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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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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베 기베르의 『연민의 기록』은 『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를 읽은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후속작이다. 전작에서 느꼈던 감정은 생존과 자살 충동이 번갈아 덮쳐 오는 숨 막히는 공포였다. 항바이러스제 '지도부딘'이 생명의 동아줄이라면, 강심제 '디기탈린'은 죽음의 유혹이었다. 그 둘 사이를 오가는 기베르의 기록은 헛구역질이 날 만큼 필사적이었고, 삶과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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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베 기베르의 『연민의 기록』은 『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를 읽은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후속작이다. 전작에서 느꼈던 감정은 생존과 자살 충동이 번갈아 덮쳐 오는 숨 막히는 공포였다. 항바이러스제 '지도부딘'이 생명의 동아줄이라면, 강심제 '디기탈린'은 죽음의 유혹이었다. 그 둘 사이를 오가는 기베르의 기록은 헛구역질이 날 만큼 필사적이었고, 삶과 죽음의 줄다리기는 처절했다.


그래서 『연민의 기록』 역시 그 연장선에서 더 지루하고, 더 절망적인 생사의 공방전이 이어질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이번 작품은 전혀 다른 결을 보여주었다. 물론 질병과 죽음은 여전히 작품의 중심에 있지만, 기베르는 르포르타주 작가가 아니라 소설가로서의 면모를 기대 이상으로 선명하게 드러낸다. 문장은 한층 침착해졌고, 절망 속에서도 시적인 감수성이 유난히 찬란하게 빛난다. 죽음을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 죽음을 통과하며 언어를 끝까지 아름답게 붙잡는 작가로서 기베르의 얼굴이 더욱 또렷이 보인다.


전작에서 삶을 붙드는 마지막 희망이 지도부딘이었다면, 이번에는 '디다노신'이 새로운 희망으로 등장한다. 구하기조차 어려운 신약을,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한 무용수가 남긴 분량을 어렵게 구해 복용한다. 그 순간 이름조차 몰랐던 죽은 무용수는 단순한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이어 주는 존재가 된다. 삶과 죽음이 약을 매개로 이어지는 이 기묘한 연결은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다.


디다노신의 효과 때문인지, 기베르는 다시 글을 쓸 힘을 얻고 성적 욕망도 되찾는다. 그런데 그 욕망의 방향이 흥미롭다. 평생 남성을 사랑했던 그가 이번에는 자신을 치료하는 여의사 클로데트에게 묘한 감정을 품는다. 그것은 단순한 사랑이라기보다,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을 붙들어 준 존재를 향한 생의 충동처럼 읽힌다. 한편으로는 노쇠한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며 한없이 작아지고, 작가로서의 명성조차 무의미하게 느낀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기베르임에도 마지막 장면은 삶에 대한 의지와 열망으로 넘친다. 클로데트에게 촬영을 거절당하지만, 진찰 도중 몰래 그녀를 카메라에 담는 데 성공하고는 아이처럼 기뻐한다. 이어 자신의 첫 영화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모습은 죽음을 앞둔 사람의 것이라기보다, 끝까지 창작을 놓지 못하는 한 예술가의 몸부림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삶이란 결국 사랑하고 만들어내는 순간에만 조금 더 붙잡아둘 수 있는 것이라는, 어딘가 서글픈 상념도 그 안에 묻어 있다.


우리는 이 작품의 결말 바깥을 알고 있다. 기베르는 몇 년 뒤 결국 디기탈린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적어도『연민의 기록』을 쓰는 동안만큼은 디다노신이 그의 몸뿐 아니라 마음에도 잠시 숨통을 틔워 주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전작보다 훨씬 고요하고, 아름답다. 절망은 여전하지만 그 절망을 표현하는 언어는 더욱 투명해졌다.


기베르는 결국 자신의 삶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언어만은 (책으로써) 영원히 살아남게 됐다.


"나는 글을 쓸 때 가장 살아 있다. 단어는 아름답고, 단어는 정확하고, 단어는 승리한다."

k************p 2026.08.0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