉠 지상의 방 한 칸 없는 비애'(p.87)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이 선택한 것은 많은 인물(그가 사랑하고 동경하는 인물들)들을 불러내는 것이다. 말라르메와 김사량과 이태준을, 빅토르 최와 짐 모리슨을, 톰 웨이츠와 에즈라 파운드를......
페르난두 페소아는 120여개의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것은 필명이 아니라 모두 그의 '다른 이름들'이었다. 박정대가 많은 인물들을 불러내는 것은 페소아에게 그 많은 이름들이 필요했던 것과 비슷한이유일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눈의 방식으로. 국경의 제한도, 돈의 한계도 무시하고 어디에나 내리는 눈처럼 말이다. '이 행성의 땅들을 분할'한 '뻔뻔한 자본주의에 예속되지'도 '굴복하지도'(p.87) 않은 채, 그 자체가 그의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시집이다. 『라흐 뒤 프루콩 드 네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 한 없이 가벼운 눈이 춤추며 내려오는 것 같은 이 시들은 한편으로 슬프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성냥불처럼 위태로우나 여전히 혁명을 꿈꾸고 말하는 이의 열정이 폭설처럼 퍼붓기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이 시집을 읽는 내내 『잠수종과 나비』가 생각났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의 기원이자 그가 동경하는 바(혹은 내 욕망이 투영된 나의 동경하는 바)는 백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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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대, 「폭풍우 치는 대관령 밤의 음악제」의 부분 부분을 인용해 문장을 작성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