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디의 워턴은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났다. 왠지 제목에 대한 끌림으로 지난 2월에 읽기 시작했는데 재미가 없어서 내려놓았다. 마치 프루스트의 작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듯한 지루한 느낌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가문’과 ‘격식’ 문제에 대한 전문가라는 등장인물이 나오고 전반적인 묘사가 그랬다. 그러다가 최근 읽다 만 책 마무리는 해야지 싶어서 다시 잡았다. 예상과 달리 초반의 지루함을 보상하듯 은근히 재미있어서 몰입하며 읽었다. 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삼각관계를 그린 소설이지만 주인공 뉴런드 아처의 시선과 그의 심리묘사를 따라 읽어가는 묘미가 있다. 워턴은 이 작품으로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무엇보다도 남자 주인공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당시 뉴욕 상류층 사교계 남성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에 대한 역자 해설도 작품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등장인물의 이름에 대한 해석도 흥밋거리를 안겨준다. 이 작품은 연애소설도 되지만 비극적 요소도 가미되었다고 했다. 흔히 비극이라 하면 슬픈 이야기나 주인공의 고통을 떠올리기 쉬운데, ‘정보의 부족이나 무지로 인한 오판’ 때문에 주인공이 가혹한 결말을 맞는 것도 비극의 범주라 한다.
이야기의 배경은 1870년대 초 뉴욕 오페라 극장의 공연장 분위기를 묘사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를 통해서 당시 뉴욕 상류층의 생활습관이나 문화, 관습을 엿볼 수 있었다. 간단히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뉴런드 아처는 약혼자 메이와 결혼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메이의 사촌 올렌스카 백작부인이 음악당에 나타난다. 자유분방하고 파격적인 옷차림, 하고 싶은 말을 참지 못하고 시원하게 내뱉는 성격의 그녀를 처음에는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어쩐 일인지 점점 마음을 뺏기고, 그녀와 함께하는 삶을 꿈꾸지만 평행선을 달리게 되는 이야기다.
아처는 왜 그런 인생을 살게 되었을까. 실질적으로 단독 주인공인 뉴런드 아처는 자신이 뉴욕 상류층 보통 남자들보다 지식이나 예술 면에 훨씬 더 뛰어난 안목을 지녔으며, 누구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고 깊이 생각했으며 세상 구경도 많이 한 뉴욕을 대표하는 존재라는 우월감이 있었다. 또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상기할 때 좀 열린 사고방식의 소유자였고, 여성들이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어떤 연민을 느꼈다. 그런데 확고한 실행력이나 배짱은 좀 부족해 보인다. 올렌스카 백작부인(엘런)을 향한 마음이 열렬했음에도 엮어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단둘이 있는 시간이 있었고 둘이 함께 도망가려고 결심까지 했는데 그럴 때마다 방해자가 나타난다. 그 방해자는 어쩌면 당대의 통념이나 분위기였을지도 모른다. 남편과 이혼을 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엘런을 친척들은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온갖 수단 방법을 찾아서 개입하고 남편에게 돌아갈 것을 종용한다. 그것은 강압적이지도 않고 원만하게, 그리고 우아하고 성대하게 송별식을 치르며 그런 분위기를 따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마치 상류층의 행동방식은 이래야 한다는 것처럼.
여기에 약혼자 메이는 어떤 인물일까. 뉴욕 사교계에서 누구나 신붓감으로 탐을 내는 미모와 재력을 소유한 집안의 딸이다. 약간 순종적이고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규칙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성격이다. 되바라진 성격도 아니어서 아처와 사이가 좋아 보인다. 그런데 아처는 은근히 메이를 무시한다. 나이 차가 많아서일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고 모든 방면에 뛰어난 자신과는 좀 안 어울리는 건 아닌가, 손해 본 듯한 느낌이다. 어떻게든 엘런과 함께하는 멋진 인생을 꿈꾸었건만 마음만 바빴지 아무 소득도 없이 ‘무미건조한 삶’을 살았다고 회고하는 장면에 이른다. 온순하게 생각했던 메이가 사실은 아처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메이도 이미 세상을 떠났고 누구도 엘런과 함께 하는 삶을 말리는 사람도 없게 되었는데 아처는 지척에 있었음에도 엘런을 만나지 않고 발걸음을 돌린다.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 듬직한 가장으로 명망 있는 시민으로 살아왔지만 아처 자신에게는 허탈한 인생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런 인생을 살게 된 오류는 아처 자신에게 있었다. 엘런을 향한 열정과 욕망만 있었지 연인의 참모습이나 그녀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메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다해 교육하고 헌신적으로 가정을 꾸려가는 것에 대해 감사하거나 행복해하지도 않았다. 현실을 살면서도 엘런에 대한 환상만을 진정한 현실로 여겼다. 한마디로 허깨비를 쫓는 인생이었다. 어쩌면 아처는 열정과 자신감으로 당당했지만, 당시 상류층의 통념이나 도덕 윤리에서 벗어나는 것에 용기가 없어서 그랬을까.
주인공 아처의 인생을 볼 때는 허탈한 감도 있지만, 메이의 인생은 모든 걸 획득한 인생이었다. 한 가정을 이룬 부부지만 한쪽은 승자였고 한쪽은 패자였다. 이런 아이러니라니. 이디스 워턴은 유복한 미국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유럽에서 살았던 만큼 풍요롭게 살았지만, 결별과 이혼의 고통으로 얼룩졌던 시절도 있었다. 당시의 고통을 메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깨끗이 치유하려는 ‘씻김굿’의 요소도 다분히 짐작할 수 있다. 메이는 겉보기와 달리 거짓 임신으로 엘런을 떠나게 하고 아처의 바람기를 막고 끝까지 가정을 지키도록 야무지게 처리했다. 엘런과 아처는 여러 번의 만남이 있었음에도 자꾸만 어긋났다. 정신적으로 메이와 엘런 어느 쪽에도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경험하지 못한 아처에게 연민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모르고 착하기만 한 것 같았던 메이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부끄러움과 미안한 마음이 교차한다. 아처에게 미안하지만 좀 웃기고도 살짝 안쓰러웠다. 삼각관계 삼부작이라는 나머지 두 작품도 읽어봐야겠다. 유한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 후회 없는 인생은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봐도 의미 있을 것 같다.
|
|
첫 도입 부분에서부터 올드머니의 아카데미 오브 뮤직과 뉴머니의 메트로폴리탄의 대립이 언급되면서 최근 들어 무척 재밌게 보고 있는 미드 《길디드 에이지》가 생각났다. 19세기만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데 《길디드 에이지》가 뉴머니의 시선으로 그렸다면, 이 작품은 올드머니에 시선으로 그려진다. 퓰리처상 수상을 한 게, 미국 사회의 건전한 분위기를 잘 그려내고 최고의 습속과 남성상을 잘 묘사한 작품이라야 한다는 당시 선정 기준에 부합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글쎄 이 제목 자체부터가 비판과 비꼼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꽤 묘한 느낌이 든다.
화가 레이놀즈가 이디스 워튼에 조카딸의 초상화를 그려서 '순수의 시대'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 순수라는 것이 이 책에서는 통렬하게 비판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지닌 메이를 언급하면서 인위적인 순수함을 이야기한다. ... 사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솔직하지도 순수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본능적인 가식에서 비롯된 온갖 술수와 방어 기재로 가득한 존재였다. 어머니 이모 할머니 그리고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선대 할머니들의 음모를 통해 너무도 교묘하게 만들어진 네이 같은 아가씨들의 이 인위적인 순수함을 생각하자 아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람들은 되게 결혼하는 남자들은 그렇게 순수한 여자를 원하고 그런 여자와 결혼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여겼다. 신부의 그런 순수함을 눈사람처럼 깨부수는 것이 주인된 남편의 기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55 또한 이 시절 뉴욕을 비판한 것이기도 하다. ... 불편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게 해 달라는 말이었다. 그런 태도 때문에 뉴욕의 공기가 이토록 맑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움찔했다. 인간의 사악함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와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본능적인 연민을 조화시키려는 스스로의 노력에 당혹함을 느끼면서 아천은 우리 모두 결국 바리새인에게 불과한가 싶었다..p.111. 여기서 바리새인은 위선자를 이른다. 길디드 에이지를 배경으로 한 뉴욕에서 부유한 뉴랜드 아처는 메이 웰랜드와 약혼을 발표하기 직전이었다. 그 두 집안은 뉴욕의 올드머니를 대표하며, 그들만의 관습과 규범을 따라하는 모범적인 집안이었다. 메이의 사촌언니인 엘런 올렌스카 백작부인이 뉴욕의 친정 밍곳 집안으로 돌아오게 되자 뉴욕의 상류사회는 웅성거리게 된다. 엄청나게 거부인 유럽의 귀족과 결혼했던 엘런이 남편의 화려하고 방탕한 생활에 지쳐서 비서와 도피했다가 그와 별거한 뒤에 뉴욕으로 온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길디드 에이지》에서도 보였지만 남편이 부정으로 인해 이혼했음에도 불구하고 뉴욕의 상류사회는 이혼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들을 투명 인간으로 취급한다. 아처는 이제 친척이 될 거라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또 법률 회사에서 근무한다는 이유로 올렌스카 백작부인을 많이 상대하게 되면서 그녀의 거침없는 솔직함과 예술과, 인간미 등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 아처 자신의 결혼 생활 역시 주변의 다른 부부들과 마찬가지로 부인의 무지와 남편의 위선으로 유지되는 경제적 사회적 이해관계에 무미 건조한 결합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53 이렇게 둘은 사랑에 빠지지만, 결혼을 서두르는 아처의 심리를 파악했던 메이에 의해 꽤나 위태로운 순간에 결별과 결혼을 하게 된다. ... 당신은 내게 처음으로 진짜 삶이 뭔지 보여주고는 계속 가짜 삶을 살아가라고 말했어. 사람이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죠...272 ... 나는 어떻게든 당신과 함께 그런 말이 그런 범주 자체가 없는 세상으로 달아나고 싶었어요. 우리가 그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가 되고 그 밖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곳으로요...322 애틋하게 엇갈리는 모습이지만, 마치 퓰리처상 수상의 이유처럼 백조들의 물밑은 보이지 않는 사랑극이었다. 하지만 아처가 저렇게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저 현재를 뒤로하고 엘런과 도망가려고만 하는 모습에서 피곤함을 느끼게 되었다. 맨 마지막 장면의 벤치 장면이 영화에서는 명장면으로 사랑의 절제를 보여준다는 평을 듣고 있다고는 했지만, 나는 끝까지 리랜드 아처가 엘런을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가 아들에게 대신 말했듯 "난 옛날 사람이에요" 라고 메타인지를 잘하고 있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헤어져 있는 동안 그는 단지 열정을 회피하고 있었을 뿐인듯하다. 다만 사소하게 상류사회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서 친구 네드의 노블리즈 오블리제에 조용한 생각을 가졌던 그가 여론을 이끄는 모습으로 되었다는 것과 자신의 아들이 보파드의 딸과 결혼하는 것을 허락하는 모습으로 좀 더 위선을 덜어냈다는 생각은 들었다. 여하간 이 책을 읽으면서, 미드 《길디드 에이지》 생각을 많이 했다. 왜 난 저 미드가 훨씬 더 공감이 되면서 이해가 됐을까? 속물인 뉴머니가 속물인 올드머니에 끼어서 아니 오히려 뉴욕을 장악하려고 하는 드라마가 더 마음에 와닿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랑을 한다지만 제대로 사랑하는 상대와 그입장을 깨닫지 못하는 수동적인 그런 사랑보다는 능동적으로 솔직하게 움직이는 욕망이 더 공감되었던 것이다. 영화로 보지는 않았는데, 시대극에 맞는 역사적 고증을 잘 이룬 드레스나 인테리어 등이 무척 아름다웠다고 들었다. 약간 씁쓸한 기분으로 책을 덮으면서 어쩜 영화로 봤다면 이들의 사랑에 좀 더 안쓰러운가 안타까움. 그리고 엔딩에서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음에 좀 더 더 깊은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제목은 많이 들어봤는데 읽어 보지는 못해서 늘 궁금했던 책인데,, 우연히 문학동네 표지를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바로 구매했습니다 ㅋㅋㅋ 초반에는 지루하지만 끝으로 갈수록 엄청납니다..!! 영화도 궁금해서 보고 싶습니다~~ㅎㅎ |
| 1921년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이디스 워턴의 대표작인 순수의 시대 리뷰입니다. 19세기 뉴욕 사교계를 배경으로 보수적인 사회에서의 여성의 삶과 그에 저항하며, 정신적 성숙과 독립을 이루어 나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
|
이디스워튼 다른 작품 이선프롬인가를 재밌게 봐서 다른 작품인 이것도 궁금해서 구매해봤습니다. 솔직히 본래 보던 것에 비해 아직 내용이 몰입하기 힘든데 그래도 워낙 명작이라 들어서 이것도 기대가 됩니다. 어떤식으로 전개될지 궁금하고요 |
|
얼마전 티비 채널을 돌리다가 오래전 영화 '순수의 시대'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정말이지 언제적 영화인지. 그 영화를 한 20년 전에 본 적이 있었지만 다시 보니 또 새로웠다. 더구나 휴일에 그냥 우연히 보게 되었으니 처음부터 정주행해서 볼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영화 중반 이후 부터 보았는데도 너무 인상적이고 강렬하게 잔상이 남아 있어서 소설을 읽어 보게 되었다. 특히나 뉴욕 상류사회의 집, 건축, 인테리어, 그 시대의 여성들의 화려한 옷가지들과 식탁위에 화사하게 장식한 꽃들과 접시들등. 볼거리가 너무 많은 영화였는데 소설을 읽어보니 영화와는 다른 또 다른 매력이 있는 작품이였다. 줄거리는 아마 너무 유명해서 대부분 알지 않을까 싶은데.. 뉴욕 상류 사회의 세 남녀의 삼각관계라고 말하면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려나? 그러나 소설을 읽다보니 단순하지만은 않은 듯 싶었다. 사실 이러한 스토리는 어느 시대나 있을 수있는 이야기이다. 남자와 여자, 결혼과 관습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사는 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사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늘 고민하고 선택하고 후회하고 하는 일은 인간의 숙명인듯 싶다. 어쨌거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혼자 살수 없으며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해서는 사회생활, 가정생활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적당히 위선적이고 적당히 쾌락적이면서 적당히 성실 하면서도 적당히 솔직해야하는 이 말도 안되는 연극같은 삶이 현실이라는 것을 이 소설은 낱낱히 보여주고 있었다.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아처를 떠나야만 했던 엘런, 가정을 버리고 사랑만을 쫓으려 다 주저 앉은 아처, 순진무구한 척 보였으나 실상 교묘하게 자신의 삶과 가정을 지키고자 했던 메이. 어쩌면 이 인물들이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정말 마지막에 아처의 큰 아들이 메이가 아처와 엘런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아처가 많은 희생을 해서 메이 자신과 가정을 지킬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아처도 놀랐지만 나도 많이 놀랐다. 더구나 뉴욕 사교계가 아처 한사람을 바보 만드는 것도 유분수지, 작당해서 엘런을 우아하고 고상하게 아처와 떨어뜨려놓은 기술은 솔직히 나도 배우고 싶은 기술이다. 어쩌면 여성이 약자였던 시대(사실 지금도 그렇지만)에 순간의 감정보다는 자신의 생존이 중요하고 살아가려면 어쩔수 없이 그래야만 했던 두 여성의 필연적 선택이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 작품이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는데 작가의 의도와 달리 뉴욕상류 사회를 품격있게 그려내서 뽑혔다하니 그 이야기를 듣고 작가 이디스 워턴이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궁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