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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하며 성경 읽기는 늘 나의 화두였다. 통독을 하며 필사를 하며 그 안에 새겨진 뜻을 묵상하고 나의 신앙생활에, 내 삶에 그 말씀들의 의미를 드러내고 싶었다. 하지만, 늘 성경 안의 말씀은 말씀 그 자체로 남고 나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한재호 신부님의 이 책은 어려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정직해서’ 책을 읽어 나가며 중간 중간 멈춰야 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말씀을 항상 접하면서도 은혜로운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는 반증이다.”라는 신부님의 머리말은 조용하지만 정확하고 그리고 가장 깊숙하게 나의 마음을 찔러 들어왔다. 미사와 공동체 봉사 중에도, 성경을 읽는 중에도 돌이켜보면 나는 늘 말씀을 읽고, 해석하고, 설명하려고는 애썼지만, 정작 내 스스로가 말씀 앞에 ‘머무는 사람’이었는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성경을 대할 때는 그리스도를 대하는 것과 같아야 한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예로니모 성인) 교회는 주님을 향해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를 향주덕, 곧 믿음ㆍ희망ㆍ사랑이라고 가르쳐왔다. 그렇다면 성경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신부님께서는 끝까지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향하는 마음과 함께 성경을 대해야 하는지 묵직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다. "창조란 꼴을 갖추고 채워지는 과정”이라는 문장은 신앙을 이미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여전히 빚어지고 있는 삶으로 바라보게 한다. 우리는 여전히 창조의 손길 안에 있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혼돈과 공허를 체험한다는 설명은 신앙의 위기를 도덕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저, 비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뿐이다. 신부님께서는 또한 끊임없이 태도를 되묻고 계신다. 우리는(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는) 말씀을 더 많이 소유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만큼을 양식으로 삼겠다는 겸손한 사람”이 되는 길. 그렇게 할 때 말씀이 어느 순간 삶의 등불이 되어 있다는 고백은 신앙에서조차 성과를 빨리 보여주고 싶고, 결과물에 안달했던 나의 조급한 신앙을 내려놓게 만든다. “말씀이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게 내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낼 수 있었던 것은, 말씀을 통해 내 삶이 한층 하느님의 뜻에 합당해지기를 바라는 희망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 마음에 오래 남은 것은 “잘 들리지 않을 그 부드러운 소리를 듣기 위해 종의 자세가 되어 귀를 열 때 그분의 현존이 드러난다”는 구절이었다. 기도에서 내가 얼마나 많이 말해왔는지, 그리고 얼마나 적게 침묵했는지를 돌아보게 했다. 나는조금이라도 나를 드러내기 위해 끊임없이 지식을 자랑하듯 성경이나 말씀 중에 들었던 내용을 앵무새처럼 떠벌렸으며, 그러한 나의 신앙이 다른 신자들보다 조금 더 우월하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던 교만과 무지를 다시 한번 돌아본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는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의 말씀처럼 지금껏 해 왔던 나의 기도를 다시 한번 신앙을 청할 때의 그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나의 기도가 아닌 그분의 기도를 할 수 있도도록 나를 성찰해 본다. “성경 전체는 단 하나의 책이고, 그 단 하나의 책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빅토르 위고)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 마리아막달레나의 머무름, 끝자리에 앉는 연습, 쓸모없는 종의 자세,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에 대한 설명들은 모두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발치에 머문다는 것은 자신의 나약함을 주님 앞에 보여드리고, 그분의 말씀을 깊이 헤아리기 위해 그분께 가까이 나아간다는 뜻”이며,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르도록 해야 한다." “마르타는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하였지만, 마리아는 자기가 원하는 방식을 내려두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에 응답하며 사랑하였다.”는 말처럼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다시 한번 ‘주님의 뜻’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아울러, 우리는 겸손되어 우리의 믿음을 고백해야 하는데,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고, 그분의 방식과 때를 신뢰하여 어떠한 고난 가운데서도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쓸모없는 종’인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지녀야 할 합당한 자세이다.” “끝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내가 가기 싫은 자리, 내가 하기 싫은 일, 내가 선택하고 싶지 않은 선택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 끝자리에 앉는 연습은 겸손을 향한 지름길이다. 그러한 겸손을 갖출 때 우리는 혼인 잔치에 합당한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가 뿌린 씨앗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시점에 상상하지 못한 열매를 맺고 있지는 않을까? 그것이 바로 씨 뿌리는 일 안에서 벌어지는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일 것 이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의 감정이 소진되고 난 뒤에서 상대방을 위해 노력하는 의지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마지못해 하는 일’, ‘어쩔 수 없이 하는 일’ 안에는 메마른 감정 속에서도 상대방을 위하려는 고귀한 의지적 사랑이 담겨 있다. 내가 원하는 방식의 신앙을 내려두고, 주님이 원하시는 방식에 응답하는 삶. 그것은 결코 대단한 영웅적 선택이 아니라, 가기 싫은 자리, 하기 싫은 일을 받아들이는 아주 구체적인 일상의 태도다. 신부님께서 이 책에서 말하는 ‘묵상’은 감정을 풍부하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다. “말씀을 맛보고 삶의 자양분으로 삼는 과정”이며, 독서·묵상·기도·삶이 서로 끊어지지 않도록 서로를 지켜주는 질서에 가깝다. “묵상 없는 독서는 건조하며 독서 없는 묵상은 오류에 빠지기 쉽고 묵상 없는 기도는 미지근하며 기도 없는 묵상은 결실이 없습니다.”라는 귀고 2세의 말처럼 묵상과 독서와 기도는 서로 유기적으로 나의 신앙생활의 버팀목이 될 것이다. 신부님께서는 이 책을 맺으면서 성경과 성사, 말씀과 교회의 삶이 본래 하나로 엮여 있음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성경 안에서 사랑으로 당신 자녀들과 만나시며 그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신다’. (…) 성사 자체가 말씀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살아 있는 말씀’이 선포될 때 ‘살아 있는 성사’가 발생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교회의 삶이 거룩한 생활로 변모되는 것이다.” 신앙을 개인의 내면에 가두지 않고, 말씀을 곧 삶으로 번져야 한다는 초대인 것이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주 만군의 하느님, 제가 당신의 것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 (예레 15, 16)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는 성경을 더 잘 읽게 해주는 책이라기보다, 말씀 앞에 서는 나의 자세를 조용히 바로잡아 주는 책이었다. 이 책은 나에게 어떤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 주기보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태도를 다시 배우게 했다. 많이 알게 하기보다, 조금 더 낮아지게 하는 책. 오늘 이후로는 말씀을 앞서 말하기보다, 삶 한가운데서 먼저 듣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늘 기도하며 나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을 곰곰이 생각하며, 그 뜻을 실천하는 삶으로 이어지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