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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래픽노블의 원작은 프란츠 카프카다. 부제로 ‘프란츠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가 붙어 있다. 솔직히 말해 표지만 보고는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래픽노블이란 사실을 모른 채 부제를 보곤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오래 전 읽었던 카프카의 소설들을 생각하면 난해한 책에 대한 거부감이 점점 심해지는 나에게 맞지 않은 책이다. 그런데 출판사 리뷰가 나를 유혹했다. 그래픽노블이고, 책장을 덮고 나면 정말로 무대에서 상연되는 한 편의 모노드라마를 감상한 듯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유혹에 살짝 넘어갔다. 그리고 기대한 것처럼 빠르고 재밌게 읽었다.
한때 연극배우 추송웅 씨가 이 원작을 연극으로 올렸었다. 추송웅이란 이름보다 나중에는 영화배우 추상미의 아버지로 더 알려졌지만 나는 그 이름을 기억한다. 카프카의 단편집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데 아직 읽지 못했다. 이 그래픽노블을 읽기 전이나 읽은 후 원작을 한 번 읽었다면 이해의 폭이 더 넓어졌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게으름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없는 일이지만. 작가 마히 그랑이 해석하고 연출한 그래픽노블로 이해해야 한다. 몇몇 대목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들지만 이 소설에서 그것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빨간 피터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집중해야 한다.
턱 수염이 덥수룩한 한 남자가 연설 연습을 한다. 그가 간 곳은 한 학술원이다. 담배를 물고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5년 전 사냥꾼들에게 포획될 때부터다. 맞다. 그는 사람이 아니다. 침팬지였다. 총에 맞은 후 배에 실려 옮겨진다. 처음에는 나무 상자에 갇혀 있었고, 나중에는 철창에 갇힌다. 그가 왜 빨간 피터로 불리는지도 이때 알려준다. 두렵지만 호기심 많은 그는 뛰어난 관찰을 통해 선원들의 행동을 모방한다. 처음에는 동작을 따라한다. 작가는 이 부분을 아주 간결하게 보여준다. 선원들이 피우는 담배를 건내줄 때 실수를 하기도 한다. 술은 또 어떤가. 그러다 인간의 말을 내뱉는다.
원숭이가 인간의 말을 한다고? 대단한 흥행의 요소다. 쇼는 성공하고, 점점 인간의 삶을 모방하고 배우는 빨간 피터는 사람의 모습을 닮아간다. 암컷 침팬지와 하룻밤을 보내지만 만족스럽지 않다. 특히 낮 동안은 대면하고 싶지 않다. “그 망연한 표정, 길들여진 짐승의 눈길에 어쩔 수 없이 고여 있는 슬픔 때문이죠.” 빨간 피터도 인간의 말을 하지 못했다면 우리에 갇힌 채 이 암컷과 비슷한 표정과 눈빛을 가졌을 것이다. 그럼 그는 인간성을 가졌을까? 인간성의 정의는 또 무엇일까? 장 지로두의 “인간성이란 인간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어떤 시도이다.”란 정의는 인간적 한계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간다. 그 학술원에 있는 학자들이 빨간 피터의 보고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알려주지 않는 것도 재밌는 부분이다.
이 그래픽노블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진화론을 인용한 그림과 만나게 된다. 인류가 유인원에서 진화했다는 사실을 빨간 피터의 보고를 통해 간결하게 보여준다. 물론 5년만에 말을 배우고 인간처럼 행동하는 것이 가능하지는 않다. 현실을 여기에 대입하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그를 작가는 아주 멋지게 표현한다. 가독성을 높이고, 곳곳에 의미 있는 그림을 넣어 놓았다. 성공한 원숭이가 인간처럼 행동하다가 원숭이의 옷을 입고 무대로 나가는 마지막 장면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카프카의 소설을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왠지 모르게 카프카의 소설을 이해한 듯한 착각도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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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 전시하기 위해 밀림에서 잡아온 고릴라 한 마리가 있다. 놀랍게도 녀석은 유럽으로 실어오는 배 안에서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기를 한참, 어느 날 “안녕”이라는 사람의 말을 내뱉는다.
곧 이 신기한 원숭이는 서커스단에 팔려서 공연을 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좀 더 큰 (경제적인) 잠재력을 알게 된 사람들에 의해 대도시로 옮겨와 사람의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어느 덧 5년 만에 성공한 유명인이 된 그가, 학술원의 회원들 앞에서 자신의 진화 과정을 담담하게 회고한다는 내용의 이야기.
흥미로운 소재다. 사람이 된 원숭이라...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한 걸까. 이 책은 그래픽 노블로, 원작은 프란츠 카프카가 쓴 소설이다. 만화처럼 구성되어 있는데, 대사가 그리 쉽거나 간단하지 않다. 책 전반에 걸쳐서 뭔가 부조리하고, 조금은 이상하기도 한 그런 느낌을 주기도 한다.(생각해 보면 이게 카프카 소설의 특징인 것 같기도 하고)
아마도 이런 ‘이상함’의 가장 큰 이유는 사람처럼 말하는 원숭이라는 주인공 때문일 것이다. 비슷하면서도 이질적인 존재인 유인원이 사람의 옷을 입고 말하는 건 동물원의 공연장에서는 지극히 평범하면서 유쾌하기까지 한 모습이겠지만, 그게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어난다면(그와 비슷한 배경을 지닌 소설 속 캐릭터라면) 확실히 조금은 어색할 것 같다.
당연히 소설 속 사건(5년 만에 고릴라가 인간처럼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작품의 내용 역시 이런 특별한 일이 어떤 과학적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어차피 작가도 독자고 이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보는 거니까. 그리고 이런 불합리한 사건에 관한 묘사 속에 당연히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담겨 있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주인공 피터가 굳이 인간처럼 사고하려고 애쓴다거나, 인간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이 진화의 과정에 무슨 역사적인 의미라든지, 철학적 사유가 들어갈 자리를 없애 버린다. 학술원에서의 그의 마지막 멘트는 그저 이런 삶도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는 것뿐이었다.
역설적으로 작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의 ‘자격’이라든지 ‘조건’이라든지 하는 게 실은 별거 없다는 식의 주제를 제시하는 것 같다. 피터는 자신의 진화를 자유를 향한 열정이나 도전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반대로 애초에 자신은 자유를 갈구해 본 적도 없다고 말한다. 그저 창살 안에 갇힌 답답함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었을 뿐. 그가 인간의 행동을 따라했던 건 다시 갇히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피터는 스스로 “인간 사회에서 중간쯤 되는 문화적 수준”을 체득했다고 말한다. 그 수준이란, 너무 현란하지도 않고, 너무 빈약하지도 않은 사고 수준에, 여흥을 적당히 즐길 줄 알고, 별다른 소란을 피우지 않으면서 순리대로 적응해 나가는 지극히 평범한 삶이다. 피터가 그렇게 살아갈 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다시 우리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여기엔 인간의 장점, 혹은 특별한 점이라고 꼽는 창의성이나 철학적 사유, 도덕이나 윤리 등이 전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 없이도 충분히 인간 사회는 돌아간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작가는 그런 것들에 관한 인간의 허위의식을 지적하고 있다고 봐야할 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니들 사는 걸 보면 딱히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데 뭘 그렇게 뻐기고 있냐 라는 식의.
물론 이건 작가가 만들어 낸 이야기 속 인간 사회가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런 형이상학적인 가치들을 빼놓고서는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문제는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자아에 갇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사고와 그 피해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지, 그런 가치들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다.(실제로 우린 이 부분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분통을 터뜨릴 때가 적지 않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저 평범한 중류층의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런 가치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은 또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건 인간을 흉내 내는 고릴라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삶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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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된 원숭이는 벌레가 된 인간만큼 극적이진 않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갑충이 되어버린 이야기보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인간으로 변한 원숭이 이야기가 더 어려웠다. 원어 독일어가 문제인지, 글이 짧아선지 카프카의 글 ‘학술원의 보고’는 ‘시골 의사’ 다음으로 난해하다. 물론 개인적인 의견이다. 아마 이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인간이 된 원숭이 이야기는 내게 꾸준히 어렵기만 한 글이 였음이 확실하다. 고마운 책이다.
21세기의 오분의 일이 지났다. 정말이지, 과거의 잔재를 먼지 털 듯 털어낸 상큼하고 신선한 새 세상이 오리란 기대까진 하지 않았다. 반대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기후변화, 인구과밀, 양극화, 종교 갈등, 식량부족 따위의 문제들로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모진 환경과 조건을 지혜롭게 극복한 인간종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에 새롭게 맞이하는 신세기가 회색빛이긴 해도 칠흑의 검은색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작은 기대는 무너졌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인간이 보인 극단적인 이기심은 놀라웠다. 가난한 나라의 방역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가운데 돈 많은 소위 선진국은 백신을 독점했다. 그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은(나를 포함해) 없는 나라 사람들이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백신을 두 번 세 번 맞았다. 보편이라는 수사가 붙어야 할 휴머니즘은 어디에도 없었다. 세계가 어두컴컴했다.
생존을 위한 대의(?)로 전쟁이 벌어졌다. 1930년에 볼 수 있었던 민족주의, 국가주의, 영토확장주의가 2022년에 다시 세계 정치에 극적으로 부활했다. 이를 대응하기 위해 만든 국제연합은 마이크 앞에서 실체도 없는 말잔치만 할 뿐이고 강대국으로 불리는 나라들은 자국의 이익을 계산하며 주판알을 튕길 뿐이다. 정의는 이해당사자들 저마다의 논리에 찢겨 너덜너덜해졌다. 무력으로 남의 나라를 해방시킨다는 나라도, 잘 싸워 이기라며 무기며 물자를 지원하는 나라도 곱게 보이지는 않다. 참화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어차피 먼 나라 남의 일이다. 입으로 정의를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자식의 팔에 이름과 주소를 새기는 부모 마음을 우리가 어찌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지금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과연 희망찬 2022년이란 말인가.
피터는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했다. 그에게 인간되기란 생존을 위한 절대적인 선택이었다. 지난한 과정을 통해 피터는 인간이 되었다. 그런데 인간은 생존을 위해 원숭이가, 아니 짐승이 되어가고 있다. 지독한 혐오와 배제, 집단주의는 이성의 존재가 아니라 본능에 따르는 동물의 습성이다. 대화와 타협보다 힘으로 억누르고, 약자에 대한 배려가 아닌 강자의 독식은 진보를 역행하며 짐승의 길을 가고 있는 인간 문명 퇴화의 전조다. 기후변화 따위의 물리적 파국을 걱정했던 나의 낭만적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인간은 스스로 파멸하고 짐승이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오래던 마키아벨리라는 선지자는 인간이 지닌 이성과 본능에 관한 통찰을 글로 남겼다. 군주론에서 이상적인 군주는 야만과 이성을 동시에 지녀야 한다고 한다. 백성들은 인간보다 동물에 가깝기 때문에 사랑보다 폭력이 통치에 효과적이라고 했다. 물론 배부르고 등따신 시절에는 인간적인 풍모를 풍기는 것이 더 유리하다. 하지만 고난의 시대엔 짐승처럼 대하는 것이 권력을 유지하는데 필수 조건이라 했다. 우리는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는 착각 속에서 산다. 짐승의 본능을 숨기면서 말이다. 숨겨진 야만성은 언제나 생존의 위협이라는 허울 아래서 폭력을 정의로 탈바꿈한다. 그게 인간이다.
어쩌겠는가. 세상이 이런 걸 말이다. 인간이 그런 존재인걸. 그저 최대한 애쓰고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인간이 된 원숭이 이야기 속에서 인간의 길이 무언지 찾으면서 말이다. 피터는 인간이 되는 최종 과정이 풍경에 녹아든 것이라 했다. 아마 인간사회의 일부분으로 동화된 것을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의 풍경이 된다는 것은 이성과 본능을 초월한 그 무엇이란 생각이 든다. 서로가 연결되어 하나를 만들어내는 건 우리 인간종이 자연의 일부요 지구 생태계의 부분이라는 자각에서 가능하다. 내 존재가, 우리라는 공동체가 특별하고 우월하다는 오판이야말로 파멸의 시작이다. 우리에겐 그저 약간의 이성을 갖춘 원숭이일 뿐이라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부족함을 함께 채워가는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