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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한 주 앞두고 여동생 내외가 부모님 댁에 들러 이틀 밤을 지내고 돌아갔다. 그 밤들 중 한 날 아버지가 토사곽란에 시달렸다. 그런 아버지를 따라 화장실에 들어갔던 엄마 또한 주저 앉아 일어서지 못하였다. 그 밤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란 여동생이 내 출근 시간을 기다렸다가 전화를 해 그 모습을 상세히 설명했다. 자신들이 아니었다면 돌아가셨을 수도 있었다며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기세였다.
나는 동생의 말이 시작될 때 잠깐 미간을 찌푸렸지만 동생의 말이 계속되면서 점점 차분해졌고, 동생이 거친 호흡과 함께 말을 끝마쳤을 때는 거의 평정의 상태가 되었다. 곧 그리로 가겠다는 말과 함께 몇 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거기에는 죽음의 상황도 포함되어 있다. 아버지와 나는 어떤 상황도 어떤 죽음도 받아들일 준비를 이미 오래전 끝내놓은 상태라는 말이었다.
사 년 전 폐암 4기 선고를 받은 이후 병원을 오가는 동안 아버지는 내가 운전하는 차를 이용했다. 지난해 인지 저하 판정을 받고 희귀암의 방사선 치료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세 달 전부터는 일주일에 세 번 투석실에 들러야 할 때도 아버지는 대부분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탄다. 폐암을 선고받고 얼마 뒤 나는 아버지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팔십 초반까지 살았으면 좋겠고, 고통 없이 떠났으면 좋겠다고 답하였다.
인지저하가 시작된 작년 봄 이후 아버지는 주말을 제외한 모든 평일에 내 차를 이용해야 했다. 아버지는 작년 한 해 동안 따로 혹은 동시에 종양내과, 피부과, 신경과, 신장내과, 방사선종양학과, 피부비뇨기과, 치과 진료를 받았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인지저하로 순한 아이가 된 아버지는 영문을 모른 채 그 많은 병원의 진찰실과 입원실에 들러야 했고, 나는 그런 아버지를 안심시켜야 했기에 더욱 수다스러워져야 했다.
아버지는 차에 타면, 지금 자신이 어디를 가고 있는지, 투석 병원에 가는 중이에요, 왜 가는지, 신장 기능이 나빠져서 기계가 그 기능을 대신해야 해요, 묻는다. 투석이 끝나고 집으로 모시려고 병원에 들르면 또, 여기가 어디인지, 투석 병원이에요, 왜 여기에 있는 것인지, 기계를 통해서 피를 교체해 주어야 힘을 내서 엄마의 집안일을 도울 수 있어요, 묻는다. 그리고 아버지는 매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병원이 18층에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란다.
부모님 댁에 도착하여 놀란 동생을 안심시킨 다음 아버지와 엄마를 살폈다. 아버지는 내가 있는 동안 한 차례 더 토하였고, 나는 투석 병원에 전화를 해 상황을 알렸다. 투석은 다은 날로 미뤄졌고 나는 병원에 들러 장염약 처방을 받아 돌아왔다. 장염약을 드시게 한 후 죽집에 들러 아버지가 드실 죽을 사왔다. 아버지가 주무시는 것을 확인한 후 여동생과 함께 투석이 가능한 요양 병원에 들러 면담을 하고 돌아왔다.
그 이후 이 책,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내내 읽었다. 매일 목도하고 있는 내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적인 상황과 (내 아버지를 비롯하여 이후 나도 포함될 수밖에 없는) 죽음을 앞둔 그들이 대면할 이 사회의 시스템을 들여다보았다고 할 수 있다. 책에 실린 내용들은 대부분 내가 앞으로 내리게 될 결정들에 영향을 끼칠만한 것들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나를 더욱 괴롭게 만들 것 같지만 그렇다.
나는 부모님과 관련한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섣부르지 말아야 하지만 또한 마냥 유예를 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삼남매의 맏이, 라는 지위(?)를 요즘만큼 실감해본 적이 없다. 사소한 결정과 중요한 결정, 결정의 초입과 결정의 중간 단계 그리고 최종적인 결정에 내가 필요해졌다. 동생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쇠락한 부모를 모시는 일이 처음이지만 그렇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나는 최근의 아버지의 칭찬들을 잊지 못할 것 같다. 두 기둥 사이에 차를 대느라 전진과 후진을 거듭하는 내게 아버지는, 너는 참 섬세하구나, 칭찬했다. 투석 병원의 간호사들에게 줄 선 선물로 쿠키를 준비한 내게 아버지는, 너는 참 생각이 깊구나, 칭찬했다. 칭찬이 자식을 망치는 길이라 생각한 대다수의 아버지들처럼 내 아버지 또한 평생 칭찬을 해본 적이 없으셨는데...
내 또래의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책에 나오는 허약 시기 노인들에 나이든 부모님을 대입하여도 되지만 나 자신이나 나의 배우자를 위치시켜 놓아도 상관없다. 권할만하다는 의미에서 책의 많은 부분을 발췌하여 아래에 덧붙여 놓았다. 이것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책이 지향하는 대략의 맥락은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에휴, 남의 일이 아니다...
『노인병 전문의 실버스톤 박사에 따르면 “노화 과정에 관여하는 단일하고 일반적인 세포 메커니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리포푸신과 활성산소로 인한 손상, 무작위로 벌어지는 DNA 변형, 그리고 수많은 여타 미세포상 문제가 축적되면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점차적이면서도 가차 없이 진행된다.
『“꼭 그래야 하나요?” 신발과 양말을 벗어 달라는 요청을 받지 할머니가 물었다.
“... 매년 35만 명의 미국인이 넘어져서 고관절 골절상을 입는다. 그중 40%가 결국 요양원에 들어갔고, 20%는 다시 걷지 못했다. 넘어지는 데는 세 가지 주요 원인이 있다. 균형 감각 쇠퇴, 네 가지 이상의 처방약 복용, 그리고 근육 약화다. 이런 위험 요인을 가지지 않은 노인이 1년 사이에 낙상할 확률은 12%다. 반면 이 요인들을 모두 가진 노인의 낙상 확률은 거의 100%에 가깝다...” (p.70)
『아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고 말한다.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 다시 말해 청력, 기억력, 친구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활 방식을 잃는 것이 두렵다는 것이다. 실버스톤 박사의 표현대로 “나이가 든다는 것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는 것”이다. 필립 로스는 소설 《에브리맨Everyman》에서 이를 더 비통하게 표현했다. “나이가 드는 것은 투쟁이 아니다. 대학살이다.”』 (p.94)
“오늘날과 같이 의료화된 시대에 장애가 있고 노쇠한 사람을 돌보는 일은 기술적인 면에서나 일상생활 면에서나 엄청난 임무다. 루 할아버지가 복용해야 하는 수많은 약들을 모두 파악하고 분류하고 다시 채우는 것만도 보통 일이 아니다. 또 만나 봐야 하는 전문의들은 어찌나 많은지 다 모아 놓으면 소대 하나는 된다. 거기에다 어떤 의사는 매주 만나야 하고, 각 의사들은 계속해서 검사와 촬영을 하며 다른 전문의를 만나야 한다고 추천한다...” (p.139)
“... 우리 할아버지처럼 기댈 수 있는 대가족이 함께 지내면서 그가 선택한 방식으로 살 수 있게 지속적으로 돕는 시스템이 부재한 경우, 우리 사회의 노인들은 통제와 감독이 계속되는 시설에 갇혀 사는 수밖에 없다. 풀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의학적으로 고안된 답이고, 안전하도록 설계된 삶이지만, 당사자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도 없는 텅 빈 삶이다.” (p.172)
“... 여기서 말하는 통찰이란 바로 노화나 질병으로 인해 심신의 능력이 쇠약해져 가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려면 종종 순수한 의학적 충동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너무 깊이 개입해서 손보고, 고치고, 제어하려는 욕구를 참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개념이 날마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환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 환자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어려운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고치려 애써야 할 때는 언제이고, 그러지 말아야 할 때는 언제일까?” (p.232)
“심각한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 말고도 해야 할 다른 중요한 일들이 많다. 조사를 해 보면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고통을 피하고, 가족 및 친구들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고, 주변과 상황을 자각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잃지 않고,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고, 자신의 삶이 완결됐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p.240)
“과거에는 보통 죽어 간다는 것이 급격하게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경험이었다. 따라서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조기에 질병을 찾아내는 정밀 촬영, 생명을 연장시키는 처치 등 현대 의학의 개입 없이도 본래 투병 기간이 길어지는 질병이 있기는 했다. 아마도 결핵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신이 생명을 위협하는 병에 걸렸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부터 죽음에 이를 대까지 며칠에서 몇 주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pp.240~241)
“... 1945년에만 해도 집에서 임종하는 경우가 단연 과반수를 차지했던 것이 1980년대 말에는 17%에 그쳤다가, 1990년대부터 다시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호스피스 케어를 이용하는 빈도도 점점 늘어나 2010년에는 미국인 사망자의 45%가 이 서비스를 받다가 임종한 것으로 집계됐다. 그중 절반 이상이 집에서 호스피스 케어를 받았고, 나머지는 호스피스 전문 시설 혹은 요양원에서 받았다...” (p.296)
“... 우리는 통증 지속 시간이 짧은 쪽보다 긴 쪽이, 그리고 평균 통증 척도가 낮은 쪽보다 높은 쪽이 더 나쁠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환자들의 반응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최종 척도를 평가할 때 통증 지속 시간은 대개 무시됐다. 대신 최종 척도를 가장 잘 예측할 수 있는 지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카너먼 박사가 말한 ‘정점과 종점 규칙Peak-End rule’이다. 이는 가장 아팠던 순간과 마지막 순간에 느낀 통증의 척도를 평균 낸 것이다...” (p.362)
『삶의 마지막 단계를 제어할 수 있다는 개념을 제안한다는 것은 보통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다. 마지막 순간을 진정으로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삶을 지배하는 것은 결국 물리학과 생물학, 그리고 우연일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우리 역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용기란 이 두 가지 현실을 모두 인식할 수 있는 힘이다. 우리에게는 행동할 여지가 있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가능성이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범위가 점점 더 좁아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려면 몇 가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이른바 기술 사회가 되면서 우리는 학자들이 ‘죽는 자의 역할’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잊고 말았다. 그것이 삶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시점에서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잊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추억을 나누고, 애정이 담긴 물건과 지혜를 물려주고, 관계를 회복하고, 이 세상에 무엇을 남길지 결정하고, 신과 화해하고, 남겨질 사람들이 괜찮으리라는 걸 확실히 해 두고 싶어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마치고 싶은 것이다...” (p.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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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과정은 수많은 선택지가 있었다. 요양병원에서 그럭저럭 지내던 엄마는 식사 도중 사레들려 며칠 인공호흡기에 의존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폐렴과 패혈증이 왔고 대학병원 중환자실로 옮기게 되었다. 처음에는 호흡기내과 중환자실로 들어갔지만 여러 가지 검사 결과 심장이 더 위중한 상태라 심장외과 중환자실로 옮겨야 했다. 담당 의사는 여러 가지 설명을 하면서 현재 인공호흡기로 버티고 있지만 더 악화하면 기도삽관을 해야 할 수도 있다며 가족들이 미리 결정해 두라고 당부했다. 폐렴은 다행히 치료가 되고 있었지만, 인공호흡기를 떼도 자연 호흡이 돌아오지 않으면 삽관해야 한다고 했다. 이때만 해도 이런 결정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중환자실에 들어간 이상 모든 의학적 처치를 다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짧은 의사와의 면담 후 간호사에게 자세히 물어보니 기도삽관을 하면 병세가 호전되지 않아 제거하고 싶어도 의사가 판정해 주지 않으면 선택할 수 없다고 했다.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임종기에 접어들었다는 의사의 판정이 있어야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다. 그제야 기도삽관이 연명치료의 한 방법이라는 걸 알게 됐다. 엄마는 중환자실에서 거의 의식이 없는 채로 인공호흡기와 각종 기계에 줄을 주렁주렁 매달고 치료를 받았다. 거기 들어간 후로는 가족들 면회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30분 이내로밖에 허용되지 않았다. 각종 치료를 받았어도 엄마는 갈수록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나빠져 갔다.
치료의 과정은 선택의 연속이었다. 요양원에서 그대로 편히 돌아가시게 하자던 형제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우겨서 대학병원으로 모신 터라 모든 결정은 내가 주가 되었다. 나는 희망을 버린 형제들이 원망스러웠고 실낱같은 가능성에 매달렸다. 하지만 매 순간 선택하는 일이 너무도 힘들었다. 엄마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게 바로 나라도 된 듯 감당하기가 벅찼다. 할 수 없이 가족들 상의 끝에 더 이상 가망 없는 연명치료를 하지 않기로 서명했다. 담당 의사가 인공호흡기 관을 제거했고 그 후에도 엄마의 호흡은 며칠 이어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거칠고 힘겹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우연히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었다. 최근 머릿속에 온통 죽음이라는 주제가 떠나질 않아 제목에 끌려 읽게 되었다. 책을 펼치자마자 단숨에 빠져들었다. 이 책은 지금 내가 궁금해하는 모든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의사로서 여러 가지 측면으로 다루지만,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의 관점에서 어떤 것이 최선인지 고민한다. 죽어가는 과정은 매 순간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 의학이 발전할수록 치료법은 다양해지고 선택지는 늘어난다. 하지만 질병에 걸린 인간을 획기적으로 완벽하게 살려낼 단 하나의 의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치료법이든 부작용이 있을 수 있고 득보다 실이 큰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모든 의사가 환자에게 이를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성공 가능성에 비중을 두고 최신 치료법을 권할 때도 있다고 한다. 환자나 보호자가 비교하고 분석해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도와주는 의사는 드물고, 과학이 전문화될수록 각 분야를 총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전문가는 더욱 드물다고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노인학이나 노인 의료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해 한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무엇이 최선인지 조언해 줄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엄마를 떠나보내는 과정에서 의사와 모든 치료 과정을 상의할 대표 보호자를 나로 지정했다. 나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너무 벅찼다. 이 치료법이 엄마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인지, 형제들 말대로 엄마를 편히 보내드리는 게 현명한 것인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엄마는 하루하루 위중해졌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은 죽어가는 과정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 하는지, 환자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이 어떤 것이 있는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존엄하게 죽을 권리는 존엄하게 살 권리이기도 하다. 내가 읽은 책, 책 쓰는 번역가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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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리뷰입니다. 스포일러가 다량포함된 후기이므로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워낙 베스트 셀러로 서점마다 전시되어있던 책이기도 하고 여러 북 유튜버들이 추천하는 책이라서 시작했어요. 죽음에 대해 금기시 했던 옛날 문화보다 요즘은 책에서도 영화에서도 대화에서도 죽음에 대한 주제로 얘기를 나누는 게 제법 자연스러워졌어요. 이런 사회에서 제법 의미있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
| 인류가 지금까지 항상 고민해 왔던 민감한 주제이며 이를 다룬 책들은 많이 있으나, 대부분은 철학 또는 종교 아니면 현대 의학자 시점에서의 고찰이 대부분이다. 이 책 역시 현대의학자 관점이긴 하지만, 과학적 이론적이라기보다는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에서만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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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기 전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치료는커녕 더 죽음에 가까이 다가간 집안 어른들을 많이 보았다.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정리 해봐야 한다. 호흡기를 달고 몇 년을 더 살아고 하는 일이라곤 먹고 자는 일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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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사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잘 죽는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망각하는 것 같아요. 더욱이 <아무르>나 <잠수종과 나비> 그리고 <미 비포 유> 등등 존엄사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영화들이 극히 소수의 관심만 받았거나 다른 측면만 부각되었던 것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애써 회피하려는 현대인의 성향을 방증하는 듯 보이는데요. 이런 성향은 ‘병원에 가면 어쨌든 살려낸다’라는 농담 아닌 농담에도 반영되어 있죠. 그런데요. 과연 어쨌든 환자가 그저 살아있기만 한 것이 능사일까요? 환자의 의사에 상관없이 고통과 수치심만 주는 온갖 처치로 목숨만 겨우 연명하게 하는 것을 진정 ‘살린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인간 삶의 궁극적인 의미인 행복에는 존중받으며 죽을 수 있는 자유와 권리도 속하는 것 아닐까요? 우리에게 죽음은 삶처럼, 아니 어쩌면 삶보다 더 중대한 과제가 아닐까요??? 이 책의 저자는 이런 존엄사와 관련된 문제들을 깊이 논의하고 있는데요. 특히 의사로서 직접 체험한 다양한 사례들을 본인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무척 강하네요.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주장은 현대 의학이 인간의 노화와 관련된 질병을 없애는 데에만 주력할 것이 아니라 노화 과정을 전반적으로 관리하며 죽음을 여유있게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었죠. 물론 당연히 작가는 자본의 논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현대 의학의 현주소 또한 잊지 않고 있네요. 어쨌든 실버 세대가 폭증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도 경종을 울리는 주목할만할 주장인 것 같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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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락은 아주 작은 영역에 초점을 맞춘다. 의료 전문가들은 마음과 영혼을 유지하는게 아니라 신체적인 건강을 복구하는 데 집중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바로 이 부분이 고통스러운 역설을 만들어 내는데 삶이 기울어 가는 마지막 다녜에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할 권한을 의료 전문가들에게 맡겨 버렸다.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질병, 노화, 죽음에 따르는 여러 가지 시련은 의학적인 관심사로 다뤄져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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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 졌다. 잘 준비해야 할텐데... 그래도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 것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1. 독립적인 삶, 혼자 설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2. 무너짐, 모든 것은 결국 허물어지게 마련이다. 3, 의존, 삶에 대한 주도권을 잃어버리다. 4. 도움, 치료만이 전부가 아니다. 5. 더 나은 삶, 누구나 마지막까지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6. 내려놓기, 인간다운 마무리를 위한 준비 7. 어려운 대화, 두렵지만 꼭 나눠야 하는 이야기들 8. 용기,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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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받아서 읽게 됐습니다. 읽은지 한참 지나서 쓰는 리뷰라 사실 내용을 많이 잊어버렸지만 좋은 책이었어요. 인도계 미국인인 의사가 사람들이 죽음에 대처하는 방법들을 보면서 느낀 바를 적은 에세이예요. 가족과 살거나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과 살거나 그 방식은 다양하지만 공통적으로 자신의 일상을 유지하면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어요. 나이가 들고 죽음이 다가오며 본래 혼자서 할 수 있던 일 중 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많아지는데 그럴수록 혼자서 무언가를 해내는 것이 얼마나 큰 자유와 기쁨인지 생각하게 되나 봅니다. 다음에 시간이 되면 다시 한번 읽어 보려고요. 나이를 더 먹으면 또 새롭게 느껴지는 게 있을 것 같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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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부키에서 출판된 아툴 가완디님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 리뷰입니다.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이제 마냥 젊은 나이가 아니고 주변에서도 간간히 부고가 들리고 하다보니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현대의학이 아무리 발달했다고 해도 인간의 영역으로는 불가능한 부분도 많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너무 준비없이 맞았던 경험이 있어서 지금부터라도 어떻게 해야할지 미리 생각해놔야겠더라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