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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무게 최인호 마인드큐브/2022.3.14. sanbaram
“문장은 무겁다. 여백이 있기 때문이다. 여백은 문장의 존재 근거다.(p.4)”라고 들어가는 말에서 언급하고 있다. 문장 자체만으로 자기의 의사를 모두 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대화를 통해 서로 의사를 표현하고 전달할 때도 몸짓과 표정으로 그 의미를 보충하듯이 문장 또한 여백이 있음으로 해서 숨은 의도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장의 무게> 저자는 이 책에 문장의 무게를 온전히 담지 못했다고 한다. 따라서 여백도 만들지 못했다고 표현 했으나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제대로 전달 된 것 같다. 모두 27편의 소설을 주제를 나타내는 문장이나 표현을 예를 들면서 그 여백에는 어떤 뜻이 있는지 하나씩 설파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독자들도 작가의 의도대로 또 다른 시각으로 여백의 의미를 파악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저자 최인호는 단어의 나이를 묻는 것이 취미다. 그리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은하수를 여행하기도 한다. 지은 책으로 <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비와 바람의 기억>, <모순수업>, <부유하는 단어들> 등 여러 권이 있다.
<문장의 무게>의 모든 내용을 전달할 수 없기에 몇 가지만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 “‘기다린다는 것’, 그것은 기쁨이다. 그것은 미래의 것이며, 결코 과거가 되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반드시 도래할 것이라는 가능성만이 한계에 머무를 뿐, 어떤 것도 갑자기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없다.(p.115)” 만약, 갑자기 다가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기다리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다리지 않아도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기다림은 우리를 절망 없는 행복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그 행복은 미래가 마치 우리에게 반드시 선물하기로 약속하기라도 한 듯 착각하는 것에서 시작되며, 우리를 현실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게 도와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린 왕자>, 생텍쥐페리 :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야.(p.152)” 사막을 아름답게 만드는 우물은 아마도 낙타의 눈물일 것이다. 어른들이 우물이 어딘 가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 하나만으로 묵묵히 걸어가며 흘린 눈물이 우물임이 틀림없다. 그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는 가시 끝에 붉은 꽃을 매단 선인장들이 피고, 낙타의 눈썹 위에 맺힌 눈물방울이 사막의 밤을 하얗게 수놓도록 별들을 불러 모았을 것이다. 사막 위의 붉은 선인장과 밤하늘의 하얀 장미꽃은 낙타가 걸어온 시간이다. 니체는 말한다. 낙타의 짐을 벗어 던지고 사자가 되라고, 니체의 말처럼 낙타 중 극히 일부는 드디어 으르렁거리며 사막을 활보하는 사자가 되기도 한다. 우물이 있는 곳은 한 곳이 아니다. 낙타에게 우물은 자신의 무게를 견디는 눈물 속에, 사자에게 우물은 자신의 발톱을 맹신하는 오류 옆에, 어린아이에게 우물은 때 묻지 않은 상상 속에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 “근대 이후 인간들은 ‘이성이라는 도구로 신을 정교하게 다듬고 아름답게 치장했다. 어떤 시대에도 없었던 완벽한 도구로 완벽한 신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다. 그렇게 신은 죽어간 것이다.(p.164)” 신은 이성에 갇혀 숨이 막히고 그들의 영역을 제한받으면서 한 없이 작은 존재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신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신은 죽어버렸다. 인간의 슬픔과 행복은 저 봄날의 흩날리는 벚꽃을 외면하는 것과 소리를 지르며 감탄하는 감정들 사이에 존재할 뿐, 결코 신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 니체는 알았다. 그렇게 슬픔과 행복을 천천히 오가는 것이, 그것들 중 어느 한쪽만을 갈망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니체는 알았다는 것이다.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 : “주의 앞에 선 개인은 그저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소크라테스를 죽인 것은 악법이 아니라 주의였다.(p.205)”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한 후 민주주의라는 화장으로 얼굴을 가린 중우정치가 판을 치고 있었다. 독점적인 정치가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우매한 대중들에 의해 완성된 중우정치가 단단한 주의로 탄생한 것이다. 중우정치라는 주의와 소크라테스라는 개인이 벌인 전투에서 소크라테스는 참패하고 말았다. 소크라테스는 재판장에서 중우정치를 비판하고 자신을 옹호하기 위해 이렇게 역설했다. 죄와 벌은 우리의 바깥이 아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의 주의가 건네는 말들에 우리는 침묵하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섬>, 정현종 : “사람들은 어쩌다 꽃들을 잃어버렸을까요? 그건 사람들이 더 이상 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노란 꽃을 보고도, 아름다운 향기를 맡으면서도 더 이상 가슴이 설레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p.251)” 사람들이 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버린’ 것이다. 꽃보다 화려한 빛깔과 자극적인 냄새에 그들의 영혼을 팔아버린 것이다. 그들은 자연을 버리고 인간들이 만든 가짜를 진짜보다 더 좋아하게 된 것이 현재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감정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돈키호테>, 세르반테스 : “돈키호테는 ‘불가능한 것들’을 꿈꾸었다. ‘부조리의 파괴, 공주와의 사랑’ 어느 것 하나 가능한 것들은 없었다. 그래서 그건 꿈이었다. 어떤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이미 현재화된 미래일 뿐 그것은 꿈이 아니다.(p.290)” 꿈은 깨지는 것도, 현실화되는 것도 아니다. 나를 미치게 하는 것이 없다면, 나는 꿈꾸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은 온갖 것들이 미쳐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는 꿈을 꾸어야 하며, 그것이 내 삶의 전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꿈을 꾸지 못한다. 그래서 모두가 미친 것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별빛은 몇백 광년 전 누군가의 꿈이었다. 우리가 꿈을 꾸지 않는다면 별의 반짝임도 죽어버릴 것이다. 꿈의 상실은 암흑이다. 잠시 돈키호테의 꿈, 반짝이는 별을 보자고 역설한다.
<지옥>, 앙리 바르뷔스 : “관음증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메두사가 인간에게 심어 놓은 관능이다. 메두사는 머리카락이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여신 아테네가 질투할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웠으며, 결국은 아테네의 질투의 칼날에 머리가 잘리고 뭇 남성들을 유혹했던 그녀의 머리카락은 징그러운 실뱀들로 변하고 말았다. 그래서 메두사의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사람들은 돌로 변해버렸다.(p.300)” 주인공은 가려진 방의 단단한 벽, 가면을 쓰고 있다. 가면은 나를 가리는 것이 아니랄 상대를 더 강하게 훔쳐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관음의 무기이다.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가리는 순간, 우리의 시선은 더 깊어지고 은밀해질 수 있으며 그것만이 진실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는 마법은 너무나 간단하다.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오면 된다.(p.317)” ‘나’가 없는 세상, ‘나’를 버린 세상으로, 나를 슬프게 하는 고통의 덩어리를 떼어내려 애쓰지 말고, 그냥 ‘나’를 버리면 된다. 우리를 알의 세계에 가둔 단단한 껍질은 오직 나의 생각이다. ‘나’이어야 한다는 생각과 그것을 깨고 나온 내 속에 타인이 공존한다는 새로운 생각도 껍질일 뿐이다. 알의 세계에서 고통스러운가? 하지만 나를 안전하게 감싸주고 있는 알을 깨는 것이 두려운가? 두려워하지 말자. 그 껍질은 단지 신기루와 같은 생각일 뿐, 나를 보호하는 천사의 입김이 결코 아니다. 동시에 파괴할 수 없는 괴물 또한 아니다. 걸음의 속도를 늦춰 들꽃 향기에게 시간을 양보하는 것도 알을 깨는 것이며, 패배한 후 눈물보다 웃음을 보일 수 있는 것도 알을 깨는 것이며, 출근길에서 벗어나 훌쩍 여행길에 오르는 것도 알을 깨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성찰>, 데카르트 :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존재는 달라진다. 우리는 이미 결정된 존재가 아니다.( p.337)” 인간은 그냥 아직 그 무엇도 아닌, 어머니 뱃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던 그 모습과 결코 다르지 않은 순수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즉 누군가에 의해 ‘결정되어버린’ 존재가 아니라 오로지 ‘나’에 의해 ‘만들어질’ 가능성으로서의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하는 순간, 순수에서 벗어나 생각의 크기나 무게만큼 혹은 방향대로 무언가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나를 만드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혹여 나의 존재를 파괴하는 생각의 노예가 되어 있지는 않은가? 그 생각의 존재부터 의심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닫힌 방>, 사르트르 : “인간들이여, 가볍게 스쳐가라. 힘껏 딛지 말아라. 혼자서 살아가는 저 단어들처럼 살아가라. 누구도 그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 저 단어들처럼. 직관적이며 감각적인 것들, 어떤 배경이나 은유도 없이, 광기와는 저무나 거리가 먼 저 단어들처럼 살아라. 어떤 것에도 관심이나 관계를 맺지 않으면서, 그저 바람이 나뭇잎에 아주 작은 흔들림의 발자국만 남기고 사라지듯 문장에 영혼과 양심을 남기지 말아라.(p.358)” 그렇게 언제나 명백하게 ‘거기에 있음’으로 살아가라. 그것만이 타인의 지옥에서 탈출의 욕망도 거세된 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하지만 당신만이라도 이 문장이 지금 내뿜고 있는 역설의 냄새에 코를 떼지 않기를 바란다고 한다.
(예스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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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책을 읽으면서 눈길이 가는 문장을 보면, 노트나 컴퓨터 파일로 그 내용을 베껴 간직하기도 한다. 지금은 메모하는 습관이 조금은 뜸해졌지만, 그동안 기록했던 독서노트가 적지 않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게 ‘수집’한 문장들은 내 글을 쓰면서 때로는 그대로 인용하거나, 그 의미를 살려 소개하는 경우가 있다. 대체로 독서노트를 다시 보는 경우가 많지 않지만, 때로 글감을 찾거나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을 때 뒤적이기도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막혔던 생각이 풀려 글을 쓰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책을 보면서 공감이 되는 문장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라는 부제의 이 책에는 모두 27권의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게 인상 깊었던 구절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전하는 내용이다. 책의 전반적인 느낌과 연결시켜 생각을 펼쳐놓기도 하고, 때로는 작가나 소설의 등장인물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상황에 대해서 느낌을 토로하기도 한다. 저자는 ‘문장은 무겁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여백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체로 어떤 문장을 읽고 여백을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독자로서 해당 책에 대헤서 공감하고, 그로부터 환기되는 생각이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책들 중에서 나의 독서 목록과 겹치는 것이 적지 않았지만, 저자가 해당 책에서 환기하는 내용들이 나와는 다른 부분들도 있었다. 물론 그것은 책을 읽는 목적이나 습관 등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여기에서는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해서 하나의 문장으로 규정하면서, 그에 대한 저자의 감상과 인상 깊었던 문장들이 소개되어 있다.
예컨대 프란츠 카프카의 <일기>라는 작품을 소개하면서, ‘내가 이룩해 놓은 것은 고독뿐이다.’라는 문장을 내세우고 있는 식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작품에서는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라는 문장을, 그리고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는 ’인간은 파멸당할 수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는 문장이 제시되고 있다. 이처럼 저자가 내세운 문장들은 해당 작품이나 책들의 본질을 이해하는 핵심어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제시한 작품들의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기보다는 그로부터 촉발되는 저자의 생각을 여백으로 삼아 소개하고 있는 글들이 대부분이다.
저자가 선정한 목록들은 대체로 서양의 소설 작품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니체의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나 세네카의 <화에 대해서>와 같은 철학이나 에세이 류들도 포함되어 있다. 정현종 시인의 시집인 <섬>을 표제로 내세우고 있는 글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시의 한 구절만을 표제로 제시했을 뿐, 정현종의 시나 해당 시집의 감상이 아닌 ‘섬’이 지닌 비유를 저자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박지원의 <연암집>의 한 구절을 들어 자신의 생각을 펼치기도 하고, 동양의 고전이라고 평가되는 <논어>나 <장자>의 구절에서 환기되는 내용을 서술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대상이 되는 책의 ‘문장’에서 저자가 느꼈던 생각들을 펼쳐내는 에세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졌다.
이 책의 이러한 성격을 일컬어 저자가 ‘그 문장들의 여백’을 느끼고, 그에 대한 생각들을 풀어놓았다고 설명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저자 자신이 ‘여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일까, 책을 다 읽은 지금 실제로 이 책의 편집에서 여백이 지나치게 많아 책의 두께에 비해 내용이 소략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동안 독서를 하면서, 나에게 공감이 되었던 분장들을 떠올려보기도 했다.(차니)
*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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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무게](최인호,2022)
총 27권에 책을 읽은 후 감상, 서평 등을 쓴 독서 일지 혹은 서평이다. 책제목이 인문학적인 색채가 가득한 [문장의 무게]이다. 독서를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선택할 만한 책이다. 책에 여백이 많아서 359페이지의 제법 두꺼운 책이지만 금세 읽을 수 있다. 중간중간 생각하고 이해할 시간들 가지라는 듯 충분한 여백을 두었다. 전체 메인 글자는 초록색, 인용글은 보라색이다. 모든 문장들은 색이 있다.
P36 [안나 카레리나] 레빈과 안나가 이성적인 사랑과 도덕에 대해 말한다. 짧은 대화지만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리나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말을 축약적으로 보여주면서 독자에게 안나 카레리나를 권유한다.
P52[보이지 않는 도시들] 젊은 시계공의 이야기는 아주 흥미롭다. 시계를 천천히 혹은 거꾸로 할 수 있다면, 시침 혹은 분침만 가질 수 있다면 사람들은 어떠한 시계를 선택할까? 나는 어떤 시계를갖고 싶은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P71[노인과 바다] 저자는 청새치가 성공을 나타내고, 노인이 청새치를 공격하는 상어떼로부터 청새치를 지키는 행동은 성공을 지켜내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상어가 청새치가 가진 겉살(성공의 겉살)을 가져갈 수는 있으나, 청새치의 뼈대(아름다운 뼈대)는 가져갈 수 없다고 말한다. 성공을 하고 그것을 지켜내고 그 과정에서 성공을 빼앗기기도 하지만 성공했다는 사실은 뼈대처럼 개인에게 남아있다.
P121[고도를 기다리며] '나는 무엇을 기다릴 수 있는가?’ 질문한다. ‘무엇’보다는 ‘기다릴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우리들은 기다릴 수 있을까?
P216[장미의 이름으로]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2]를 찾는 과정을 소설로 쓴 책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2]에서 웃음이 거대한 우주의 에너지라고 생각했다. 웃음은 정숙한 중세 신과 맞지 않다고 판단한 노수사 호르헤는 책을 숨긴다. 읽지도 않은 두꺼운 책 내용을 단숨에 요약하며 심지어는 읽고 싶게 만든다.
P262[연암집] 유사와 상사가 가진 차이점을 설명한다. 유사는 원본을 모방하는 것이고 상사는 모방을 모방하는 것이다. 연암 박지원이 중국 것을 상사하는 유학자들을 비판하며 연암집을 썼다. 이것을 마그리트가 그린 작품과 연결한다. [이미지의 배반-이것은 사과가 아니다.],[두 개의 신비-두 개의 파이프 그림],[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사람의 아들-코가 사과인 남자의 그림]까지 마그리트의 그림은 모방의 모방이 아닌 새로운 예술임을 말한다.
P333[장자] 쓰임 자체를 버리는 것이 삶을 되찾는 유일한 길이라고 한다. “나’를 위한 쓰임도 역시 누군가를 위한 쓰임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 사람이 유용하며 쓰임이 있다는 것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중요한 일인데, [장자]는 쓰임을 버리고 삶을 찾으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쓸모를 찾아 사회에 살아남으려고 하는데 이제 그 쓰임을 버리라고 한다. 그런데 그 삶을 찾는 구체적인 방법이 어떠한지는 제시하지 않는다.
이 책은 27편의 책 중에서 읽은 책이 조금이라도 있는 독자에게 권한다. 책을 읽었지만 도무지 남는 게 없는 독자에게 권한다. 한 권도 읽지 않았다면 이 책들 중에서 목록을 만들고 싶은 독자들에게도 좋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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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읽는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활자중독증 같은 것이 있었고, 명승지를 가면 그 곳에 새겨진 안내판부터 본다. 심지어 학교 다닐때는 책을 읽으며 밥을 먹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여전히 일반적인 직장인 중에서는 책읽기를 굉장히 많이 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집에 책이 수 천권 정도 되는데 그래도 책을 여전히 사 모으고 있다. '사 모은다'는 표현은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김영하선생님이 책을 읽으려고 사는 것보다 책은 사놓은 책 중에서 골라 읽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나 역시 그렇다.
문장에는 힘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무겁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비슷한 표현 같다. 여백이 있기 때문이라는데 그 말 역시 반어적인 의미로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유현준 선생님이 그랬다. 건축이란 결국 (사람 또는 사물이 살아가거나 놓여질) 빈 공간을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채우고 만들어낸다고. 문장 역시 그런 것 같다. 결국은 생각의 힘을 주기 위해 그것을 쓰고 만들어 낸다. 문장이란 단어들의 연결이 무조건 문장이 되는 것은 아니며, 문장이라고 반드시 여백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많은 단어를 연결한다고 할 지라도 그 속에 울림이 없다면, 무게가 없다면 그것은 여백을 갖지 못한 단순한 단어의 나열에 불과할 것이다. 여백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생기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마치 추사의 세한도처럼 말이다. 이 책 <문장의 무게>에 실린 작가들의 문장은 모두 그렇다. 첫 키스보다 진한 떨림을 주고 있고, 문장들 속에서 열병을 앓는 젊은날을 보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책의 판본이 들고 다니면서 읽기에 딱 좋았고, 무엇보다 책 자체에도 여백이 많은 것이 한 챕터씩 읽으면서 생각하게 만들었다) 책 속에는 27권의 고전 속에서 길어올린 울림이 큰 문장, 인생을 담고 있다. 고전 읽기를 좋아하지만 이 책 속에 나온 고전을 사 놓기만 하고 읽지 않은 책이 더 많다. 내가 읽은 책 위주로 그 속에서 느낀 감정을 서평에서 정리하고, 여기 나온 27권의 책이라도 반드시 내 남은 생에 꼭 다 읽어내려 가고 싶다. 며칠 전 나이를 만나이로 바꾼다는 것을 보고 내년부터 갑자기 2살이 어리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12월생이라 또래보다 빠르게 두 살을 먹었는데 그것을 내려놓게 되었다. 앞자리가 4자로 바뀌면서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줄 모른다. 단숨에 두살이나 어려지면 앞자리마저 바뀔 수 있다. 사람이 표현하는 언어는 그렇다. 무엇을 만들어낸다. 우리 모두 1월생이나 12월생이나 심지어 '빠른'이라고 불리는 그 다음애 2월 28일 생도 함께 언어로 같은 '학년'이라고 묶어버리니까 그렇게 우리는 살아갔다. 언어는 결국 그것을 말하는대로, 쓰여진대로 만들어가는 힘이 있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재수 시절 대학생이던 친구집에 가끔 주말이 되는 금요일~토요일 찾아갔다. 지방에서 같이 서울로 올라왔지만 우리 둘은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힘든 무게였는지 모른다. 원래 둘 다 책을 좋아했지만 대학생인 친구의 서가에서 이 책을 보면서 그때까지 서양문학의 세계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특히 제목에서 주는 무언가 '있어 보임'에 끌렸다. 대학생이 되면 나도 까뮈의 <이방인>이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봐야겠다고 했는데 사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20대 초반의 나에게는 제대로 사랑을 해보지 못했고, 또 나름 순수한 시절이었기에 크게 와닿지 않았다. 또 곧 군입대를 앞둔 나에게는 말그대로 참아야 했던 책이었다. 오히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원제 : 노르웨이의 숲>은 조금 더 와 닿았다. 세월이 20년 가까이 지나고 이제는 내용도 그 속에 문장도 희미해졌지만 몇 구절 머리속 여백 한 켠에 들어가 있음을 보고는 과연 멋진 책이구나 하는 생각도 해봤다. 읽고 싶은, 읽어야 할 책이 너무나 많기에 다시 읽을지는 기약할 수 없지만 기회가 되면 백세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쉰살이 되기 전에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다. 왜 밀란 쿤데라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삶을 가볍게, 그토록 가볍게 만들었을까? 토마시는 '성적인 우정'이라는 신념으로 많은 여성들과 육체적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테레사와 결혼한 후에도 그의 '성적인 우정'에 관한 신념은 깊게 박힌 가시처럼 뽑히지 않는다. 새로운 여인 삽나와의 관계, 육체적 탐닉에 가까운 그 가벼운 존재들의 행위에서 밀란 쿤데라는 그것의 이유를 니체의 '영겁 회귀' 사상에서 찾은 듯이 보인다. '한 번 일어난 것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것과 같다.'는 말처럼.
밀란 쿤데라는 '소련의 침공'(지금 또 그렇다)과 민주화의 억압이라는 삶의 무게, 그 속에서 그 무게를 고스란히 받아내야먄 했던 지식인의 고뇌, 그것들의 무게를 아뭣도 아니라는 듯이 덮어버린 은유적 기만으로서의 육체적 사랑을 통해 '프라하의 봄'을 갈구했듯이 우리도 뜨거운 사랑을 해야 한다. "당신의 힘을 가끔 내게 쓰지 않는 이유가 뭐야?" "사랑한다는 것은 힘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지." 여전히 나에게 남아있는 문장이었다. 책에서 다시 꺼내 읽고 이제는 그런 감수성이 지난 나이라 조금은 또 다르게 읽혔다. '삶의 큰 재앙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리라.는 저자의 말이 와 닿는다.
얼마 전 집에 있는 외대 이철 교수님의 <안나 카레니나> 범우사판이 있는데 번역도 오래됐고, 아무래도 이 책은 여성 번역가의 필치로 읽는 것도 좋아보여서 민음사 판으로 다시 구입을 했다. 아주 조금 읽어서 이 책을 완독해 낸 다음 여기 안에 있는 내용도 보리라 마음 먹었다.
'그대가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은 이미 여행을 통해 모두 배웠네' 바야흐로 코로나 엔데믹이 다가오고 있다. 2019년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생한 코로나19는 2020년 봄부터 전 세계를 예측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었다. 어느덧 2년 마스크와 단절 속에 살아가던 우리는 결국 코로나와 공생하게 되었고, 서서히 일상생활의 회복을 앞두고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자유로운 해외여행이었다. 2019년 가까운 대만과 일본을 다녀 왔던 것이 후회될 정도로 '여행 마렵다'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여행이 그리웠다. 우리는 누구나 여행을 꿈꾼다. 낯선 곳에서 다른 생각과 행동양식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며, 또 아무도 날 모르는(물론 어딜가나 한국 사람은 꼭 있지만)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여유로운 테라스에서 커피 한 잔은 우리를 새롭게 만든다. 또한 그런 여행이 아니라 익스트림을 즐기고 사막 위의 모래바람을 맞으며 스핑크스를 찾아가고, 티베트 고원과 몽골 사막을 누비는 사람들도 있다. 다 좋다. 안정된 대기업 직장인으로 어느덧 10여년 넘게 살아가고 있다. 가끔은 용기와 새로움, 낯선 곳에 대한 도전, 두렵지만 설레이는 첫 발을 떠올리고는 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지켜야 할 것이 있어서(많지는 않다) 결국 도전하지 못하고 주저앉고 일상과 타협한 채로 살아가지만 그것을 조금이나마 충족시켜주는 것이 여행 같다.
운명이란, 우리가 아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는 길을 믿는다는 그말. 그래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도 믿으며 작지만 앞으로 한 발, 한 발 내딛고 가야겠지.
다른 책에서 이미 접한 바 있는 연암의 '비슷한 것은 이미 진짜가 아니다'라는 말. 연암은 반남박씨 조선 후기 몇 안되는 문벌 귀족의 자제였다. 그의 집안은 판서와 고관대작이 즐비했고, 훗날 그가 <열하일기>를 쓸 수 있었던 것도 청나라에 사은사로 가는 화평옹주의 부마 금성위 박명원이 그의 삼종형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기득권적인 삶이 아니라 조금은 삐딱한 삶을 살아갔기에 오늘날 역사는 그를 기억한다. '옛것을 모방하여 글을 짓되, 거울이 형상을 마주하듯 한다면 닮았다고 할 수 있을까? 실체의 좌우가 반대되니 어떻게 닮았다 할 수 있으랴. 그림자가 물체를 따라다니듯 한다면 닮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낮에는 낮앵이가 되었다가 해가 기울어질 때는 키다리가 되니 어찌 닮았다고 할 수 있으랴.' ---연암집 <녹천관집서> 당시의 선비들을 문체반정으로 빠지게 만들었던 연암의 문체는 당시에는 정조의 정치적 사유나 또는 여러가지 이유로 주가 되지는 못했지만 당시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고, 오늘날에는 '한국의 문장'으로 남았다. 뒤에 돈키호테에도 나오지만 '도대체 꿈꾸는 자와 꿈꾸지 않는 자, 누가 미친거요?'라는 말처럼 꿈을 꾸고 생각해야 변할 수 있고, 변하면 언젠가는 통하게 된다.
데미안의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같은 유명한 문장이 담긴 책과 그 속의 많은 말들, 그리고 생각하게 만드는 여백.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고 하는 장자의 말처럼 때로는 짧은 한 문장이 수 천년을 살아 또 수백, 수만가지의 생각을 낳게 만든다.
책을 읽으며 책 속에 나오는 고전만이라도 완독해 내고 싶다고 생각했고, 많은 글을 읽으며 삶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됐다. 고마운 책이었다.
* 예스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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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나이를 묻는 것이 취미, 라는 작가의 소개 글에서 그의 단어와 문장이 궁금해진다. 그의 문장엔 어떤 우주가 있는지, 또 그 무게를 이기고 우린 우주를 둥둥거리며 유영하게 될는지, 기대됐다.
이 책은 작가가 선택한 27개의 동서양의 고전 혹은 근대 작품 속에서 우주를 품은 묵직한 문장을 펼쳐 놓는다. 모든 문장의 울림이 내게 도달했다고 할 수 없으나 그 자체의 무게로 우주를 연결하고 있다. 어째 쓰고 보니 철학자 흉내를 내고 있지만 지금 내 기분이 그렇다. 모두 마음을 울리진 않지만 그대로 의미는 사유하게 되는 문장들이다.
"도덕은 내일을 생각하지만 사랑은 오늘만 생각합니다. 사랑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진공상태에서만이 사랑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행위가 아닌 상태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42쪽, 사랑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의 공포로 인해 비도덕적인 것이 되어가는 것이지요
머리를 비장하게 밀던, 오늘만 산다던 영화 <아저씨>에서 전혀 아저씨의 외모를 가지지 않은 죄로 수많은 아저씨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던 원빈의 말은 결국 사랑이었던가. 안나가 레빈에게 불같은 외침으로 남겨야 했던 그 사랑처럼.
"청새치를 잡는 싸움에는 목숨을 걸 필요가 없을지라도 청새치를 지키는 싸움에는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77쪽, 인간은 파멸당할 수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
성공이 뭔지도 모른 채 불나방처럼 날아들어 날개가 부서져라 흔들어 대지만 결국 원 없이 날갯짓을 해본 것으로 만 만족하고 추락하는 내 성공은 톨스토이를 빗대 작가가 지적하는 지독한 외로움과 포기된 욕망들, 은 아닐까. 그래서 성공의 골격도 모른 채 파멸과 패배의 속살을 생뚱맞은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관광객은 '나'일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이 어지럽게 섞여든다.
"언제 우리에게 도착할지 알 수 없는 것들이 가진 시간의 거리가 우리의 삶의 길이를 만든다." 111쪽, 이 엄청난 혼돈 속에서 분명한 건 딱 하나야.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삶의 실존은 어찌 됐던 타자의 끌림이 있건 없건 우린 그렇게 가거나 기다리면서 혼돈 속에 머물면서 누군지도 모를 그 '고도'를 기다리는 건 아닐지.
카프카의 고독, 안나의 사랑, 프란츠의 탐닉, 노인의 성공과 파멸, 시계공의 혼돈, 보르헤스의 망각, 조르바의 자유, 존재의 기다림, 죽어버린, 아니 죽여버린 신이나 인간을 파국의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 있는 화, 삶의 희망, 안인가 밖인가 그리하여 나는 모래를 파내고 있긴 한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쾌락을 품는 지옥 자체라는 의식, 알을 인식하는 망상 그 어느 것 하나 놓치면 안 될 문장이 가득한 책들이 유혹한다.
책장을 넘기는 손이 조금 바르르 떨린다, 아니 전율이다. 왜 작가와 같은 책을 읽었음에도 이토록 뒷골이 서늘하거나 팔에 소름이 돋아나고 심장이 불규칙하게 빠르고 거칠게 뛰게 만드는 나는 길어 올리는 문장을 찾지 못하는 것일까. 그저 식탐 정도의 욕구는 무념무상으로 책장 넘기기에만 바빴던 나의 독서가 초라해진다. 고전과 세상의 수많은 책들이 감추고 있는 미궁 속 은유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길, 우린 작가의 어깨에 올라타 먼 곳을 응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왔다 오늘 사라진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말 것, 영원히 간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가슴에 새기는 것조차 포기할 수는 없다. 가슴에 새기는 미지의 그 무엇, 오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그것만이 꿈이다." 298쪽, 꿈꾸는 자와 꿈꾸지 않는 자, 도대체 누가 미친 거요?
문장 하나로 이리 깊고 넓은 철학적 사유를 전달하는 책이 있었던가. 정말 소중하게 품어야 할 책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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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무게
이 책을 살펴보기 전에..
최인호 단어의 나이를 묻는 것이 취미다. 그리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은하수를 여행하기도 한다. 간혹, 어설픈 문장과 문장을 연결해 우주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우주는 어릴적 ‘일기의 문장들’ 이 만든 우주보다 볼품없고 아주 작은 것들뿐이었다. 『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비와 바람의 기억』, 『모순수업』, 『부유하는 단어들』, 『지독 재독』, 『1등급 공부습관』,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공저) 등이 있다.
연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연세대 대학원 고전문학을 전공하였으며 여행 자유화 조치 이후 1세대 배낭여행족으로 20년 동안 홀로 40국 이상의 나라를 돌아다녔다. 밥보다 책이 좋아 매일 책을 읽는 책벌레인 저자는 중국, 일본, 미국 등 흔한 여행지는 물론이고 인도, 티베트, 페루, 아르헨티나 등 익숙한 이름이지만 막상 여행하기 쉽지 않은 곳들을 여행하였다. 여행을 하면서 경험하고 느낀 상념을 책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그가 가진 철학과 그가 읽은 도서의 글들을 연관시키면서 풀어냈다. [예스24 제공]
책 속의 문장들을 조용히 옮겨 적으며 마음의 위로를 얻는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읽고 쓰는 시간이 나를 재생시키고 살아갈 용기와 힘을 더해준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다른 사람은 무슨 책을 읽는지 어떤 문장을 수집하는지 기울이는 관심이 나에겐 지극히 당연한 현상 같아서 심심치 않게 기웃거리며 살펴본다.
친절히 기꺼이 내가 사랑한 문장을 독자들과 나누며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이 책이 좋다.
조용히 사색해 볼 수 있는 문장들과 책 이야기는 언제나 나를 더 근사한 곳으로 안내하는 기분이 든다.
"운명이란, 우리가 아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는 길을 믿는 것이라네." p124
이미 정해진 길.. 이 길이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속박과 한계 안에 날 가두어놓고서 산다.
주체성이 나에게 제대로 있지 못해 보인다.
현실에 안주하며 체념하듯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을 때도 많다.
타고난 운명 탓이란 비겁한 변명을 하면서 오늘도 숨어사는 내 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해진다.
이미 난 불운을 타고 난 것인가를 단정 짓고 살아가는 꼴 같아 더 비참하게 나 자신을 몰아가는 꼴이다.
우주의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고 내 삶을 가만히 지켜보면 왜 그렇게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그러게 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부정적이고 시시한 것 뿐인지 모르겠다.
내가 걸어온 시간, 걸어갈 시간들을 스스로 의미없게 여기고 살아갔던 하루가 무사히 안전 궤도 안에 놓이길 바라고만 있어야 하나.
좀 더 꿈을 꿔도 좋을 들썩거림과 호기로움, 유쾌함이 좀 더 첨가될 수 있는 삶에 관심을 기울여봐도 좋을 내 삶이란 걸.
"사람들이 말에는 늘 칼이 들어있고 피의 냄새가 진하다. 그런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어 말을 한다면, 결국 나는 '나'를 잃게 될 것이며, 나는 '나'를 잃게 될 것이며, 나는 나의 말에 찔릴 것이다." p274
내뱉는 순간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의 실수는 이어진다.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제어하기 힘들다.
말이 가진 묘한 속성 속에 파괴적인 것이 지나치게 많으므로 침묵을 배우는 것이 오히려 무해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말을 하고 사는지 내 말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면 가까운 가족들에게 공격성 언어로 시비를 거는 듯한 거슬리는 말들로 덜어낼 수 없는 거친 말들로 실수를 아니 알고도 하는 말들이 많았다.
말이 사라진 세상으로 떠날 수 없기에 폭력과 파괴속에 기생해서 살아가야하나 싶어 마음이 씁쓸해진다.
좀 더 경계하고 덜어낼 말들을 생각하며 살자.
나와 상대를 흔들어 놓을 혼란한 말들로 우리 사이를 더 틀어 놓는 게 아닌 말로서 단물을 마신 듯한 기분 좋음과 선순환이 일어날 수 있는 좋은 기운을 내가 받고 싶은 만큼 내가 줄 수 있는 말들로 순화하며 살아가자.
평생동안 이 경계는 흐리지 않고 매번 넘어지며 연습해야 할 끝맺지 못할 숙제가 되지 않을까.
역시나 고전이 주는 강한 울림이 좋다.
나에게 닿기까지가 이처럼 손쉽고 간편한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그저 읽기만 하면 되는 것을.
문장을 수집하고 이를 위해 늘 읽고 사는 삶을 동경하고 지향한다.
활자 속으로 좀 더 자유롭게 유영하기 위해 오늘도 읽고 기록하며 삶을 남긴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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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가끔 생각한다. 새로운 책이 쏟아져나오는 이 시대에 고전을 읽는다.. 고전이라는 책이 아닌, 한 문장을 통해서도 가물어가는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 단비를 뿌려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글을 쓰셨다고 한다. 단어의 나이를 묻는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은하수를 여행하기도 한다.
진짜 오랜만에 있는 문학책인듯하다. 매번 자기계발서, 육아서, 현대소설만 있다가 고전에 관련된 책은 참 오랜만이다 그런 면에서 쉽게 읽히면서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런 부분은 읽고 또 다시 읽게 된다. 내가 읽었던 책들이 고전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도 있고 고전이라고 생각해서 알고 있지만 읽지 않은 책들도 있다. 왠지 평소에 어렵게만 느껴지는 고전을 이렇게 만나니까 더 친근한 것 같기도 하다. 꿈을 쫓아 여행을 떠나는 것은 사실 정말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두려움과 함께 떠나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신기루를 뚫고 그저 끝까지 가는 가는 것만이 운명을 이끄는 방법이다.
고전 속의 삶의 답이 있다. 깊게 생각하게 해주는 힘이 있다. 고전, 철학 에세이는 처음 보면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읽고 또 읽다보면 그게 이해되는 순간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읽다보면 일상 속에서 고전을 깨닫게 된다.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또 직관적으로 생각하면서 쉽게쉽게 넘기는 요즘 현대인들에게 추천해주고싶은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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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랑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지쳐간다. 몸도 아프고 삶에 있어 더 추구할 수 있는 것도 없어보이고 그렇게 덧없이 다소 괴로운 시간과 함게 늙어간다. 사랑이라는 것이 꼭 이성의 사랑을 뜻할 필요없다.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그것을 추구하고 그렇게 삶을 춤추게 한다면 살아있는 생명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일 것이다.
명작 노인과 바다 부분에서 나왔던 문장인데, 외로움을 견딘 순간에만 찾아오는 성공. 무리를 지어 이동하다보면 무리를 지어 어디가에 도착한다. 나만의 길이 아닌 그냥 나도 모르는 어딘가 다른 사람이 가는 것 같았던 그 길에 도달한다. 그리고 아주 무사히 아무일도 이루지 못하고 죽음에 도달한다.
이것을 방지하려면 외롭더라도 자신의 길을 가야한다. 그 과정에 고통이 있더라도 견디며 가야한다. 그러다 보면 노인의 거대한 물고기처럼 자신의 삶이 찾아온다.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은 '패배'가 아니다. 그것은 파면이 없는 삶이다. 무사히 살아서 무사히 죽음에 도달한 삶.
육지를 터나지 않고 배를 썩히면서 내 몸도 썩고 그렇게 무사히 아무일 없이 죽음에 도달하는 것이 가장 두려워 해야 한다. 지금 하지 않아도 언젠가 강렬하고 눈부신 삶이 나타날 것이라 망상하며 또 뭔가를 미룬다. 미루는 이유는 지금은 시시해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지금 하기에는 너무 거대하기 때문이며, 지금 하기에는 그냥 왠지 싫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무나도 내가 실행하기 좋은 타이밍을 기다리며 그 타이밍이 오면 내 삶은 강렬하게 빛날 기회를 얻을 것이라 망상하며 무사히 아무일도 없는 삶을 살다가 죽음에 도달한다.
파멸이란 말이 극단적으로 들리지만, 우리 삶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다. 실패도 아니다. 치열하게 사는 것이다. 아름다운 전체 삶의 완성을 그려가지 말고 치열하게 살자.
치열하게 살다 가는 30살이 무사히 아무것도 이루지 않고 살다 가는 100살 보다 더 나은 삶이 아닐까?
요즘은 다소 춤에 대한 시각이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춤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거부감음 상당하다. 어린아이를 보다 보면 틈틈히 즉흥적인 춤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다. 춤은 내가 가장 정직할 수 있는 언어다. 그래서 우린 태어나자마자 춤을 춘다.
세상이 정한 여러 규칙들로 힘든 삶에 춤이 있다면 누구나 이해하는 나만의 언어로 세상과 마음것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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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거장들의 문학작품의 무게있는 부분을 삽입하고 작가의 시각을 첨한 책이다. 책 한권이지만, 27개의 문학작품이 실려 있고 짧고 깊게 짧은 호흡으로 읽어나갈 수 있다.
최근 허무주의 그런것에 조금 빠졌었다. 나이가 30대에서 40대가 되어서 그랬을까? 그간 쫒았던 것들의 몇몇이 허상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앞으로 남은 삶에대해서도 허무함이 있었다. 그때 읽었던 책에서 삶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그 중 하나는 사랑을 선택하는 것. 사랑에는 남녀의 사랑도 있을 것이고 그 결실로 얻은 자식에 대한 사랑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사랑이든 사랑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 목표중 하나다. 인류애적 사랑, 보편적 사랑도 좋고, 이성의 사랑도 좋다. 우리가 태어난 목적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유전자 입장에서 보면 번식이 목적이다. 이젠 동성끼리도 아이를 만들 수 있는 단계까지 왔으니 제한없는 사랑의 시대도 펼쳐졌다.
외로움이란 어쩌면 죽음과 가까워지는 기분이다. 무리를 짖는 초식동물이 외롭게 되었다면 곧 죽음이 임박했을 것이다. 밀림의 왕 사자 정도도 그 신체가 강력하지 않으면 하아에나 등에게 죽음을 피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외로움을 피하려 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짐승이면서 짐승과 다른 사람이다. 사람은 태어난 능력뿐 아니라 키워낸 실력으로도 살아간다. 그 실력은 우르르 몰려다닌다고 생겨나지는 않는다. 그런 협업이나 시너지의 순간도 필요하지만, 그 시너지를 낼 기본 실력은 대게 본인의 외로운 시간을 견뎌낸 결과로 나타난다.
'숨결이 바람 될 때'라는 책과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 인생무상은 일단 베이스로 깔고 가는데 생명은 투쟁이 본질이다' 이런 생각. 도전하고 실패, 파면하고 또 도전하고 투쟁하는게 생명이다. 죽지않으려 애쓰고 굴복하지 않으려 애쓰는게 생명이고, 그런 생명을 즐기다 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죽을때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할까? "와! 드디어 무사히 아무것도 안하고 죽음에 도착했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근은 기분 좋은 것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기분이 좋은 것은 정신적 균형을 위해서 필요하긴 하지만, 몇시간이면 사라질 기분보다 실질적 현실을 개선하는 것에 관심을 더 두어야 한다는 것. 단지 살아 있고, 오래 사는 것, 기분좋게 오래 사는 것, 이런 것이 목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처럼 생명처럼 사는 것이다. 문어는 알을 낳으면 죽을 줄 알면서도 알을 낳고 죽는다. 사마귀도 자칫 잘못하면 암컷에게 먹힐 수 있음에도 목숨을 걸고 짝짓기를 도전한다. 무사히 아무일 없이 오래 살아남는 것. 무시히 아무일 없이 죽음에 도달하는 것. 그렇게 살아 내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리셋은 과거의 것들을 삭제하는 것이 시작이다. 새롭게 되는 것, 망각. 난 단기 기억상실을 경험해봐서 이것의 효과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기억이 사라지면 불안하거나 절망적이지 않다. 그냥 시작할것만 있다. 이 세상에 시작할 것만 있는 상태가 된다. 호오포노포노에서 말하는 기억을 지우는 주문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용서해주세요.'를 말해보자.
난 탱고라는 춤을 추고 있다. 이 문장을 다시 생각해봤다. 춤을 추려면 자신의 감정과 본능을 자유롭게 허락해야한다. 그래서인지 춤을 추고 나면 괜찮다. 그냥 괜찮다.
코로나로 2년이 넘게 탱고를 추지 않고 지냈다.삶에서 상당히 중요한 것이 사라져버렸던 것 같다. 삶에서 중요한 활동을 잃었고, 정신적으로 힘들고 흔들린 삶을 살았다. 이제 코로나가 풀려가고 더 이상 아무것도 안하고 살 수 없기에, 다시 탱고를 하고 있다.
많은 동물들은 기본 본성이 튀지 않고 싶은것이 있는 것 같다. 그러면 무리속에 숨을 수 있고 내가 타겟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인간도 어느 시점까지는 이것이 잘 작동했었다. 현대사회에서는 이렇게 산다면 그저 그런 삶을 살면서 의미를 잃게 된다. 인간은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유전자 목적인 번식에 성공했다면 좀 더 심리적으로 편안할 수 있지만, 그것이 아니어도 인간은 의미없는 것들에 고통스러워 한다. 의미 없다는 것은 존재할 필요가 없기도 하다 생각할 수도 있다. 가볍게 짧은 호흡으로 읽을 수 있지만 내용은 가볍지 않아 좋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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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무게』 최인호(저자) 마인드큐브(출판) 독서에세이
문장의 무게를 읽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좋은 글귀와 문장들을 필사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문장의 무게는 작가 최인호님이 고전을 읽으며 그 안에 담긴 문장들을 다시 끄집어냄으로써 문장의 무게 말 그대로 그 무게에 대해 느껴볼 수 있는 책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삶에도 여백이 있듯이 문장에서도 무게가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담아내지 못했다는 작가님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또한 문장의 무게에서 작은 여백이라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삶을 내 문장의 커다란 여백이라 부를 것이라는 작가님의 말이 마음속에 더 와닿았던 이유는 모든 것에 완벽함이란 없었고 여백이 주는 의미를 다시금 헤아려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7개의 소설 속에는 내가 감명 깊게 읽었던 소설들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작가는 어느 부분의 문장 속에서 무게감을 느꼈을지 더 궁금증이 몰려왔습니다.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카레리나를 최근에 읽었을 때 난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그토록 자신을 파멸시킬 줄이야... 사랑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한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간 건지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문장의 무게를 읽으면서 고전 작품이 많이 나오는데 왜 고전이 고전일 수밖에 없는지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책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계속 읽어야 하는지 한 문장 한 문장 읽으며 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좋은 작품은 분명히 그 안에서 삶의 내면과 인간 내면의 본질 삶에 대한 우리들의 자세 어떤 길로 나아가야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지침서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랬기에 고전의 한 문장을 통해서도 이 책은 과연 이 책이 옳았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장의 무게가 이토록 클 줄 그땐 미쳐 알지 못했지만 비로소 문장의 무게가 어떤 무게이고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이번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 되었습니다. 필사하기에도 좋은 책 문장의 무게를 읽고 삶의 진정한 무게를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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