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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더러 있다. 기억 속을 아무리 헤집어 봐도 같거나 비슷한 것을 도무지 찾을 수 없어 매번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하게 되는 순간순간들. 삶과 죽음이 갈라놓는 상실의 고통이 그렇다. 나이가 들수록 상실과 애도의 경험은 가파르게 증가하지만 그에 반비례하여 차츰 고통이 줄어들거나 마음에 굳은살이 박이는 것도 아니어서 상실의 고통은 언제나 처음. 무작정 아픔. 그리고 넋을 놓게 되는 여러 날들. 가슴에 뚫린 커다란 구멍으로 불어오는 휑한 바람과 휑뎅그렁하게 변한 세상. 이어지는 회한과 자책. 그 모든 게 언제나 처음처럼 하나도 빠짐없이 되풀이된다.
지난해에도 나는 장인어른을 그리고 몇 달 뒤에는 어머니와 작별했다. 그럼에도 나는 두 분 모두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당신 스스로 죽음을 직감했던 장인어른은 삶의 마지막 1주일을 남겨 두고 병원에 입원하셨다. 곁에 있는 여러 가족들을 힘들게 하기 싫다는 게 입원에 대한 당신의 정당성이었다. 어머니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약간의 치매 기운이 있으셨던 어머니는 요양병원 생활을 1년쯤 이어오고 있었다. 대면 면회가 금지되는 코로나 시국의 자식들은 이따금 걸려오는 어머니의 전화에 건성건성 답을 하거나 병원 관계자로부터 전해 듣는 어머니의 근황은 마치 남의 일처럼 가벼웠다. 그렇게 나는 회한과 자책 속에서 두 분을 보내드렸다.
"아무도 죽음에 대해 말할 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이 죽음에 대해서 내릴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정의일 것이다. 죽음은 말을 벗어나는데, 죽음이 정확히 발화의 끝에 도장을 찍기 때문이다. 그것은 떠난 자의 발화의 끝일 뿐 아니라, 그의 뒤에 살아남아 충격 속에서 늘 언어를 오용할 수밖에 없는 자들의 발화의 끝이기도 하다. 애도 속에서 말은 의미작용을 멈추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것이 더이상 없음을 전하는 데에만 종종 쓰일 뿐이다." (p.139)
직접 목격하지 않은 죽음은 언제나 비현실적이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생전에 쓰던 유품 하나하나가 영원히 주인을 잃고 곧 버려질 운명에 처했다는 걸 인정하기 어려운 것도 바로 그런 데서 비롯된다. 사라졌던 주인이 내일이라도 당장 자신이 쓰던 물건을 찾아 집안 곳곳을 헤집고 다닐 것만 같은 것이다. 현대인의 죽음은 늘 이런 식이다. 삶과 죽음이 집과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 벌어지지 않기에 죽음을 맞는 사람도, 살아서 고인을 추모하는 가족도 죽음은 늘 엉겁결에 일어나는 일이며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후에나 현실의 틈새를 비집고 겨우 제 자리를 찾아가는 어떤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죽음을 배운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다. 단 두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모세처럼 돌아서 미래를 본다는 조건하에서 가능하다. 미래는 우리 앞이 아니라 우리 뒤에, 우리가 막 오른 산의 흙 위에 새겨진 우리 발자국에 있다. 그 흔적 속에서, 우리를 뒤따를 사람들과 우리 뒤에 살아남을 사람들이 우리가 아직 거기에서 볼 수 없는 것을 읽을 것이다." (p.221~p.222)
델핀 오르빌뢰르가 쓴 <당신이 살았던 날들>은 프랑스의 세 번째 여자 랍비로서 작가가 대면했던 여러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랍비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손녀인 그녀는 랍비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손녀인 그녀는 이 책에서 원리주의에 희생당한 「샤를리 에브도」의 정신과 의사 엘자 카야, 그와 생전에 ‘죽음’과 ‘공포’를 주제로 서신을 교환했던 의사 마르크, 아우슈비츠에서 함께 살아남아 생의 마지막까지 특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시몬 베유와 마르셀린 로리당, 자식에게조차 자신의 삶을 설명할 방법이 없어 끝내 침묵 속에 눈을 감은 홀로코스트 생존자 사라, 늘 같이 놀던 동생 이사악이 어디로 갔는지, 어디에서 그를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해하는 어린 형, 병마에 시달리며 예전과 같은 ‘나’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진 친구 아리안과 그 끝을 예감하면서도 친구 곁을 지킨 오르빌뢰르 본인의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유대교는 성직자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랍비가 수행하는 모든 일은 원칙적으로 다른 누군가에 의해 실행될 수 있고 발화될 수 있다. 랍비는 공동체로부터 학식을 인정받고 그들의 지도자로 선택된 사람일 뿐이지 절대, 그나 그녀는 하느님과 인간을 매개하는 자가 아니다." (p.116~p.117)
물리학에서 일컫는 '열역학 제2법칙' 다른 말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의하면 우리 몸의 세포 배열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헝클어지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이 지극히 자연스럽다는 말씀.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죽음이 불쑥 우리 집 문턱을 넘었을 때의 고통과 비애는 물리학 법칙만으로 말끔하게 설명할 있는 어떤 대상이 될 수 없다. 죽음이 있음으로 해서 각자의 삶은 유일하고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와 같은 명제만으로 유족의 슬픔을 모두 위로할 수도 없다. 죽음 앞에선 이따금 악의 없이 뱉은 말이 커다란 상처가 되어 누군가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도 끝내 발화하지 못한 채 뒤돌아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쭙잖은 말이 상처로 남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죽음은 삶의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조용하고 편안한 의식이 아니다. 이름도 모르는 의료인의 체계적이고 냉담한 손길에 의해 인도되는 하나의 절차일 뿐이다. 더구나 팬데믹과 같은 대규모 상실의 시대에 각각의 죽음은 개별적인 슬픔으로 위로되지 않는다. 큰 슬픔으로부터 쪼개진 하나의 파편화된 슬픔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체온이 변하지 않는 한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슬픔 역시 차갑게 식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당신이 살았던 날들>을 읽었던 우리도 역시 예전보다 죽음에 좀 더 익숙해진 것도 아니고, 상실의 고통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 더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넬 자신이 생긴 것도 아니고, 삶과 죽음에 대한 숱한 질문에 명징한 해답을 제시할 만큼 해박한 지식을 갖추게 된 것도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누군가가 살며 사랑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같이 슬퍼하면서 나아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예전보다 덜 외롭다고 느낀다. 그것만으로도 가슴 한켠이 따뜻해진다. 책이란 모름지기 그런 것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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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뒤에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에 관하여"라는 부제 붙은 이 책
이 책의 핵심을 이렇게 짧은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랍비(우리의 스승) 델핀 오르 빌뢰르의 글은 무한한 상상을 하게 했다. 번역가의 숨은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단어 하나하나 섬세하게 그리고 깊은 의미를 담아내려는 흔적들이 이 책의 가치를 말해주는 게 아닌가 싶다.
지은이는 특이한 이력을 지녔기에 "세속적인 랍비"라는 평가를 받는 것인가, 신의 세계인 성과 인간 세계인 속세, 성 속에 관한 우리의 고정관념과 사고의 관성을 거침없이 파괴한다. 그는 의학을 공부한 철학자이며, 작가로, 또 낡은 관념의 틀을 깨고, 그 자리에 본디 있어야 할 그 무엇을 채워 넣은 일을 한다. 자유주의 유대인 운동에서 펴내는 잡지<테누아>의 편집장으로서….
죽음, 우리가 기억하는 파리에 있는 어느 잡지사에 무슬림들이 공격을 했다. 마호메트를 모욕했다고…. 이때 그 자리에 있었던, 정신과의사이자 칼럼니스트인 엘자 카야트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에피소드 9개를 소개한다. 죽음이 찾아온 순간에 지은이가 함께했던 유명하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히브리어로 묘지는 베트 아하임, '생명의 집' '살아있는 자들의 집’
죽어서 묻힌 묘지를 생명의 집이나 살아있는 자들의 집이라는 반어적 표현은 왜일까? 지은이는 죽음을 부정하거나 죽음을 지우면서 죽음을 물리치려는 시도와 무관하다고 말한다. 오히려 죽음을 언어 바깥에 놓으면서 죽음에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라 했다.
내 아들들이 나를 이겼구나, 이겼어
종교지도자들에게 금과옥조처럼 여겨지는 게 있다면 그건 하느님의 말씀을 담은 서물, 혹은 교리, 또 전통적인 뭔가일 것이다. 세속에 이미 알려진 그것들이 하느님의 권위를 대신한다. 이 책은 이를 웃기는 소리로 한마디로 '개소리'라 여긴다.
탈무드의 에피소드를 들어, 랍비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 존재인지를 말한다.
랍비들이 한낱 전승을 통해서 힘의 이른바 위계를 뒤엎고 초월적 권위에 대한 복종을 문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랍비들로서는 주님이 그들에게 율법을 위임했으니 율법에 대한 해석은 마땅히 그들의 소관인 것이고, 그 해석은 심지어 하느님의 생각 자체를 거스르는 해석마저 포괄한 것이다"라고(41쪽),
이미 랍비들에게 부여한 힘은 그분이 포기한 것이기에 역사에서 더 이상 그분의 개입을 정당화하지 못한다고, 탈무드의 랍비들은 유머가 넘치는 신, 웃으며 역사에서 물러날 준비가 된 신, 토론하는 인간들을 위하여 사라질 준비가 된 신을 열망한다. 최근 <피로교회와 필요교회>라는 책이 나왔다. 이 제목에서 이미 모든 걸 말하고 있지 않은가,
무덤에 꽃 대신 조약돌을
무덤에 조약돌을 가져다 놓는다. 대단히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인다. 꽃은 시들지만, 조약돌은 쌓여 가신 이를 찾는 사람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 말이다. 그런데 지은이는 왜 그런지 그 기원을 말한다. 물론 위에 짐작하는 게 맞기는 맞는 모양인데,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조약돌은 히브리어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에벤'를 나누면 아브와 벤 즉, 부모와 자식이 드러난다는 이야기다. 무덤 위에 조약돌을 올려놓는 것은 그 안에 잠든 이에게 우리가 그의 유산에 포함된다는 선언이라는 말이다.
위대한 신은 인간이 그의 체면을 세워주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 대목은 참으로 이슬람을 신봉하는 무슬림인구가 9억, 아니 그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아프리카에서 동남아시아까지, 지하드든 뭐든 다 좋다. 테러라는 말은 상당히 정치적이어서 내편과 네 편을 가르기도 한다. 테러라는 말을 쓰는 순간, 이미 이분법이 적용된다는 말이다. 뭐 이 말은 여기서는 주제가 아니니, 그렇다 치고…. 아무튼 신이 모욕당해서 노여워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큰 신에 대한 모욕이지 않을까, 신이 그리 쩨쩨한가?, 유머러스한 신은 위대하다는 지은이 말에 공감한다.
레하임(삶을 위하여)
지은이는 전통 유대교의 재해석을 통해 아니 종교에 관한 그의 생각을 말한다. 종교란 정해진 답이 있는 게 아니라 세대마다 새롭게 정의되는 탐색의 과정이라고…. 죽음은 또 하나의 외침이다. 산 자와 죽은 자는 함께 하는 것이고,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죽음 향해 나아간다. 우리 사회, 자기 죽음을 어떻게 여길지, 이름을 남기고 죽을지, 아니면 쓰지도 못할 재산을 싸매고 들어갈지,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찾는 계기를 가졌으면 한다.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고, 살아있는 이들, 후세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을 것이라고,
삶이 아름다움 죽음을 향한 여정이라면 내 손에 뭔가가 있을 때, 내 주머니에 뭔가가 들어 있을 때, 배려와 나눔을 해야 한다고, 삶과 죽음이 5분 안에 갈리는 세상 속에서 죽음은 결코 늘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들….
뭔가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책의 가치는 아마도 이런 뭉클한 감동을 주는 그 뭔가였을 때 나타나는 게 아닐까?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당신이살았던날들#델핀오르빌뢰르#북하우스#죽음이란무엇인가#죽음의의미#종교란무엇인가#새로운종교관을위해서#프랑스기자#교보북살롱서평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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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핀 오르빌뢰르는 의학을 공부한 랍비이자 철학자, 작가다.(랍비는 히브리어로 나의 스승을 의미한다.) 그가 쓴 ‘당신이 살았던 날들’은 죽음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담은 고급 에세이다. 그의 책에서 죽음과 삶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얽혀 있는 존재들로 해명된다.
생명 형성 과정 초기에 종려나무 형태로 완전하게, 아무 간격도 없이 발달해 있다가 정상적인 발달 과정을 거쳐 서로 결합하고 있던 세포들이 파괴되면서 개별화되고 하나씩 벌어지는 우리 손은 죽음에 빚지는 존재의 비밀을 알게 하는 단적인 예다.
세포 단위에서의 죽음을 의미하는 말 가운데 네크로시스, 아포토시스가 있다. 네크로시스는 외상(外傷)에 의한 죽음이다. 보기 좋지 않은 흔적을 남긴다. 후자는 자발적 죽음을 의미한다. 말끔하다. 죽지 않고 계속 분열하는 세포는 암(癌) 세포가 된다. 아포토시스는 낙엽 같은 것이 위에서 떨어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봄(spring)은 아포토시스를 경험한 사람에게만 도래하고 죽음에 그의 회생 가능성을 조각하도록 내맡긴다.”(24 페이지) 저자는 랍비는 의례를 집행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직업이지만 해가 갈수록 자신의 직업과 가장 엄밀하게 가까운 직업명은 이야기꾼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말에 걸맞게 저자의 글은 현란하고 사색적이다.
물론 저자는 랍비라는 직업을 통해 자주 언어의 무력(無力)을 의식했고 그래서 속엣말을 털어놓아야만 한다고 말한다.(140 페이지) 저자는 자신의 나라인 프랑스의 세속주의와 자신의 종교인 유대교에 대해 한 마디 한다. 그에 의하면 세속주의는 우리 삶의 공간이 결코 확신들로 채워지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확실한 것들 사이에 항상 비어 있는 자리를 보장하며, 유대교는 나의 관념과 다른 관념을 위한 여유 공간을 확보하고 따라서 무한한 초월성 즉 다른 사람이 유대교에 대해 내릴 정의의 초월성을 보존한다.
이 부분에서 생각하게 되는 문장이 있다. 즉 앞서 인용한 손가락과 같은 차원으로 거론된 우리의 많은 체강(體腔), 심장, 창자, 신경계통 등이 오로지 내부의 파인 공간 덕분에 제 기능을 수행한다는 말이다.
1995년 이츠하크 라빈 총리 암살 사건을 계기로 근본주의로 기우는 종교에 깊은 의문을 품은 저자는 자신의 믿음이 유대 전통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라는 국가 안에서 헤게모니를 결코 장악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축복처럼 받아들이고 하늘 아래 충분한 공간에서 각자가 호흡을 가다듬는다는 사실을 기뻐한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선생님은 가깝지만 거리를 유지하십니다.”란 친구의 말을 떠올린다.
저자의 책은 어원에 대한 고급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저자에 의하면 많은 경우에 유대교 전례들이 보여주듯 유대교는 말에 대한 날카로운 의식(儀式)이 있다.(119 페이지) 유대교는 그것을 공식적으로 상기하면서 발화의 힘(세상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말의 능력)을 환기하는 날에 더욱 두드러진다.
저자의 책은 저자가 만나거나 숙고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의 이름이 챕터 제목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몬이라는 이름도 그 중 하나다. 시몬은 시몬 베유(1927 - 2017)를 의미한다. 프랑스 니스에서 유대인의 딸로 태어나 사법관으로 활동하고 보건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여성의 권리 신장을 위해 앞장선 인물로 유럽 의회 최초의 선출직 의장으로 유럽통합에 기여했다. ‘중력과 은총’의 저자 시몬 베유와 동명이인이다.
‘중력과 은총’의 저자 시몬 베유는 저자처럼 프랑스 국적의 유대인으로 살다간 인물이다. 유럽 의회 최초의 선출직 의장이었던 시몬 베유의 친구 마르셀린 로리당 이벤스도 그렇다. 마르셀린은 저자를 나의 랍비(남성형 명사인 랍비가 아닌 여성형 명사인 라비니)라 불렀다.(프랑스어에서 직업명은 기본적으로 남성형이다.)
친구인 시몬 베유와 마르셀린 로리당 이벤스는 여러 면에서 대척점에 있었다. 저자는 간혹 자신의 머릿 속에서 두 사람이 언쟁을 벌인다고 말한다. 이 말은 저자의 인식이 그렇다는 말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되지도 않는 소리에 의미를 부여하는 많은 서툰 조문(弔問)객들을 맞아야 하는 유족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제일 좋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세상을 떠난다.”, “적어도 그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을 것”,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이 시련을 감당할 수 있을 것” 등의 말을 하는 조문객들을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건은 죽음은 삶과 이어지는 문제라는 점이다. 남은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죽음 또는 죽은 사람들과 관련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언어가 그렇듯 프랑스어에는 자식을 잃은 부모를 지칭하는 단어가 없다. 반면 히브리어에는 있다. 번역이 거의 불가능한 샤쿨이라는 단어다. 열매가 수확된 포도나무 가지라는 의미다. 자식을 잃은 부모는 히브리어에서 과실을 딴 나무줄기나 과립이 떨어진 포도 송이의 이미지로 묘사된다.
유대교의 토라는 망자들의 귀환도, 삶 이후에 그들을 기다리는 길도 언급하지 않고 그들의 유령이나 부활, 천국이나 지옥도 말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저승에 대해 품을 수 있는 모든 지나친 관심을 경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142 페이지)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한다. 이스라엘 시인 예후다 아미하이가 유대 민족을 정의하는 것은 그들의 지리학도 유전학도 아닌 지질학이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즉 단층, 함몰, 퇴적층과 작열하는 용암이 말해준다는 것이다.(146 페이지)
어쩌면 저자의 책에서 죽음에 대한 내용보다 더 의미 있게 읽히는 것은 랍비에 대한 숙고가 아닌가 싶다. 저자는 랍비라는 존재는 무너진 세상의 혼돈 속에서 안정의 가능성을, 지속의 약속을 나타내야 하며 회복력을 상징하기 위해서 울지 않는 사람이 될 줄 알아야 하고, 주저앉은 사람들에게 다시 일어설 가능성을 믿을 수 있게끔 해야 한다고 말한다.(167 페이지)
저자의 책을 통해 랍비도 개혁파와 정통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자는 다른 사람들의 임종을 지킨다고 해서 죽음과 마주치는 불안에 면역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206 페이지) 마찬가지 차원으로 저자는 위대한 인물일수록 삶에 대한 집착은 쇠심줄처럼 더 강해 보인다고 말한다.
모세에게는 죽고 싶지 않았던 자라는 설명이 붙었다. 저자는 모세가 주님의 입맞춤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고 말한다.(209 페이지) 모세는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죽었다. 그는 히브리 민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고 40년간 광야에서 민족을 이끈 지도자다. 그가 죽었을 때 나이는 120세였다. 다른 전승에서 모세는 하나님에게 맞서며 죽지 않으려고 한다.
저자의 책의 특징 중 하나는 구약 성경 속 인물들과 자신의 지인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점이다. 저자가 행한 어원에 대한 다양한 천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불가지론인지도 모른다.
* 리뷰어 클럽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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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살았던 날들>을 쓴 델핀 오르빌뢰르는 랍비이자 철학자 그리고 작이다.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중에 라빈 총리 암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로 돌아와 언론인으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다가 뉴욕으로 이주하여 맨해튼의 히브리 유니온 칼리지에서 탈무드를 공부하고 랍비가 되었다. 그녀는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돕는다는 점에서 의학과 저널리즘, 유대교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당신이 살았던 날들>은 그녀가 랍비로서 장례식을 주관하면서 죽은 사람과 남아 있는 사람을 만나면서 느낀 점들을 정리하였습니다. “나는 장례를 진행할 때마다 우리 안에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죽은 자에게서 살아 있는 자에게로 이어지는 이 이야기의 힘으로, 그 자리를 빛내고, 확장하려고 노력한다.(25쪽)”라고 적은 대목이 생각할 거리를 준다는 느낌입니다. <당신이 살았던 날들>에는 죽음과 관련한 이스라엘 민족들의 다양한 관습을 소개합니다. 예를 들면 이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아즈라엘-손안의 생명과 죽음’에서는 죽음의 천사 아즈라엘이라는 존재를 이야기합니다. 유대 사람들은 아즈라엘은 한 손에 검을 쥐고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 주변을 서성인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자에게 다른 이름을 붙여 아즈라엘을 속이려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장례식에 참석했더라도 집에 곧장 가지 않고 다른 장소에 들러서 죽음을 떼어놓는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글을 엘자를 비롯하여 장례식을 의뢰한 사람들의 사연을 통하여 죽음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정리하는데, 뒤에서는 자신의 장례식을 생전에 치른 미리암의 사연을 비롯하여 죽고 싶지 않았던 모세에 관한 이야기, 그녀의 조국 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를 거쳐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로 마무리합니다. 이 책에서는 죽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과 관습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책을 읽다가 표시를 해둔 부분을 몇 곳 소개합니다. 히브리어로 묘지는 베트 아하임(Beit ahH’aym)이라고 하는데 ‘생명의 집’ 혹은 ‘살아있는 자들의 집’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이는 죽음을 부정하려는 의미가 아니라, 죽음이 그곳에 뻔히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의 승리이 징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리고 보면 유대인들은 죽음에 대하여 아주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건배 구호는 레하임(LeH’ayim)인데 ‘삶을 위하여’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건배를 할 때마다 질병을 조롱하자는 뜻이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매장되는 순간까지 고인의 시신 가까이에 초를 켜두어야 한다는데, 이는 아직 살아 있는 영혼의 존재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람이 죽으면 관에 담겨 장례식장을 떠날 때까지 촛불과 향불이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14살이 되던해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향불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밤새 애썼던 기억이 납니다. 요즈음의 장례식장에서는 자정이 되기 전에 상주들이 장례식장을 정리하고 잠을 청하는 분위기라고 하는데 촛불과 향불이 끊이지 않게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사후세계에 대한 분명하게 정리된 바가 없다고 합니다. 유대교에서 나온 기독교가 사후세계와 부활을 강조하는 것과는 다른 점입니다. 유대인들이 토라라고 하는 모세오경에는 죽은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스올(shéol)이라는 곳이 언급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이 어디인지는 분명치 않다는 것입니다. 스올이라는 단어는 ‘질문’을 의미하는 어근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죽음에는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만이 남게 된다는 뜻일까요? 앞서 미리암의 사례가 사전에 장례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처럼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죽음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한 것은 우리네 생각과는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옛날 어른들은 나이가 들면 자신이 입을 수의를 미리 장만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죽음을 수용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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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은 유한하기에 우리는 죽음을 인식하며 산다. 죽음을 이해하거나 아는 건 아니다. 다만 먼저 떠난 이를 그리워하고 슬픔을 달래는 일도 죽음을 인식하는 일부라고 여긴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죽음이 우리 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사람이 떠난 빈 공간, 부재로 존재하는 이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삶이 어느 순간 일생을 지탱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걸 알기에.
랍비 델핀 오르빌뢰르의 『당신이 살았던 날들』를 읽으면서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가 참석한 누군가의 장례식장의 풍경이나 모습은 우리가 느꼈던 슬픔과 의구심은 우리가 느꼈던 것들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죽음을 말하는 건 삶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느낀다. 가족, 이웃, 친구를 잃은 이들을 위로하면서 나눠야 할 것도 바로 그렇다. 비탄과 상심이 가득하겠지만 죽은 이의 생이 우리와 어떻게 연결되고 겹쳐지는지.
오르빌뢰르가 마주한 죽음은 다양하다. 죽음이 특정한 누군가를 정해놓은 게 아니니까. 책에서 그가 마지막 인사를 전하며 만난 이들은 다양하다. 원리주의에 희생양으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정신과 의사 엘자, 엘자와 죽음과 공포에 대한 생각을 서신으로 교환했던 마르크,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란 비밀을 혼자 간직하고 쓸쓸히 죽은 사라, 아픈 역사로 우리에게 남은 아우슈비치에서 함께 지내 생의 마지막까지 서로를 응원한 시몬과 마르셀린. 같이 놀던 형을 남기고 떠난 어린 동생 이사악, 암에 걸린 오르빌뢰르의 친구 아리안. 성경 속 모세와 이스라엘의 죽음까지. 그녀는 랍비로서 죽음을 알려주며 남겨진 삶을 위로하고 성찰의 메시지를 전한다.
나는 자주 생각한다. 우리의 장례식 날에 우리의 삶이 비극의 형식과는 다르게 이야기될 수 있고, 우리가 다른 어휘와 다른 상황의 언어로 회상될 수 있기를, 그리고 우리의 삶 역시 스릴러, 로맨스 시리즈, 신화, 심지어 대중적인 코미디 영화처럼 간주될 수 있기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 역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장례식에선 우리가 우리의 죽음으로 요약되지 않고, 그래서 우리가 살아생전에 얼마나 살아 있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57쪽)
사실 이 책은 너무 슬프다. 내 곁을 떠난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씩 떠올리기에 충분하고 저마다의 죽음은 곧 그들의 삶이니까. 생의 마지막인 죽음 앞에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자식을 잃은 부모를 에둘러 위로하는 말들, 안타까운 사건에 대한 탄식과 비난이 아니라 죽음의 당사자, 곧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이 살아온 삶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말이다. 한 사람의 고유한 생이 그려낸 아름다운 기록. 그것이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죽음과 마주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죽음이 무엇인지 인식하면서도 그것의 공포는 여전하다. 팬데믹의 시대, 가족과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나는 이들이 많다. 그것은 사회적 죽음이며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그들의 죽음을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 몇 년 전 여름의 뜨거운 날에 떠난 큰언니는 가을에 떠날 수 있기를 바랐다. 남겨진 이들의 자신의 장례를 치르는 게 힘들 거라면서. 그게 조금 더 살고 싶다는 말이었다는 걸 어리석은 나는 바로 알지 못했다. 생의 끝자락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나와 보냈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큰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암에 걸려 자신의 죽음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친구 아리안을 지켜보며 오르빌뢰르는 어떤 감정이었을까. 어떤 날은 친구로 어떤 날은 랍비로 아리안을 대하며 함께 웃고 울었던 시간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은, 있을지 모를 세상으로 향하는 통로를 열어둘 수 있다. 죽음은 두 세상을 분리하지만 때로는 죽음을 실제로 만나야만 새로운 세상에 들어갈 수 있다. (200쪽)
종교적인 색채와 성경의 의미를 뒤로하고도 오르빌뢰르가 들려주는 죽음의 사유는 아름답고 귀하다. 이 책에 대해 잘 말하지 못해 아쉽지만 분명한 사실은 아주 훌륭하고 좋은 책이라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고 삶을 생각한다. 언제일지 모를 나의 죽음을 생각하며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먼저 떠난 일들을 생각하며 삶의 거룩함을 생각한다. 어쩌면 죽음은 삶의 연장선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더욱 경건하고 진실해야 한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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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태어나는 순간 죽음도 함께 태어납니다. 누구나 '삶' 만큼이나 죽음을 품고 살지만 사실 나와는 먼 존재이길 바라고 있습니다. 델핀 오르빌뢰르의 [당신이 살았던 날들]에 대한 첫 인상은 놀라움 입니다. 6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살아가는 프랑스 유대 공동체에서 2021년 기준으로 여자 랍비는 단 다섯 명 뿐이라는 소개글과 함께 그들 중 한명이 바로 이 책의 저자 '델핀 오르빌뢰르'라고 하니 놀라웠습니다. 저에게 '랍비'란 TV 다큐멘터리에서 본 도서관에서 서로 큰소리로 토론을 하는 학자이자 종교적 존재 뿐이라 왜 책 표지에 '죽음 뒤에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에 관하여' 라는 문장이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프랑스에서 기자로 활동을 한 작가 델핀 오르빌뢰르는 뉴욕에서 랍비가 되는 과정을 준비하여 현재 프랑스에서 랍비이자 작가로, 진보성향의 계간지의 편집장으로, 그리고 세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궁금했던 '죽음' 키워드는 그녀가 랍비이기에 죽음 뒤의 과정에 관여하기 때문임을 책을 통해 서서히 알게 되었습니다. 아즈라엘, 즉 죽음의 천사 입니다. 랍비는 죽음으로 인한 의례를 집행하고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들에게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또한 이야기꾼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어로 '묘지'는 '베트 아하임'으로 불립니다. 생명의 집 혹은 살아 있는 자들의 집을 의미하는 '베트 아하임'에 임하는 죽은 이를 위해 절차를 진행하고 그들이 살며 겪었던 이야기들을 가족에게 듣고 지인들에게 들어 다시 이야기 하는 사람이 바로 랍비 입니다. 엘자 카야트, 프랑스 정신과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그녀의 안타까운 죽음은 그녀에게 상담을 받고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에겐 큰 시련입니다. 더이상 그녀는 살아 있는 자들의 집으로 갔기에 돌아올 수 없다 말했던 오르빌뢰르에게 2년 후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의 희생자 마르크의 장례절차 과정 중 그가 바로 엘자 카야트와 편지 교환을 통해 출간 계획을 하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됩니다. 두 사람이 주고 받은 대화가 담긴 이메일 원고가 결국 엘자를 돌아오게 만들었습니다. 사라와 마르셀린과 시몬 베유, 어린 동생 아사악의 죽음에도 애니메이션 레고 시티에 빠진 형의 질문에도 델핀 오르빌뢰르는 사유하고 죽음을 이해하고 그들이 살았던 날들을 이야기 합니다. 살아남은 이들에게, 가족들에게, 지인들과 친구들에게. [당신이 살았던 날들]을 통해 '나의 삶'을 돌아봅니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았다 정의 내릴 수 있을까? 내가 존재 했던 이유가 있을까? - 죽은 자들은 땅과 하늘에 있고, 이곳과 저곳에 있으며, 고인들의 불멸의 영혼은 신과 결합하지만 그들은 오직 우리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고. (147쪽) 깊이 소화할 능력이 안되어 읽으며 고민만을 거듭했지만 읽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책 [당신이 살았던 날들] 추천합니다. 죽음이 탄생의 순간에도 함께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히브리어와 유대인들의 긴 역사와 슬픔에 대해 조금은 더 알게 되었습니다. 팬데믹의 시간으로 인해 통제 된 삶에서조차 전화로 그들의 율법과 장례절차를, 기도를 해 나가는 모습에 깊은 슬픔과 애환을 목격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진심이기에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출판사 제공 도서 #당신이살았던날들 #델핀오르빌뢰르 #김두리 #북하우스 #프랑스여성랍비 #책추천 #책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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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생사관과 장례 문화를 살필 수 있는 책이다. 저자 델핀 오르빌뢰르는 프랑스의 여자 랍비인데, 이스라엘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프랑스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 뉴욕에서 랍비가 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장례를 주관하고 애도자를 위로하는 유대교 랍비의 글이기에, 간혹 히브리어로 풀어놓는 유대인들의 장례 문화가 우리에게 얼핏 낯설 것 같지만, 웬걸 오히려 우리의 장례 문화와 흡사한 점이 많아 놀라게 된다. 가령 우리네 저승사자에 해당하는 죽음의 천사 아즈라엘이 있는데, 검을 들고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 주변을 서성인다고 한다. 우리가 저승사자를 속이기 위해 간혹 어린 자녀에게 개똥이 같은 매우 허접한 이름을 갖다붙이는 것처럼, 유대인들도 아즈라엘을 피하기 위해 식구 중에 아픈 사람이 생기면 환자에게 다른 이름을 붙여준다고 한다. 유대인의 생사관과 장례식에 토라와 『탈무드』에 근거한 유대 전통이 버젓이 살아있듯, 비록 고도의 비즈니스 사업이되었지만 한국의 장례 문화 역시 여전히 유교의 상례와 제사, 불교의 천도제 같은 전통 종교의 영향력이 매우 강한 편이다.
묘지는 히브리어로 '베트 아하힘', 이름하여 '생명의 집' 혹은 '살아있는 자들의 집'으로 불린다. 유대인이 생명의 가치를 무엇보다 존중하고, 죽음 뒤에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이 있다는 전통의 가르침을 잘 드러낸 표현이다. 죽음이 비극적인 생명의 마침표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은 무덤에 꽃을 갖다 놓는 게 아니라 작은 조약돌을 올려놓는다. 이 조약돌을 '에벤'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를 쪼개면 '아브'와 '벤', 즉 '부모'와 '자식'이란 뜻이 된다. 우리가 장례와 제사에서 '효'를 중시하는 취지와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꽃은 이내 시들지만 조약돌은 오래 머무르는 기억의 힘을 보여주는데, 무덤을 찾은 남은 자들이 떠나는 자의 생명 가치와 삶의 이야기를 연장하는 '세대'라는 점을 함축한다.
랍비에게 죽음을 애도하고 고인에 대한 추억을 나누는 장례식은 결국 "고인들을 저버리지 않고 그들을 이야기한다는 조건하에서, 동반의 제의를 통해 고인들의 삶이 운명으로 변한다는 것"임을 알리고 가르치는 일이다. 랍비는 고인의 삶을 추모하는 '스토리텔러'가 되어 떠나는 자의 무언가와 살아남은 자들의 삶을 새롭게 엮어 주고 재구성한다.
"나는 자주 생각한다. 우리의 장례식 날에 우리의 삶이 비극의 형식과는 다르게 이야기될 수 있고, 우리가 다른 어휘와 다른 상황의 언어로 회상될 수 있기를. 그리고 우리의 삶 역시 스릴러, 로맨스 시리즈, 신화, 심지어 대중적인 코미디 영화처럼 간주될 수 있기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역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장례식에서 우리가 우리의 죽음으로 요약되지 않고, 그래서 우리가 살아생전에 얼마나 살아 있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5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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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는 많은 것을 바꿔 놓았고 우리 주변엔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척, 친구 또는 이웃을 잃은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죽음이란 것이 갑작스럽게 찾아올 때 준비가 되지 않아 더욱 슬픕니다. 죽음에 대한 대비를 철저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슬프긴 마찬가지이긴 합니다. 하지만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생각이 조금만 달라진다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조금은 덜 슬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 《당신이 살았던 날들》은 죽음의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무엇인지 철학적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히브리어로 묘지는 모순된 이름인 '베트 아하임(생명의 집, 살아 있는 자들의 집)'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죽음을 부정하거나 죽음을 지우면서 죽음을 물리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언어 바깥에 놓고 죽음에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좀 더 히브리어 이야기를 하면 '하임'은 복수형으로 히브리어로 삶은 단수형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겐 다른 여러 삶이 있고 그 삶들은 연속된 것이 아니라 서로 얽혀 있다고 말합니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사람이 죽어서 매장되는 순간까지 고인의 시신 가까이에 초를 켜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초는 아직 살아 있는 영혼의 존재를 상징합니다. 우리를 떠난 자의 생명에서 무언가 며칠 동안 눈부시게 작열한다는 것입니다. 떠나는 생명은 특별한 방식으로 빛나고 그래서 그의 곁을 지키는 모든 사람들이 빛을 감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시간을 초월한 이 순간에 유족과의 대화가 중요합니다. 유대 전통에서 죽은 자들의 채비를 매듭짓는 마지막 사항이 있다고 합니다. 수의의 가장자리를 꿰매야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의 옷을 꿰매는 것은 그들이 떠남에 도장을 찍어주는 행위로 장례 준비의 마지막 단계이기도 합니다. 액운을 쫓거나 죽음의 천사가 주위를 맴돌 경우에 아주 명확한 메시지를 보내야 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유령이 표상하는 움직이는 하얀 형상은 헐거운 수의에 싸인 죽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령들은 엉성하게 꿰매거나 전혀 꿰매지 않은 수의를 입은 망자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유령과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의 문화와 우리가 들은 이야기들에는 유령이 있고 때때로 우리가 말하는 언어에도 유령이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에 눈을 뜨면서 자신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매우 분명히 알게 된다고 합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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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평소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는 죽음! 친정아버지와 시어머님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비로소 가까이 죽음을 경험했을 뿐, 지금도 <죽음>이라는 단어는 그냥 어떤 추상화 같은 느낌으로 내게 다가온다. ▷저자 소개 : 델핀 오르빌뢰르 1974년생. 랍비이자 철학자, 작가이다. 1992년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다 1995년 이츠하크라빈 총리 암살 사건을 계기로 근본주의로 기우는 종교에 깊은 의문을 품고 프랑스로 돌아와 언론인으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후 탈무드를 연구하기 위해 뉴욕으로 이주, 맨허튼의 히브리 유니온 칼리지에서 공부를 마치고 랍비가 되었다. <예루살렘 포스티>지가 선정한 2021년 영향력 있는 50인의 유대인 중 한 사람인 델핀 오르빌뢰르는 프랑스의 세 번째 여자 랍비이다. 60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아가는 프랑스 유대 공동체에서 2021년 기준으로 여자 랍비는 단 다섯명 뿐이라고 한다.
그녀는 여자 랍비로서 많은 사람들의 장례식을 집행하면서 만난 고인들의 이야기, 살아남은 가족들의 이야기, 그리고 유대교의 이야기들을 이 책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나는 자주 생각한다. 우리의 장례식 날에 우리의 삶이 비극의 형식과는 다르게 이야기될 수 있고, 우리가 다른 어휘와 다른 상황의 언어로 회상될 수 있기를, 그리고 우리의 삶 역시 스릴러, 로맨스 시리즈, 신화, 심지어 대중적인 코미디 영화처럼 간주될 수 있기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역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장례식에서 우리가 우리의 죽음으로 요약되지 않고, 그래서 우리가 살아생전에 얼마나 살아 있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간은 언젠가 꼭 죽는다! 그녀가 만난 죽음의 에피소드들 중 어린 나이에 이사악이라는 동생을 잃은 형의 질문이 인상적이다.
"난 이사악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어요. 동생은 땅으로 내려간 거예요, 아니면 하늘로 올라간 거예요? 어디를 봐야 동생을 찾을 수 있는지 알고 싶어요."
기독교나, 불교와는 달리 유대교에서는 언어로 사후를 규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대교에서는 말의 불가능성 그 자체가 바로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말의 불가능성은 말을 넘어서는 것이고, 그것을 말하려면 양립할 수 없는 언어만을 사용해야 한다. 이것인 동시에 저것이기도 한 것을 받아들이고, 말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세상에 사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넉살 좋고 경쾌한 할머니 미리암의 관심사는 오직 한 가지였다. 그것은 그녀의 삶의 욕구를 상승시켰고, 삶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장례식 준비였다. 그녀는 늘 자신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조문객들의 앉을 자리와, 관이 입관할 때 흐를 음악의 순서, 꽃다발에 들어갈 꽃의 종류와 크기까지, 영정사진은 무엇을 쓰고, 사진을 어디에 어떻게 눈에 띄게 배치할지까지 신경 써서 선택하고 결정했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딸이 만나자는 얘기를 하고, 택시를 타고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은 대 예배당이었고,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의자들은 반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평소 그녀가 꿈꾸던 노란색, 하얀색, 주황색의 장미, 국화, 라일락이 어우러진 꽃다발들이 풍성하게 놓여 있었다. 그건, 바로 마리암이 꿈꾸었던 장례식 장면 그대로였다.
"엄마는 당연히 초대받을 수도 없는데, 어쨌거나 당신이 마음껏 감상하실 수 없을 초특급 무대를 꼼꼼하게 계획하셨죠. 가족, 자식, 손주, 친지들한테 어찌나 입이 닳도록 말씀하시는지 우리가 아무리 말려도 그 고집을 누가 꺾겠어요. 그래서 우리가 엄마 살아생전에 엄마한테 선물해 드리기도 결심한 거예요. 엄마가 그토록 사로잡혀 있던 이 순간을요. 그래요, 우리는 엄마가 이 순간을 경험할 수 있길 바랐어요. 그럼 그날이 어떤 풍경일지 보게 되실 테고, 어쨌든 만사가 계획대로 되면 마음을 고쳐먹으실 수도 있겠죠."
자신의 죽음뒤의 풍경을 경험하게 된 마리암은 이제 더이상 장례준비에 몰두하지 않고, 삶에 몰두하는 여생을 살게 되었을까?
이 책의 저자가 랍비이기에 책 대부분의 이야기는 유대교의 이야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술술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오히려 쉽게 발음하기 어려운 그녀의 이름만큼이나 많은 생소한 단어들이나 문장들이 나와서 페이지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과연 인간의 죽음 그 후는 무엇일까? 종교가 없는 나는 그냥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러하기에 지금의 삶에 충실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인간의 죽음 앞에서 <당신이 살았던 날들>을 반추해보고, 지금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 보게 되는 책이었다.
-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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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작가의 추천사만 모아 책을 한 권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추천사 장인은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책의 핵심을 뚫는다. 문장을 따라가는 순간 운명처럼 젖어 들었다.
랍비 델핀 오르빌뢰르는 홀로코스트와 테러, 국가적 슬픔으로 명명되곤 하는 죽음들과 개인사적인 죽음_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까지. 그 비극을 통해 어떤 씨앗이 삶에 씨앗을 틔우고 확인하고자 한다. 허나 어떤 챕터에도 결론을 내리고 있지 않다. 죽은 자의 결말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이어진다. 죽은 자의 질문은 살아있는 자의 과업으로, 삶은 또 다른 삶으로 이어졌다.
단어는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그들의 문화 사상 생각, 단어를 안다는 것은 그들은 안다는 것이다. 당신이 살았던 날들에는 히브리어의 어원을 풀어 삶의 의미를 설명하는 의미가 나온다. 랍비인 그녀는 그 어원을 이야기 할 뿐 부연 설명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에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한 사람의 죽음에 탈무드와 종교, 역사적 사건, 랍비인 작가의 견해를 담고 있다. 가장 맘에 들었던 것을 위에 설명한 어원들이다. 삶을 뜻하는 '하임'은 복수형이다. 히브리어로 '삶'은 단수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삶이 단수로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은 무엇일까. 망자들이 내려간다는 '스올'은 '질문'과 같은 어원을 갖는다. 이는 누구도 알 수 없고, 우리는 이 질문을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매 챕터마다 어떤 단어가 나오는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 라인 테이프를 붙이며 의미를 새긴다. 책에 실린 이야기와 의미들은 저마다 아름답다.
르포처럼 딱딱하기보단 에세이처럼 물 흐르듯이 읽혀가는 이야기들은 많은 정보들과 아름다운 이야기, 감동을 전해준다.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기독교는 죽음 이후 기회가 없다고 한다. 그 이후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심판이 있을 뿐이다. JTBC 프로 '다수의 수다'에서 신부는 기독교에서 윤회는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가정으로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거부한다. 만약이라는 가정을 인정하게 되면 다음에 잘하자는 그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면 지금의 삶을 부정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번 생은 망했어, 그렇다면 다음 생을 기할 것인가? 기독교에서는 심판과 뜨거운 불구덩이 많이 존재한다. 이생망이란 없다. 보다 나아질 수 내일과 지금부터 달라질 수 있는 기회만 주어질 뿐이라고 말한다. 죽음은 삶에 대한 강력한 찬가라는 르 몽드의 지의 말이 다시금 떠오른다.
단순히 죽음을 이야기하는 책인 줄 알았던 '당신이 살았던 날들'은 이야기의 중요성과 언어, 구전되는 것들의 위대함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연결되는 것들은 단순히 존재와 존재만이 아니다. 이야기와 이야기, 의미와 의미. 많은 것들이 유기적 관계를 맺고 복잡하게 얽혀 우리의 영혼에 맺혀 있다. 그것이 유대인의 저력과 무서움이다. 전 세계가 보다 미래로 먼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버려왔지만 유대인들은 결코 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긴 시간 떠돌며 아프게 잃어 오던 중 많은 것들은 영혼과 핏 속 깊이 새겨왔다. 그래서 그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 보다 의연하고 단단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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