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12)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75%
  • 리뷰 총점8 25%
  • 리뷰 총점6 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10.0
  • 40대 9.0
  • 50대 9.0

포토/동영상 (5)

리뷰 총점 종이책 구매
이 땅의 모든 조선인 청년 최영우를 기억하겠습니다.
"이 땅의 모든 조선인 청년 최영우를 기억하겠습니다." 내용보기
태평양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필름에서 미군이 일본군을 향해 맹렬히 진격하고 전투에 패한 일본군 포로들이 알몸으로 행렬을 지어 이동하는 장면을 볼 때면 세상의 악이 심판받고 정의가 이루어진 것 같은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 일본군 포로의 행렬 속에 나의 할아버지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남원에서 자라고 전주공립공업전수학교를 졸업한 스무살의 엘리
"이 땅의 모든 조선인 청년 최영우를 기억하겠습니다." 내용보기

태평양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필름에서 미군이 일본군을 향해 맹렬히 진격하고 전투에 패한 일본군 포로들이 알몸으로 행렬을 지어 이동하는 장면을 볼 때면 세상의 악이 심판받고 정의가 이루어진 것 같은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 일본군 포로의 행렬 속에 나의 할아버지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남원에서 자라고 전주공립공업전수학교를 졸업한 스무살의 엘리트 청년 최영우는 일제강점기 마지막 시기인 1942년, 태평양전쟁으로 강제징집이 임박한 때에 가족을 대표해 일본군 군속 포로감시원으로 자원하여 동남아시아로 떠난다. 만 2년간 복무하고 돌아올 예정이었던 여정은 부산을 출발하여 사이공과 싱가포르를 지나 인도네시아에 도착해 일본군이 점령한 동남아시아의 네덜란드, 영국, 호주, 인도군 등 다양한 전쟁 포로들을 관리한다. 조선반도가 좁았던 꿈많은 청년은 동남아시아의 이국 풍경에 마음이 넓어지고, 서양의 신문물을 육안으로 확인하며 감탄하기도 하지만 전쟁은 모든 것을 뒤섞어버렸다. 인도네시아 원주민들은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킨 일본군을 환영했고, 일본군 군속으로 따라온 조선의 청년은 위대한 아시아인이라는 일본의 선전과 착취당하는 식민지 고향의 현실 사이에서 당황했다. 곳곳에 설치된 위안소에서 조선인 여인들을 발견했을 때엔 아픈 가슴을 쥐어뜯었고, 자신이 관리해야 하는 포로들에게 충분한 먹을 것을 공급할 수 없어 영양실조로 죽어나가는데도 강제노역을 시켜야 할 때에는 같은 인간으로서 괴로워했다. 전쟁은 여기서 또 한번 최영우의 삶을 뒤바꾼다. 일본이 항복하여 조선 땅에서는 만세의 물결이 홍수처럼 범람할 때, 어느날 갑자기 이국에 남겨진 조선인 군속들은 일본군과 같이 전범 혐의자가 되어 수용소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는 사랑하는 현지 여인과 작별인사도 못한 채 헤어지게 되고 싱가포르의 전범 수용소로 이송되어 자신이 관리했던 포로들보다 훨신 더 비참한 처우를 받으며 2년을 보내면서 감옥의 철문이 열릴 때 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무기력한 자신을 추스리며 희망을 잃지 않고 일기를 써내려갔다.

 

이 책은 꿈많은 조선 청년 최영우가 틈틈이 써 놓은 당시의 일기를 훗날 외손자가 받아두었다가 그가 작고한 이후 외조부의 행적과 당시 상황을 조사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찾아 나선 청년의 눈으로 당시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신세계를 향한 이방인으로서, 노예가 된 식민지 조선의 청년으로서, 서양 제국을 물리친 위대한 대동아공영권이란 선전의 홍수 가운데 서 있는 한 동아시아인으로서, 절대적 약자의 자리에 처한 포로들을 관리해야 했던 한 인간으로서, 2년간 아무도 변호해주지 않는 파란 눈 이방인들의 재판정에 생사의 결정을 맡긴 채 쇠창살 밖 고향을 그리는 전범 혐의자로서 아직 20대 초반의 나이에 있는 한 조선 청년의 눈이 동시다발적으로 교차되며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빠지게 된다.

 

저자 최양현은 영화 감독이자 제작자로서 외조부의 일기를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뿐 아니라 철저한 자료조사와 취재를 통하여 당시 상황을 개인적 차원에서 부터 국제정세 까지 다각도에서 설명함으로써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의 이야기로 되살렸다. 나라 빼앗긴 조선인이면서도 일본제국의 2등시민. 결코 원치 않았지만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최선의 결정을 내려 전쟁에  나갔을 뿐인데 전범이 되어 처벌받아야 했던 운명. 내가 선택했지만 선택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아이러니한 운명은 조선인 청년 최영우를 시대의 폭풍 한가운데로 내던진다. 일본의 패망이 임박한 시점, 포로 하나가 그에게 한국인 아니냐고 물었을 때 자신이 누구인지 한 마디로 말할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답한 것은 그에게 두고 두고 후회와 부끄러움으로 남았다. 21세기 현재 모든 역사의 경과를 알고 독립국이자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 사는 나는 그의 선택에 감히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는 한평생 자신의 운명을 탓하지 않았다. 만신창이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한국전쟁과 독재와 민주화와 경제발전의 격랑 속에서 묵묵히 책임을 다한 뒤 이 땅을 우리에게 물려준 다음 자신의 특별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 누군가 기억해 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외손자의 손에서 다시 살아난 그의 이야기를 통해 조선인 청년 최영우는 이제 나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풍요롭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을 누리는 나는 암울한 시대를 견뎌온 모든 조선의 청년 최영우를 사랑과 존경의 마음으로 기억할 것이다.

h********4 2022.06.08.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