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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추!! [서평] 역사와 국가의 주인으로 일어서는 민중과 진보진영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강추!! [서평] 역사와 국가의 주인으로 일어서는 민중과 진보진영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내용보기
강추!! [서평] 박세길 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 1980년에서 1990년대 초까지>를 읽고 / 1998. 10., 314쪽, 돌베개<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는 전두환 일당의 1979년 12.12 군사쿠테타 및 1980년 광주민중 학살과 뒤이은 광주민중항쟁에서 시작하여 1990년 김영삼이 역사의 대역죄인으로 등장하는 '3당 합당'까지 이어진다.1980년대의 출발은 미국과 전두환 일당에 의해 민중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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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추!! [서평] 박세길 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 1980년에서 1990년대 초까지>를 읽고 / 1998. 10., 314쪽, 돌베개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는 전두환 일당의 1979년 12.12 군사쿠테타 및 1980년 광주민중 학살과 뒤이은 광주민중항쟁에서 시작하여 1990년 김영삼이 역사의 대역죄인으로 등장하는 '3당 합당'까지 이어진다.
1980년대의 출발은 미국과 전두환 일당에 의해 민중들의 흥건한 피와 처참한 패배주의로 시작된다. 하지만 민중들과 새로운 세대는 한국전쟁 후 한 세대에 걸친 선배들의 헌신적인 투쟁과 희생을 목격하면서 스스로 역사의 주인임을 자각하기 시작하여 조금씩 투쟁의 돌파구를 열어가다가 마침내 역사적인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일구어낸다.
비록 1987년 양 김씨와 민족민주운동의 분열로 인해 외세의존적인 군사독재 일당이 재집권에 성공하고 1990년 또다시 김영삼 등의 배신으로 보수대연합에 국가권력을 찬탈당하지만, 민중들과 민족민주운동 진영은 서서히 역사의 주인으로 발돋움하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저자 박세길은 1941년부터 시작된 일제의 태평양전쟁과 한민족 말살책동, 이에 굴복한 수많은 지식인들의 변절과 친일행위를 딛고 중국과 만주, 국내에서 끈질기게 저항하여 8.15 해방에서부터 굴곡되고 ??겨진 한민족의 삶을 다루었다. 북한의 역사 또한 공개된 자료와 정보를 중심으로 균형있게 다루었다.

박세길의 한국현대사 서술 관점은 한국전쟁 이후 1990년대 초까지 국내 역사학자와 지식인 어느 누구도 바라보지 않았던 한민족 전체의 관점,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관점, 지배자들이나 기득권자들의 입장이 아닌 민중들의 입장을 중심으로 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국사 교과서나 언론, 주류 지식인들이 감추거나 외면했던 남북한 전체의 모습,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러시아-미국-일본의 음모와 움직임, 민중들의 역동성에 그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1940년대 초에서 1960년까지의 한국현대사 1단계와 1961년부터 1979년까지의 한국현대사 2단계의 공통된 특징은 '냉전대결'과 '소련봉쇄'라는 세계최강 제국주의인 미국의 동북아 군사패권전략에 한민족과 남한 민중이 철저하게 희생된 것이었고, 그러한 특징은 한국현대사 3단계까지 이어졌다.
군사쿠테타와 광주민중학살을 통한 전두환 일당의 등장과 전국민적인 6월 항쟁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반란 세력의 단죄 없이 1987년 헌법이 개정되고 '광주 5적' 중의 하나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보수대연합 '3당 합당'은 동북아시아에서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미국이 얼마나 철저하게 친일파 후예들과 군사독재 잔당과 결탁하여 남한의 정치,경제,군사,문화 전반을 관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준 동기이자 결과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자주, 민주, 통일과 '일하는 사람이 주인되는 세상'을 원하는 민족민주운동 진영과 민중들은 분단체제 극복과 반외세 반독재 전선으로 단결하고 연대하지 않고는 외세와 친일-친미 군사독재 후예들의 간교한 분열책동과 무력탄압, 언론조작과 경제적 수탈에 맞서 최소한의 기본권과 생존권도 이루기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주요 고비마다 분단체제를 이용하여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통해 정치공작과 여론조작, 파쇼탄압과 야권분열, 기득권 유지를 획책해 온 미국과 냉전수구세력들의 지배전략은 2013년인 지금도 여전히 강력하다는 점에서 민중들과 민주진보진영에 가장 큰 숙제로 제기된다.

1961년 미국의 지지와 지원 아래 민주당 장면 정권을 군사쿠테타로 무너뜨린 박정희 군사독재체제는 1978~1979년 YH무역 노동자 등 민중들의 투쟁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유신 철폐투쟁의 힘이 부마항쟁으로 폭발하였고, 이에 따라 발생한 지배집단 내부의 분열이 김재규 등의 저격으로 무너졌다.
박정희의 사망과 유신체제의 붕괴에 대해 다수의 민중들은 환호했지만, 미국과 친일-친미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리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고, 야당과 민주세력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박정희 체제에서 성장한 일단의 정치군인 집단인 '하나회'가 주축이 되어 또다시 군사쿠테타를 일으켰다. 미국의 지원과 보호를 바탕으로...

박정희와 달리 전두환 일당은 그동안 성장한 민중들의 힘을 탄압하여 말살하려 하고, 민주세력의 분열을 공작,조장하면서 언론과 행정체제를 장악하였고, 6개월 뒤 2차 5.17 군사쿠테타를 자행했다. 여기에는 무능한 보수여당인 김대중-김영삼 세력과 '5.15 서울역 회군'으로 상징되는 비겁한 학생운동 지도부가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전두환 일당은 5.17 군사쿠테타 이후 유일하게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광주시의 대학생과 민중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였고, 광주민중들은 결사항전으로 맞섰다.
광주민중들의 결사항전 소식은 남한 전역에 소리소문 없이 번져나갔고, 학생들과 민중들은 미국과 전두환 일당의 폭압통치를 뚫고 7년 만인 1987년에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만들어냈다.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전두환 국가반란 세력을 법으로 처단하지 못한 한계와 재벌체제를 혁파하지 못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처음으로 정당하고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유신헌법을 민주헌법으로 개정하였고 직선제로 정권을 선출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외세와 군사독재 일당의 청산이라는 민중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전두환 일당의 분열책동에 말려든 김대중-김영삼 보수정치세력과 민족민주운동 세력은 분열을 거듭하여 광범위한 관권,금권 부정선거를 자행한 노태우 일당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그렇지만 민족민주운동(진보) 진영과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 지식인 등 민중운동 진영은 분열의 아픔을 딛고 자주적인 대중조직을 광범위하게 결성하여 새로운 대체세력으로 거듭났고, 김대중 중심의 정치세력보다 세력 규모가 약하지만 권력에 대한 탐욕은 더 강했던 김영삼은 민중운동 진영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미국과 노태우 군사독재 잔당들의 꼬임에 넘어가 김종필 유신잔당과 함께 '3당 보수대연합'을 만들어냈다. 
민족민주운동 진영과 민중운동 진영은 보수대연합을 토대로 금권, 관권 부정선거를 더한 김영삼 일당에게 1992년 선거에서 패배했다.

1980년대 남한의 경제사정은 외세의존적, 수출의존적, 매판재벌 중심으로 운영된 박정희의 부실한 경제정책의 연장선에서 노동자, 농민들의 피땀으로 전후 30여 년동안 그나마 일으켜 세운 경제성과마저 외세와 매판재벌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결과는 전두환 일당의 무능함과 수동적 경제정책, 외국자본의 수탈구조, 저임금-저곡가의 민중수탈 경제구조의 원인이면서도 더 심하게 왜곡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나마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남한 전역에서 노동자들 스스로의 힘으로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이루어내었고, 산업 전분야와 사회 각분야의 민중들이 수탈당하는 정도를 줄여가면서 소득 수준을 높여갈 수 있었다.

1987년을 계기로 이후 민중들의 조직과 민주진보진영이 강력하게 성장하였고 이에 기반하여 민주개혁성향의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창출하여 정치,경제개혁과 남북화해, 평화통일로 한 걸음 더 전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과 2012년 연속 외세 의존과 친일파-군사독재-매판재벌 잔당이라는 특징을 가진 냉전수구세력들에게 정권을 탈취당한 이유가 무엇일까.
앞으로 1990년대 이후 20년간 한국현대사에 대해  공부하고자 하는 목적이다.

*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 중에서 인상적인 대목을 블로그에 정리했습니다. http://blog.daum.net/hy2oxy/8691710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 1, 2, 3권 전체에 대한 주요 내용은 http://blog.daum.net/hy2oxy/8691548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 2013년 12월 27일 ]

 

c****n 2013.12.28.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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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를 읽었다. 전두환 일파는 칼날을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저항의 싹을 키우고 있던 지식인 사회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휘둘러졌다. 소위 '7․30 교육개혁조치'를 단행하여 대학입학 본고사를 폐지하고, 졸업정원제를 시행하여 민주화 투쟁의 가장 강력한 세력인 대학생들을 성적 경쟁의 쳇바퀴 속으로 밀어 넣었다.(p.75)   애초에 팀스피리트 훈련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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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를 읽었다.

전두환 일파는 칼날을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저항의 싹을 키우고 있던 지식인 사회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휘둘러졌다. 소위 '7․30 교육개혁조치'를 단행하여 대학입학 본고사를 폐지하고, 졸업정원제를 시행하여 민주화 투쟁의 가장 강력한 세력인 대학생들을 성적 경쟁의 쳇바퀴 속으로 밀어 넣었다.(p.75)

 

애초에 팀스피리트 훈련은 '한반도 유사시 한국에 증원 ․ 투입되는 미국 예비 병력을 신속히 공수하기 위한 작전'으로 실시 되었는데, 1980년대 레이건 정권 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 훈련 내용에 상당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훈련 기간이 20일에서 70~90일로 늘어났고 참가 병력 또한 1976년 5만명 정도에서 1983년 20만명으로 확대되었다. (p.95)

 

전두환 정권이 등장한 1980년 당시의 국내 경제는 최악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1970년대의 중화학 공업화가 애초부터 선진국의 불황산업을 떠맡는 과정이었던데다가, 1979년에 터진 제 2차 석유 파동은 국내 경제를 한 순간에 뒤 흔들어 놓고 만 것이다. 우선 경제 성장률은 사상 유례가 없는 마이너스 5.4%를 기록한 반면, 도매물가는 무려 44.2%나 치솟아 올랐다. 이러한 가운데 공장 가동률이 1979년 82%에서 74%로 떨어졌고, 그에 따라 휴폐업과 대량 해고 사태가 빈번해지면서 공식적인 실업률이 1979년 3.8%에서 5.0%로 상승하였다. (p.112)

 

외국자본과의 관계가 재정비 되어 가던 중, 3저 즉 저달러, 저유가, 저금리라는 3저 현상이 발생하고 그로부터 한국 경제가 3저 호황이라는 단군이래 최대의 호황을 구가하게 되었다. (p.120)

 

기업은 엄청난 흑자로 흥청망청했지만, 임금상승은 보잘것없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예컨대 3저호황의 첫해인 1986년의 경우, 노동자들은 뼈빠지게 일해 노동 생산성을 13.6%에 올려 놓았고, 그 덕분에 기업은 막대한 이윤을 남길 수 있었지만 그해 실질 임금은 7.9%의 상승에 그쳤다. 반면 기업은 늘어난 이윤을 부동산 투기에 쏟아 붓느라 정신이 없었다. 단적으로 삼성, 롯데, 기아, 금호 등 주요 재벌그룹들은 1985~88년 기간 동안 총투자액의 80% 이상을 부동산 매입에 사용했을 정도이다.(pp.121~122)

 

1983년 12월 '제적학생 복교허용'과 함께 대학가에 상주하던 경찰을 철수시키는 조치를 취하고 말았다. 비록 오래갈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정책 변화는 3년간의 극렬한 탄압정책이 실패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p.134)

 

'학원자율화 추진위원회'등 공개기구를 중심으로 실질적인 학원자율화를 추진함과 동시에 1984년 5월 4일 고려대에서 '강제징집 사망학생 합동유령제'를 거행하는 것을 계기로 대학간의 연대를 강화시켜 나갔다. 이러한 노력들은 1984년 2학기에 접어들어 주요 대학에서 학생회가 출범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11월 3일 연세대에서는 전국 42개 대학 2천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민주화투쟁 학생연합'이 결성됨으로써, 학생운동은 보다 강력한 반독재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조직틀을 갖추게 되었다. (p.135)

 

2․12 총선에 나타난 중요한 현상-정치규제법에 묶여 있던 일부 인사들은 민한당 후보로 나섰는데도 역시 당선되었다. 반면에 민한당 국회의원이었다가 신민당 후보로 나온 인사도 있었으나 이들은 대부분 낙선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민중은 어느 후보를 지지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과연 그 후보가 전두환 정권과 협력을 하였는가, 아니면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으면서 그와 대결을 벌였는가를 우선적으로 고려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우리 민중은 전두환 정권과 협력한 인물은 단호히 거부했고, 그럼으로써 전두환 정권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투쟁만이 허용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p.138)

 

함평군 손불면의 경우는 농지세 총수납 목표가 83만 원이었는데 산남지구 50여 가구에 부과된 농지세만도 2백 30만원에 이르렀다. 산남1구에 사는 모씨는 그해에 양파와 마늘을 합하여 3천여 평을 경작하는데 3백 20만원의 생산비가 들었지만 3백만원을 받고 밭떼기로 팔았다. 결국 소득은 커녕 20만원 이상을 손해봤는데도 10만 4천원을 세금으로 내라는 고지서가 날아들었다. 고지서를 받아든 그는 기가 막히고 앞이 캄캄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의신청을 하였다. 그러자 관계 공무원이 고지서를 회수해 가더니 다음에 찾아와서 뭐가 잘못 되어서 그런다면서 형편대로 내라고 하였다. 이에 농민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세금도 무슨 양동시장에서 잠바 사는 식이냐'고 따졌다고 한다.(p.155)

 

1986년 10월 28일 오후 1시부터 건국대 민주광장에서 전국의 29개 대학생 2천여명이 '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발족식을 거행하였다. 3시 20분쯤 학생들은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나카소네 일본 수상등에 대한 화형식을 거행하였다. 바로 그때 학교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1천 5백여명의 경찰들이 불시에 최루탄을 난사하며 밀려들었다.(p.173)

 

31일 오전 10시, 이윽고 학생들에 대한 진압작전이 시작되었다. 작전 이름은 황소 31 입체 작전! 8천여명의 경찰이 동원된 이날의 작전은 정말 '입체적' 이었다. 하늘에서는 헬기가 최루탄과 소이탄을 직격으로 쏘아 대고, 땅에서는 최루탄이 날아 오르고, 고가 사다리의 소방 호스에서는 페부를 뚫은 듯한 강한 물줄기(최루액)이 뿌려졌다. 바리게이트를 뚫고 올라온 용감무쌍한 '민중의 지팡이'들은 쇠파이프를 어지럽게 휘둘렀고 사방으로 피와 살점이 튀겼다. 각목으로 대항한 학생도 있었으나 천지사방에서 날아드는 최루탄과 쇠파이프를 허기진 몸으로 막아 낼 수는 없었다. 한 시간이나 계속된 유혈의 참극이 끝나갈 무렵, 최후까지 항전했던 사회과학관 옥상에는 때 아닌 무지개가 피어 올랐고, 팔을 뒤로 걱인 채 끌려가던 학생들은 뿌연 눈물 너머로 이 무지개를 보았다. 그리고 한 학생이 외쳤다. "동지여! 무지개가 떴습니다. 승리의 무지개가! 우리가 승리할 것입니다!"(pp.173~174)

 

경찰 당국은 박종철군이 심문을 시작한지 30분 후 책상을 '탁'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p.177)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중요한 사건이 터졌다. 5월 18일 광주 민중항쟁 7주년 추모미사에서 김승훈 신부는 "당국은 철저하게 이 사건을 은폐했고 그 과정 일체도 조작해서 국민을 다시 한번 속였다"며 박종철군을 고문한 경관이 모두 다섯 명임을 폭로하였다.(p.179)

 

6월 민중항쟁 기간 동안에는 다양한 구호들이 선보였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광주학살 배후조종 미국놈들 몰아내자. 군사독재 지원하는 미국놈들 몰아내자. 전두환 노태우 그놈이 그놈이다. 직선제 쟁취하여 군부독재 타도하자. 노동3권 탄압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 대통령에서 동장까지 우리의 손으로.(p.180)

 

부산에서의 시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일째 계속되었다. 밤 열 두시가 넘어도 많은 시민들은 해산하지 않고 다음날 아침까지 시위를 계속했고, 그러다 보면 다시 많은 시민들이 합세하여 새로운 투쟁이 전개 되었다. 19일의 경우에는 소나기가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수만의 시민들이 우산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p.187)

 

마침내 6월 26일 국민운동본부의 제창에 의해 '국민평화대행진'이 개최되었다. 이날에는 전국의 34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백만 명(국민운동본부 집계, 경찰 발표는 5만 8천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광주에서는 약 30만의 시민이 거리를 그득 메웠다. 항쟁이 다시금 절정을 향해 치솟아 오른 것이다. 당시 우리 민중은 그간의 투쟁을 통해 자신감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이틀 전인 6월 24일 전두환 김영삼 회담에서 전두환이 "정치 일정을 여야가 합의하여 건의하면 받아들이겠다"는 등의 잠꼬대만을 되풀이하는 바람에 가떡이나열이 받아 있던 상태였다. (p.188)

 

7월 9일 이한열 군의 장례식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 너나 할 것 없이 한 젊은 학생의 죽음을 통해 지나온 고난의 순간들을 되씹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의미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하여 거듭 다짐했다. 이는 장례 행렬에서 무수히 외쳐진,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거ㅘ제들에 대한 구호들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군 장례식은 항쟁의 마무리이자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는 자리가 되었다.(p.193)

 

1987년 7월 3일, 우리 나라 최대의 중공업 도시 울산에서는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전국을 뒤흔든 노동자 대투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현대엔진 노동조합이 결성된 것이다. 물론 노조결성 자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노조결성에 관한 한 난공불락의 청옹성으로 불리던 현대왕국에서 노조가 결성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남다른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p.196)

 

11월 29일 KAL기 실종 사건 발생. (p.218)

 

1988년 4월 26일 총선거가 실시 되었다. 결국 민중은 4․26총선에서 야당 우세의 국회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집권 세력의 완전한 참패였다.(p.222)

 

전교조 배경 - 한국의 교육열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은 수준이라는 것

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제도 교육이 지금까지 해온 역할은 사대주의, 민족분열주의, 개인주의 등 온갖 잡사상을 주입하고 단순한 몇 가지 기능을 습득시켜주는 것뿐이었다. 그런 만큼 올바른 교육을 바로 세우는 것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절대 절명의 과제라 할 수 있다. (p.228)

 

1987년 대전 충남대에서 개최된 제 1기 전대협 출범식에는 약 3천 5백 명의 학생이 참가하였지만, 그로부터 5년 뒤인 1992년 서울 한양대에서 개최된 제 6기 전대협 출범식에는 무려 8만여 학생이 집결하였던 것이다. (p.232)

 

19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 북 방문-공동성명은 통일방안으로서 연방제안을 채택하였으며, 다양한 방법에 의한 연방제 실현과 정치․군사 문제 및 교류협력 문제를 동시에 추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로써 문익환 목사 개인 자격이기는 하지만 남북의 관계자가 구체적인 통일방안을 합의하는 중대한 전진을 이룩하게 되었다. 통일방안의 합의는 민족대단결의 필수적 전제조건이다. 서로 다른 통일방안을 갖고서는 결코 민족대단결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문목사의 방북이 갖는 의의가 있다.(p.240)

 

책 한권으로 80년대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바다를 헤엄칠 수 없듯이, 80년대의 역사를 돌아본다는 점에서, 개론서로 적합하다.

80년대에 태어났지만, 정작 나는 80년대를 모른다. 세파형 동검과 빗살무늬 토기는 외웠어도 문목사의 이야기는 모른다. 그것은 이 시대에 관한 필자의 무관심도 있었겠지만,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낸 선배들의 목소리도 부족했기 때문 아닐까.

역사를 배우는 것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강도의 무게는 판단 할 수 없지만, 비슷한 시나리오가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출판사 돌베게에서 이 책을 출간한지 18년이 흘렀다. 내년이면 19년이다.

저자 박세길의 긍정적 희망과 전망을 우리는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2010.12.13. 철산에서



YES마니아 : 플래티넘 s*******2 2010.12.1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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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항쟁을 돌아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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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아이디는 아버지 아이디 입니다 서평은 아들인 저가 쓴것^^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3권을 읽었다. 1, 2권보다 더욱더 흥미 있었고 책에 빠져들었는데 그 이유는 광주 민주화 항쟁 등 민주화를 위한 항쟁이 많아서 이다. 특히 광주 민주화 항쟁 부분을 읽을때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때에 대한 설명을 읽을때는 흥분이 되었다. 특히 광주 민주화 항쟁 부분이 가장 인상깊었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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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아이디는 아버지 아이디 입니다 서평은 아들인 저가 쓴것^^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3권을 읽었다. 1, 2권보다 더욱더 흥미 있었고 책에 빠져들었는데 그 이유는 광주 민주화 항쟁 등 민주화를 위한 항쟁이 많아서 이다. 특히 광주 민주화 항쟁 부분을 읽을때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때에 대한 설명을 읽을때는 흥분이 되었다. 특히 광주 민주화 항쟁 부분이 가장 인상깊었다. 다른 책을 읽어봐도 나는 항쟁과 혁명 같은 내용이 나오면 더욱더 흥분되고 책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광주 민주화 항쟁은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민주주의를 위해서 광주 대학생들이 먼저 항쟁을 시작했다. 5.16 쿠데타때 군사력에 눌려서 민주화를 외치지 않았던 것과는 달랐다. 전두환의 쿠데타도 서울역까지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데모를 갔다가 군대가 진압한다는 말에 자진해산해서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군부 역시 대학생들의 항쟁이 놀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생들 스스로 겁이나서 해산하니 군부가 더욱 강하게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광주는 달랐다. 처음에는 대학생들이 시위를 했었다. 그러던 것이 군부대가 투입되어 무자비하게 탄압하면서 점점 규모가 커지면서 항쟁이 되었다. 인구 73만 광주에 2만명이 넘는 공수부대를 투입한 것은 전쟁을 한다는 말고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광주시민은 학생들이 시위하는 것을 지켜봤지만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을 보았고 노약자 등 가리지 않고 모든 시민들 역시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두르고 죽이자 궐기하게 되었다. 군대 투입을 할때는 미국이 도와준 것은 말 할 것도 없었다. 쿠데타를 미국이 도와주었다는 것이 입증 된 것이다. 처음에는 평화적으로 시위하던 광주 시민들은 평화 시위는 짐승같은 공수부대의 폭력에는 소용없음을 알고 광주 외각 지역 경찰서 등을 습격해서 총을 빼앗어 와서 무장항쟁에 돌입했다. 이렇게 되자 전두환 역시 매우 놀랐었다. 무장항쟁으로 까지 확대 될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광주전역을 고립시켰다. 그래서 며칠 간 광주는 해방되었었다. 그러나 고립으로 인한 위기감과 군부대의 대대적인 재투입으로 광주민주화 항쟁은 쓰러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 역사적인 항쟁은 80년대 6월 민중 항쟁으로 계승되었다. 민중항쟁을 통하여 노동자들은 거대한 노동자의 힘에 겁먹은 경찰 등 정부가 겁을 먹었음을 확인하였고 민주화를 위해서 계속 나아갔던 것이다. 그 중에서 울산에서의 현대 노동자의 연대 투쟁에 가장 절정이었고 노동자 투쟁에 길이 남을 투쟁 이였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불과 내가 태어나기 몇 년 전에도 우리나라가 민주화가 안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생각하게 되었고 지금도 완전한 민주주의가 아니다는 것이 생각났다. 지금은 예전처럼 큰 항쟁과 투쟁은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우리 모두 지금 우리가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민주주의에 가깝게 생활 할 수 있게 된 항쟁과 투쟁을 생각하고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될 것 같았다. 이 책을 읽고 다시 한번 국민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깨달았고 우리나라 민주화 역사를 자세히 알게 되어서 좋았다.
YES마니아 : 로얄 s****s 2001.09.30.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그대..!! 아직도 박정희의 경제신화를 믿고 있는가?
"그대..!! 아직도 박정희의 경제신화를 믿고 있는가?" 내용보기
내가 다시쓰는 한국현대사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시절.. 그러니까 1993년.. 강남 도서관의 서재에서 국사 현대사 부분의 발표를 위해서..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다가.. 투박한 디자인과 활자의.. 책을 무심코 집어드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부터 3일동안 나는 다시쓰는 한국현대사를.. 손에서 뗄 수 없었고.. 가슴이 턱턱 막히는.. 억울한 감정을 억누르며.. 간신히 책장을 덮
"그대..!! 아직도 박정희의 경제신화를 믿고 있는가?" 내용보기
내가 다시쓰는 한국현대사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시절.. 그러니까 1993년.. 강남 도서관의 서재에서 국사 현대사 부분의 발표를 위해서..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다가.. 투박한 디자인과 활자의.. 책을 무심코 집어드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부터 3일동안 나는 다시쓰는 한국현대사를.. 손에서 뗄 수 없었고.. 가슴이 턱턱 막히는.. 억울한 감정을 억누르며.. 간신히 책장을 덮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흘러 95년.. 대학에 들어와.. 사회철학 연구 동아리에 들어갔을 때.. 맨 먼저 권했던 책도.. 다시쓰는 한국현대사였다. 이 책의 내용에 대해 구구절절 말하고 싶지 않다..!! 이 책이 모두 옳다고 항변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역사를.. 그리고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할 수 있으며.. 보는 각도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 다시쓰는 한국현대사는.. 내게 이런 중요하고 소중한 의미들을 깨우쳐 주었다. 한국의 현대사를.. 대통령과 정치인들의 몫이 아닌.. 우리 아버지.. 어머니.. 이 사회를 이루는 민중의 몫으로.. 한 번쯤 생각해보고 싶다면.. 부디 이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박정희 경제신화의 다른 이유를 꼭!! 확인하기 바란다..!! 미국의 잉여농산물 도입에 따른 농민의 대거 몰락과 그로 인한 대량 이농과 도시빈민의 양산이야말로 노동자계급의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 되어 왔다. 그런 의미에서 남한의 농민과 도시빈민 그리고 노동자계급은 하나의 운명의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이다. -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P 178-179 -
n******n 2003.12.1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