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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드리스 엑스타인스의 <봄의 제전>은 1913년 댜렌스키의 발레 <봄의 제전> 초연 당시 상황을 서막으로 하면서 시작하는 종이 위에 수놓아진 작품이다. 1막에서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복선처럼 발레 <봄의 제전> 초연 당일의 상황에 이어 유럽, 특히 독일인의 세계관의 탄생 배경이 그려진다. 2막에서 현실로서의 전쟁의 참혹함이 그려지고, 전쟁을 끝까지 이어지게 한 광기와도 같은 유럽의 열망이 펼쳐진다. 그리고 3막에서는 전쟁이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상황, 유럽 특히 독일에 남아있던 혁명에 대한 열망의 흔적들이 나치즘으로 강하게 뭉쳐지는 모습을 그려내고, 그 시대의 열망과 상상이 만들어낸 결정체인 히틀러의 출현과 자살의 순간으로 막을 내린다.
<봄의 제전>에서 내내 중요하게 언급되는 것은 같은 제목을 가진 발레 작품의 배경음악처럼 이전과는 다른 것,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정신이다. 같은 뿌리를 가진 가치관이 예술로서는 모더니즘으로 표출되고, 역사적 배경과 그 시대의 전제와 맞물려 더 큰 차원에서는 전쟁으로 표출된다.
1. 모더니즘과 제1차 세계대전은 같은 나무에서 열린 사과들이다?
모더니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널리 알려진 과거의 독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의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것이기에 신선함에 앞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는 예술이라는 영역과 과거와 현대를 이어주는 지점에서 모더니즘의 존재감에 대한 무의식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인류 역사상 다시 발생하지 않기를 염원하는 전쟁의 파괴적인 이미지와 연관이 있다는 시각은 생각해 보지 못했던 부분이었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지만 '이게 맞나?'싶은 생각과 감정의 존재는 발레 <봄의 제전> 초연 당시 샹젤리제 극장에 있던 관객들이 느꼈던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모더니즘의 DNA가 강렬히 남아있는 듯하다. 흔히 진취적인 것,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려는 정신, 새로운 시도, 도전은 긍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전 세계가 연결되어 있는 이 시대, 자본주의 세계에서 정체된다는 것은 죽음과 동일시되며 발전은 끝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긍정적이고 궁극적인 가치이다. 매일 새로운 상품, 새롭고 발전된 기술, 자극적인 뉴스,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한 편리하고 살기 좋은 미래 세계의 건설은 지금 우리 세계가 추구하는 가치의 핵심이다.
이러한 우리의 가치관에 앞서 나타난 1910년 유럽의 새로운 가치가 '불가피한 결과는 아니었지만 일어날만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지금 우리의 가치 역시 어떤 결과를 창조해낼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지금 긍정적으로 여겨지는 가치라고 해서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독일인을 열광하게 했던 세계관과 상상은 히틀러라는 결정체를 만들어냈고, 그들이 생각하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자 했던 혁명은 전쟁에서 패망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히틀러가 가진 예술적인 기질이 개인적으로 표출되었더라면 그저 자유로운 보헤미안으로서의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는 점이 흥미롭다. 예술적이 기질이 다른 곳에서는 전쟁이라는 형식으로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전쟁이 예술의 한 표현 형태라고 주장한다.
2. 내가 살고 있는 세계는 어떤 전제를 가지고 있는가.
내가 자유 민주주의 사상과 자본주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을 전제로 하는 세상에 태어나 자라났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가지는 전제가 나의 가치관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다.
모더니즘을 탄생하게 한 정신의 뿌리는 당시 합리적이로 이성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기존의 가치를 틀 부패한 것으로 여기고 미래를 향해 투쟁하고 변화시키려는 정신을 탄생시켰다. 제1, 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전쟁에 대한 독일에서 들끓었던 혁명을 향한 전 국민적인 열망의 분위기를 돌아보노라면 내가 만약 그 시대 넓은 광장에 모여있던 수백만 독일 국민 중 한 사람이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 보게 된다. 나 역시 '자랑스러운' 독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시대의 물결에 내 몸을 기꺼이 실으려 하지는 않았을까. 지금 제3자의 입장에서는 파멸을 향해 뛰어드는 무모한 불나방 집단같이 느껴질 뿐이지만 말이다.
3. 역사의 물결 속에서
발레 <봄의 제전>의 초연 이후 다시없었던 관객의 싸늘하고 혼란스러웠던 반응은 현대의 시작을 상징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만큼 그 의미가 있다. 예술의 영역에서 관객이 한 요소로 포함된 시작점이 된 순간이기 때문이다. 비록 생소한 것을 난생처음 접하는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다른 관객의 반응을 눈치 보면서 결정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혼란스러웠던 관객들의 반응까지 포함하여 그날의 공연은 완성되었다.
역사를 흔히 물결로 묘사한다. 외부에서 물결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내부에서 시작된 작은 물결이 점점 거세지기도 한다. 거세진 물결 속의 개인은 물결에 휩싸여 그저 허우적대기도 하고, 물의 저항을 헤치며 스스로의 힘으로 가능한 최선을 몸짓을 취하기도 한다.
독일인은 나치가 되도록 강요받지 않았지만 예술적인 경지에 이른 나치의 선동 운동에 이끌려 나치가 되었다. 이는 나치가 만들어낸 물결 속에 서서히 휩싸여 만드는 것인지 만들어지는 것인지 모를 몸짓을 했다는 뜻이지도 않을까. 독일인들은 나치에 열광했고, 나치를 창조했다. 물론 당시 독일인들은 그들이 기꺼이 휩쓸렸던 그 거대한 물결이 지금 우리가 나치를 평가하는 그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2022년의 관객으로서 우리는 반응을 넘어 참여하고 창조한다. 국가의 정책이나 사회문화적인 현상에 참여하는 관객으로서 우리의 역할과 영향력은 과거에 비해 비교할 수도 없이 실질적으로 커졌다. 하지만 이 영향력은 이 전제의 울타리가 튼튼하게 우리의 삶을 지켜주고 있을 때까지만이다.
지금 우리는 시대가 또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는 물결이 무엇을 휩쓸어가서 어떤 결과를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을까.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전제 속에서 개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가치를 우선시하며 살고 있을까. 전 국민적으로 열광하는 역사적인 물결이 다시 한번 만들어진다고 하면, 나는 그 물결 속에서 나의 개인적인 가치가 휩쓸리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4. 예술이 된 과거
모든 것이 다 지나고도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모든 결말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의 몸짓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시도한다.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비극이었던 현재였더라도 훗날 사람들에게 예술로 재창조된 과거는 관객들에게 보이고 기억됨으로써 역사와 삶의 일부가 된다.
많은 역사적 사실들, 과거의 이야기들이 영화, 드라마로 책, 연극으로 뮤지컬로, 무용으로 만들어진다.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한 작품은 그 안에 많은 허구와 과장을 담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는 현실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진지한 태도를 가지게 만든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최선이었냐고 훈수를 두게끔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아직 닥치지 않은 불확실한 모든 미래였을 것이므로 안타까운 선택으로 보이더라도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은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한 작품으로 미제 사건 중 하나로 건조하게 기억되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관객들의 눈앞에 생생한 과거를 현실 세계로 가져다 놓았다. 사건을 해결하려는 형사들의 고군분투하던 시간과 우리와 다름없는 일상을 살다 비극을 맞이한 희생자들, 그리고 잡히지 않은 범인은 관객들에게 잊혀서는 안되는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영화의 구성과 디테일은 너무나 완벽했고, 심각한 내용 가운데서도 유머러스함을 잃지 않았다. '재미있는' 영화로 러닝타임 내내 푹 빠져서 본 멋진 영화였지만 미제 사건이라는 사실은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 <봄의 제전>도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모더니즘 정신이 어떤 형태로 발현되었는지 다양한 사례와 근거와 주장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면서도 냉소적이긴 하지만 유머러스함을 때때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그저 관객으로서 나는 저자가 엮어내는 이야기들에 반응할 뿐이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 통을 실제 경험했던 사람들, 참호 속에서 적군을 살피려 고개를 내밀다 총을 맞았을, 독가스에 몸부림치다 고통 속에 눈을 감았을 군인들을 생각하면 그들이 기꺼이 열광하고 몸을 실었던 축제처럼 시작된 역사의 물결이 허망하다. 발레 <봄의 제전>에서 제물로 선택된 처녀의 춤과도 같은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하게 된다.
5.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전쟁
전쟁 전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낙관적인 결과를 가슴에 품고 참전했던 군인들은 장기간의 참호전과 참혹했던 환경 속에서도 항명하거나 집단 탈영하지 않고 끝까지 전쟁을 이끌어나갔다고 한다. 나의 개인성이 사라지고 나의 삶이 사라져도 지켰어야 할 그 무엇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전방에서 버텨냈을 군인들, 지금은 수천 개의 십자가 대열로 끝없이 늘어선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을 그들을 생각하면 그것이 정말로 가치 있는 것이었는지 묻고 싶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적군과 선물을 주고받고, 노래를 부르며 파티를 했던 화목했던 시절의 근원이 영국인의 신사적인 태도를 보여주려는 친절한 우월감이라고 주장하지만 독일군도 그러하였음을 보면, 저자의 주장은 내게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보다는 전방에서 죽음을 공유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가지는 근본적인 인류애가 발현된 것이라고 믿고 싶다. 각자의 세계가 추구하던 가치에 몸을 싣고 큰 물결에 휩싸여 전쟁의 최전방까지 흘러갔지만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본능 중 하나로 그러한 시간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이 책의 초판이 출간된 1989년으로부터 33년이 지난 현재 4월의 봄에도 우리는 이 순간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목격하고 있다.
전 세계가 연결되어 있는 세상에서 전쟁은 어떤 나라에는 주가와 물가의 들썩거림으로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어떤 나라에는 차를 타고 함께 피란을 떠나던 가족이 옆자리에서 총에 맞아서 죽고, 피란민을 위하 봉사하고 이제 자신의 몸을 피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길을 가던 사람이 기갑 차의 공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죽기도 한다.
최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더 빨리 더 잔혹하게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잔인함을 최고봉에 이른 듯한 온갖 전쟁무기들이 민간인들의 터전으로 떨어진다. 평화로운 지구와 인권을 운운하면서도 이 전쟁이 끝나지 않는 것을 보면 평화란 냉혹한 국제질서의 이해관계의 선을 넘지 않는 한에서만 유예되는 불확실한 그 무엇이라는 생각에 우울해진다. 그 전쟁 무기들을 맨몸으로 맞고있는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 나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던 보통의 사람들이에 내일처럼 느껴져서인가 보다.
크고 작은 전쟁 소식을 보고 들으며 살아왔지만 '핵 무기'까지 언급하며 치르는 전쟁이란 대체 어떤 목적과 명분이 있는 것일까? 그들 역시 그 유럽의 DNA를 물려받은 후예로서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가능한 결과로써 전쟁을 선택했을까? 그것은 지도자만의 선택인 것일까? 국민들은 그 물결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을까? 군인들은 전쟁의 진정한 목적을 알고 있을까? 끝까지 전쟁을 치르기 위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을까? 책 429페이지의 문장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또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정말로 전쟁은 대체 무엇을 의미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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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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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드리스 엑스타인스 작가의 봄의 제전입니다.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 혼란스럽고 복잡하고 또 터질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조용한 것 같은 복잡한 유럽 시대상을 얘기하는 내용이에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초연했을 때 다들 당황했는데 그게 결국 전설로 남았고 그게 20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어떤 상징이 되었죠. 이 시기만큼 격동적이고 혼란스러운 시기는 없는 것 같아요. 문화사로 볼 수 있는 역사는 언제 봐도 늘 즐겁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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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을 다룬 책들이 이미 즐비하게 책장을 채우고 있고 저마다 자신을 읽어 달라고 나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이 마당에 다른 세계대전을 다룬 책을 고른다는 것이 허세일거라고 느끼던 찰라, 이 책 봄의 제전은 그렇게 예스 24의 책장에 자리잡고 기다려얌나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런 책들이 가지고 있는 불명확성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이 책이 언젠가 절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눈 먼돈이 생기자 마자 바로 봄의 제전을 불러들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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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는 끌려도, ‘가장 잔인한 4월’만큼이나 ‘봄의 제전’은 낯설다. 속살을 모르는 1차 세계대전도 궤를 벗어나지 않는다. 낯섦으로부터 난해함과 흐릿함은 채워야 할 것을 요구한다. 다른 공간, 그것도 100년이라는 시간을 끌어당겨 공감을 붙이는 데에 있어야 할 감성이 구멍으로 남는다. 본질과 정체성은 차치하고 세상눈에 보이는 것만이라도 물음표는 그만 찍고 싶다. 오늘의 생존 본능으로 들숨과 날숨을 안정시키며 뽄새를 갖추려고 한다.
원시적 의복, 무용수들의 발구르기, 심쿵하게 들리는 리듬이다. 한 무리의 처녀들이 역사 이전 인신 공양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배경지식 없는 문외한의 눈과 귀에는 통통 튀는 밝은 느낌으로 경쾌하기만 한데. ‘봄의 축제’ 같은데, ‘봄의 학살’이라고 한다. 원시성을 배태하고 있는 것이 진짜로 도덕적 양념이 결여된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못 읽은 것인지 헷갈린다. 세계대전의 단초라는 부분에서는 더더욱 부족한 지식을 자책한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형식이나 내용에서 기존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정도가 심해서 에펠탑의 나라에서는 일상의 문화생활을 방해하는 소음이었다. 경찰을 소환할 수 있는 범죄였다. 50년 후에나 어울리는 것이었다. 파리는 급진성을 담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던 것 같다.
급진성을 원했던 베를린은 봄의 제전은 ‘죽음으로 활기’라고 한다. 황태자 부부의 암살에 최초의 세계대전이라는 응전이 과연 활기인지는 지식 너머에 있다, 그것이 어떤 이유를 더 함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위해서 거대한 대륙의 수백만 명을 희생하며 수년 동안 벌였는지 오리무중이다. 비석 하나 남기기 어려웠을 젊은이들은 ‘제물’인지 ‘애국’인지 답답하다. 패전국이라는 이유로 모든 비난의 독박을 쓰는 것이 자연적 정의인지는 꺼내지도 못하겠다. 따져 보고 싶은 것들 속에서 역시나 이전 전쟁과는 다름이 있다. 은행, 기업체 등 중간계급이 주축이 되었다. 참호전은 아주 딴판의 전개 양상이었다. 날씨와 전염병도 싸워야 할 적이 되었다. 독가스, 잠수함, 참호 박격포 등의 신기술은 대학살의 현장을 만들었다. 새로움의 추구는 새로운 형태의 비참함을 불러왔다.
달라도 너무 다른 또 하나의 다름의 극치가 있다. 한치 건너 바다 너머로 이웃하고 있는 두 제국주의 국가, 베이컨의 나라와 데카르트의 나라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다름의 도가니였다. 역사 주체는 말할 게 없다. 의무와 역사에 대한 철학의 뿌리, 산업화의 속도로 분위기에서 국제질서에서의 입장까지 발 디딜 데가 없다. 전쟁 개념은 극복 불가능한 간격에 있었다. 크리스마스 휴전에 흐르는 것의 발로였다. 2차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공간에서 평행선을 경주하던 두 강자가 제로섬 게임의 패권 전쟁을 벌이는 것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세기를 시작하면서 조용하던 움직임 위에 요란하고 혼란스럽게 닥쳐온 두 쌍의 조합이 만들어낸 ‘모르는 것투성이’는 ‘다름의 미학’으로 이어진다. 다름의 집합은 시간을 변수로 변화의 쌍곡선을 탄다. 다름의 영역은 시대적 가치와 결합하여 진실의 영역을 벗어나서 옳고 그름의 공간으로 이끈다. 시대 감수성에 생명을 담보로 치열함이 피를 튀긴다. 깨뜨려서 새로운 것의 추구가 하늘을 찌른다. 삶의 죽음을 통한 풍요, 파괴를 통한 재생의 염원이다. 넓디넓은 맥락의 이상에서 출발한 발레곡이 보여주는 기괴스러운 급진적 현대성의 추구와 기나긴 참호에서 치열한 생존 본능은 레드오션의 영역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시간상의 다름과 공간상의 다름이 교차한다.
비틂을 통한 창조, 파괴를 통한 창조. 이질적인 두 개의 사건은 하나의 존재 평면에 있다.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순한 시간상 선후만으로도 보인다. 그럴듯하게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나눴다가 합치고, 합쳤다가 나눠지기를 반복한다. 밀고 당김은 단순해 보여도 일의적이지 않다.
미래와 과거의 관계, 역사와 미래 비전의 연결함수는 열려 있다. 맨땅 위의 잔존 가치에 의존하는 제로가 시작점이다. 결과의 가치판단은 함몰되고, 방향만 초점이다. 진보로, 변화로, 혁명, 전쟁으로 가는 길목과 보존하고 회복하는 길목은 열십자로 피와 살을 내놓는다. 생명은 죽음으로, 이상은 허무함을 부를 수도 있다. 참상은 유럽으로 향했지만, 승리 잔치는 대서양을 건넌다는 것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게 무한대로 열려 있는 공간에서 사회와 문명, 역사에 대한 개인의 생존 좌표 하나 찍기가 쉽지 않다. 정치적 현실과 문화적 이상 사이의 괴리에 합리화는 번지르르하다. 삶의 무게는 아래층일수록 기하급수로 가중된다. 생뚱맞은 발구르기를 해야 하고, 관객들의 심한 야유를 견디고 끝까지 공연해야 하는 무용수들이 겪었어야 할 고통을 생각한다. 세상 모든 언어와 소리로 묘사하기에 부적절함이 넘치는 참호 경험을 견디는 젊은이들은 어찌할까? 후방의 민간인들이 부둥껴야 하는 혼란과 고통도 전장 못지않다. 결과의 고통을 운 없음이라는 참을 수 없는 개인적 해석 능력의 문제만으로 치부하는 것은 억울할 뿐이다.
역사는 주기율표를 마련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에너지의 진동은 골과 마루를 만든다. 하나가 끝나는 곳에서 다른 하나가 당연하게 시작한다. 익숙해짐으로 무감각해지는 감각을 부른다. 기억의 반복에서 벗어나 신명 나는 것을 찾는다. 변화의 도정에서 이탈하는 순간, 사지를 펼친 채 푸줏간 판매대에 널브러진 고깃덩어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불나방이 된다. 한 줌의 망설임 없이 운명의 수레바퀴에 온몸을 던진다. 손발이 쑤시도록 움직인다. 내일을 향해 오늘을 마구 흔든다. 수십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전통에 이탈은 애교 수준이다. 숨 막히는 난맥상에는 전쟁을 마다하지 않고, 바이러스로 욕망의 저주를 퍼붓는다.
지식이 싸이고 또 싸여도 리셋의 순간이 여지없이 온다. 처절한 몸부림에도 망각은 매너리즘을 호출한다. 여기저기에 꼼꼼하게 숨어 있었던 플롯과 리듬, 패턴들은 예정이나 된 것마냥 갑자기 툭 튀어나와 일상을 깨트린다. ‘위험하게 살라’는 주문과 깨어남의 구호로도 빗겨나가지 못한다. 돌고 돌아 부지불식간에 제자리이다. 사람만 바뀌었을 뿐이다. 또 하나의 세계대전은 현재가 된다. 문화와 문명은 긴장과 이완을 거듭하면서 삶을 진보와 퇴보로 굴곡지게 한다.
희극이든 비극이든 경험으로 쌓인다. 동고동락하며 블록체인으로 엮인 개인들은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이다.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게 하는 역사의 총합이다. 평생을 함께 기억으로 뭉친 작은 도서관이다, 감수성까지 얹혀 발산된 예술성은 50년 후를 바라보는 길잡이를 꿈꾼다. 작은 것 속에 큰 것을 담고, 그 속에는 더 큰 것을 담아서, 공동체 질서의 어제와 내일을 뱉어 놓는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역사적 사건 앞에서 예술 속에 삶의 의지를 드러낸다.
지금의 비극이 클수록 한 가닥 실마리를 찾는다. 진화의 과정에서도 포기될 수 없는 상상력이 가만히 있질 못한다.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야 하는 것도 아니고, 포연 속에 있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추구하는 본능이 가능성에 영(零) 이상을 부여한다. 막다른 골목에서도 문을 만드는 기염을 토한다. 잔인하고 추(醜)한 것에도 미(美)를 더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평범성’을 증류하여 경로를 이탈한 ‘악의’를 조합하는 논란도 마다하지 않는다. 바람과 현실이 접점을 잃어버려 삶이 고달파도 다름에 대한 열렬한 증오와 변화에 대한 비현실적 전망이더라도 신화의 중심을 꾸역꾸역 끄집어낸다. 역사를 보다 크고 넓고 깊고 풍부하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움직이는 시대’이다. 날마다 ‘끔찍한 전진과 회귀의 순간’들을 묵도한다. ‘어디로 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는 어느 야전 장교의 보고서는 변화 속 개인의 내면에 깔린 정서의 깊이를 대변한다. 오늘이 어색하고 모름이 깊을수록 비빌 수 있는 끈끈한 토대를 찾는다. ‘과거와 현재의 끝없는 대화’를 거역할 수가 없다. 어제는 오늘의 눈이 되고, 그제는 어제에 달라붙는다. 100년 전은 이 순간 여기에 침전된다. 고정된 목판활자는 금속활자로 꿈틀거린다. 순서를 재배열하며 날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조각한다. 지금이 100년 후에 누군가에 어떤 언덕이 될 것 같아 허투루 보내는 게 쉽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