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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자치통감> 전체 294권 중 29권(漢紀 21권)에서 41권(漢紀 33권)까지를 다룬다. 시기로 따지자면, 전한(前漢) 원제(元帝) 영광(永光) 3(B.C. 41)에서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5년(A.D. 29)까지의 역사에 해당한다. 즉 한(漢)나라가 왕망(王莽, B.C. 45~A.D. 23)으로 대표되는 외척 세력의 발호(跋扈)로 망했다가 다시 부활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왜 한(漢)나라가 망했을까? 그 원인(遠因)을 찾자면 무제(武帝)에게 책임을 돌려야겠지만, 원제의 아들 성제(成帝)도 한(漢)나라 멸망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는 태자 시절부터 호색(好色)한 것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황제가 되어서도 주색(酒色)에 빠져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다. 이에 따라 그의 총애를 받은 조비연(趙飛燕), 조합덕(趙合德) 자매가 황자와 후궁을 죽이는 등 횡포를 부리고, 외척세력이 세도를 휘둘렀다. 그러니 나라가 엉망이 될 수 밖에. 그러다가 가장 총애하던 소의(昭儀) 조합덕(趙合德)의 궁에서 새벽에 바지와 버선을 입고 일어나려다가 옷을 떨어뜨리고 말을 하지 못한 상태로 있다가 40대의 나이로 죽었다. 그렇기에 아들 반고와 더불어 <한서>를 남긴, 반표(班彪, 3~54)도 <사기후전(史記後傳)>에서 도중에 주색에 빠지고, 조씨 자매가 궁내를 어지럽히며 왕씨 외척이 조정을 멋대로 하는 천조(擅朝)를 행하도록 허용했다. 가히 사람들로 하여금 흐흑하며 낮게 탄식하는 울음소리를 자아낼 만하다!고 했다. 성제의 건시(建始) 연간 이래 왕씨 외척이 처음으로 국명(國命)을 장악한 상황에서 성제의 뒤를 이은 애제(哀帝)와 평제(平帝)는 짧게 보위에 있는 단조(短祚)로 끝났다. 왕망이 마침내 찬위(纂位)하게 된 배경이다. [pp. 243~244] 라고 평가한 것이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식적인 찬탈자인 왕망(王莽)은 <주관(周官)>을 바탕으로 주(周)시대로의 복귀를 꿈꾸며 각종 개혁정책을 펼쳤다. 대표적인 것이 정전법(井田法)이다. 한나라 조정은 전조(田租)를 감경해 수확물 가운데 30분의 1을 세금으로 내게 했다. 늘 수자리를 서는 대신 세금을 납부하는 경부(更賦)가 있어 늙거나 병든 파륭(罷?)의 사람조차 모두 세금을 내야만 했다. 호민(豪民)이 약한 백성을 침릉(侵陵)하여 가난한 자의 소작 농사 수확물을 가혹하게 수탈했다. 명목상의 세금은 30분의 1이었으나 사실은 10분의 5에 해당했다. ~ 중략 ~ 지금 다시 천하의 전지(田地)는 왕전(王田), 노비는 사속(私屬)으로 명칭을 바꾼다. 모두 매매할 수 없다. 해당 가호의 남자가 8명이 되지 않는데도 전지가 900무(畝)인 1정(井)이 넘는 자는 나머지 전지를 구족(九族)이나 이웃마을인 인리(隣里) 또는 같은 마을인 향당(鄕黨)의 친우에게 나눠 주도록 하라. 전에는 전지가 없었으나 이번에 전지를 받게 된 자 역시 이 제도를 좇아 처리하도록 하라. [pp. 459~460]
문제는 왕망이 황제(黃帝)와 순(舜)임금의 후예를 자처하며, 고대의 제도와 명칭을 조급하게 적용했다가 변경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신채호가 칭찬했다는 정전법도 시행한지 몇 년 되지 않아 백성들이 근심하고 원망한다는 얘기에 사실상 백지화시켜 버렸다. 왕전(王田)을 보유한 사람은 모두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다. 이는 법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 또한 서민을 사적으로 매매하는 죄를 범한 경우 역시 잠시 일률적으로 추궁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p. 502]
진(秦)나라의 가혹한 통치가 [초한지(楚漢志)] 혹은 [초한연의(楚漢演義)]의 시대를 이끌어낸 것처럼 신(新)나라의 현실성이 결여되고 변화무쌍한 통치는 다시금 ‘적미(赤眉)의 난(亂)’으로 대표되는 혼란을 가져왔다. 마치 진(秦)나라가 멸망한 후 군웅(群雄)의 할거(割據)가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에 의해 정리가 된 것처럼 우리가 편의상 전한(前漢)이라고 부르는 나라가 멸망한 후 혼잡스럽던 세상은 훗날 광무제(光武帝)가 된, 유수(劉秀)에 의해 통합된다.
경시(更始) 원년(元年), 경시제(更始帝)에 의해 임시직인 ‘행대사마사(行大司馬事)’로 임명된 유수(劉秀)는 황하를 건너 여러 주군(州郡)을 진정시키고 위로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에 대사마 유수가 하북에 이르러 지나가는 곳에 있는 각 군현(郡縣)에 대해 관원을 고찰(考察)하고, 능력 여부에 따라 승진시키거나 내쫓는 출척(黜陟)을 했다. 억울한 죄목으로 옥에 갇힌 죄수들을 공평히 판결해 풀어주는 등 왕망 시대의 가정(苛政)을 제거하며, 한나라 때의 관명(官名)을 회복시켰다. 이민(吏民)들이 희열(喜悅)한 나머지 쇠고기와 술인 우주(牛酒)를 다퉈 들고 나와 반가이 맞이하여 수고를 위로했다. 유수가 이를 모두 받지 않았다. [p. 602]
사마광도 군주가 용병하는 뜻은 오직 위덕(威德)으로 안민(安民)을 이루는 데 있음을 말한 것이다. 광무제가 관중(關中)을 손에 넣은 배경을 보건대 이 또한 ‘위덕안민’의 이치를 이루고자 한 것이다. 이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p. 706]
아마도 이와 같은 유수(劉秀)의 행적들과 왕망(王莽)의 신(新)이 행한 실효성 없는 잦은 변경에 대한 반감, 그리고 한(漢)에 대한 향수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그가 한(漢)을 부활시킨, 진정한 황제가 될 수 있게 했다고 생각한다.
옥의 티
p. 375 남군(南郡) 태수 무장륭(毋將隆)은 전에 ~ 당시 젊은 왕망은 무장륭을 흠모한 나머지 함께 사귀고자 했으나 무장령은 오히려 왕명의 이런 모습에 ⇒ 남군(南郡) 태수 무장륭(毋將隆)은 전에 ~ 당시 젊은 왕망은 무장륭을 흠모한 나머지 함께 사귀고자 했으나 무장륭은 오히려 왕명의 이런 모습에 [무장륭을 무장령으로 잘못 표기한 부분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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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분량으로 원문과 함께 번역을 시도한 <자치통감>의 3권을 흥미롭게 읽어냈다. 3권에서는 한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한무제 이후 원제와 성제 등의 치세로 시작되고 있다. 흉노에게 시집을 가야만 했던 왕소군의 일화가 각종 야사에서는 안타까운 사연으로 치장되어 잇지만, 이 책에서는 그저 담담하게 다양한 사건 가운데 하나로 취급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한성제의 후궁으로 황후에 오르기까지 했던 조비연 자매에 대한 내용도 야사에서는 흥미 위주의 내용들로 채워져 있으나, 사마광은 당시의 기록을 토대로 객관적인 내용으로 기술하고 있다. 때로는 사마광 자신이나 반고 등의 평을 덧붙이고 있기는 하지만, 특정 인물의 행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제왕과 그들을 보좌하는 신하들의 권력에 대한 관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한나라를 전한과 후한으로 구분하는 기점으로 잡고 있는 왕망의 치세가 3권에서는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권력 기반이 약했던 한평제의 외척으로 다양한 수법으로 민심을 얻고자 했지만, 마침내 신나라를 내세우며 황제로 등극하며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했던 면모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인심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각지에서 반기를 들고 군사를 일으키자, 끝내 반군에 의해 살해당하는 처지에 놓였던 것이다. 권력을 잡기 이전에는 온갖 언사로주변 사람들을 현혹시켰다가, 정작 권력에 오른 후에는 자의적으로 농단하는 현대 정치인들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왕망의 사례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권력을 농단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동안 중국사에서는 왕망의 존재를 단순하게 기술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는 권력을 잡는 모습과 패망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잇다는 점도 특징이라고 이해된다. 아마도 권력의 본질은 그것을 휘두르는 것에 있지 않고, 민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해석된다. 또한 왕망을 대신하여 다양한 인물들이 한나라의 후예를 자처하며 황제를 칭했지만, 사마광은 그 정통을 후한의 광무제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게 여겨졌다. 수많은 군웅들이 할거하는 가운데 천하의 민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광무제의 등극 과정이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으며, 결국 정통성을 인정받은 그의 치세는 4권의 내용으로 이어질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의 기록은 현재를 돌아볼 수 있는 거울이라는 점에서 <자치통감>이 지니는 의미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차니)
*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바탕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개인 독서 카페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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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은 북송대의 역사학자 사마광이 송 영종의 지지와 당대 최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쓴 역사서이다. 그는 주나라 위열왕이 3진(晉)을 각각 제후로 임명한 기원전 403년부터 송 건국 이전인 서기 960년 후주(後周) 세종에 이르기까지 열여섯 나라 1362년간의 역사를 1년씩 묶어 편년체로 총 294권에 담았다. 이 책의 역자인 신동준 선생은 완역을 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지만, 전국시대부터 진(晋)나라 초기까지, 즉 주기(周紀) 권1에서 진기(晋紀) 권3까지 81권을 역했다. 동양고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열국지]와 [초한지], [삼국지]가 다루는 시기가 전부 들어있다. 그중 이 책 [자치통감 3]권은 한기(漢紀) 21권부터 33권까지 13권을, 기간은 기원전 41년부터 서기 29년까지 70년간을 역(譯)한 내용이다. 이 시기를 사마광은 전부 한기(漢紀)로 표기했지만 전한(前漢)시대, 왕망시대, 후한(後漢)시대로 나눌 수 있다. 전한시대는 [자치통감 2]권에 이어 한기 21권에서 26권까지, 왕망시대는 한기 27권부터 32권까지, 그리고 후한시대는 한기 33권에서 49권까지이지만 이 책에서는 한기 33권, 한권만을 다루고 있다.
전한시대는 한 원제부터 성제, 애제에 이르기까지 3대, 39년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원제가 죽고 난 후 보위에 오른 성제는 모친인 왕태후 왕정군의 의중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그래서 여러 왕씨 외숙을 제후에 봉하고 조정의 대신들 또한 외가의 인물들로 채워졌다. 매복이 상서를 올려 한나라 건국 이래 사직이 세 번 위태로운 적이 있었는데, 여씨, 곽씨, 상관씨의 위기가 바로 그것이라며 모두 황제의 어머니 집안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 간했다. 그러나 한 성제는 외면했고, 왕태후는 조카인 왕망을 대사마로 임명하여 보정을 하게 했다. 왕망은 속마음을 감추고 예의를 행하는 등 극도로 절제하며 명성을 꾸미니 많은 사람이 칭송했다. 한 성제가 죽고 조카인 유흔이 13대 황제로 즉위하니 그가 한 애제이다. 애제 역시 조모인 부태후의 일가들과 외가인 정씨들을 대거 제후에 봉했다.
왕망시대는 한 애제부터 평제, 왕망, 회양왕, 광무제에 이르기까지 5대 28년간의 기록이다. 한 애제가 황제로 있을 때 왕씨가 극도로 몸을 사렸다. 그러다 애제가 재위 6년 만에 후사 없이 죽자 태왕태후 왕정군이 왕망을 불러들여 수습하게 했다. 중산왕 유기자를 애제의 후사로 삼아 제위에 오르게 하니 그가 한 평제이다. 그때 평제 나이 9세였다. 왕망은 이때부터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모두 몰아냈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삼도록 했다. 한 평제 5년, 왕망은 평제를 독살하고 섭정을 한다. 한 선제의 현손인 2살짜리 유영을 황태자로 삼고 자신은 주공의 흉내를 냈다. 동군태수 척의가 거병하자 이를 진압하고,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라이름을 신(新)으로 바꿨다. 왕망은 황제(黃帝)와 순임금의 후예를 자처하며, 고대제도를 흉내 내고 시의를 헤아리지 않아 백성들이 괴로워한다. 흉노와 서역이 반기를 들고 백성들은 도적이 되어 곳곳에서 노략질을 한다. 번승이 거병하여 왕망의 군사와 섞이지 않도록 눈썹을 붉게한데서 유래한 적미단이 횡행했다.
왕망의 폭정이 계속되자 남양의 호걸들과 거병한 신시병, 평림병 모두가 연합하여 서기 23년 유현을 황제로 추대했는데 그가 경시제이다. 유연, 유수형제의 위명이 높아지자 경시제의 측근들이 유현에게 이들 형제를 제거토록 종용했다. 유연이 죽임을 당하자 유수는 사죄하며 자신의 허물만을 거론했다. 연합군 병사들이 장안성을 공격하여 왕망을 죽이고, 유현은 낙양에 도읍을 정한다. 경시제와 측근들은 유수를 멀리하고 재폐를 얻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유수는 임시직인 행대사마사가 되어 북쪽의 여러 주군을 진위하며 백성을 위무했다. 서기 25년 유수가 제장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건무로 개원했다. 그가 바로 후한을 여는 광무제이다.
사마광은 경시제를 회양왕이라 칭했다. 당시 왕이란 제후를 이르는 말로 이는 사마광이 유수를 적통으로 보았음을 의미한다. 왕망의 폭정 말기부터 거병하기 시작한 군벌들이 곳곳에서 침략과 노략질을 하고 있는데 경시제는 국정을 장인에게 맡기고 재폐에만 관심을 보였지만, 광무제는 반군들을 토벌하며 백성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힘을 쏟았으니 당연하지 싶다. 왕망시대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고구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서기 12년 왕망은 고구려 병사를 발동해 흉노를 치고자 했으나 고구려가 말을 듣지 않았다. 요서군이 출병을 강박하자 고구려는 요서를 침범해 대윤 전담을 죽였다. 이에 왕망의 장수가 고구려후 추를 유인해 죽이고 왕망은 고구려를 하구려라 부르자, 이때부터 부여와 예맥 모두가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치통감]을 읽다보면 다른 사서와 달리 저자인 사마광이 역사적 사실에 대해 곳곳에서 자신의 관점에서 평한 내용이 들어있다. [자치통감 3]권에서도 네 군데에 사마광의 평이 들어있는데 그중 두 군데가 광무제에 관한 내용이다. 하나는 광무제 유수가 칭제한 후 백성들을 위해 애민한 탁무를 찾아내어 태부로 삼자, 이를 두고 ‘먼저 힘써야할 선무를 깊이 알아 그 본원을 얻은 덕분에 옛 한나라 왕실인 구물을 광복해 장구하게 왕조를 유지하도록 만’들었다고 평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광무제가 편장군 풍이를 파견하여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면서, 정벌은 평정하여 안전이 모이도록 하는 안집에 있다며 군현의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을 두고 ‘군주가 용병하는 뜻은 오직 위덕으로 안민을 이루는데 있다며 이 어찌 아름답지 않는가’라고 논한 부분이다. 사마광이 유현을 회양왕이라 칭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럼에도 사마광은 왕망에 대해서만큼은 한마디 평도 하지 않았다. 아마 왕망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역자의 [자치통감 3]권까지에는 주기(周紀), 진기(秦紀), 한기(漢紀) 등 41권이 수록되어 있다. 역자가 역한 81권의 기록 중 딱 절반이다. 다음 4권에서는 아마 후한(後漢)시대 모두가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후한시대 역시 외척이 발호가 심심찮게 등장할 것이다. 또한 삼국시대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후한의 역사에는 어떤 기록들이 흥미를 느끼게 할지 기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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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3 사마광/신동준 인간사랑/2022.3.20. sanbaram
<자치통감>은 1065-1084년에 걸쳐 북송의 사마광이 책임자로서 역사를 1년씩 묶어 편년체로 편찬한 역사서이다. <자치통감>이 다루는 시기는 주나라 위열왕 23년인 기원전 403년부터 시작해 오대십국의 혼란기가 마무리되는 후주 현덕 6년인 959년에 끝난다. 1,362년간에 걸쳐 16개 왕조의 역사가 총 294권 300만 자에 파노라마처럼 시간대별로 정리돼 있다. 그 중에서 <자치통감 3>에서 다루는 시기는 한나라 말기의 혼란기로부터 왕망시대를 거쳐 다시 후삼국이 시작되는 시기를 다루고 있다.
<자치통감 3>는 한원제 영광 3년(BC 41)년부터 한광무제 건무 3년(AD 27년)까지 68년의 역사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즉 ‘3부 전한시대(권29-34), 4부 왕망시대, 5부 후한시대’ 등으로 이루어 졌다. 중요한 역사적 사실로는 한평제 초시 원년(D 8년) 왕망이 스스로 섭정에 있으면서 보위에 오른 때부터 회양왕 경시 원년(AD23년) 왕망이 사망할 때까지 15년간의 역사를 중심으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나라 조정이 혼란에 빠지는 과정과 여러 지방 세력의 발호, 그리고 외적의 침입과 각 군벌의 이합집산을 거쳐 광무제 유수가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다시 후3국 시대가 태동하는 시기를 서술한 역사서라 할 수 있다. 주요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원제 경녕 원년(BC33) 봄 정월, 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내조해 스스로 한나라 황실의 사위가 돼 친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황제가 후궁 가운데 자가 소군인 양가 출신 왕장을 선우에게 내려주었다.(p.45) 당초 흉노의 좌이질자 왕은 호한야 선우를 위해 계책을 세워 한나라에 귀부함으로써 마침내 흉노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p.49
한성제 2년(BC 27) 황상이 여러 왕씨 외숙을 제후에 봉했다. 왕담을 평야후, 왕상을 성도후, 왕립을 홍양후, 왕근을 곡양후, 왕봉시를 고평후로 삼았다. 이들 5인을 같은 날에 책봉했다. 세상에서 이들을 두고 ‘5후’로 칭한 이유다. p.101
한애제 원수 원년(BC 2) 6월 26일 황제가 미양궁에서 26세의 나이로 재위 6년 만에 붕어했다. 태황태후가 사자를 시켜 달려가서 왕망을 부르게 했다. 왕망은 옛날 대사마로 있을 때 자리를 양보해 정씨와 부씨를 피했다. 당시 왕망을 현명하다고 칭송했다. 왕망이 태황태후의 근친인 까닭에 대사도 공광을 비롯한 조정관원들이 조정 차원의 거조 입장에서 하나같이 왕망을 천거했다. p.372 태황태후는 왕망과 후사 건립 문제를 논의했다. 7월 왕순과 대홍려 좌함을 사자로 보내 지절영 자격으로 증산왕 유기자를 한애제의 후사로 삼게 했다. 왕망은 태황태후에게 건의해 유사에게 조서를 내렸다. p.372 9월1일 증산왕 유기자가 평제로 즉위하다. 한평제의 나이는 9세여서 태황태후 왕정군이 입조하고, 대사마 왕망이 실권을 잡는 병정을 했다. 백관이 국사를 총괄해 왕망에게 보고했다. p.378
한평제 초시 원년(AD 8) 9월 왕망의 모친인 공현군이 사망했다. 왕망은 스스로 섭정으로 있으면서 보위에 오른 까닭에 한나라 대종의 후대를 잇고 있는 셈이었다. p.442 일반백성인 증서가 왕망이 부명을 받드는 듯을 알고, 대신들 역시 널리 논의를 거친 결과를 태황태후에게 따로 상주했다. 이로써 왕망이 정식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모습을 점차 드러내게 됐다. 기문랑 장충 등 6인이 모의해 함께 왕망을 겁살하고 한선제의 증손인 초왕 유우를 세우기로 했다. 도중에 발각돼 주사됐다. p.445 반표가 찬했다. “하, 은, 주 삼대 이래 왕공이 권력을 잃는 실세를 할 경우 여인에 대한 총애인 여총에 기인하지 않은 경우가 매우 드물다. 왕망이 흥기할 당시 효원황후 왕정군은 한나라의 4대에 걸친 천하모로서 조정의 봉양을 받은 지 60여 년이나 됐다. 왕씨의 여러 소인이 대를 이어 정권을 잡고 나라의 권력인 국병을 장악해 오장과 섭후가 된 뒤 마침낸 새로운 왕조 신나라의 도성인 신도까지 만들었다. 제왕의 자리와 존호가 이미 신나라로 옮겨졌는데 태황태후는 연연해하며 손에 쥐는 권권의 모습으로 옥새 하나를 틀어쥔 채 왕망을 바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부인의 인자한 마음이 부인지인은 실로 사람을 슬프게 만든다!” p.449
회양왕 경시 원년 ( 23) 2월 1일 육수의 모래사장 위에 단을 만든 뒤 유현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p.580 상현출신 두오가 왕망을 죽였다. 교위로 있는 동해 출신 공빈취가 신나라를 세워 15년 동안 제위한 68세의 왕망의 머리를 잘랐다. 연합군 군인들이 달려들어 왕망의 몸을 나눠가졌다. 시체 마디마디 해체되고 살이 저며지는 절해련분의 상태가 됐다. p.596 대사마 유수가 하북에 이르러 지나가는 곳에 있는 각 군련에 대해 관원을 고찰하고, 능력 여부에 따라 승진시키거나 내쫓는 출척을 했다. 억울한 죄목으로 옥에 갇힌 죄수들을 공평히 판결해 풀어주는 등 왕망 시대의 가정을 제거하며, 한나라 때의 관명을 회복시켰다. p.602
한광무제 건무 원년 (AD 25) 7월5일 황제의 자리에 오른 광무제 유수가 2천석 이하의 관원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지진 사지절의 사자를 보내 등우를 대사도에 제수한 뒤 찬후에 봉하고, 식음으로 1만호를 내렸다. p.659 광무제 유수가 회현에 행차한 뒤 경업과 진준을 파견해 나루터인 오사진에 진을 치고 형양 이동을 방비하게 했다. p.661
한광무제 건무 2년 (AD 26) 광무제 유수의 건무 2년은 적미의 황제 유분자의 건시 2년을 비롯해 산나라 황제를 칭한 유영 2년, 회남왕 이현 4년, 초려왕 진풍 3년, 주성왕 전융 3년, 무안왕 연잠 원년, 연왕 팽총 원년, 제 손등 원년에 해당한다. p.686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은 송나라 진종 때 사람으로 20세 때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왕안석의 신법이 채택되자 관직을 사퇴한 뒤 <자치통감>저술에 몰두 했다. 그의 나이 48세 때인 1066년에 시작해 66세 때인 1084년에 마무리 했다. 역저자 신동준은 고전연구가이자 평론가로 <삼국지 통치학>, <전국책>, <중국 문명의 기원>, <공자의 군자학>, <맹자론> <장자>, <한비자> 등 100여권에 달하는 책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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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악이란 드라마에서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만들던 시대의 분위기를 읽을 수가 있었다. 복송의 4대 황제 인종 때를 무대로 해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청평악에 그려져 있다. 이 시대에 이 책의 저자가 살았다고 해도 되겠다. 이 드라마는 황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얘기들을 다루고 있다. 정치에 있어선 대신들에게 언로를 열어두고 대화를 통해 문제들을 풀어나간 인종의 치세가 그려져 있다. 다양한 생각들이 부딪고 개혁을 주창하던 신진 관료들이 등장하며 언관들이 득세를 하던 때다. 범중엄, 구양수, 부필 등 뛰어난 관리들이 이 시대에 등장한다. 인종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고 사촌의 아들인 영종이 뒤를 이었다. 영종이 병약해 4년 뒤 승하하고 그의 아들 신종이 등극을 한다. 이 영종, 신종 시대에 사마광이 역사서를 집필하였고 그것이 자치통감이다. 그때는 범중엄의 영향을 받은 왕안석이 신법으로 개혁을 주도했던 때이기도 하다. 사마광은 너무 급진적인 왕안석의 개혁에 대항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그래서 왕안석이 세력을 얻어서 개혁을 이뤄나갈 때, 정치에서 물러나 집필에 마음을 쏟았던 것으로 사료된다.
당시에는 학자들이 학문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잘 조성되어 있었고 그들이 득세를 했던 때다. 간관들이 그들의 뜻을 피력하여 여론을 형성하고 그것으로 세몰이를 하던 때이기도 하다. 황제는 이들의 의견을 잘 조율하면서 나라를 다스려나가야만 했다. 그러기에 인종의 경우는 어찌 보면 우유부단하게 보일 정도로 신하들의 얘기를 잘 듣는 황제로 그려진다. 늘 성군이 되기를 꿈꾸었던 황제로 혼란스러운 나라이길 원하지 않았던 그의 품성이 정치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런 자유로운 사고가 왕성하게 활동하는 사회일수록 문인들이나 학자들이 많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서로 갑론을박하면서 자신들의 뜻을 펼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와중에 타의에 의해 은거를 하게 되는 경우 학자의 뜻을 세우는 일을 하기도 한다. 사마광의 자치통감도 그런 상황에서 써졌다. 이 역사서가 다음 대의 많은 황제들의 귀감이 되기도 했다. 과거는 현재의 스승이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편년체의 형식으로 기술된 것으로 기전체와 상대되는 개념의 역사 기록 방법이다. 중국 역사서의 한 표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시대별로 낱낱이 그려주기 때문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과 같은 사실감이 있다. 해마다 일어난 일들을 차례로 그려서 보여주기 때문에 인과관계 같은 것을 통해 시대상을 알 수 있고 역사의 흐름을 잘 인식할 수 있다. 통치가가 어떻게 역사를 봐야 할 것인가? 현재에 접목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는 방식이다. 자치통감 3권에 해당하는 이 책은 전한과 신을 재료로 서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뒷날의 통치자들이 이를 통해 자신들이 갖춰야 할 덕목을 살펴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후대의 정치인들이 이 책을 가까이 두고 많이 읽은 이유도 될 수 있으리라.
왕망 천봉 2년(AD 15) 1) 봄 2월, 천하에 대사령이 내렸다. 2) 민간에서는 황룡이 황산궁 안에 떨어져 죽었다는 와언이 있었다. 왕망이 이를 싫어해 와언이 시작된 배경을 찾도록 시켰다. 3) 흉노의 제19대 난제함 선우가 이미 중국과 화친하고 나자 자신의 아들인 난제등의 시신을 요구했다. 4) 왕망은 내심 제도가 정해지면 천하가 스스로 평안해질 것으로 생각했다. 제례작약을 한 이유다. 5) 한단 이북에서 계속된 대우로 인해지하에서 물이 솟아올랐다. 급류에 휩쓸려 죽는 사람이 많았다.
신이 세워진 2년에 이르러 일어났던 이야기들을 엮은 것이다. 나라를 평안케 해나가기 위해 애를 쓰는 왕망의 언행이 잘 나타난다. 당시 사회가 주술성이 존재한 사회였기에 그런 특성이 조금 나타나나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사소한 일이 역사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흔적들도 많다. 이렇게 항목별로 전체적인 개요를 적고 구체적으로 사실을 해설해 나가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원문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번역된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자의 노력을 알 수 있고 독자로 이해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원문을 통해서 검증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구성으로 여겨진다. 책이 무척 가치 있게 느껴진다.
3권인 이 책은 전한의 원제 때 이야기로 시작한다. 왕소군을 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스스로 한나라 황실의 사위가 되어 친해지기를 바란다고 해서 시집을 보내는 이야기를 한다. 선우는 환호를 했고, 한과 좋은 관계를 이어간다. 그리고 서로 협조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 왕소군은 그 뒤 시인묵객들에 의해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많이 그려졌다. 역사적인 인물로 세인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 인물이 된 것이다. 새로 황제가 등극하면 주로 사면령이 내려졌다. 책의 전편에 등장하는 내용들이다. 자신의 치세를 새롭게 하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입혀 황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요즘도 정권이 바뀌면 사면령이 내려지는 경우가 있는데 비슷한 상황으로 보면 되겠다.
한선제 때 후궁들의 얘기가 행해진다. 그 유명한 반첩여, 조비연 등의 얘기다. 이들의 갈등은 궁중의 비련을 만들어낸다. 또한 외척들이 발호하는 얘기가 그려진다. 황제가 외척들을 경계하고 위협을 하지만 더욱 세력은 커지게 된다. 그런 가운데 왕망이란 인물이 나오게 된다. 그때 천재지변이 많이 일어나고 나라가 뒤숭숭해 진다. 이런 때에 정치 과정에서 인심을 얻은 왕망이 어린 유아를 왕 위에 앉게 하고 섭정을 하면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다. 그리고 왕망은 자신이 전면에 나서면서 참위설을 내세운 사술로 보위를 빼앗아 결국 한 나라가 망하게 한다. 물론 자신이 더욱 잘 이끌어가겠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나라를 ‘신’으로 바꾸고, 많은 개혁정치를 행한다. 토지개혁, 화폐 개혁, 노비 소유 제한 등 주나라를 모델로 해서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어 나가려는 시도를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결국 실제적인 형태로 나타나지 못하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민심을 잃게 되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그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이었던 유수에게 15년의 기간을 끝으로 나라를 물려주게 된다. 이 유수가 후한 광무제다. 신이라는 국가에서 전의 한을 그리워하는 백성들을 등에 업고 유수가 나타났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후한의 개국이다.
왕망이 민중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신’을 개국하고 포부가 컸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자신이 충분히 좋은 나라를 열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듯하다. 그러기에 자신이 옹립한 2세의 황제도 폐하고 자신이 직접 황제에 올랐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 생각이 이상적으로만 흐르고 현실은 백성들이 어려운 가운데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유씨의 나라, 한 나라를 그리워하는 정서가 싹트게 되었다. 그것이 한나라 후손들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그 반란을 진압할 수 없었던 왕망은 자신의 이상을 15년만에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신이 그렇게 해서 중국 역사상 단명한 나라로 남게 되었고, 외척들의 발호를 후세 황제들이 경계하는 여건을 만들어 놓게 되었다.
유수가 이 얘기를 듣고는 부성에서 완현으로 달려와 사죄했다. 대사도 관속들이 유수를 맞이하여 조문했으나 유수는 이들과 사사로운 말인 사어를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오직 깊이 자신의 허물만 거론할 뿐 일찍이 거둔 곤양 전투의 대공을 조금도 내세우지 않았다. 또 친형인 유연을 위한 복상도 하지 않았고, 음식과 언소 역시 평상시와 같았다. 경시제 유현은 이로 인해 부끄럽게 생각하며 유수를 파로대장군에 임명하고 무신후에 봉했다. p589
유연과 유수가 신에 대해 대항하는 군사를 일으키고 많은 전공도 세웠다. 그런데 갑자기 유현이 나타나 황제로 옹립되게 되었고 그들의 입지가 곤란해지는 상황이 되었다. 유현에게 굴복하지 않은 유연과 많은 사람들이 유현에 의해 몰락하게 된다. 이때 상황을 깨달은 유수가 한 행동이 그려져 있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유수가 어떻게 해서 지혜롭게 세력을 키워나가고 결국은 후한을 열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냉철하고 지혜롭게 상황에 대처해 나가는 그의 인물됨이 민중들의 공감을 얻고 나라를 여는 주춧돌이 되어 준 것이다.
왕망의 신은 많은 반란이 일어나 곳곳에서 서로 전투를 일삼았다. 그 가운데 경시제 이현도 있었고 소왕 유수도 있었다. 그런데 결국 모든 세력들을 규합한 것이 지모와 능력에 앞섰던 유수가 된다. 그는 황제에 오른 뒤 세력을 몰아내고 후한을 세운다. 결국 후한을 세우고 반란을 정리하는 부분까지가 3권에서 그려진다. 3권은 신이 멸망하고 후한이 개국하는 데까지라 보면 되겠다. 이 당시의 상황을 보면 군웅들이 할거했던 진나라 말기를 연상할 수 있다. 진승, 오광의 난이 일어나면서 많은 세력들이 각지에서 일어나 서로 세력 다툼을 하다가 결국은 한 초로 갈리게 되고 결국 한나라로 통합되었던 역사를 보는 듯하다. 결국 승자가 소왕 유수지만 처음부터 유수가 가장 강한 세력은 아니었다. 서로 힘자랑을 하다가 이합집산이 일어나고 유수가 최고의 권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들이 편년체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부분이 2천 년 전의 이야기다. 그런데 너무도 사실적으로 자세하게 우리가 읽을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역사서의 힘이 아니겠나 생각이 된다. 물론 이 책이 기록된 것은 천 년 정도 전이다. 송나라 시대에 한 나라의 이야기를 조목조목 항목별로 시간대에 맞춰 그려주고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우리가 지금 천 년 전에 기록한 2천 년 전의 이야기를 눈에 선하게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 책에서는 그 역사를 통해 오늘의 우리들의 삶을 일깨울 수 있다는 것이 또한 고맙다. 중국의 역사서로 방대한 저작에 경의를 표하는 마음이 된다. 역사의 많은 부분을 실제처럼 읽을 수 있어 좋다. 많은 도움이 된다. 후한, 삼국, 오대까지 다음에 나올 책들이 기다려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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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랑에서 출간한 [자치통감(資治通鑑)] 3권은 한기(漢記) 21에서 한기(漢記) 33의 내용을 싣고 있다. 시기로는 기원전 41년부터 기원후 29년인 이 시기는 한의 11대 황제인 원제부터 16대 광무제(후한(後漢)의 초대황제)의 치세 초반에 해당된다. 크게 보자면 이 책은 원제의 뒤를 이은 성제의 즉위 이후 외척인 왕씨가 정권을 잡고 성제 이후 연달아 즉위한 어린 황제들로 인하여 불안한 정세가 이어지다가 결국 왕망이 선양의 형식으로 신(新)나라를 창건하였다가 광무제 유수를 포함한 반란 세력에 의하여 신(新)의 멸망과 후한(後漢)의 등장까지 다루고 있다.
굵직한 사건들이 많기는 하지만 나는 왕망(王莽)이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춰서 이 책을 읽었다. 왜냐하면 기존 역사에서 왕망(王莽)은 물론 그가 세운 신(新)은 중국 역사에서 통일 제국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시대로 구분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실제 한(漢)나라가 신(新)을 사이에 두고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으로 나뉜 것은 신(新)을 독자적인 제국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新)은 1대 왕망에 의하여 15년 존속한 나라였지만, 건국한 시점이 5호 16국이나 5대 10국과 같이 수많은 나라가 건립한 혼란한 상황이 아니라 한(漢)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뒤를 무력이 아닌 선양(물론 강요에 의한 것이었지만)의 형식으로 자연스럽게 등장하였다는 사실은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중국 역사에서는 제대로 인정받지 않아서 상당히 부정적인 평가를, 심지어 아예 제대로 다루지 않고 있지만, 제국의 신하의 신분에서 그대로 제국을 넘겨받아 새로운 왕조를 세운 점은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 생각된다. 훗날 조조와 사마의가 그런 방식으로 왕조를 열어서 그래도 재평가를 통하여 어느 정도 역사에 다뤄지고 있지만 유독 왕망은 그렇지 못하고 있으니 그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가질 필요성을 느꼈다.
왕망이 중국 역사에서 부정적인 평을 넘어 거의 무관심한 대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를 직접적으로 다룬 책을 한국에서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아마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편년체 기술 방식으로 주(周)나라 시기부터 후주(後周)(송나라 건국 직전 5대 10국 중 5대의 마지막 왕조로서 조광윤은 후주의 절도사였다가 선양의 형식으로 송나라를 건국하게 된다.)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니 이 책을 통하여 왕망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전한(前漢) 후반에 외척으로 어떻게 권력을 장악하고 훗날 신(新)나라를 건국하고 또 멸망하는 과정이 오롯이 시간적으로 존재했기에 자치통감(資治通鑑)에 그러한 부분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도 신(新)의 정통성은 철저히 부정되어 신(新)에 해당하는 서기 9년부터 23년에 해당하는 기간을 '신기(新記)'가 아닌 '한기(漢記)'로 표기되어 있으며 왕망의 대부분의 행적을 서술하되 부정적인 뉘앙스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왕망(王莽)은 부친 왕만의 요절로 유고한 까닭에 부귀와 같은 또래의 사촌 형제 등의 군형제에 미치지 못했다. (중략) 왕망은 절개를 꺾고 공감한 자세로 옷을 유생처럼 입고 근면히 두루 공부하는 근신박학을 행했다. 모친은 물론 친형인 왕영의 요절로 과부가 된 형수를 섬기면서 부친을 잃은 조카 왕광들을 양육했다. 모두 삼가며 정성을 다하는 칙비의 모습을 보였다. 또 밖으로는 영준과 사귀는 외교를 하고, 안으로는 여러 백숙을 공손히 섬겼다. 몸을 굽혀 섬기는 위곡에 성의를 보이는 예의가 있었다. - p. 156 : 한성제 영시 원년(BC 16) 中에서 - 자치통감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왕망(王莽)에 대한 기술 부분은 상당히 긍정적이다. 중국 역사에서 왕망(王莽)은 상당히 부정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고 한 점을 감안한다면 위 기술 내용은 그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왕망(王莽)의 출생이 기원전 45년이었으니 30세가 되는 시점에 그에 대한 기록이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으니 그가 외척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어렵게 살아왔음을 우선 확인할 수 있다. 한원제의 황후이자 한성제의 모친인 효원황후 왕씨 덕분에 왕씨 일가는 외척으로서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황후의 형제가 8명이었으니 이들이 군권을 비롯하여 모든 권력을 장악하여 위세를 떨치는 상황에서 왕망은 그의 부친이 요절하여 고모인 태후의 배려를 받을 정도로 곤궁한 삶을 살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사촌들이 호의호식을 하며 방탕한 삶을 살았음에도 왕망(王莽)은 유생으로서 학문에 정진하고 명망있는 사람들과 교제하고 있었으니 그의 부정적인 평가를 떠올려 본다면 뜻밖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왕망(王莽)은 그의 백부이자 대장군인 왕봉이 병으로 눕게 되자 조카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정성껏 간호하면서 아들보다 낫다라는 평을 받았고, 이에 감명받은 왕봉은 죽으면서 태후와 황제에게 왕망을 부탁하고 이후 왕망(王莽)은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위가 높아질수록 오히려 더욱 겸손하며 검소한 삶을 살았으며, 수레와 말을 빈객에 나눠 주고, 명사들을 지원하며 도와주고, 장상 및 경대부와 교제하며 자주 왕래하였으니 그의 명성은 더욱 커져만 갔다. 아래 기록은 그의 검소한 삶을 잘 보여주는 대목인데, 사마광은 말미에 그러한 것들이 왕망이 자신의 명성을 계획적으로 높이기 위한 의도적인 것으로 기술함으로써 왕망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황제가 하사한 상사와 봉읍에서 나오는 돈인 읍전을 모두 선비들에게 나눠주어 향유하게 하면서 더욱 검약한 모습을 보인게 그렇다. 모친이 병이 났을 때 공경과 열후가 부인들을 보내 문질하게 했다. 이때 왕망의 부인이 이들 부인들을 맞이했다. 치맛자락이 땅에 끌리지 않은 것은 물론 겉옷인 무릎 가리개도 삼베로 만든 것을 사용했다. 이를 본 부인들 모두 비녀인 동사로 여겼다가 물어본 뒤 왕망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크게 경악했다. 그가 자신의 명성을 꾸민 게 모두 이와 같았다. - p. 232 : 한성제 수화 원년 (BC8) 中에서 -
하지만 나는 과연 이런 것들이 애초부터 왕망(王莽)이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자치통감에 왕망(王莽)의 기록이 그가 대략 30세가 되던 시기에 처음 등장하였으며, 위의 사례는 그가 대사마로 군권을 장악한 38세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그가 제위를 선양받는 것은 17년 뒤의 일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주위를 의식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행적 모두가 향후 제위를 선양받기 위한 쇼맨십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 않을까?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 불린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미 그 결과를 알고 있는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하여 부정적인 평을 받는 왕망(王莽)의 제위를 찬탈하기 훨씬 이전의 행적마저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의 둘째 아들인 중자 왕획이 노비를 죽이는 일이 빚어졌다. 왕망이 심하게 질책하며 자진하게 했다. - p. 350 : 한애제 원수 원년(BC2) 中에서 - 왕망이 잇달아 상서해 100만 전 토지 30경을 바쳐 대사농으로 하여금 빈민을 구제하는 데 사용하게 했다. 공경들 모두 이를 흠모하며 본받았다. 전택을 헌납한 자가 총 230명이었다. 호구의 숫자에 따라 빈민에게 나눠주었다. - p. 391 : 한평제 원시 2년(AD2) 中에서 - 심지어 왕망(王莽)은 자신의 아들이 노비를 죽이자 아들 스스로 자결케 만든다. 이 시기에 사실 왕망은 잠시 실각한 상태였으니 어떻게 보면 이 역시 부정적으로 본다면 일종의 쇼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법 앞에 모두 평등하다고 말하는 현재 사회에서 음주운전과 막말, 마약 밀수, 부정 입시, 부동산 비리 등을 저지른 고위 정치가의 자녀와 가족들이 의혹 또는 가벼운 처벌로 넘어가는 반면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시민들 대부분에게 잊혀지는 상황인데 수천년전 신분제가 명확한 시대에 최고 권력자가 위법을 저지른 아들을 죽음으로 단죄하는 것은 결코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더불어 그는 여전히 스스로 나서서 빈민 구제에 앞장섰으니 그에 대한 신망은 더욱 커졌고 결국 그가 서기 9년에 제위 선양의 형식으로 신(新)을 건국하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만약 이것이 모두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일이라면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아래서 인고의 세월을 거쳐 패권을 차지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비견될 만한 인물이 아닐까?(이에야스는 이후 수백년간 도쿠가와 막부 체제를 유지되었지만 왕망은 자신의 대에서 건국과 멸망이 이루어졌다는 차이는 있겠지만)
하지만 그는 황제에 오르면서 이상주의적인 정치의 추진과 무능으로 인하여 점점 신망을 잃게 된다. 그는 이전의 주(周)나라 시기의 제도를 복원하여 그 시기로 회귀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모든 정책이 점점 이상주의로 변모하고 현실을 외면하였으니 그의 치세 말기에는 적미군과 훗날 광무제 유수가 되는 각종 반란세력으로 인하여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면서 그가 건국한 신(新)나라는 1대 15년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그의 수많은 실정 중 관심을 끄는 대목은 신(新)의 고구려 공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왕망(王莽)은 내부의 불만과 그의 이상주의를 위하여 당시 중국의 주변 이민족과 왕국을 하대하는 정책을 취하였는데, 고구려 역시 그에 해당된다. 사실 이 부분은 우리 역사에서도 잘 언급되지 않았기에 흥미가 생겼다. 왕망은 또 고구려 병사를 발동해 흉노를 치고자 했다. 고구려가 행군하려고 하지 않자 요서군이 출병을 강박했다. 고구려 병사가 출새한 뒤 범법하여 침구했다. 요서 대윤 전담이 이를 추격하다가 살해됐다. 주군의 관부가 그 허물을 고구려 부족의 우두머리인 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에게 돌렸다. (중략) 왕망이 엄우에게 조서를 내려 반격하게 했다. 엄우가 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를 유인해 목을 벤 뒤 수급을 장안으로 보냈다. 왕망이 대열하며 하서하여, 고구려의 명칭을 '하구려(下句麗)'로 바꾸게 했다. 이로 인해 고구려 즉 맥인의 변새 침공이 더욱 심해졌다. - P. 503 : 왕망 시건국 4년(AD 12년) 中에서 -
위 내용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언급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대부분의 내용은 일치하지만 엄우라는 장수가 죽였다는 '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에 대한 부분은 엇갈린다. 자치통감의 기록대로라면 '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는 고구려 왕을 뜻하는 것인데 당시 시기에 해당하는 고구려 왕은 바로 유리왕(琉璃王)이었다. 그가 기원전 19에서 서기 18년까지 고구려를 다스렸으니 '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가 고구려 왕이라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해 목을 베고 수급을 수도로 보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죽은 인물이 고구려의 왕이 아니라 '연비(延丕)'라는 장수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맞다고 할 수 있지만 '연비(延丕)'라는 이름이 삼국사기 이외의 사서에서는 등장하지 않기에 쉽게 정의할 수 없다. 현재로서는 전사한 인물이 고구려 유리왕이라는 설과 장수 '연비(延丕)'라는 설, 그리고 '추(騶)'라는 표현으로 인하여 동명성왕(고주몽)이라는 설이 있지만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어서 앞으로도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이후 2년 뒤 서기 14년에는 고구려가 다시 신(新)나라를 공격하여 고구려현을 빼앗았다는 내용이 있지만 자치통감에는 그런 기록이 없으니 중국과 고구려에 대한 고대사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재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편년체의 역사서로서 그 방대한 역사 기록으로 인하여 중요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중국의 역사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이 책에 등장하는 사건과 인물들이 우리 입장에서는 낯선 인물들이 꽤 많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중국 역사의 흐름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전공자 또는 역사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렇게 읽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리뷰처럼 그 시기에 주목할만한 사건이나 인물에 초점을 맞춰서 읽어보는 것도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읽는 하나의 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을 좀 더 상세히 찾아가면서 읽다보면 그 내용은 물론이고 점점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익숙해질 수 있으니 말이다. 나 역시 이 책을 통하여 왕망이라는 중국 역사상 부정적인 평가를 받던 인물에 대한 나름의 재평가라든지 그동안 아예 접한 적이 없었던 신(新)나라와 고구려와 연관된 내용을 확장하여 찾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의미있는 독서였던 것 같다.
- 이 리뷰는 출판사 인간사랑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쓴 글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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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 인스타그램은 책스타그램의 용도로 사용하는거라 책이야기만 주로 하게 된다. 인스타그램에 쓴 짧은 메시지를 옮겨 온거라 정식 리뷰와는 거리가 좀 있다. 더 자세한 리뷰는 차차 하기로 하고. 집에 책이 쌓여간다. 인간사랑 출판사에서 나온 자치통감이 3권까지 집에 있는데 1권 절반 정도 읽고 나머지는 손대는 순간 다른 일을 못할까봐 아껴뒀다 해야되나.. 아이들이 오늘은 감기약의 여파로 비교적 이른 시간인 10시 40분에 다 자는 호재 속에..(나는 어제 9시에 딸래미를 재우다 거의 동시에 자버려서ㅋㅋ숙면을 취했다) 책을 읽..으려고 하다가 요즘 중국어 공부 겸(사실 거의 안 들린다.오히려 드라마에 빠졌다, 일생일세를 한 편 보고) 책을 들었다. 지금 읽는 책은 다른 책이지만, 문득 아껴둔 이 책이 생각나서 아무곳이나 펼쳤다. 사실 나는 법학, 지금의 전기회사에서 10년 한 마케팅을 했지만 그 어떤 것보다 역사에 자신이 있어서 아무곳이나 펴도 이해가 되고, 역사의 줄기가 잡아진다. 3권은 전한 말기 왕씨 외척이 득세하면서 왕망이 역심을 품고 신을 건국했다가 후에 광무제에 의해 다시 유씨 천하가 되는 후한으로 이어지는 시대의 이야기다. 외척은 늘...권력자들에게 힘이 되면서도 가장 큰 근심이었다. 가까이는 안동김씨, 풍양조씨,여흥민씨로 대표되는 한말 세도정치부터 인종, 명종대 대윤소윤의 윤임, 윤원형의 대립, 고려의 이자겸, 한나라의 왕씨 등 수도 없이 많은 외척 세력이 황제(왕)의 위세를 믿고, 특히 세자시절부터 보필한 외숙이면 성인군자급이 아니면 거의 다가 세도의 중심에 있게 된다. 결국 나라를 누란의 위치까지 몰아간 사례가 많았다. 심지어 오스만 투르크는 외척의 발호를 방지하기 위해 왕이 신분이 낮은 여인과 결혼했다. 왕이 되는 왕자 이외의 왕자는 죽이거나 새장제도를 만들었다. 이로 인해 후대 왕이 어리거나 할 경우 지켜주는 세력이 없어 권력이 약해지기도 했지만 그만큼 외척 세력은 모든 권력자의 근심이었다. 그러기에 최근 방영중인 KBS1의 사극 속 태종 이방원은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해 처남 4명을 사사하고, 심지어 차기 왕의 장인으로 중국 사신으로 갈 때 그 전송행렬이 어마어마 했다는 젊은 재상 심온까지 사사시킨다. (물론 외척세력 근절만의 이유로만 저지른 일은 아니지만 가장 큰 목적이었을 것이다) 자치통감 3권은 아주 오래전 고사로 모든 권력가들에게 반면교사를 준다. 고 신동준 선생님이 번역을 마치지 못하고 타계하셔서 너무나 안타까운 미완의 대작이 됐다. 하지만 초기 10권만으로도 감사하다. 문득 중국어 원문으로 읽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다. 인간사랑 출판사의 출판정신에 감사드린다. #자치통감 #신동준작가 #후한광무제 #인간사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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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의 #편찬이유~는 왕조의 통치에 고민하는 황제의 명령으로 편찬됐다. 전국시대에서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약 1360여년 동안의 방대한 자료속에서 첫째로는 제국의 흥하고 망한 이유에대해 정리하고 둘째로는 다스림에 있어서도 역대의 본이 되고 거울이 될 수 있는 부분만 따로 정리된 것에 큰 이미를 두고 있다. 인간은 고만고만하게 비슷하고 자기가 보고싶은 것만 보게 돼 있다. 하물며 제국을 다스리는 일에 주어진 권력의 편향성은 때론 무서움의 극치가 될수 있기에 위기의식의 통치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리더는 #修身齊家治國平天下~요 #修身齊家治道~란 생각이 든다.
#또한가지로 #資治通鑑~은 거대한 역사의 방대한 분량에따른 출판사의 구분이 편집자에따라 약간씩 다를 수 있음으로 참고하여 보면 될듯하다. 그 어마한 분량을 단권으로 출판된 책도 있고 시리즈로 출간된 것도 있다. 인간사랑 출판사의 資治通鑑은 고 신동준 선생님이 번역해 출간한 資治通鑑 시리즈로 지금까지 3권까지 출간됐다. 1편과 2편은 전국시대와 초한시대를 거처 전한시대 중반기까지 정리됐고, 이번 본문인 3권은 전한시대 중후반부터 왕망시대를 거쳐 후한시대 시작까지를 싣고 있다.
#개인적으로 資治通鑑의 정치외 치도가 중복되는 초한지, 삼국지, 열국지 중에 마지막 열국지는 읽어보질 못했으나 항우와 유방의 한판인 초한지와 삼국지는 정말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초한지는 중국본으로는 읽어보지 못하고 한국인 역본만을 읽었고 삼국지는 본토 출판본과 한국 이문열 작가의 역본을 읽었는데 큰 차이는 없다. 다만 사건과 정쟁의 선후 차이일뿐, 전쟁터와 장군 이름들이 햇갈려 앞뒤로 왔다갔다 한것 빼고는 재미있었던 기억을 지금까지도 가지고 있다.
#사족이지만 마침 자치통감과 비슷한 사극류인 드라마 태종 이방원을 가끔 몰아 본다. 설에 의하면, 조선 1대왕 태조, 2대왕 정종(방과), 3대왕 태종(방원)에 이은, 즉 선대왕들과는 다른 로얄 패밀리로서 왕가의 교육을 받으며 왕이 된 첫번째요, 태종의 여섯번째(앞의 3명은 어렸을때 사망으로 실제로는 3번째임) 아들인 조선 4대 임금, 세종대왕이 극찬하며 손에서 놓지않고 즐겨 봤다고 알려진 책이 資治通鑑이다.
혹 이런 책이 대한민국의 저작물이 아니라 안타갑다는 사람들이 있을까 말하지만 책이란 국경이 없다. 누구든 읽고 내 지식으로 만들면 내 자산이기에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런 희대의 성종으로 칭송받는 세종까지 손에서 놓치 않고 늘 곁에 뒀다는 책, 또 신하들에게도 적극 권장했다고 알려진 資治通鑑의 내용이 어떤 책인지를 알고 나면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모두에도 언급했지만 요즘으로 말하면 資治通鑑은 리더쉽의 정수라고 칭할 수 있는 책으로 치도라는 측면에서 당연히 임금이라면 보지않 수 없는 책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수 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이다. 資治通鑑의 무엇이 세종대왕은 물론 세계적인 리더들의 손에 놓지않고 서너번씩 읽을까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세종도 임금으로서 초반엔 신하들과의 갈등으로 상당히 어려움을 겪은것으로 알려진것을 보면 왕권의 강력한 정치력속의 임금으로서도 나라는 다스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마음을 얻는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세종을 위한 태종의 계획들은 무수한 피를 통해 최고의 자리에 오른 다음, 첫번째로 한일이란 공신과 친가, 외가를 막론하고 싸그리 쳐내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음을 두고 한 말이리라. 자치통감의 성격과 결코 무관치 않다는 점에서 그렇게까지 해줬음에도 세종의 초반 정치력은 상당히 어려웠다고 알려져 있다.
#왜였을까. 왜 그럴수 밖에 없었을까를 생각해볼때 리더의 최 정점에 위치할 지라도 흥하고 망하고 성하고 쇠함의 두려움과 어려움의 과업을 통합해 한마디로 말하면 두려움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출판사의 지원으로 작성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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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29-41권, 한기 21-33을 번역하고 원문을 함께 실었다. 원제 후기에서 광무제 초기까지의 역사이다.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망하는 과정이다. 읽기 편하게 번역하였다. 옛 글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도 쉽게 볼 수 있다. 문장 또한 매끄럽다. 권중달도 자치통감을 번역하였는데, 전문가가 아닌 나에게는 이 책이 낫다.
자치통감은 연도별로 기록한 편년체 역사서로 황제의 통치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사실을 충실히 기록하고, 일의 시비와 역사적 인물의 공과를 논했다. 사건의 전말을 밝혀 귀감으로 삼게 하고, 상소문 등 뛰어난 문장을 실어 안목을 넓혀주고, 대의에 입각한 평가로 식견을 높여주었다. 주요하게 기록한 것은 천문, 자연현상, 홍수ㆍ화재ㆍ가뭄 등 재난, 황제의 행적, 황가의 일, 왕과 제후에 봉함과 파함, 중신의 임면, 제도의 변경, 반란, 전쟁, 외교, 기이한 일 등이다. 국사에 대한 논의로 신하가 황제에게 올린 상소, 왕과 신하의 문답, 신하들 간의 논쟁이 들어있다. 역사가인 순열, 반고, 반표 등의 평가를 실었고, 사마광이 자신의 이름으로 한 평가와 그냥 적은 평가가 있다. 현대의 역사는 토지제도 등 경세치용에 치중하여 밋밋한데, 자치통감에는 사람이 보인다.
자치통감 3의 내용이다. 원제 후기. 변방의 흉노를 제압한다. 세도가 석현이 전횡을 행한다. 성제. 권신에게 정사를 맡기고, 편안함을 즐긴다. 외척을 중용한다. 작은 반란들이 일어난다. 치세 중반부터 황궁를 벗어나 미행을 하고, 조첩여 등 여색을 즐긴다. 충직한 신하들이 외척을 견제하고 정사에 집중하라고 간언하지만 듣기만 할 뿐 행하지 아니한다. 후사 없이 급사한다. 애제. 황태자로 있다가 젊은 나이에 등극한다. 황권을 위협하는 권신들을 물리치기 위해 외척인 부씨와 정씨를 중용한다. 하지만, 이들은 탐욕이 넘치는 자들이었다. 동현이라는 젊은 남자를 총애하여 각종 특혜를 제공하고 중신에 임명한다. 갑자기 요절한다. 평제. 후계 없이 황제가 사망하자 태황태후가 신속히 전권을 장악하고 내세운 어린 황제이다. 충절과 효행, 근검 등으로 왕씨 일가에서 명성이 높았던 왕망이 전면에 나선다. 왕망은 인사권을 활용하여 권력을 강화한다. 평제의 외척이 입경하지 못하게 견제하고, 반대파를 제거한다. 황제가 성장하자 독살하고, 양위의 형태로 황제에 오른다. 한조가 멸망하였으나 큰 반발이 없다. 왕망. 요순시대를 칭송하며 복고 정책을 시행한다. 외양을 변경하고 정전제 등을 실시한다. 현실성 없는 정책들은 실패하였다. 또, 법령과 제도를 자주 변경하니, 나라가 혼란에 빠진다. 사적으로 이득을 취하는 자들이 득세한다. 주변국과 관계도 신뢰가 무너지고, 사방에서 한나라의 세력권을 벗어난 왕들이 나온다. 민생의 파탄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농민들이 주축이 된 赤眉와 한조 부흥을 외친 세력이 있었다. 한조를 계승하고자 하는 경시제가 왕망을 죽인다. 경시제. 인물됨이 비루하여, 대업을 이루지 못했다. 각 곳에서 황제라 칭하는 자가 나선다. 경시제 휘하에 있던 유수가 경시제를 몰아낸다. 광무제. 전공을 많이 세웠다. 사람들을 포용할 줄 알았고, 어려운 시기 참을 줄 알았다. 대세를 장악한 후 차례로 반란 세력을 진압한다. 농민군인 적미는 많은 숫자에도 불구하고 폭동세력에 불과해 스스로 궤멸되었다. 지방 세력들은 대세가 기울자 상당수 귀순하였다. 이 시기 나라를 망하게 한 왕망의 생애를 적어본다. 왕망은 태후의 조카였지만 아버지가 일찍 죽어 어린시절 한미하였다. 성실하고 효성이 깊고 검소하였다. 출사한 후, 교유의 폭을 넓혔고, 빈객들에게 많이 베풀었으며, 위사람을 극진히 모셨다. 사람들의 좋아했다. 경쟁자를 모함하여 물리치고 대사마에 올랐다. 평제가 등극하여 새로운 외척이 부상하자 실권한다. 부태후의 처우에 대하여 원칙론을 주장하여 명성을 높인다. 봉국에 내려가 관리들의 인심을 얻으니 그의 신원을 요구하는 상소가 많이 올라간다. 노비를 죽인 아들을 자살하게 했다. 평제가 죽자, 태황태후의 비호 아래 인사권을 확보하고 실권을 장악한다. 풍설을 이용하고 이적을 조작하여 권력을 강화했다. 실권자임에도 겸양의 자세를 보여 명성을 높였다. 자신을 따르는 이를 중용하고 따르지 않는 이는 제거했다. 많은 이를 봉후하고, 관리들을 우대하였다. 허나, 선심정책에 따르는 실질이 없어 관리들에게는 녹봉이 제후들에게는 봉토가 없었다. 옛 시대의 명당을 모방하여 건축하는 등 요순시대를 이루고자 했다.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아들과 조카를 죽게 하였다. 성정이 躁擾하여 수시로 법을 바꾸었다. 반란이 일어나자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과 함께 끝까지 항거하다 목숨을 잃었다.
다양한 인물들의 부침과 각종 사건들의 전개가 흥미롭다. 몇가지 감상을 적는다. 상벌은 경중을 따져야 한다. 흉노를 정벌한 연수와 진탕이 사소한 불법을 저지른다. 이에 승상이 처벌하려고 하니 유향이 ‘큰 공이 있는 자에 대해 적은 죄를 기록하지 아니한다’며 반대한다. 결국 가벼운 벌을 주는 것으로 끝난다. 공적이 있는 사람을 존중함이다. 사소한 잘못을 가지고 청문회에서 괴롭히는 것을 삼가해야 한다. 또한, 심각한 불법과 사소한 불법을 구별하지 못하고 같게 이야기하는 것도 부적절하다. 일의 경중을 무시하고 쉽게 비난하거나 옹호하는 것 모두 게으른 것이다. 일을 맡은 자는 실행력이 있어야 한다. 국정을 담당한 황제가 우유부단하고 사적인 인연에 매이니 나라가 어지러워졌다. 원제는 권신인 석현의 전횡을 알고 있었으나 덮어주었고, 평제는 왕씨들의 전횡에 위압당했다. 문제를 직시하고 대응책을 시행하지 못하니 탐욕이 기승을 부렸다. 늘 좋은 간언은 있다. 다만, 그것을 따르지 않을 뿐이다. 대표적으로 원제 시절 광형의 상소가 있었고, 평제에게 올린 포선의 상소가 있었다. 시의적절한 상소들을 읽는 것은 즐거웠다. 나라의 버팀목은 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수자가 적어지면 나라가 망한다. 원제 시절 석현이 전횡을 하였으나, 일을 잘해 보려는 자였으니 제 일을 하였고, 평제 시절 많은 신하들이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여 어지러움 속에서도 나라가 굴러갔다. 그러나, 애제에 이르러 기존의 세력을 몰아내는데 주력하여 많은 인재들을 내치니 나라가 망가진다. 왕망은 실권을 장악한 후 인재를 구하지 아니하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들만 등용하니 나라가 망했다. 인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라를 지탱하는 인재들을 잘 보호해야 한다. 위정자가 공을 버리고 사를 취하면 나라가 급속히 기운다. 평제가 조첩여를 총애하면서 법도가 어지러워졌고, 애제가 동현을 총애하고 중용함에 풍속이 무너졌다. 왕망에 대해 생각해본다. 열심히 일하였으나 결국은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고 나라를 망하게 했다. 좋고 올바른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했으나, 실제로는 냉혹하고 사익에 밝은 자였다. 반고는 ‘色取仁而行違’로 평가했다. 그의 잘못은 쉽게 보인다. 정책이 현실에 근거하지 못했고, 겉으로 화려하지만 실속이 없었다. 한무제 이후 나라가 안정되고 물산이 풍부해진 시대에 적용할 수 없는 정전제를 시행했다. 주나라를 선망하여 돌아가고자 했으나 無望한 일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제도의 안정성을 무너뜨린 것이다. 법이 시행되고 안정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수시로 법을 바꾸니 현장이 혼란해졌다. 제도가 무너지니 관리들의 전횡이 심해지고, 선량한 관리들도 손 쓸 방도가 없었다. 재물과 지위를 제공하여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하였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가능하지 지속될 수 없었다. 관리들을 우대하고 많은 귀족을 새로이 만들지만, 결국 이들에게 주어야 할 녹봉이나 봉토가 없으니 어려움만 더했다. 외교도 잠시의 화려함을 위해 졸속으로 행하니, 신뢰를 잃어 선린관계가 파탄났다. 비정한 인물이었다. 부득이한 일도 아닌데 아들 둘과 조카를 죽게 하였다. 동현의 시체를 열어 확인했고, 원한을 반드시 갚았다. 겸양한 척 하였으나, 자신에게 주어지는 직위를 끝까지 거절한 적은 없었다. 현명하지 못했고 현명한 자를 등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런 자가 득세할 수 있었을까? 몇가지 이유를 추정해본다. 외척이 발호하면서 조정에 현량들이 적어지니, 교언영색하는 그를 알아볼 식견을 가진 자가 적었다. 평온한 시대, 사람들에게 아부하는 자를 견제하기 어려웠다. 시대의 덕목인 중효와 성실, 검소, 관용을 실천하고, 노비를 죽인 아들을 자살하게 하는 강직함까지 보이니, 사람들이 좋아했다. 관리들에게 잘 해주어 조정에 우호세력을 많이 확보했는데, 그 폐해가 드러나는데는 시간이 필요헀다. 주어진 권한을 사적으로 거침없이 사용하는데, 안정된 시대에 사람들이 온화하니 대응하기 어려웠다. 여론전에 능하여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으니, 올바른 목소리가 적었다. 풍설과 거짓 이적을 추종자들이 유포하였다. 황제에 올라 그동안 쌓아놓은 국가의 자원을 이용하여 단기적 성과를 보이니, 진면목이 드러나는데 시간이 걸렸다. 곧 폐기될 인기 좋은 정책을 시행하고, 재물을 주어 외국의 복종을 얻었다. 그를 열렬히 추종하는 자들이 있어 응집력이 있으니, 내부에서 무너지기 어려웠다. 나라가 망하고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상황에 이르러서도 지지와 존경을 거두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다. 평제 이후 별다른 반전 없이 망국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역사를 보는 마음은 무겁다. 문제가 커지기 전에 고쳐야지 무너지기 시작하면 막기 어렵다. 점차 나쁜 인간들이 득세한다. 맡은 일을 하지 않는 게으른 자, 성실하지만 무능한 자, 인기에 영합하는 자, 인색한 자, 사적 이익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 거짓된 이적과 풍설을 이용하는 자, 가족을 가혹하게 대하는 자, 착한 자인 척 하는 자, 제도를 조변석개하는 자 등등이다. 산업사회에 도달하고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복지사회가 구현되면서 나라가 안정되었다. 이제, 교언영색하며 사익을 추구하여 풍속을 어지럽히는 자들이 늘어난다. 백주에 거짓을 스스럼없이 말한다. 죄를 짓고 부끄러운 짓을 해도 지위에 구차하게 매달리고 오히려 자신이 옳다고 강변한다. 사회의 소금이 되어야 할 언론은 오히려 이러한 자들을 내세운다. 그래도, 아직 나라가 유지되는 것은 제도가 건재함이요, 각 자의 위치에서 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안정된 사회에서는 새로운 무엇을 찾기 보다는 잘못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좋은 풍속을 유지함이 중요하다. 황제가 없는 시대, 모두가 주인인 시대를 맞이하여 각자가 자신의 영역에서 할 일을 제대로 하면 풍요로워진다. 자신이 현명하도록 노력하고, 현명한 이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발탁하고 천거하고 지원하고 격려해야 한다.
역자는 번역의 정형에 매이지 않고, 독자가 읽기 편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한문으로 된 옛 글을 읽는 맛을 느끼면서도 술술 편하게 읽는다. 많은 단어에 한자를 병기했고, 주석으로 처리할 설명도 본문에 적었다. 다음과 같은 번역이다. ‘大旱’ -> ‘대한大旱’ ‘損膳’ -> ‘반찬의 수를 줄이는 손선損膳’ ‘寶對曰 年七十 悖 恩衰共養 營妻子 如章’ (390쪽) -> ‘손보가 대답했다. “나이가 70세가 되자 정신과 눈이 흐릿한 패모悖 의 모습을 보이고 있소. 모친을 공양하는 은정이 쇠해지고, 처자를 배려하는 마음만 있었으니 실상이 상주문 내용과 같소.”’ (397쪽) ‘幸賴陛下德澤 間者風雨時 甘露降 神芝生 蓂莢 朱草 嘉禾 休徵同時幷至’ (398쪽) -> ‘다행히 태황태후 폐하 덕택德澤에 근래 풍우風雨가 때를 맞추고, 감로甘露가 내렸습니다. 또 불로초의 버섯인 신지神芝를 비롯해 하루에 잎이 하나씩 나다가 16일부터 잎이 하나씩 떨어진다는 전설상의 신목神木인 명협蓂莢과 성왕이 등장할 때 피어나는 붉은 색의 서초瑞草인 주초朱草 및 줄기가 2개이고 싹이 1개인 가화嘉禾 등이 나타나는 등 상서로운 조짐이 동시에 이르고 있습니다.’ (39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