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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을 향하여 <먹다 듣다 걷다>를 읽고 이어령 선생은 한평생 지(구별의 어른이었기도 한)성인으로 살다가 노년에 이르러 지성과 영성 사이의 문지방 위에 선다. 다른 저서에서 그는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로 넘어간 것은 맞지만, 자신은 신학(神學)이 아닌 시학(詩學)을 하는 사람이라고. 즉 신을 어떻게 믿느냐가 아니라 성경을 (텍스트로서)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하다고. 성경과 종교에 담긴 영성을 인문학적 시선으로 풀어낸 여러 저작들이 이를 증거하리라. 선생의 4주기를 맞아 펼친 <먹다 듣다 걷다> 역시 영성에 관한 통찰을 담아낸다. 특히 오늘날 위기의 시대를 사는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교회와 함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신(과 비슷한 존재)을 믿기는 하나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필자에게도 큰 거부감 없이 읽히는 책이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성경 속 예수와 그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세 가지 동사, 곧 ‘먹다’, ‘듣다’, ‘걷다’라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떻게 현실과 작용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첫 번째, (저자의 가르침에 따라 동사가 지닌 역동성을 반감시키는 명사 사용은 지양해야 하나 보다 매끄러운 문장을 지향하기 위해 택한) ‘먹기’이다. 잘 알다시피 성경은 선악과에서부터 빵과 포도주에 이어 최후의 만찬까지 먹는 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교회에서 먹거리를 만들어 이웃에게 나누는 활동은 칭찬받아 마땅하나, 단순히 물질적 나눔에서 그치지 않고 ‘정신적’ 빵을 나눠야 한다고 저자는 제안한다. 여기서 빵에 대한 그의 해석이 퍽 흥미롭다. 예수가 돌덩어리로 빵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주면 당장은 배고픔을 달랠 수 있겠으나 결국 소진되어 먹을 게 하나도 남지 않을 테다. 대신 빵을 만들 수 있는 곡식을 가꾸고 가축을 길러 새끼를 쳐서 먹는다면 지속가능한 식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저자가 『생명이 자본이다』에서 ‘생명자본주의’를 주장하면서 든 사례라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또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농사나 목축이 타인의 노동과 공유 없이는 개인의 생존도 불가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두 번째, ‘듣기’이다. 양식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듯이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정신이 고픈 법이라고 저자는 비유한다. 현재까지 교회가 배고픔은 어느 정도 해결했으나 정신적 허기는 채워주지 못한 것 같다고 지적한다. 성경에서 대체로 예수는 말하고, 제자들은 그가 하는 말을 ‘듣고’ 그의 행동을 보는 것으로 묘사된다. 성어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낫다’는 듣기보다 보기를 우위에 둔 말이다. 그러나 영성의 관점에서 볼 때 직접 보지 않고 듣기만 하고 믿는 것이 더 큰 믿음이라고 한다. 저자는 그 믿음을 실천하는 자세의 좋은 예와 그렇지 않은 예를 언니 마르다와 동생 마리아의 경우를 들어 알려준다. 어느 날 집에 찾아온 예수를 위해 음식을 차려 대접하느라 분주한 마르다와 달리, 마리아는 예수의 곁에서 그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한다. 보다 못한 마르다가 성마르게 하소연하자 예수는 마르다의 행동도 좋지만 마리아처럼 오롯이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 더 좋다고 응답한다. 마르다가 그 말뜻을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누군가의 얘기를 경청하는 태도가 곧 소통의 기본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세 번째, ‘걷기’이다. 예수를 비롯하여 성인으로 칭송받는 이들이 걷고 걷다 길 위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과거뿐 아니라 현재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걷기를 예찬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걷는 것은 그만큼 자기와 대화를 하게 하고, 생각을 확장시키며, 또한 창의적으로 만듭니다. 이것이 걷기의 힘(140쪽)”이라고 저자도 걷기의 쓸모를 긍정한다. 무한경쟁 사회 속에서 자기만 살아남기 위해 걷고 뛸 게 아니라, 예수처럼 이타적 걸음을 내딛으며 타인을 살리는 길을 걸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끝으로 혹시 본 서평만 읽고 이 책을 종교 서적으로 오해할지도 모를 독자를 위해 덧붙인다. 특정 종교를 주제로 쓰여진 글이지만, 단언컨대 결코 건조하거나 설교적이지 않다. 오히려 이어령 선생과 함께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와 「만종」, 피사로, 고흐 등이 그린 작품들과 더불어 종교화들을 요모조모 뜯어보면서 작가 특유의 발상과 필치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덮으며 신 혹은 종교를 넘어 (아니면 그런 골치 아픈 것들은 제쳐 두고) 공생을 향한 그의 말들을 먹고(듣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한 길을 걸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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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서문에서 ‘그리스도인’ 이라고 하면 어떤 상징, 키워드들이 떠오르는지를 물어본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같아지시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먹고, 듣고, 걷는 행위로 뛰어드셨으니, 그것을 잘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풀어서 말해주고 있다. 먹는 것과 듣는 것, 그리고 걷는 것은 우리가 매일을 살아가면서 하고 있는 일이다. 책에서는 각 동사와 관련된 성경속의 이야기들을 연관하여 교회가 새롭게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듣다’ 부분에서 나온 마르다와 마리아를 이야기한 부분이 인상깊었다. 교회가 다른 사역 보다도 우선 말씀을 듣고 생명을 살리는 것에 집중 해야 하며, 그렇지 않고 사회적으로만 봉사하려고 하면, 세상의 봉사단체와 다를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한 가지 사건을 보았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 나와는 다른 색다른 시각을 접하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다. 많은 성도들이 같은 성경 말씀으로 메시지를 준비해도 고유한 느낌과 은혜가 있는 것 처럼 말이다. 저자가 고인이 된 후에 나온 책들을 보고 있으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시각을 새롭게 접하게 되어 공감이 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였다. 아마 그래서 모두 시대의 지성이라고 저자를 이야기 한 것 같기도 하다. 두껍지 않은 책 속에, 성경 말씀들을 담은 화가들의 명화들과 사진들도 많이 담겨 있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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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까지 평생 멈추지 않고 걸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길이십니다. 그래서 걸으며 사랑을 실천하시고 하늘로 향한 영생의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여리고를 지나 베다니를 통해서 가셨습니다. 이 여정은 120마일(약 193km)로 알려져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부활 후 갈릴리로 가서 제자들을 만나셨으므로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은 왕복 240마일(약 386km)에 이릅니다(p.145)."
명화가 말하는 이야기와 성경 속 인물과 사건들의 이야기가 겹치고, 그 시대의 문화 속에서 예수님이 행동하셨던 모습과 우리의 현재가 대비되면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찾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주요 동사인 먹다, 듣다, 걷다. 이 순서로 찾아서 보다 마지막에 예수님이 걸으셨던 그 길의 숫자적 계산을 보고 놀라게 된다. 아니,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