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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주체적으로 철학을 사유하는 역작.
한국인이 서양철학에 관한 책을 쓴다면 아마 두 부류 중 하나일 것이다. 하나는 담백하게 해당 철학자의 이론을 해설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와 더불어 저자 자신의 평가, 지양, 종합, 보완을 꾀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언어의 한계 때문에 가로막혀 있는 서양철학의 최신 경향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래서 한국인으로서의 독자들이 그 책이 다루는 철학자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한편으로는 독자들 스스로 판단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저자의 직접적이고 명료한 평가가 포함되어 있다면 여러모로 독자들이 '스스로' 판단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담론이론의 사회철학』은 후자의 측면을 절묘하게 살리고 있다. 이 책에서는 빨라도 헤겔과 마르크스 이후 현대 사회철학, 정치철학의 대가들을 다루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들인 푸코, 데리다는 물론이고 마르크스주의 계열인 그람시, 알튀세르, 포스트마르크스주의 계열인 라클라우와 무페에 신실용주의자 로티와 비판이론 2세대 하버마스, 미국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거장 롤스까지. 이 책에서 매우 심도깊게 논의되고 있다. 이들 대가들이 개별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게 아니라, 저자가 치밀하게 비교, 대조하고 대가들 간의 상대적 우열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더욱 흥미롭다. 예를 들어 급진민주주의 기획에서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에서 공동체주의에 대해 우위를 점했다고 평가하면서도, 이러한 정치적 자유주의에 비해 하버마스의 토론민주주의가 상대적인 우위를 가지므로 보완될 여지가 있다고 덧붙이는 점이 그렇다. 마찬가지로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철학자이지만 데리다는 실천적 함의를 끌어내기가 매우 어려운 반면 푸코는 자체의 약점을 감안하더라도 풍부한 실천이론으로서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한다.
하나하나가 워낙 수준 높은 대가들이기에 저자 한 사람이 이들 이론의 우열을 논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도 치밀한 분석과 해부로 차근차근 각 이론의 상대적 강약을 평가해가는 모습을 읽는 이로 하여금 지적 쾌감을 느끼게 한다. 책의 집필 시기가 다소 옛날인지라 문체가 다소 옛스러운 것은 사실이나, 사용하는 어휘나 문장력이 매우 다채롭고 물흐르듯 해 '읽는 즐거움'까지 주고 있다.
한국인이 한국어로 철학적 사유를 하는 책의 모범이 있다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