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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한 사진을 볼 때마다 그 시절에 속했던 때를 떠올리곤 한다. 되돌아갈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아련한 그리움이 된 시기. 사진이 선명해서 그런지 머릿속 기억 또한 또렷한데, 사진이 없던 시절에는 이런 재미가 없었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시대가 허락하는 선에서 무어가 됐건 최적의 방법을 고안하는 게 바로 인간이다. 그 시절 사람들은 그림을 통해 세상을 간직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예술 작품이라 여기는 그림들을 보고 있자면 조금은 특별한 시간 여행에 참여한 거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많은 장르 중 저자가 주목한 건 풍속화다. 풍속화는 인간의 삶을 담은 그림을 뜻한다. 서양 사회에서 처음부터 인간이 중심에 섰던 건 아니다. 신이 강렬한 지배력을 행사했던 중세 시대를 아마 적잖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림 또한 신을 찬미하기 위한 의도에서 그려졌으며, 인간이 그림에 등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풍속화라는 장르의 탄생은 역사에서 인간의 위상이 커가는 과정과도 같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짐작대로 저자가 우선적으로 주목한 건 르네상스 시대이다. 신과 인간의 고루한 싸움에서 인간이 서서히 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때, 몇몇 화가들은 종교를 떠나 인간의 삶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브뤼헐의 그림 속 사람들은 축제의 흥겨움에 취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다. 반면, <교수대의 까치>는 같은 화가의 그림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삼엄하다. 마녀사냥이 활개를 치던 때, 실제 두 사람의 귀족이 네덜란드에서 공개 처형을 당했다. 르네상스가 마냥 생동감 넘치는 시절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같은 화가의 전혀 다른 그림을 보니 절로 들었다. 생동감 넘치는 장면, 곧이곧대로 바라보면 타락한 인간상 같기도 하다. 오늘날과 형태는 다를 테지만 자본이 조금씩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던 때, 근면 성실함을 견지할 것을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은 제 그림을 통해 말하려 들었다. 여성이라면, 어머니라면 으레 이러해야 한다는 식의 모습으로 그림 속 여성들은 그려졌거나, 반대로 아예 비웃음 거리로 창조되기도 했다. 담배를 피우고, 쓰디쓴 술을 마시고. 잔뜩 찡그린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여기에도 왠지 숨은 의도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귀족들의 화려함이 돋보이는 로코코 시대의 풍속화가 왠지 현실과 괴리된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면, 이어 등장한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등에서는 다시금 화가들이 현실을 노래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밀레나 마네, 에드가 드가 등의 작품도 물론 좋았으나, 내 경우에는 프리드리히 에두아르트 메이어하임이라는 긴 이름을 지닌 화가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그의 그림엔 가족이 등장한다. 아이와 부모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모습은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아름답다. 제목이 <아픈 아이>인 작품조차도 평온한 분위기라, 이런 세상이라면 어떠한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거란 확신마저 든다. 페르디난드 게오르그 발트뮐러의 화풍도 비슷하다. 갓난아기를 향한 가족들의 따사로운 눈빛, 창가에 옹기종기 모인 엄마와 세 아이 등이 품은 표정이 이 시대에 대해 기대케 한다. 한 번 즈음 살아보고 싶다는… 그림을 그린 화가들도, 그림에 등장한 이들도 모두 더는 이 세상에 없다. 그들이 한 때 존재했다는 사실을 엄연히 존재하는 그림만이 우리에게 말해준다. 조금 형태는 다를지라도 나의 오늘도 어딘가에서 한 폭의 그림으로 박제되고 있을 것만 같다. 우중충한 표정, 지쳐 굽은 어깨 등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은데, 부디 미소를 머금은 모습으로 내 자신이 그려질 수 있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